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1. ISLAND
서준은 17년을 도시 외곽에서 살았다. 서울에서 근간을 잃은 사람들이 모여든 조그만 마을에서 17년을.
얼떨결에 이웃으로 묶인 사람들은 서로의 없는 살림을 살펴 주며 돕고 살았지만, 이따금 땅이 갈라질 정도로 쾅쾅대며 싸우기도 했다. 부식된 벽과 벽 사이에서 팔과 다리가 부서지도록 치고받는 사람들을 보며 서준은 그런 생각을 했었다.
참 가관이다.
그는 가파른 계단을 한참이나 올라야 있는 자신의 좁은 집을 때때로 섬이라 부르기도 했다. 외딴집보다는 외딴섬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멋져 보인다는 이유였다.
그가 조그만 외딴섬에서 어느 휴양지의 섬처럼 큰 집에 들어오게 된 것이 불과 세 달 전이었다. 그것도 한국에서 열 손가락에 들어가는 기업 중 하나인 명온 그룹의 유일무이한 손자로.
이전의 생활을 빨리 잊으라던 안주인의 명령 같은 조언에 서준은 지난 세 달 동안 자신만의 외딴섬을 생각하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잊을 수 있다고 스스로 자부하던 어느 날, 그는 자신의 눈앞에서 펼쳐지는 풍경을 보며 생각했다.
참 가관이다.
그런 ‘가관’은 이전에 살던 곳에서나 일어나는 거라고 생각했다. 낮만 해도 점잖게 조문객들을 맞이하며 고고함을 유지하던 사람들이 밤이 되자 취객 못지않게 패악질을 부렸다. 조근조근 속삭였던 목소리가 아니라, 감칠맛이 느껴질 정도로 차진 욕설이 마구 터져 나왔다. 과거에 있던 곳을 생각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었다.
“네년이 여기가 어디라고, 어디라고!”
“죽기를 바랐지! 불쌍한 우리 언니, 죽자마자 뻔뻔하게 얼굴을 들이밀어!”
“아직 염도 제대로 못 했는데 어딜 기어들어 와!”
옷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아니 입고 있었던 여자가 그 중심에 있었다. 단추가 다 뜯어져 안이 다 보이는 데다가 머리카락마저 뜯기는 상황에서도 여자는 소리 한번 내지 않았다.
“아프겠다.”
“저런 거 보지 마세요.”
“보이는데요.”
난장판에 섞여 들지 않은 사람은 서준과 그 옆을 지키고 있던 지혁이 유일했다. 뻔히 보이는데 보지 말라는 지혁의 말이 어딘지 우스워 서준은 웃음을 터트렸다.
숨죽이지 못한 그의 웃음소리에 난장판을 구경하고 있던 조문객들 몇몇이 뒤를 돌아봤다. 지혁이 서준을 가리듯 서서 속삭였다.
“회장님이랑 사모님 모시고 나갈 테니 나가 계세요.”
아예 자리를 뜨란 소리였다. 서준은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했다.
“차 있는 데로 가 있으면 돼요?”
“뒷문 주차장에 정 기사님이 계실 거예요.”
서준은 곧장 뒷문으로 향했다. 더 보고 있기에는 몸에 딱 맞는 옷이 불편했다.
밖으로 나가는 짧은 사이에 그는 검은색 재킷을 벗고, 팔과 목을 죄고 있는 단추를 풀었다.
한층 느슨해진 옷차림으로 밖에 나오자마자 자신이 타고 왔던 차를 찾았다. 여기 어디에 주차해 놨을 텐데 막상 오니 잘 보이지 않았다. 색과 모양이 비슷한 차들이 빼곡하게 있었고, 어두운 저녁이어서 찾기가 쉽지 않았다.
서준은 가장 끝에 있던 화단에 걸터앉아 목을 길게 뺐다. 기억이 날 듯 말 듯한 차 번호를 속으로 헤아렸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숫자 하나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어쩔 수 없이 휴대폰을 꺼내 주소록을 뒤적였다.
