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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빌붙어 산 게 반년이 넘었는데 아직도 말뿐이네.”
그녀가 나긋이 대답하자 동환의 걸음이 멈췄다.
“이 정도면 못 쫓아내는 거지. 참는 게 아니고.”
도연의 무신경한 눈이 그를 직시했다. 동환은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그녀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그래. 못 쫓아내. 그 대신 네가 제풀에 지쳐 나갈 때까지 가만 안 둘 거니까 각오해. 앞으론 진짜야.”
도연은 그의 팔을 가볍게 쳐냈다. 주변 시선을 의식한 탓인지 동환은 쉽게 손을 뗐다. 대신 도연이 팔을 들어 그의 어깨를 가볍게 쳤다.
“힘내. 머리도 좀 쓰고. 그래야 네 발길에 채어 나가든 말든 할 거 아냐.”
도연은 동환의 구겨진 미간에 눈을 고정한 채 턱짓했다.
“앞장서.”
도연은 여유롭게 웃기까지 했다. 썩어들어 가는 동환의 얼굴은 아버지의 집에서 살게 된 이후부터 지금까지 유일한 즐거움이었다.
“표정 풀어. 누구 오네.”
굳어 있던 동환이 인기척에 얼른 표정을 가다듬었다.
“동환이 맞지?”
“아, 네. 안녕하세요.”
“서 사장님은?”
“잠깐 다른 분이랑 얘기하고 계세요. 회장님한테 먼저 인사드리라고 하셔서요.”
“저쪽에 계셔. 나도 막 인사하고 나온 참인데.”
머리를 단단하게 틀어 올린 여자가 가리키는 쪽을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옆에는…….”
여자가 머뭇거리며 눈짓하자 도연이 차분하게 대답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서도연이라고 합니다.”
도연의 담담함에 외려 놀란 여자가 떨떠름하게 웃으며 한 발 물러섰다.
“으응, 그래.”
“저, 그럼 회장님한테 인사드리러 갈게요.”
동환은 도연의 팔을 잡고 우악스럽게 이끌었다.
여자는 둘의 모습이 사라지기도 전에 구석에 있는 한 무리로 가 입을 달싹이기 시작했다.
도연이 뒤를 돌아 그들을 보았다. 자신을 힐긋거리며 속닥대는 사람들을.
“듣기론 엄마를 빼닮았대요.”
“서 사장이 홀랑 넘어간 걸 보면 대단한 미인이었겠지. 그 덕에 빛도 못 보고 그대로 묻혔다며. 지 어미 닮아 꽤 예쁘긴 하네.”
“그럼 뭐 해. 보니까 눈빛이 보통이 아냐. 엄마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할 것 같진 않아.”
본 적도 없는 사람을 두고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재주가 특출 나서 부자인 건가.
시답지 않은 생각에 빠져 있던 도연은 몸이 내팽개쳐지는 느낌에 다시 고개를 돌렸다. 동환이 자신의 팔을 내던지다시피 놓고 숨을 고르고 있었다.
“동환아.”
어느새 뒤를 쫓아온 혁수가 동환과 도연의 사이를 파고들었다.
“저기 계시네. 가자. 도연이 너도.”
“네.”
세 사람이 도착한 원형 테이블에는 일가족으로 보이는 여러 명의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도연은 눈을 살짝 내리깐 채 눈동자만 굴렸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회장님, 사모님.”
“그래. 혁수야.”
현 명온 그룹 한화섭 회장에게 혁수가 깍듯이 인사했다. 도연이 보기엔 공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할아버지일 뿐이었다. 희끗희끗한 머리와 어울리지 않게 허리가 굽지 않은 것만 빼면.
한 회장은 혁수에게 있어 친아버지와 다름없는 사람이라고 했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성공할 수 있게 도와주셨던 은인이라고, 앞으로 볼 일이 많을 테니 잘 보이라며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던 조금 전을 떠올렸다.
“둘은 처음 보겠구나. 여긴 내 아들, 태범이.”
한 회장이 손짓하자 혁수의 몸이 살짝 돌아갔다. 그 앞에 일어선 중년의 남자가 혁수에게 먼저 손을 뻗었다.
“한태범입니다.”
“반갑습니다. 서혁수입니다.”
“둘은 앞으로 자주 볼 테니 인사들 잘 나누고.”
한 회장이 동환 쪽으로 느긋하게 고개를 돌렸다.
“동환이는 그새 많이 자랐구나.”
“안녕하세요, 회장님. 사모님, 생신 축하드립니다.”
“그래. 유학 준비는 잘되어 가고?”
“네. 이번 학기만 마치고 갈 예정입니다.”
