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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너 지금 뭐라고 했어?”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듯 커다랗게 눈을 치켜뜬 그녀가 차준을 무섭게 쏘아보았다. 필요 이상으로 흰자위가 많이 드러나 번뜩이는 선아의 눈동자를 보자면 누구라도 무섭다고 느꼈을 것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쏘아본 건 아니었다. 방금 마주 앉은 녀석에게 들은 소리는 이제껏 그녀가 살아오며 들어본 말들 중 가장 어처구니없는 말이었으니, 표정 관리가 안 되는 게 당연했다.

차준은 선아의 놀란 표정이 재밌는지 히죽거렸다. 그녀의 물음에 대수롭지 않다는 듯 방금 뱉었던 말을 다시 또박또박, 한 글자씩 강조해 말했다.

“나랑 결혼하자고.”

“미친놈.”

선아의 입에서 반사적으로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지금 눈앞에 앉은 이 자식에게 붙일 어떤 적합한 단어도 떠오르지 않았다.

저건 미친놈이다.

“너무하네. 친구한테 미친놈이라니.”

“그 소리가 안 나오게 생겼어? 스캔들 때문에 충격 받아서 머리가 어떻게 되기라도 했어? 아님 툭하면 나한테 장난치고 놀리는 낙으로 살던 중딩 때 버릇이 다시 나온 거야?”

“진심이야.”

차준은 입가에 히죽이던 미소를 거두고 이내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방금의 어처구니없는 말보다 더한 말을 듣고 말았다.

선아의 머리에 급격히 피가 쏠리더니 눈앞에 번쩍거리는 점들이 찍혔다. 10년 전 체력장 오래달리기 테스트 중에 쓰러지기 직전에나 보았던 별이었다. 앞에 놓인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지만, 바짝 말라오는 목과 입술은 축여지지 않았다.

“너 뭐야? 느닷없이 결혼을 하자니. 말이 안 되잖아. 결혼은 좋아하는…… 아니, 사랑하는 사람끼리 하는 거야. 강차준, 네가 날 좋아하는 건 분명 아닐 테고.”

“왜 아닐 거라 생각해?”

“그야 오랜 시간 동안 우린 어떤 케미도 없었고. 나도 널 남자로 본 적 없고, 넌 더욱이나 날 여자로 안 봤잖아. 여자로 못 보는 사람이잖아.”

“여자로 못 보는 사람이라고?”

“꼭 내 입으로 이 말을 하게 만들어야 하니. 너…… 넌 게이잖아!”

선아는 눈을 질끈 감고 두 팔로 방어 자세를 취했다. 분명 뭐라도 날아올 거라 생각했다. 어쩌면 물세례를 받을지도 몰랐다.

차준이 먼저 고백하기 전까지 절대 입 밖으로 꺼내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던 말을 해 버리다니. 하지만 이런 거지 같은 상황에서 언제까지 참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한참을 지나도 물건이나 물세례는 날아오지 않았다. 선아는 팔을 내리고 슬쩍 눈을 떠 차준을 살폈다. 그는 태연하게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미안, 네가 말하기 전에는 먼저 꺼내선 안 되는데. 갑자기 결혼하자느니 진심이라느니, 이상한 소릴 하니까…….”

“진짜 내가 게이라고 생각해?”

차준은 여전히 태연하게 물었다.

“아! 너 혹시 그런 거니? 인터넷에서 본 적 있어. 성 소수자들이 간혹 위장 결혼을 하는 경우가 있다던데. 혹시 이번 일로 실추된 네 명예나, 뭐 이런 것 때문에 결혼을 해 달라는 거라면…… 친구로서 생각은 해 볼게. 진짜 결혼을 하겠다는 게 아니라 생각만.”

“흠, 위장 결혼이라……. 네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다니 흥미로운걸.”

차준은 다리를 꼬며 선아를 똑바로 응시했다. 안 그래도 날카로운 그의 눈매가 반짝이며 빛을 냈다.

선아는 의식적으로 눈을 돌렸다. 가끔씩 차준이 이렇게 뚫어지게 바라볼 때면 어찌할 바 몰라 시선을 피해 버리게 된다.