정 기사의 번호를 막 찾은 그가 통화 버튼으로 손가락을 옮길 때였다.
“오지 말고 거기 있어.”
낯선 목소리에 서준이 어둠 속을 두리번거렸다. 차와 차 사이에 낯익은 여자가 서 있었다.
산발인 머리를 겨우 묶었는지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삐죽 나와 있었고, 머리만큼 헝클어진 옷을 겨우 여민 채로 어딘가를 향해 차게 말하고 있었다. 그녀의 눈이 유독 뾰족하게 보였다.
“네 아버지는 허락했어. 데리고 가겠다고 약속도 했고. 오지 말고 거기 있어.”
“엄마.”
“아버지라고 불러. 죽기 살기로 붙어살아.”
서준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여자의 눈길이 닿는 곳을 좇았다. 그의 시선에 닿은 것은 검은색 원피스를 입고 있는 또래의 여자애였다.
“그만 가!”
불현듯 여자가 소리를 지르자 거리를 좁혀 오던 아이는 발을 멈췄다.
“엄마.”
“엄마 소리 그만해. 나, 너 키우면서 지긋지긋했어. 엄마 소리 징그럽고 끔찍하다고!”
“나를…….”
표정이 잘 보이진 않았지만 서준은 확신했다. 여자애는 울고 있을 것이라고. 물기 어린 목소리가 형편없이 갈라져 있었다.
“어떻게 오늘 버리냐.”
뚝뚝 떨어지는 눈물이 보이는 것도 같았다.
“어떻게 오늘…… 나를 여기에 버리냐고.”
“…….”
“엄마.”
여자가 돌아서 가는데도 여자애는 그 자리에 박힌 듯 서 있었다.
서준은 그 장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우두커니 서 있는 그 여자애는 가지가 얇은 나무 같기도 했고, 검게 물든 바다 어딘가에 잠겨 드는 섬 같기도 했다. 주먹을 말아 쥐고 바들바들 떨고 있는 여자애는 땅이 유난하게 무른 섬처럼 보였다.
서준은 오랫동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아이를 두고 돌아선 여자가 완전히 보이지 않을 때까지.
얼마 지나지 않아 차분해 보이는 중년 여성이 여자애의 근처를 서성였다. 무어라 말을 건네는 듯했다. 여자애는 고개를 저을 뿐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난처해 보이는 여성의 뒤로 낯선 남자가 걸어왔다.
“도연아.”
도연아.
그 이름에 여자애가 고개를 들었다. 서준은 고개를 든 여자애, 도연에게 무어라 말하는 남자의 모습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그때였다.
“서준 학생!”
갑작스럽게 울리는 그의 이름에 여자애와 함께 있던 두 사람이 서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서준은 몰래 숨어 있다가 들킨 사람처럼 무안한 얼굴로 화단에서 엉덩이를 뗐다. 애써 모르는 척 앞만 보며 자신을 부른 정 기사에게 다가갔다.
“왜 이쪽에 있었어? 차는 저 건너편에 주차했는데.”
“주차장이 이쪽이라서 여기에 있는 줄 알았어요.”
“아유, 여긴 너무 복잡해서 저기다 댔지. 가자. 회장님은 벌써 타고 계셔.”
정 기사의 뒤를 졸졸 쫓아 걷던 서준은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가까이서 여자애를 보니 눈이 빨갰다. 얼굴엔 눈물 자국도 언뜻 보였다.
“도연아, 가자.”
여자애는 남자의 등에 가려져 더 이상 보이지 않았지만 서준은 끝까지 시선을 떼지 않았다. 한참 앞서가던 정 기사가 다시 돌아와서 그를 재촉하기 전까지.
불필요한 기억은 남기지 말라고 지혁이 말했지만, 서준은 그날의 일을 묻어 두지 않았다.
서준은 본의 아니게 장례식장에서 보았던 두 여자에 대해서 금방 알 수 있었다. 그때의 가관을 잊지 못한 방문객이 그의 집에서 호들갑을 떠는 통에 모를 수가 없었다.
