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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준은 괜스레 목을 몇 번 가다듬으며 헛기침을 하고 매니저 형의 눈치를 흘깃 살폈다. 그리고 휴대폰에 입술을 가까이 대고 속삭였다.

“오늘 강의 몇 시에 끝나?”

─어? 아, 오늘은 오후 강의까지 들어야 하니까 5시쯤이면 끝날걸?

“끝나고 연락해.”

─잠깐, 차준아. 하……. 알겠어. 어차피 알게 될 거니까. 그리고 얼굴 보기 전에 미리 말해 둘 게 있어. 난 널 믿어. 만에 하나 네가 너 자신에 대해 솔직해지고 싶다면, 그러니까 어떤 고백 같은 거 말이야. 네가 어떤 사람이든지 난 네 편이고 친구야. 앞으로도 쭉 그럴 거야. 미리 알아 뒀으면 해. 알겠지? 그럼 이따 보자.

선아의 진지함에 결국 풉, 웃음이 터져 버린 차준이 급히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고 입가를 가렸다.

“인마, 지금 웃음이 나와?”

“아, 아니. 웃는 거 아니야. 갑자기 기침이 나와서. 콜록.”

잔뜩 신경이 곤두서 있는 매니저가 쌍심지를 켜자 차준은 어설픈 연기력으로 기침하는 척 콜록거리면서 고개를 숙였다.

“네 곳이야. 방금 온 전화까지. 이번 타이틀 방어전 스폰을 약속했던 회사 중에서 대기업들이 전부 발을 빼고 있어. 이게 무슨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야, 날벼락이!”

넥타이를 풀어헤친 임 대표가 양손에 휴대폰을 쥐고 바닥에 주저앉아 허공을 향해 절망적으로 소리쳤다.

집 밖에 몰려든 기자들 탓에 차준은 한 발짝도 나갈 수 없는 상태였다. 덕분에 스캔들이 터진 새벽부터 그의 집에서 열린 대책 회의는 끝날 줄 모르고 계속되고 있었다.

한국인 최초로 UFC 미들급 챔피언 벨트를 따내고 세 번의 방어전까지 성공적으로 마친 터였다.

실력과 더불어 훤칠한 키와 조각 같은 몸매, 잘생긴 얼굴까지 흠잡을 곳 없었던 그는 데뷔 직후부터 엄청난 팬심을 사로잡으며 인기 선수로 자리매김해 왔다. 챔피언 벨트를 손에 쥔 이후에는 세계적인 스포츠 스타 반열에 올랐던 차준이었다.

승승장구하던 그에게 이 스캔들은 너무도 치명적이었다. 배우나 가수 등의 엔터테이너라면 몰라도, 강한 남성미를 뿜어내야 하는 스포츠 스타에게 동성 스캔들은 사망 선고나 마찬가지였다.

그를 선망하는 수많은 팬을 실망시킨 것은 물론이고 빠른 시일 내에 확실한 대책을 내지 않으면 천문학적인 돈과 선수로서의 커리어도 잃게 될 위기에 처할 것이다.

제일 대표적인 선례로, 이전엔 커밍아웃을 한 미식축구 선수가 배신감을 느낀 남성 팬들에게 살해를 당한 사건도 있었다. 차준에게 이 스캔들은 자칫 목숨까지 위협받을 수 있을 만큼 심각한 사건이었다.

“기자 회견이라도 할까? 내가 진지하게 말한다면 팬들은 이해해 줄 거야. 그 터무니없는 스캔들 자체부터 사실이 아닌데.”

차준의 말에 박 변호사가 고개를 저었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어떻게 보이느냐가 문제죠. 무엇보다 국민들에게 기자 회견장에서 무슨 수로 강차준 씨의 성 정체성을 납득시킬 겁니까. 속된 말로 카메라 앞에서 여성과 성관계를 가질 것도 아닌데 말이죠. 과격하게 말씀드려 죄송합니다만, 그만큼 이런 종류의 스캔들은 사실 여부를 증명하기도 까다롭고, 방법도 없다는 뜻이죠.”

박 변호사는 어느 상황에서건 당황하거나 이성을 잃는 법이 없다. 이번에도 그는 냉정한 지적으로 차준을 비롯하여 방 안의 사람들이 판단력을 흐리지 않게 잡아 주고 있었다.

“아, 돌아 버리겠네. 이대로 선수 인생 종치는 건가.”

“방법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죠.”

절망적인 한숨을 내쉬고 있는 차준에게 박 변호사가 안경 너머 강렬한 시선을 보냈다.

“어떤 방법이지?”