“그래. 그리고…….”
도연은 자신에게로 쏠리는 눈길들에 맞서듯 허리를 빳빳하게 세웠다.
“제 딸아이입니다, 회장님.”
“안녕하세요.”
도연이 고개 숙여 인사하자 한 회장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쁘네. 나이가 몇이랬지?”
“열…….”
“열일곱입니다.”
도연이 혁수의 대답을 막으며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친모가 빛은 못 봤어도 꽤 예쁜 배우였다니, 그 씨가 어딜 가겠어요.”
자신을 할퀴려 작정한 날카로운 말에도 도연은 굴하지 않았다.
“너도 네 엄마 같은 재주가 있니?”
“글쎄요.”
눈꼬리를 접으며 웃기까지 하는 도연을 향해 다시 질문이 돌아왔다.
“글쎄요?”
“아마 없을 거예요. 엄마 닮았다는 소리 별로 못 들었거든요.”
“하.”
어디선가 짧은 웃음이 터졌다. 도연은 여유 있게 웃으며 긴 쇼핑백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사모님, 생신 선물이요. 팥꽃나무 화분이에요.”
도연이 꺼내 놓은 화분에는 손가락 한 마디만 한 삽수 몇 개가 전부였다.
“직접 했니?”
“네. 직접 삽목했어요. 잘 돌보시면 한 달 뒤엔 새순이 날 거예요.”
“돌봐?”
“네.”
“꽃나무를 주면서 돌보라는 사람은 네가 처음이구나.”
“좋아하신다고 하셔서요. 정성껏 돌보고 나면 보는 재미가 더 있으실 거예요.”
도연이 쇼핑백에 화분을 조심이 넣자 날카롭던 여자의 눈매에 호기심이 일었다.
“새순이 나고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 뿌리가 단단해져요. 그때 분갈이를 해 주셔야 해요.”
“내가?”
“네.”
“직접 할 이유가 있니? 우리 집에 정원사도, 가정부도 없을까 봐서?”
“말씀드렸잖아요. 정성껏 돌보고 난 뒤에 보는 재미가 더 있으실 거라고. 그리고…….”
도연은 입매를 올리며 말을 덧붙였다.
“씨를 뿌린 사람이 책임을 져야죠.”
당돌한 도연의 말에 모두가 놀란 표정으로 서로를 살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요했던 테이블 위로 웃음소리가 퍼져 갔다.
“내 아내가 받은 선물 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구나.”
잠자코 도연을 보고 있던 한 회장이 제일 크게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안에 가져다 놓고 오겠습니다.”
어떤 여자가 뒤에서 다가왔지만 사모는 고개를 저으며 단호히 말했다.
“아니. 내가 가져갈 테니 신경 쓰지 말게.”
날카로웠던 목소리는 한결 풀어져 있었다.
“이름이 뭐랬지?”
“서도연입니다.”
“도연이. 내 손주와 나이가 같구나.”
한 회장이 가리키는 쪽으로 도연의 눈이 자연스레 향했다.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비스듬하게 올라간 입매였다. 이내 테이블 위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한 치의 틈도 없이 부딪쳤다.
눈썹 위로 단정하게 내려앉은 밤색 머리카락, 가로로 긴 눈, 눈에 띄게 흰 피부. 소년을 천천히 훑어보던 그녀의 눈이 순간 딱딱하게 굳었다.
비틀린 입가는 비웃고 있었다. 아주 분명하게.
“친구처럼 지내면 좋을 것 같은데.”
혁수가 얼른 앞으로 치고 나오며 말을 이었다.
“서준이도 못 본 새 많이 컸네요.”
서준.
도연은 입안으로 소년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이름이었다.
도연은 다시 한번 익숙한 이름을 중얼거렸다.
“서준이는 지난달부터 명온 고등학교에 다니는데, 도연이는…….”
“아, 도연이는 검정고시를 볼 예정입니다. 집에서 과외를 하기로 했고요.”
“그래?”
그 뒤로 의미 없는 말들이 이어졌다. 한 회장의 손짓에 자리를 잡기 전, 혁수가 도연과 동환에게 살짝 눈치를 줬다. 그러자 동환은 가볍게 묵례를 하며 돌아섰고, 도연 역시 짧게 인사한 뒤 물러났다.
도연은 마치 길을 아는 사람처럼 오른쪽을 빙 돌아 걸었다. 풀숲에 잠긴 신발은 소리 없이 발자국만 남겼다.
동환은 들리는 말소리가 잦아들 때까지 조용히 걷다가 우뚝 멈췄다.
