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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시작은 달콤하게
유진으로 말할 것 같으면, 나름 블로거들 사이에서 분위기 좋다고 유명한 카페의 사장이다. 때문에 여기서 얼굴 모를 작가 나부랭이 따위를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
그러니까, 부탁이라곤 도통 할 줄 모르는 제 친구가 아침 일찍 전화하지 않았다면 말이다.
띠리링.
막 18번째 초인종을 누르려는 찰나, 문이 열렸다. 유진의 앞이 아닌 뒤에서.
“그 집 지금 사람 없어요. 은석이 누나 친구예요? 그 누나, 친구 없는데.”
“안녕, 학생. 친구는 아니고, 담당 편집자가 일이 있어서 대신 왔어.”
멀뚱멀뚱 유진을 쳐다보던 소년은 개나리색 슬리퍼를 질질 끌고 나오더니 유진이 그렇게 두드리던 문 앞에 섰다. 띡띡띡, 몇 번 숫자 누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열린다.
학생, 여긴 이웃 간의 정이 참으로 두텁구나.
“들어오세요. 은석이 누나는 지금 병원 갔어요. 보통 이 시간이면 도착하는데 오늘은 좀 늦네요.”
유진은 아아, 하며 소년을 따라 집 안으로 들어갔다. 현관에서 신발을 벗고 오른쪽으로 꺾는 복도식 구조였다. 복도를 따라 세 개의 문을 지나니 거실 겸 주방이 나온다. 좀 더 구경을 하고 싶어 어슬렁거리던 찰나, 다시 한번 현관문이 열리고는.
“야, 꼬마! 너 내가 집에 막 들어오지 말라 했지!”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보이는 조그맣고 하얀 얼굴. 저 조그만 얼굴에 눈, 코, 입이 다 들어가는구나. 유진은 으레 남자들이 그렇듯 얼굴에 대한 감상평을 속으로 삼키고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성준이 친구?”
어리게 봐 줘서 감사합니다. 제가 좀 귀엽죠.
“희찬이 부탁으로 원고 받으러 왔습니다.”
“아, 희찬이 친구구나. 문자 미리 받았어요.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요.”
잠시만요, 하며 그녀는 소년을 향해 고개를 돌리더니 나긋나긋하게 말한다.
“꼬마, 넌 너희 집 가. 한 번만 더 번호 누르고 들어오면 네 손가락을 다 부러트릴 거야.”
유진은 방금 본인의 귀가 무슨 말을 들었는지 의심했다. 맙소사. 저 예쁜 얼굴로 무슨 말을 한 거야, 지금? 게다가 마른 몸에서 무슨 힘이 그렇게 나오는지 왁왁하는 소년을 현관 앞까지 밀어내고는 냉정하게 문을 꽝 닫았다.
“누나야말로 밥때 되면 찾아오지 마! 현관문 번호는 누나가 더 많이 누르면서! 번호 바꿔서 형한테만 알려 줄 거야!”
다소 억울한 듯 소리치며 문을 한 번 차더니 금방 조용해졌다. 본인의 집으로 들어갔나 보다. 방금 소년이 한 말이 신경에 거슬렸는지 여자는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손가락이 움찔거리는 것이 상당히 위협스러웠다.
엄마, 나 이 여자 무서워. 장담하건대 내가 없었으면 저 소년은 오늘 형을 보지 못했을 거다.
“죄송해요. 좀 시끄러웠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여자는 유진을 보며 말했다.
“아니라고 부정은 못 하겠네요.”
유진이 솔직히 대답하니 여자가 웃으며 거실로 향했다. 소파에 앉아 있으란 말을 하고는 부엌 찬장에서 커피 믹스를 두 개 꺼낸다.
아, 커피는 좀.
이래봬도 카페를 운영하다 보니 유진의 커피 입맛은 상당히 까다롭다. 하지만 이미 포트에 물을 올리는 모양새를 보니 다른 선택지가 있을 것 같진 않았다.
까짓것 마시지 뭐.
유진이 속으로 결단을 내리는 순간, 난감한 질문이 훅 들어왔다.
“제 책 읽어 보셨어요?”
“……죄송해요. 책과는 친하질 않아서.”
“죄송할 것까지야.”