그에게는 사람을 순식간에 압도하는 카리스마가 있었다. 특히 경기 중에 유독 돋보이는 차준의 맹수 같은 눈빛과 카리스마는 그를 링 밖에서도 환호받는 스타로 만들었을 것이다.

선아는 차준의 눈을 피한 채 목을 가다듬고, 황급히 말을 돌렸다.

“같이 사진 찍힌 그 남자, 너희 체육관에서 본 적 있어. 그분 입장도 이해해. 아직 데뷔도 안 한 신인 선수에게도 너에게도 이 스캔들은 치명적인 거 알아. 하지만 결혼은 나에겐 중요한 일이야. 요즘 같이 이혼을 많이 하는 시대에 뭐가 중요하냐고 할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쉽게 결정지을 문제가 아니잖아.”

선아의 목소리는 긴장으로 떨리고 있었다.

“너, 정말 내가 게이라고 생각해?”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차준이 허리를 굽혀 얼굴을 선아의 코앞까지 얼굴을 들이댔다.

“왜 이래, 징그럽게 얼굴을 들이밀고. 그럼 아니야?”

“만약 그렇다면 결혼해 줄래? 솔직하게 말할게. 스캔들을 무마시키려면 네가 필요해. 네 인생이 중요하지 않다는 게 아니야. 그 부분은 충분히 보상해 줄 테니까.”

선아는 가까이 다가온 차준의 얼굴을 밀어내고 자신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그녀가 스트레스를 받을 때면 습관적으로 하는 행동이었다.

“보상이라니? 네 인생을 구하고 이혼녀 딱지를 달게 되는 건 나잖아. 이건 위장이라도 쉽게 결정 내릴 문제가 아니야. 언젠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 그 사람에게 떳떳하고 싶기도 하고.”

“널 정말 사랑할 남자라면 이혼했다는 이유로 떠나진 않아. 우리가 애를 가질 것도 아니고.”

“그건 그렇지만…… 아, 머리 아프다. 지금은 어떤 판단도 내릴 수가 없어. 일단 집에 가서 생각 좀 해 보고 나중에 다시 얘기해.”

“내가 결정 내리기 좀 더 쉽게 만들어 줄까?”

고민에 빠진 선아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차준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그녀의 맞은편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평소의 자신만만한 모습으로 돌아온 그가 말했다.

“너희 어머니 부동산 사업 망해서 진 빚 다 갚아 줄게.”

“뭐라고……? 이게 진짜 보자 보자 하니까 못 하는 말이 없네. 그따위 소리는 결정이 아니라 거절을 쉽게 만들어 주고 있는 거야! 돈으로 날 사겠다 이거야? 잘나가는 스타로 사시더니 머리가 어떻게 됐니? 엄마 빚은 내가 갚을 거야.”

화가 난 선아가 씩씩거리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현관문을 향해 걸어갔다. 차준은 앉은 채로 그녀의 뒤통수를 향해 소리쳤다.

“2억 5천이나 되는 빚을 학생인 네가 무슨 수로 갚을 건데. 졸업한 뒤 금방 취직한다고 해도 평범한 회사원들에겐 감당하기엔 부담스러운 금액 아닌가?”

선아는 움찔했다. 전부 다 맞는 말이었기에 그의 말은 칼처럼 그녀의 가슴팍에 콕콕 박혔다.

“우리 집 빚이 얼마인지 어떻게 알았어? 자세하게 얘기한 적 없었는데.”

“나한테 실력 있는 변호사가 많다는 거, 몰랐어?”

“저질.”

“날 뭐라고 불러도 좋아. 지금 나가도 좋고. 하지만 집에 돌아가서 내 제안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줬으면 해. 평생 살자는 건 아니야. 이 일이 잠잠해지고 내가 제자리를 찾을 동안만 방패가 되어 줘. 부탁해.”

이제껏 본 적 없는 진지한 얼굴이었다. 선아는 화가 나서 잔뜩 인상을 구긴 채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리고 네가 걱정하는 이혼녀 딱지, 굳이 안 달아도 돼. 식만 올리자. 혼인 신고는 하지 말고. 해 봤자 우리 둘에게 좋을 일 없으니까. 계약서는 이미 준비되어 있어. 계약서에 네가 사인한 뒤 선금 1억. 계약이 끝난 뒤 1억 5천.”