여자애를 두고 돌아섰던 여자는 십몇 년 전에 데뷔했던 배우라고 했다. 하지만 TV에 출연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유부남이었던 켄트 호텔 오너와 바람이 나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고, 그날 장례식장에서 돌아가던 길에 사고를 당해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여자애는 켄트 호텔 오너와 여배우의 불륜으로 태어난 아이였다. 방문객은 그 아이를 반쪽짜리라고 불렀다.
그 후로 몇 달이 지났지만 서준은 때때로 도연을 떠올렸다. 녹음이 울창해진 나무를 볼 때면, 드넓은 앞마당 구석에 홀로 핀 이름 모를 꽃을 볼 때면 유독 그 여자애의 얼굴이 또렷하게 떠올랐다.
서도연, 여자애.
반쪽짜리, 섬 같았던.
그 여자애를 다시 보게 된 것은 그로부터 반년이 지난 어느 초여름이었다.
* * *
도연은 고개를 움직이며 주변을 살폈다. 한눈에 다 담기도 힘든 큰 정원에 즐비한 원형 테이블과 그곳을 휘젓고 다니는 사람들.
생경한 광경을 뚫어져라 보던 도연은 귀를 기울였다. 부드러운 클래식 선율과 사람들의 웃음소리, 사박사박 풀을 밟고 지나가는 소리.
“얘는 도대체 왜 데리고 온 거야?”
바짝 날이 선 목소리.
순간적으로 도연의 어깨가 앞으로 툭 고꾸라졌다. 그녀는 부딪힌 어깨를 괘념치 않았다. 목을 죄는 리본 끝을 만지작대며 눈을 깜빡일 뿐이었다.
제일 울창하게 자란 나무 옆엔 이제 막 새싹을 틔운 낮은 꽃나무들이 즐비했다. 이 집의 안주인이 관엽 식물을 좋아한다는 것을 모를 리 없는 손님들이 가지고 온 게 분명했다.
바로 코앞에서 자신을 죽일 듯 노려보고 있는 눈빛을 느끼면서도 도연은 딴생각을 했다.
동환은 그 담담함이 마음에 들지 않아 눈에서 힘을 풀지 않았지만, 도연의 한쪽 입꼬리는 보란 듯이 올라갔다. 미세한 움직임이었지만 그의 신경을 긁기에는 충분했다.
“웃어? 이게 진짜……!”
“서동환!”
동환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그의 이름을 호통치듯 부른 사람은 동환의 아버지이자 도연의 친부이기도 했다.
도연은 동환과 아버지라는 남자를 번갈아 보았다. 같은 집에 산 지 반년이나 지났는데도 여전히 낯설었다.
“아빠도 정말 너무하신 거 아니에요? 저년 때문에 우리 엄마가……!”
“보는 눈이 많다. 듣는 귀도 많고.”
“아빠!”
“서동환.”
강압적인 목소리가 동환의 입을 다물게 했다.
“서혁수 사장!”
때마침 생소한 목소리가 두 사람의 아버지를 불렀다. 동환을 노려보던 눈이 삽시간에 풀렸다. 돌아서는 얼굴엔 미소까지 번져 있었다.
도연은 그런 아버지를 보며 생각했다. 사실 저 사람도 배우가 아니었을까.
“동환아, 도연이 데리고 먼저 회장님 찾아뵈렴.”
무언으로 압박하는 아버지의 눈빛에 동환은 불만이 가득한 얼굴을 숨기지 못하고 고개를 홱 돌렸다. 혁수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도연에게도 말했다.
“도연아. 오빠 잘 따라가.”
“네.”
거칠게 풀을 짓밟는 구두 뒤로 분홍색 단화가 종종종 움직였다. 동환은 입안으로 욕지거릴 하며 눈을 돌렸다. 도연이 무표정하게 걷고 있었다.
“야. 너 우리 집에 빌붙어 살 생각 추호도 하지 마.”
“…….”
“엄마만 생각하면 지금이라도 널 죽이고 싶어.”
도연은 다시 입꼬리를 올렸다. 누가 들을세라 눈치를 살피며 속삭이는 폭언은 우스울 뿐이었다.