“난 친구들 만나고 올 테니까 너 먼저…….”
말을 끝맺지 못한 동환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뒤에서 따라오고 있을 줄 알았던 도연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아이씨.”
도연은 작게 욕을 뱉곤 주변을 살폈다. 말없이 빠져나와 걸어온 곳은 한참 구석에 있는 풀밭이었다.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자 그녀의 발을 감싸고 있던 분홍색 단화가 힘없이 벗겨졌다. 도연은 신발을 들어 안쪽 구석을 살폈다.
“아, 나 250이라니까.”
도연은 245라고 새겨져 있는 숫자를 원망스럽게 보다가 신경질적으로 단화를 내팽개쳤다.
땅으로 처박히듯 던져진 단화는 몇 바퀴 굴러가더니 남색 운동화 앞에서 멈추었다.
도연이 앉은 그대로 고개를 들었다.
“서도연?”
조금 전 비웃음을 보였던 입술이 자신을 불렀다. 도연은 눈을 가늘게 뜬 채 그를 올려다보았다. 방금 마주쳤을 때보다 더 선명한 얼굴이 나타났다.
“네 이름 맞지? 서도연.”
툭. 도연의 발끝에 단화 한쪽이 닿았다.
“한서준.”
도연이 기억에서 끄집어낸 이름을 낮게 읊조렸다. 그와 동시에 서준의 발에 걷어차인 나머지 단화 한쪽이 도연의 발 옆에 닿았다.
“손으로 주워 주는 건 좀 간지러워서.”
도연은 대답 없이 서준을 바라보았다. 눈을 크게 굴리며 이상하게 낯이 익은 그의 얼굴을 샅샅이 살폈다.
혁수의 집으로 들어간 지 반년이 채 되지 않았고, 그의 딸로 소개되는 자리는 오늘이 처음이었다. 명온 그룹 손자의 얼굴이나 이름을 접했을 일이 전혀 없는데도, 마냥 낯선 느낌이 아니었다.
“할머니가 너 마음에 들었나 봐. 너 찾아서 데리고 오래.”
도연은 입술을 달싹였다.
“한서준.”
“서준 학생!”
도연은 고집스럽게 기억을 더듬은 것을 후회했다. 가장 최악의 날이었던 하필 그때, 그 모습을 관전하고 있던, 화단에 앉아 멀뚱히 자신을 보고 있던 그 남자애였다.
그녀가 나긋이 대답하자 동환의 걸음이 멈췄다.
“이 정도면 못 쫓아내는 거지. 참는 게 아니고.”
도연의 무신경한 눈이 그를 직시했다. 동환은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그녀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그래. 못 쫓아내. 그 대신 네가 제풀에 지쳐 나갈 때까지 가만 안 둘 거니까 각오해. 앞으론 진짜야.”
도연은 그의 팔을 가볍게 쳐냈다. 주변 시선을 의식한 탓인지 동환은 쉽게 손을 뗐다. 대신 도연이 팔을 들어 그의 어깨를 가볍게 쳤다.
“힘내. 머리도 좀 쓰고. 그래야 네 발길에 채어 나가든 말든 할 거 아냐.”
도연은 동환의 구겨진 미간에 눈을 고정한 채 턱짓했다.
“앞장서.”
도연은 여유롭게 웃기까지 했다. 썩어들어 가는 동환의 얼굴은 아버지의 집에서 살게 된 이후부터 지금까지 유일한 즐거움이었다.
“표정 풀어. 누구 오네.”
굳어 있던 동환이 인기척에 얼른 표정을 가다듬었다.
“동환이 맞지?”
“아, 네. 안녕하세요.”
“서 사장님은?”
“잠깐 다른 분이랑 얘기하고 계세요. 회장님한테 먼저 인사드리라고 하셔서요.”
“저쪽에 계셔. 나도 막 인사하고 나온 참인데.”
머리를 단단하게 틀어 올린 여자가 가리키는 쪽을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옆에는…….”
여자가 머뭇거리며 눈짓하자 도연이 차분하게 대답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서도연이라고 합니다.”
도연의 담담함에 외려 놀란 여자가 떨떠름하게 웃으며 한 발 물러섰다.
“으응, 그래.”
“저, 그럼 회장님한테 인사드리러 갈게요.”
동환은 도연의 팔을 잡고 우악스럽게 이끌었다.
여자는 둘의 모습이 사라지기도 전에 구석에 있는 한 무리로 가 입을 달싹이기 시작했다.
도연이 뒤를 돌아 그들을 보았다. 자신을 힐긋거리며 속닥대는 사람들을.
“듣기론 엄마를 빼닮았대요.”