여자는 가볍게 웃더니 커피가 담긴 컵을 유진의 앞에 내려놓고는 방에 들어가 노트북을 들고 다시 나왔다.
“희찬이 친구면 저보다 두 살 어리겠네요.”
“네. 스물일곱이에요.”
“그렇구나.”
여자는 그저 의례적으로 물어본 듯 노트북에 집중한다. 키보드를 따닥따닥, 마우스를 딸깍딸깍. 몇 번 그렇게 두드리더니 상큼한 얼굴로 노트북을 종료시켰다.
“희찬이 메일로 원고 보냈어요. 걔도 참. 전화로 하면 될 걸.”
본인이 시간을 잘 지켰으면 내 망할 친구가 저를 보내 재촉할 일도 없었을 텐데요.
유진은 이런 말은 속으로만 삼키고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는 본인 몫의 커피를 한 모금 마시더니,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오늘도 물 조절은 실패네요. 밍밍할 테니 안 마셔도 돼요.”
“에이, 내준 성의가 있는데 그럼 안 되죠.”
솔직히 유진은 밍밍하든 달든 상관이 없었다. 어차피 본인 입맛엔 맞지 않은 액체이니. 커피가 식을 때까지 입에도 대지 않던 유진은 컵 위로 연기가 더는 오르지 않자 한 번에 들이켰다. 신기하듯 저를 보는 여자의 시선에 어깨를 으쓱하고는 말했다.
“맛있네요, 뭐.”
한 방울도 남지 않은 컵을 받아 든 여자는 유진의 대답이 맘에 들었는지 생긋 웃는다. 유진은 카페를 오래 비워 둘 수 없어 이내 소파에서 일어났다.
“이제 그만 가 봐야겠네요.”
여자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현관까지 유진의 뒤를 졸졸 따라 나왔다. 신발을 신고 돌아선 유진이 인사를 하려 하자 먼저 질문이 날아든다.
“그래서 희찬이 친구분, 이름이 뭐예요?”
그 말에 빙긋 웃은 유진이 문고리를 잡으며 말했다.
“최유진이에요.”
유진이 현관문을 열고 한 발을 내딛다가 다시 은석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이번엔 조금 더 활짝.
“이 건물에서 나와서 왼쪽으로 한 블록 걸어가면 빨간 문 카페가 있어요. 나중에 한 번 놀러 오세요. 제가 진짜 맛있는 커피 드릴게요.”
유진은 여자에게 인사를 하고는 집을 나섰다.
* * *
놀러 오란다고 이렇게 빠른 행동력을 보일 줄이야.
우리의 재회는 다음 날 이루어졌다. 출근 시간이 지나 한가한 평일 오전, 여자는 노트북을 옆구리에 끼고 카페에 들어왔다.
“어서 오……. 어라? 작가님 오셨네요.”
여자는 건넨 말이 들리지도 않는지 메뉴판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우리 가게 메뉴판에 그렇게 볼 게 많던가. 그러더니 대뜸 입을 열었다.
“맛있는 커피요. 기분 좋아지게 달달한 걸로.”
드디어 유진과 눈을 맞추고 주문을 한다 싶더니 메뉴판에 적히지 않은 것을 말했다. 가까이서 마주 보니 하얀 얼굴이 더욱 맑게 빛나는 것 같아 조금 예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음에 튀어나온 말은 전혀 예쁘지 않았다.
“뭐라고요?”
“말 놔도 되냐고요. 제가 두 살 더 많잖아요. 싫은가?”
그래도 어쩔 수 없단 듯이 여자는 말을 이었다.
“싫으면 너도 반말해. 난 관대한 사람이니까. 은석이 누나라 불러도 돼.”
딱딱한 호칭은 딱딱한 분위기를 만들고, 그럼 딱딱한 글이 나온다며 나름대로의 논리를 펼치고 웃는다. 유진은 할 말을 잃어 여자를 빤히 봤다.
지금 나, 뭔가 되게 휘둘리는 느낌이야.
“앞으로 자주 올 거야. 어쩌면 매일. 여기 맘에 들어.”
아, 저희 카페가 맘에 드셨군요. 근데 그거랑 우리가 말 놓는 거랑 무슨 관계가?