서준은 17년을 도시 외곽에서 살았다. 서울에서 근간을 잃은 사람들이 모여든 조그만 마을에서 17년을.
얼떨결에 이웃으로 묶인 사람들은 서로의 없는 살림을 살펴 주며 돕고 살았지만, 이따금 땅이 갈라질 정도로 쾅쾅대며 싸우기도 했다. 부식된 벽과 벽 사이에서 팔과 다리가 부서지도록 치고받는 사람들을 보며 서준은 그런 생각을 했었다.
참 가관이다.
그는 가파른 계단을 한참이나 올라야 있는 자신의 좁은 집을 때때로 섬이라 부르기도 했다. 외딴집보다는 외딴섬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멋져 보인다는 이유였다.
그가 조그만 외딴섬에서 어느 휴양지의 섬처럼 큰 집에 들어오게 된 것이 불과 세 달 전이었다. 그것도 한국에서 열 손가락에 들어가는 기업 중 하나인 명온 그룹의 유일무이한 손자로.
이전의 생활을 빨리 잊으라던 안주인의 명령 같은 조언에 서준은 지난 세 달 동안 자신만의 외딴섬을 생각하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잊을 수 있다고 스스로 자부하던 어느 날, 그는 자신의 눈앞에서 펼쳐지는 풍경을 보며 생각했다.
참 가관이다.
그런 ‘가관’은 이전에 살던 곳에서나 일어나는 거라고 생각했다. 낮만 해도 점잖게 조문객들을 맞이하며 고고함을 유지하던 사람들이 밤이 되자 취객 못지않게 패악질을 부렸다. 조근조근 속삭였던 목소리가 아니라, 감칠맛이 느껴질 정도로 차진 욕설이 마구 터져 나왔다. 과거에 있던 곳을 생각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었다.
“네년이 여기가 어디라고, 어디라고!”
“죽기를 바랐지! 불쌍한 우리 언니, 죽자마자 뻔뻔하게 얼굴을 들이밀어!”
“아직 염도 제대로 못 했는데 어딜 기어들어 와!”
옷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아니 입고 있었던 여자가 그 중심에 있었다. 단추가 다 뜯어져 안이 다 보이는 데다가 머리카락마저 뜯기는 상황에서도 여자는 소리 한번 내지 않았다.
“아프겠다.”
“저런 거 보지 마세요.”
“보이는데요.”
난장판에 섞여 들지 않은 사람은 서준과 그 옆을 지키고 있던 지혁이 유일했다. 뻔히 보이는데 보지 말라는 지혁의 말이 어딘지 우스워 서준은 웃음을 터트렸다.
숨죽이지 못한 그의 웃음소리에 난장판을 구경하고 있던 조문객들 몇몇이 뒤를 돌아봤다. 지혁이 서준을 가리듯 서서 속삭였다.
“회장님이랑 사모님 모시고 나갈 테니 나가 계세요.”
아예 자리를 뜨란 소리였다. 서준은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했다.
“차 있는 데로 가 있으면 돼요?”
“뒷문 주차장에 정 기사님이 계실 거예요.”
서준은 곧장 뒷문으로 향했다. 더 보고 있기에는 몸에 딱 맞는 옷이 불편했다.
밖으로 나가는 짧은 사이에 그는 검은색 재킷을 벗고, 팔과 목을 죄고 있는 단추를 풀었다.
한층 느슨해진 옷차림으로 밖에 나오자마자 자신이 타고 왔던 차를 찾았다. 여기 어디에 주차해 놨을 텐데 막상 오니 잘 보이지 않았다. 색과 모양이 비슷한 차들이 빼곡하게 있었고, 어두운 저녁이어서 찾기가 쉽지 않았다.
서준은 가장 끝에 있던 화단에 걸터앉아 목을 길게 뺐다. 기억이 날 듯 말 듯한 차 번호를 속으로 헤아렸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숫자 하나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어쩔 수 없이 휴대폰을 꺼내 주소록을 뒤적였다.
정 기사의 번호를 막 찾은 그가 통화 버튼으로 손가락을 옮길 때였다.