“서 사장이 홀랑 넘어간 걸 보면 대단한 미인이었겠지. 그 덕에 빛도 못 보고 그대로 묻혔다며. 지 어미 닮아 꽤 예쁘긴 하네.”
“그럼 뭐 해. 보니까 눈빛이 보통이 아냐. 엄마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할 것 같진 않아.”
본 적도 없는 사람을 두고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재주가 특출 나서 부자인 건가.
시답지 않은 생각에 빠져 있던 도연은 몸이 내팽개쳐지는 느낌에 다시 고개를 돌렸다. 동환이 자신의 팔을 내던지다시피 놓고 숨을 고르고 있었다.
“동환아.”
어느새 뒤를 쫓아온 혁수가 동환과 도연의 사이를 파고들었다.
“저기 계시네. 가자. 도연이 너도.”
“네.”
세 사람이 도착한 원형 테이블에는 일가족으로 보이는 여러 명의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도연은 눈을 살짝 내리깐 채 눈동자만 굴렸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회장님, 사모님.”
“그래. 혁수야.”
현 명온 그룹 한화섭 회장에게 혁수가 깍듯이 인사했다. 도연이 보기엔 공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할아버지일 뿐이었다. 희끗희끗한 머리와 어울리지 않게 허리가 굽지 않은 것만 빼면.
한 회장은 혁수에게 있어 친아버지와 다름없는 사람이라고 했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성공할 수 있게 도와주셨던 은인이라고, 앞으로 볼 일이 많을 테니 잘 보이라며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던 조금 전을 떠올렸다.
“둘은 처음 보겠구나. 여긴 내 아들, 태범이.”
한 회장이 손짓하자 혁수의 몸이 살짝 돌아갔다. 그 앞에 일어선 중년의 남자가 혁수에게 먼저 손을 뻗었다.
“한태범입니다.”
“반갑습니다. 서혁수입니다.”
“둘은 앞으로 자주 볼 테니 인사들 잘 나누고.”
한 회장이 동환 쪽으로 느긋하게 고개를 돌렸다.
“동환이는 그새 많이 자랐구나.”
“안녕하세요, 회장님. 사모님, 생신 축하드립니다.”
“그래. 유학 준비는 잘되어 가고?”
“네. 이번 학기만 마치고 갈 예정입니다.”
“그래. 그리고…….”
도연은 자신에게로 쏠리는 눈길들에 맞서듯 허리를 빳빳하게 세웠다.
“제 딸아이입니다, 회장님.”
“안녕하세요.”
도연이 고개 숙여 인사하자 한 회장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쁘네. 나이가 몇이랬지?”
“열…….”
“열일곱입니다.”
도연이 혁수의 대답을 막으며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친모가 빛은 못 봤어도 꽤 예쁜 배우였다니, 그 씨가 어딜 가겠어요.”
자신을 할퀴려 작정한 날카로운 말에도 도연은 굴하지 않았다.
“너도 네 엄마 같은 재주가 있니?”
“글쎄요.”
눈꼬리를 접으며 웃기까지 하는 도연을 향해 다시 질문이 돌아왔다.
“글쎄요?”
“아마 없을 거예요. 엄마 닮았다는 소리 별로 못 들었거든요.”
“하.”
어디선가 짧은 웃음이 터졌다. 도연은 여유 있게 웃으며 긴 쇼핑백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사모님, 생신 선물이요. 팥꽃나무 화분이에요.”
도연이 꺼내 놓은 화분에는 손가락 한 마디만 한 삽수 몇 개가 전부였다.
“직접 했니?”
“네. 직접 삽목했어요. 잘 돌보시면 한 달 뒤엔 새순이 날 거예요.”
“돌봐?”
“네.”
“꽃나무를 주면서 돌보라는 사람은 네가 처음이구나.”
“좋아하신다고 하셔서요. 정성껏 돌보고 나면 보는 재미가 더 있으실 거예요.”
도연이 쇼핑백에 화분을 조심이 넣자 날카롭던 여자의 눈매에 호기심이 일었다.
“새순이 나고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 뿌리가 단단해져요. 그때 분갈이를 해 주셔야 해요.”
“내가?”
“네.”
“직접 할 이유가 있니? 우리 집에 정원사도, 가정부도 없을까 봐서?”
“말씀드렸잖아요. 정성껏 돌보고 난 뒤에 보는 재미가 더 있으실 거라고. 그리고…….”
도연은 입매를 올리며 말을 덧붙였다.
“씨를 뿌린 사람이 책임을 져야죠.”
당돌한 도연의 말에 모두가 놀란 표정으로 서로를 살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요했던 테이블 위로 웃음소리가 퍼져 갔다.