방긋방긋 웃는 얼굴과는 반대로 상당히 직설적인 말투다. 하긴, 어제 고등학생은 족히 될 법한 남자애한테 꼬마라고 칭한 것만 봐도 알 만하다. 유진은 간만에 투쟁 욕구가 불타올랐다.
“야.”
유진의 머릿속엔 이쪽도 한 방 날려 주마, 라는 기특한 생각이 들었다. 막상 보는 앞에서 야, 라고 불릴 거라고 예상 못 했는지 여자에게 잠시 버퍼링이 걸렸다. 여기서 주도권을 놓치면 안 된다는 생각에 유진은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맘에 드는 자리에 앉아 있어. 커피 가져다줄게. 달고 맛있는 걸로.”
버퍼링에서 벗어난 여자가 유진을 보고 귀엽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그래, 착하네.”
그리고 유진은 또다시 생각했다.
아, 예쁘네.
* * *
이은석. 29살. 국내 로맨스 소설의 선두 주자. 2년 전, 데뷔작 <요정의 언어>로 화려하게 입문. 현재 <그대의 심장이 멈출 때까지> 연재 중.
이 유명 작가님이 유진의 카페로 출근 도장을 찍은 지 벌써 한 달이 지났다. 그 정도는 서로를 알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유진아, 나 커피 좀.”
아침잠이 많다는 점. 커피도 좋아하지만, 핫초코도 즐겨 마신다는 점. 얌전한 얼굴과 다르게 성격이 꽤 못됐다는 점. 그리고 주기적으로 병원에 간다는 점까지.
어느 날은 어디가 안 좋아서 병원을 다니냐 물었더니 난감한 듯 웃기에 굳이 알지 않기로 했다. 그날의 미소는 한 달간 봤던 은석의 웃음 중 가장 못생겼었다. 눈썹과 눈꼬리가 축 처져서는.
“이거 마셔 봐.”
은석은 내려놓은 커피를 보더니 이게 뭔가 하는 눈빛으로 유진을 올려다봤다.
일단 마셔 보렴. 너를 위한 특별 메뉴이니.
유진은 이 모든 뜻을 담은 제스처를 보이고 맞은편에 앉았다.
“매일 핫초코와 아메리카노 사이에서 고민하는 널 위해 만들었어. 걔 이름은 초코 라테야.”
“누나라 안 할래? 그리고 너, 네이밍 센스 저급해.”
은석은 한심한 언어 능력이라며 비웃었다.
“얼씨구, 마시기 싫나 봐?”
유진이 곧바로 일어나 컵을 다시 들려 하자 재빨리 컵을 양손으로 잡는다.
“미안해.”
사과도 참 빠르다. 유진은 봐준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도록 한숨을 한 번 내쉬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럼 고귀하신 작가님, 그 아이에게 센스 있는 이름을 하사해 주시지요.”
“뭐?”
당황한 듯 저를 쳐다보는 이은석. 뭐해. 얼른 생각해 내지 않고.
유진은 고개로 컵을 한 번 가리키는 것으로 재촉했다. 졸지에 작가의 센스 수준을 선보여야 하는 은석은 오른손 중지 손톱으로 엄지 살을 살살 긁는다.
아, 나 저거 알아. 저건 생각이 막혔을 때 이은석의 버릇.
1분 남짓을 생각하던 이은석은 슬쩍 유진의 눈치를 한 번 보더니 우물쭈물 입을 열었다.
“초코라……유?”
이 여자야. 그래도 글 쓰는 게 직업인데 좀 더 기발해 보지 그랬니.
유진은 여기서 제대로 비웃어 줘야 할지 정색해야 할지 헷갈려 반응을 보일 타이밍을 놓쳤다. 본인도 민망한 듯 다시 노트북에 집중한다. 아니, 집중한 척을 했다.
귀여우니까 이 오빠가 한 번 져 줄게.
“좋네, 초코라유. 그걸로 하자. 어차피 너만 마실 건데 뭐.”
실실 웃으며 말하자 저를 가볍게 흘겨보며 누나, 라고 고쳐 준다.
참 질기다, 너도. 백날 고쳐 줘 봐라. 내가 널 누나라고 부를 날이 오나. 자, 그럼 우리의 2차전을 시작해 볼까.
어깨를 으쓱하며 유진은 시계를 봤다.