“아주 까다롭긴 하지만…….”

“뜸 들이지 말고 빨리 말해. 지금 물불 가릴 때가 아니야.”

“결혼.”

“결혼?”

손톱을 질겅거리던 임 대표와 멍하니 창밖만 바라보던 매니저, 그리고 차준까지. 방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박 변호사에게 향했다.

일순 주목을 받자 박 변호사의 날카로운 눈매가 더욱 반짝였다.

“네, 결혼. 참한 아가씨를 하나 구해서 시끄러운 스캔들이 조금 잠잠해질 때 즈음 결혼 발표를 하는 겁니다.”

“아니, 박 변. 결혼이라니 너무 나갔잖아. 그건 내 인생이 걸린 문제라고.”

“지금 상황은 인생이 걸린 문제가 아니고요?”

“그것도 맞긴 하지만, 애초에 애인도 없는데 무슨 결혼을 해. 결혼할 여자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차준이 실소를 터트렸다. 냉철한 지략가인 박 변의 머리가 어떻게 되기라도 한 것 같았다. 저런 애들 장난 같은 소리를 방법이라고 떠들어 댈 줄이야.

하지만 박 변호사의 태도는 처음과 다름없이 진지했다. 차준의 실소에도 그는 표정 한번 바꾸지 않고 말을 이어 나갔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닙니다. 결혼은 인륜지대사니까요. 허나 잘 생각해 보세요. 지금 강차준 씨는 이제껏 쌓아 온 인생이 송두리째 날아갈 운명의 기로에 서 있어요. 시합을 후원해 줄 스폰서들까지 떨어져 나간 상태에서 운동을 지속할 수 있을까요? 등 돌린 팬들이 적이 돼서 무슨 짓을 당할지도 모릅니다. 이 바닥에서 동성 스캔들이 얼마나 위험한지는 외국 선수들의 선례를 통해서도 알려졌으니 강 선수가 심각성을 모르진 않을 겁니다.”

박 변호사의 말에 차준의 얼굴에 더욱 그늘이 덮였다. 그가 말을 이어 나갔다.

“요즘 세상에 결혼하고 살다가 안 맞으면 이혼쯤 일도 아니잖아요? 일단 커리어를 되찾고 나면 그 정도 흠이야 흠도 아닙니다. 차준 씨 정도의 재력이라면 이 쇼에 동참해 줄 사람 구하는 건 그리 어렵지도 않죠.”

“그래. 박 변 말도 일리는 있는데, 가장 큰 문제가 있잖아. 박 변이 말한 참한 여자를 어디서 구하냐고. 내 주변에 있는 애들 알잖아. 어떤 타입들인지.”

“강차준 씨가 그동안 만나온 로드걸이나 레이싱걸, 모델, 연예인들은 절대로 안 됩니다. 물론 적은 액수로도 제안에 응할 여자는 당장이라도 줄 서겠지만, 국민들에게 반감만 살 뿐이거든요.”

그럴 듯한 논리에 세 사람은 이어지는 박 변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평범한 여자, 세계적인 스타인 강차준의 아내 될 여자가 의외로 수수하고 평범한 여자라면 국민들은 친근감과 신뢰감을 동시에 느끼게 될 겁니다.”

“그런 여자가 내 주변에 없다니까?”

차준이 얼굴을 찡그리며 손바닥으로 이마를 감싸 쥐었다. 아무리 떠올려도 대중들의 반감을 사지 않고 스캔들까지 잠재울 만큼의 좋은 이미지를 가진 신붓감은 그의 주변에 없었다.

“가까운 곳에 적당한 아가씨가 있을 텐데요. 회사에도 자주 들렀던 차준 씨 동창분. 키가 좀 작고 귀엽게 생긴…… 이름이 뭐라고 했더라.”

“류선아?”

“아, 네. 그분은 어떠세요? 사실 전 미리부터 그분을 염두에 두고 생각해 낸 해결책이라서요.”

“내가 결혼하잖다고 걔가 잘도 덥석 하겠다.”

박 변호사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올랐다. 차준의 진열장에서 반쯤 남은 위스키 한 병을 꺼내 두 개의 빈 잔에 따른 박 변이 한 잔을 그에게 건넸다.

“시도도 안 해 보고 포기하는 건 강차준 선수의 방법이 아닐 텐데요.”

박 변호사의 도발에 차준의 미간이 깊게 파였다.

승부욕 강한 차준의 다음 행동은 이미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계획이 정해지면 실천한다. 원하는 것은 얻고 마는 그의 사전에 포기란 없었다.