“내 아내가 받은 선물 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구나.”
잠자코 도연을 보고 있던 한 회장이 제일 크게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안에 가져다 놓고 오겠습니다.”
어떤 여자가 뒤에서 다가왔지만 사모는 고개를 저으며 단호히 말했다.
“아니. 내가 가져갈 테니 신경 쓰지 말게.”
날카로웠던 목소리는 한결 풀어져 있었다.
“이름이 뭐랬지?”
“서도연입니다.”
“도연이. 내 손주와 나이가 같구나.”
한 회장이 가리키는 쪽으로 도연의 눈이 자연스레 향했다.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비스듬하게 올라간 입매였다. 이내 테이블 위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한 치의 틈도 없이 부딪쳤다.
눈썹 위로 단정하게 내려앉은 밤색 머리카락, 가로로 긴 눈, 눈에 띄게 흰 피부. 소년을 천천히 훑어보던 그녀의 눈이 순간 딱딱하게 굳었다.
비틀린 입가는 비웃고 있었다. 아주 분명하게.
“친구처럼 지내면 좋을 것 같은데.”
혁수가 얼른 앞으로 치고 나오며 말을 이었다.
“서준이도 못 본 새 많이 컸네요.”
서준.
도연은 입안으로 소년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이름이었다.
도연은 다시 한번 익숙한 이름을 중얼거렸다.
“서준이는 지난달부터 명온 고등학교에 다니는데, 도연이는…….”
“아, 도연이는 검정고시를 볼 예정입니다. 집에서 과외를 하기로 했고요.”
“그래?”
그 뒤로 의미 없는 말들이 이어졌다. 한 회장의 손짓에 자리를 잡기 전, 혁수가 도연과 동환에게 살짝 눈치를 줬다. 그러자 동환은 가볍게 묵례를 하며 돌아섰고, 도연 역시 짧게 인사한 뒤 물러났다.
도연은 마치 길을 아는 사람처럼 오른쪽을 빙 돌아 걸었다. 풀숲에 잠긴 신발은 소리 없이 발자국만 남겼다.
동환은 들리는 말소리가 잦아들 때까지 조용히 걷다가 우뚝 멈췄다.
“난 친구들 만나고 올 테니까 너 먼저…….”
말을 끝맺지 못한 동환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뒤에서 따라오고 있을 줄 알았던 도연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아이씨.”
도연은 작게 욕을 뱉곤 주변을 살폈다. 말없이 빠져나와 걸어온 곳은 한참 구석에 있는 풀밭이었다.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자 그녀의 발을 감싸고 있던 분홍색 단화가 힘없이 벗겨졌다. 도연은 신발을 들어 안쪽 구석을 살폈다.
“아, 나 250이라니까.”
도연은 245라고 새겨져 있는 숫자를 원망스럽게 보다가 신경질적으로 단화를 내팽개쳤다.
땅으로 처박히듯 던져진 단화는 몇 바퀴 굴러가더니 남색 운동화 앞에서 멈추었다.
도연이 앉은 그대로 고개를 들었다.
“서도연?”
조금 전 비웃음을 보였던 입술이 자신을 불렀다. 도연은 눈을 가늘게 뜬 채 그를 올려다보았다. 방금 마주쳤을 때보다 더 선명한 얼굴이 나타났다.
“네 이름 맞지? 서도연.”
툭. 도연의 발끝에 단화 한쪽이 닿았다.
“한서준.”
도연이 기억에서 끄집어낸 이름을 낮게 읊조렸다. 그와 동시에 서준의 발에 걷어차인 나머지 단화 한쪽이 도연의 발 옆에 닿았다.
“손으로 주워 주는 건 좀 간지러워서.”
도연은 대답 없이 서준을 바라보았다. 눈을 크게 굴리며 이상하게 낯이 익은 그의 얼굴을 샅샅이 살폈다.
혁수의 집으로 들어간 지 반년이 채 되지 않았고, 그의 딸로 소개되는 자리는 오늘이 처음이었다. 명온 그룹 손자의 얼굴이나 이름을 접했을 일이 전혀 없는데도, 마냥 낯선 느낌이 아니었다.
“할머니가 너 마음에 들었나 봐. 너 찾아서 데리고 오래.”
도연은 입술을 달싹였다.
“한서준.”
“서준 학생!”
도연은 고집스럽게 기억을 더듬은 것을 후회했다. 가장 최악의 날이었던 하필 그때, 그 모습을 관전하고 있던, 화단에 앉아 멀뚱히 자신을 보고 있던 그 남자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