“그나저나 조금 있으면 희찬이 올 거야. 6시쯤 온다 했으니 거의 도착했겠네.”
혼자 중얼거리듯 덧붙이며 유진이 은석의 눈치를 슬쩍 봤다. 아니나 다를까, 손으로 재빨리 노트북을 종료시키며 발로는 사정없이 유진의 정강이를 깐다.
“아! 아파! 아프다고, 이 기지배야!!”
“내가 오늘 아침 10시부터 여기 죽치고 앉아 있었는데 넌 그게 이제 생각났어? 아무래도 네 머리는 어떤 게 중요한지 우선순위를 모르나 보네. 그거 왜 들고 다녀, 무겁게.”
첫 만남 때 유진을 멘붕 오게 했던 은석의 독설이 간만에 빛을 발한다. 하지만 완벽한 자신의 승리를 예감한 유진은 까짓것 들어주마, 란 마음으로 여유롭게 은석을 바라봤다. 가방을 들고 막 일어나려는 은석의 뒤에 서 있는 인영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왔어, 친구?”
유진이 자신의 뒤를 향해 손을 살랑살랑 흔들며 인사하자 일어나려던 은석의 행동이 딱 멈춘다. 은석에게 호환 마마보다 무서울 그의 친구는 돌처럼 굳은 그녀를 지나쳐 인사를 건넸다.
“나 아메리카노 한 잔.”
오케이.
산뜻하게 주문을 받은 유진이 일어난 자리에 희찬이 앉았다.
“작가님, 우리 참 오랜만이죠. 그래도 내가 작가님 담당인데 얼마 만에 얼굴 보는 것인지 모르겠네.”
은석은 희찬의 얼굴을 보지도 않고 주섬주섬 노트북을 다시 꺼낸다.
오랜만이야, 희찬아. 인사도 덧붙이며.
“메일로 보내 준 <그심장> 1부 읽어 봤어요. 전화는 왜 안 받으세요?”
“그냥.”
우와, 지금 쟤 완전 뻔뻔했어.
희찬도 할 말을 잃었는지 한동안 둘 사이에는 침묵만 흘렀다. 별수 없다는 듯 가볍게 한숨을 내쉰 희찬은 가방을 열어 노트를 꺼냈다.
“재밌던데요. 지금 교정 들어갔어요. 표지 디자인으로 생각해 둔 거 있어요?”
잠시 고민하던 은석은 제 앞에 다 식어 가는 컵을 만지작거렸다.
“그을쎄에.”
어울리지 않게 말꼬리를 길게 늘린다. 생각할 시간을 벌려는 속셈이었다. 은석의 중지 손톱이 다시 한번 엄지 위를 살살 긁는다. 꽤 침묵이 흘렀는데도 희찬은 재촉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은 희찬에겐 아주 익숙했다.
이윽고 생각을 정리한 듯 은석의 입이 열렸다.
“화려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바탕은 어두운 색이 좋고, 제목은 휘갈긴 듯 두 줄로.”
유진으로 말할 것 같으면, 나름 블로거들 사이에서 분위기 좋다고 유명한 카페의 사장이다. 때문에 여기서 얼굴 모를 작가 나부랭이 따위를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
그러니까, 부탁이라곤 도통 할 줄 모르는 제 친구가 아침 일찍 전화하지 않았다면 말이다.
띠리링.
막 18번째 초인종을 누르려는 찰나, 문이 열렸다. 유진의 앞이 아닌 뒤에서.
“그 집 지금 사람 없어요. 은석이 누나 친구예요? 그 누나, 친구 없는데.”
“안녕, 학생. 친구는 아니고, 담당 편집자가 일이 있어서 대신 왔어.”
멀뚱멀뚱 유진을 쳐다보던 소년은 개나리색 슬리퍼를 질질 끌고 나오더니 유진이 그렇게 두드리던 문 앞에 섰다. 띡띡띡, 몇 번 숫자 누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열린다.
학생, 여긴 이웃 간의 정이 참으로 두텁구나.
“들어오세요. 은석이 누나는 지금 병원 갔어요. 보통 이 시간이면 도착하는데 오늘은 좀 늦네요.”