위스키 한 잔을 마시고 잠시 생각해 보겠다며 혼자 방으로 올라간 차준은 마음속 저편에 잠겨 있던 기억들을 꺼내 놓았다. 인생이란 어찌 보면 참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학교 입학식 날 처음 보았던 귀여운 여자아이.

그 아이와 같은 반이 된 걸 알았을 때 설레었던 마음은 그녀와 친구로 지내기로 결심했던 그때부터 깊숙이 묻어 두었었다.

차준은 자신을 편하게 대하는 선아의 모습이 더 좋았다. 숫기 없고 소심했던 중학교 1학년 소년은 거절당할까 두려워 차라리 소녀의 친구가 되는 쪽을 택했다.

“첫사랑과의 결혼이라…….”

침대에 팔을 괴고 누워 천장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던 차준이 작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 * *



차준의 제안은 확실히 달콤했다.

동시에 두려웠다.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변화시킬 만한 결정을 그녀는 지금 내리려 한다.

“엄마, 허리는 좀 괜찮아? 집에 있을 땐 좀 쉬라니까.”

“괜찮아, 금방 끝나. 아무리 힘들어도 청소는 하고 살아야지.”

선아는 밤늦게까지 식당일을 마치고 돌아와 거실 바닥을 닦고 있는 엄마에게 다가가 걸레를 빼앗아 들었다.

“내가 할게. 엄만 소파에 앉아 있어.”

억지로 엄마를 소파에 앉힌 선아는 대신 바닥 청소를 마치고 엄마의 옆에 슬그머니 다가가 앉아 어깨를 주물렀다.

“얘가 오늘따라 왜 이래? 너 엄마한테 뭐 부탁할 거 있니?”

“아니, 그냥…….”

무심하게 말하면서도 내심 기분이 좋은지 엄마는 옅게 미소를 지었다.

고된 일로 딱딱하게 뭉친 어깨를 선아는 손이 뻐근해지도록 주무르고, 또 주물렀다. 거칠어진 엄마의 살결과 딱딱한 어깨가 그녀의 가슴속을 아프게 짓눌렀다.

선아가 고등학교 때 빚을 내 시작했던 부동산 사업이 망한 뒤 엄마는 지금껏 본인을 죄인이다 말씀하시며 살아오셨다. 아빠의 월급만으로는 갑작스레 얻게 된 큰 빚을 갚을 수 없었기에 몇 년간 안 해 본 일없이 모질게 몸을 혹사시켰다.

고3인 남동생과 대학 졸업반의 취업 준비생인 선아. 운 좋게 금방 취업을 하더라도 선아는 가족의 빚은커녕 지금껏 받아 온 학자금 대출을 갚는 일만으로도 벅찬 상황이었다.

한참을 말없이 어깨를 주무르던 선아가 살며시 말을 건넸다.

“있잖아, 엄마……. 나 결혼할까?”

“뭐!?”

“아! 귀 아파. 무슨 소리를 그렇게 크게 질러.”

“무슨 소리야? 겨, 결혼? 너 남자 있었니?”

“엄마! 일단 목소리 좀 낮춰요. 우리 집 방음도 잘 안 되는데 옆집까지 다 들리겠어.”

엄마는 어깨에 올려진 선아의 손을 내리고 아예 몸을 돌려 앉아 따져 물었다.

“너 결혼할 남자가 있었어? 근데 왜 여태껏 엄마한테 한마디도 안 했니!”

“하겠다는 게 아니라 만약에 내가 결혼하면 어떨 것 같냐고 물어본 거예요. 엄마도 오바는.”

“얘 거짓말하는 것 좀 봐. 내가 내 자식 거짓말하는 거도 모르겠어? 누구야. 어떤 놈이야? 나이는 몇 살이고, 걔가 너보고 결혼하자고 하디? 설마 학생은 아니지?”

“아, 엄마 잠깐만!”

엄마의 속사포 질문 공세에 선아는 눈을 한껏 찡그리고 귀를 틀어막았다.

“류선아, 너 빨리 말 안 해?”

선아가 귀를 막자 엄마가 그녀의 팔을 냅다 꼬집었다.

“악, 아파! 강차준! 강차준이야!”

“어머, 얘. 차준이라면 어릴 때 너 쫄래쫄래 따라다니던 꼬맹이 아니니? 그 뭐 요즘 TV에서 싸움 잘하는 거로 유명한 애.”

“엄마…… 싸움 잘하는 거로 유명한 애가 아니라, 격투기 선수예요.”

엄마가 다시 속사포 질문을 쏟아 내려는데 난데없이 부엌 쪽에서 큭큭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