선아는 차준의 말에 한마디 톡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입술이 찰싹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젠장. 그의 제안은 너무나 유혹적이었다.









1. 내 친구의 스캔들









아침에 일어나 부스스한 몰골로 컴퓨터 앞에 앉아 인터넷을 뒤적이던 선아는 까무러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검색어 1위에 올라 있는 친구의 이름을 언제나처럼 무심코 눌러 보았을 뿐이었다. 어젯밤 TV를 돌리던 중 인기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한 차준의 모습을 보았던 터였기에, ‘이번 방송에서 꽤나 활약을 했나 보군’하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본방송을 끝까지 시청하지 못한 채 잠들어 버린 걸 후회하려던 찰나, 클릭과 동시에 눈앞에 펼쳐진 수많은 자극적인 기사들에 그녀는 숨이 턱 막혀 왔다.



UFC 미들급 세계 챔피언 강차준 야밤에 밀회 현장. 상대는 남자?



“이게 다 무슨 소리야?”

선아는 서둘러 눈에 띄는 기사 제목을 클릭해 보았다. 스타들의 사생활을 파헤치기로 악명이 높은 한 언론사에서 발간된 기사에는 멀리에서 찍은 파파라치 사진들이 첨부되어 있었다.

어두운 새벽녘에 찍힌 사진은 흐릿하고 초점도 흔들린 채였다. 하지만 검은 마스크 위로 보이는 짙은 눈매며 높은 콧날, 큰 키와 긴 다리, 몸을 가린 후드티 밖으로도 선연히 보이는 날렵한 근육질 몸매. 얼핏 보아도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라도 저 남자가 강차준임을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그와 함께 찍힌 다른 남자였다. 클럽의 뒷골목으로 보이는 지저분한 골목 어귀에서 술에 취해 몸을 못 가누는 듯한 남자가 차준의 가슴에 한쪽 몸을 밀착한 채 기대고 있었다. 얼핏 보기에도 차준보다 체구가 작은 남자는 한쪽 손으로 그의 허리를 감싸 안고 귓가와 볼 가까이에 입술을 가져가기도 했다.

차준 역시 그와 거리를 두거나 밀쳐 내는 모습이 아니라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였다. 상대가 남자임을 제외한다면 누가 보더라도 연인 간의 다정한 밀담, 혹은 애정 행각을 나누는 장면으로밖엔 보이지 않았다.

말도 안 돼. 내가 10년 가까이 알아 왔던 차준이가 그럴 리가.

하지만 만에 하나……?

그럼 그동안 사귀었던 여자들은 뭐지. 전부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기 위한 위장 전술이라도 했다는 거야?

뭐에 홀리기라도 한 듯 ‘게이’라는 단어를 검색하던 선아는 평생을 살아도 사람 속은 모른다고 입버릇처럼 얘기하던 엄마의 말을 떠올렸다.

책상에 앉아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그녀는 곧장 침대로 몸을 날려 베개 밑에 놓아두었던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한창 회의가 진행 중인 진지한 분위기 속에서 울린 진동 소리에 차준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평소 중요하지 않은 전화라면 바로 거절 버튼을 누르는 그였지만, 발신인을 내려다보곤 휴대폰을 귀에 갖다 댔다.

“어.”

─너 지금 어디야?

“이 시간에 집이지 어디야.”

─지금 일어났어? 혹시 아직 안 본 거야? 차준아 잠깐, 잠깐만 일단 컴퓨터 켜지 말고 있어 봐.

선아의 호들갑에 차준은 이마를 찌푸렸다. 녀석이 이렇게 호들갑을 떠는 이유는 뻔했다. 지난 새벽에 터진 스캔들 기사를 오늘 아침에서야 확인한 모양이다. 역시나 뒷북을 잘 치는 선아다웠다.

“왜 그러는데.”

─그게 그러니까…….

차준은 적당히 그녀의 장단에 대꾸해 주며 얼버무릴 생각이었다. 지금 우거지상을 하고 방 안을 돌아다니고 있는 매니저와 임 대표를 상대하려면, 녀석에게 뭔갈 설명한다는 건 어차피 무리였다.

“그러니까?”

차준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침을 꿀꺽 삼키고 있을 선아의 얼굴을 떠올렸다. 이런, 이 심각한 상황에서 웃음이 나오려 하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