“오지 말고 거기 있어.”
낯선 목소리에 서준이 어둠 속을 두리번거렸다. 차와 차 사이에 낯익은 여자가 서 있었다.
산발인 머리를 겨우 묶었는지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삐죽 나와 있었고, 머리만큼 헝클어진 옷을 겨우 여민 채로 어딘가를 향해 차게 말하고 있었다. 그녀의 눈이 유독 뾰족하게 보였다.
“네 아버지는 허락했어. 데리고 가겠다고 약속도 했고. 오지 말고 거기 있어.”
“엄마.”
“아버지라고 불러. 죽기 살기로 붙어살아.”
서준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여자의 눈길이 닿는 곳을 좇았다. 그의 시선에 닿은 것은 검은색 원피스를 입고 있는 또래의 여자애였다.
“그만 가!”
불현듯 여자가 소리를 지르자 거리를 좁혀 오던 아이는 발을 멈췄다.
“엄마.”
“엄마 소리 그만해. 나, 너 키우면서 지긋지긋했어. 엄마 소리 징그럽고 끔찍하다고!”
“나를…….”
표정이 잘 보이진 않았지만 서준은 확신했다. 여자애는 울고 있을 것이라고. 물기 어린 목소리가 형편없이 갈라져 있었다.
“어떻게 오늘 버리냐.”
뚝뚝 떨어지는 눈물이 보이는 것도 같았다.
“어떻게 오늘…… 나를 여기에 버리냐고.”
“…….”
“엄마.”
여자가 돌아서 가는데도 여자애는 그 자리에 박힌 듯 서 있었다.
서준은 그 장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우두커니 서 있는 그 여자애는 가지가 얇은 나무 같기도 했고, 검게 물든 바다 어딘가에 잠겨 드는 섬 같기도 했다. 주먹을 말아 쥐고 바들바들 떨고 있는 여자애는 땅이 유난하게 무른 섬처럼 보였다.
서준은 오랫동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아이를 두고 돌아선 여자가 완전히 보이지 않을 때까지.
얼마 지나지 않아 차분해 보이는 중년 여성이 여자애의 근처를 서성였다. 무어라 말을 건네는 듯했다. 여자애는 고개를 저을 뿐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난처해 보이는 여성의 뒤로 낯선 남자가 걸어왔다.
“도연아.”
도연아.
그 이름에 여자애가 고개를 들었다. 서준은 고개를 든 여자애, 도연에게 무어라 말하는 남자의 모습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그때였다.
“서준 학생!”
갑작스럽게 울리는 그의 이름에 여자애와 함께 있던 두 사람이 서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서준은 몰래 숨어 있다가 들킨 사람처럼 무안한 얼굴로 화단에서 엉덩이를 뗐다. 애써 모르는 척 앞만 보며 자신을 부른 정 기사에게 다가갔다.
“왜 이쪽에 있었어? 차는 저 건너편에 주차했는데.”
“주차장이 이쪽이라서 여기에 있는 줄 알았어요.”
“아유, 여긴 너무 복잡해서 저기다 댔지. 가자. 회장님은 벌써 타고 계셔.”
정 기사의 뒤를 졸졸 쫓아 걷던 서준은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가까이서 여자애를 보니 눈이 빨갰다. 얼굴엔 눈물 자국도 언뜻 보였다.
“도연아, 가자.”
여자애는 남자의 등에 가려져 더 이상 보이지 않았지만 서준은 끝까지 시선을 떼지 않았다. 한참 앞서가던 정 기사가 다시 돌아와서 그를 재촉하기 전까지.
불필요한 기억은 남기지 말라고 지혁이 말했지만, 서준은 그날의 일을 묻어 두지 않았다.
서준은 본의 아니게 장례식장에서 보았던 두 여자에 대해서 금방 알 수 있었다. 그때의 가관을 잊지 못한 방문객이 그의 집에서 호들갑을 떠는 통에 모를 수가 없었다.
여자애를 두고 돌아섰던 여자는 십몇 년 전에 데뷔했던 배우라고 했다. 하지만 TV에 출연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유부남이었던 켄트 호텔 오너와 바람이 나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고, 그날 장례식장에서 돌아가던 길에 사고를 당해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여자애는 켄트 호텔 오너와 여배우의 불륜으로 태어난 아이였다. 방문객은 그 아이를 반쪽짜리라고 불렀다.
그 후로 몇 달이 지났지만 서준은 때때로 도연을 떠올렸다. 녹음이 울창해진 나무를 볼 때면, 드넓은 앞마당 구석에 홀로 핀 이름 모를 꽃을 볼 때면 유독 그 여자애의 얼굴이 또렷하게 떠올랐다.
서도연, 여자애.
반쪽짜리, 섬 같았던.
그 여자애를 다시 보게 된 것은 그로부터 반년이 지난 어느 초여름이었다.
* * *
도연은 고개를 움직이며 주변을 살폈다. 한눈에 다 담기도 힘든 큰 정원에 즐비한 원형 테이블과 그곳을 휘젓고 다니는 사람들.
생경한 광경을 뚫어져라 보던 도연은 귀를 기울였다. 부드러운 클래식 선율과 사람들의 웃음소리, 사박사박 풀을 밟고 지나가는 소리.
“얘는 도대체 왜 데리고 온 거야?”
바짝 날이 선 목소리.
순간적으로 도연의 어깨가 앞으로 툭 고꾸라졌다. 그녀는 부딪힌 어깨를 괘념치 않았다. 목을 죄는 리본 끝을 만지작대며 눈을 깜빡일 뿐이었다.
제일 울창하게 자란 나무 옆엔 이제 막 새싹을 틔운 낮은 꽃나무들이 즐비했다. 이 집의 안주인이 관엽 식물을 좋아한다는 것을 모를 리 없는 손님들이 가지고 온 게 분명했다.
바로 코앞에서 자신을 죽일 듯 노려보고 있는 눈빛을 느끼면서도 도연은 딴생각을 했다.
동환은 그 담담함이 마음에 들지 않아 눈에서 힘을 풀지 않았지만, 도연의 한쪽 입꼬리는 보란 듯이 올라갔다. 미세한 움직임이었지만 그의 신경을 긁기에는 충분했다.
“웃어? 이게 진짜……!”
“서동환!”
동환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그의 이름을 호통치듯 부른 사람은 동환의 아버지이자 도연의 친부이기도 했다.
도연은 동환과 아버지라는 남자를 번갈아 보았다. 같은 집에 산 지 반년이나 지났는데도 여전히 낯설었다.
“아빠도 정말 너무하신 거 아니에요? 저년 때문에 우리 엄마가……!”
“보는 눈이 많다. 듣는 귀도 많고.”
“아빠!”
“서동환.”
강압적인 목소리가 동환의 입을 다물게 했다.
“서혁수 사장!”
때마침 생소한 목소리가 두 사람의 아버지를 불렀다. 동환을 노려보던 눈이 삽시간에 풀렸다. 돌아서는 얼굴엔 미소까지 번져 있었다.
도연은 그런 아버지를 보며 생각했다. 사실 저 사람도 배우가 아니었을까.
“동환아, 도연이 데리고 먼저 회장님 찾아뵈렴.”
무언으로 압박하는 아버지의 눈빛에 동환은 불만이 가득한 얼굴을 숨기지 못하고 고개를 홱 돌렸다. 혁수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도연에게도 말했다.
“도연아. 오빠 잘 따라가.”
“네.”
거칠게 풀을 짓밟는 구두 뒤로 분홍색 단화가 종종종 움직였다. 동환은 입안으로 욕지거릴 하며 눈을 돌렸다. 도연이 무표정하게 걷고 있었다.
“야. 너 우리 집에 빌붙어 살 생각 추호도 하지 마.”
“…….”
“엄마만 생각하면 지금이라도 널 죽이고 싶어.”
도연은 다시 입꼬리를 올렸다. 누가 들을세라 눈치를 살피며 속삭이는 폭언은 우스울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