유진은 아아, 하며 소년을 따라 집 안으로 들어갔다. 현관에서 신발을 벗고 오른쪽으로 꺾는 복도식 구조였다. 복도를 따라 세 개의 문을 지나니 거실 겸 주방이 나온다. 좀 더 구경을 하고 싶어 어슬렁거리던 찰나, 다시 한번 현관문이 열리고는.
“야, 꼬마! 너 내가 집에 막 들어오지 말라 했지!”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보이는 조그맣고 하얀 얼굴. 저 조그만 얼굴에 눈, 코, 입이 다 들어가는구나. 유진은 으레 남자들이 그렇듯 얼굴에 대한 감상평을 속으로 삼키고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성준이 친구?”
어리게 봐 줘서 감사합니다. 제가 좀 귀엽죠.
“희찬이 부탁으로 원고 받으러 왔습니다.”
“아, 희찬이 친구구나. 문자 미리 받았어요.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요.”
잠시만요, 하며 그녀는 소년을 향해 고개를 돌리더니 나긋나긋하게 말한다.
“꼬마, 넌 너희 집 가. 한 번만 더 번호 누르고 들어오면 네 손가락을 다 부러트릴 거야.”
유진은 방금 본인의 귀가 무슨 말을 들었는지 의심했다. 맙소사. 저 예쁜 얼굴로 무슨 말을 한 거야, 지금? 게다가 마른 몸에서 무슨 힘이 그렇게 나오는지 왁왁하는 소년을 현관 앞까지 밀어내고는 냉정하게 문을 꽝 닫았다.
“누나야말로 밥때 되면 찾아오지 마! 현관문 번호는 누나가 더 많이 누르면서! 번호 바꿔서 형한테만 알려 줄 거야!”
다소 억울한 듯 소리치며 문을 한 번 차더니 금방 조용해졌다. 본인의 집으로 들어갔나 보다. 방금 소년이 한 말이 신경에 거슬렸는지 여자는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손가락이 움찔거리는 것이 상당히 위협스러웠다.
엄마, 나 이 여자 무서워. 장담하건대 내가 없었으면 저 소년은 오늘 형을 보지 못했을 거다.
“죄송해요. 좀 시끄러웠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여자는 유진을 보며 말했다.
“아니라고 부정은 못 하겠네요.”
유진이 솔직히 대답하니 여자가 웃으며 거실로 향했다. 소파에 앉아 있으란 말을 하고는 부엌 찬장에서 커피 믹스를 두 개 꺼낸다.
아, 커피는 좀.
이래봬도 카페를 운영하다 보니 유진의 커피 입맛은 상당히 까다롭다. 하지만 이미 포트에 물을 올리는 모양새를 보니 다른 선택지가 있을 것 같진 않았다.
까짓것 마시지 뭐.
유진이 속으로 결단을 내리는 순간, 난감한 질문이 훅 들어왔다.
“제 책 읽어 보셨어요?”
“……죄송해요. 책과는 친하질 않아서.”
“죄송할 것까지야.”
여자는 가볍게 웃더니 커피가 담긴 컵을 유진의 앞에 내려놓고는 방에 들어가 노트북을 들고 다시 나왔다.
“희찬이 친구면 저보다 두 살 어리겠네요.”
“네. 스물일곱이에요.”
“그렇구나.”
여자는 그저 의례적으로 물어본 듯 노트북에 집중한다. 키보드를 따닥따닥, 마우스를 딸깍딸깍. 몇 번 그렇게 두드리더니 상큼한 얼굴로 노트북을 종료시켰다.
“희찬이 메일로 원고 보냈어요. 걔도 참. 전화로 하면 될 걸.”
본인이 시간을 잘 지켰으면 내 망할 친구가 저를 보내 재촉할 일도 없었을 텐데요.
유진은 이런 말은 속으로만 삼키고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는 본인 몫의 커피를 한 모금 마시더니,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오늘도 물 조절은 실패네요. 밍밍할 테니 안 마셔도 돼요.”
“에이, 내준 성의가 있는데 그럼 안 되죠.”
솔직히 유진은 밍밍하든 달든 상관이 없었다. 어차피 본인 입맛엔 맞지 않은 액체이니. 커피가 식을 때까지 입에도 대지 않던 유진은 컵 위로 연기가 더는 오르지 않자 한 번에 들이켰다. 신기하듯 저를 보는 여자의 시선에 어깨를 으쓱하고는 말했다.
“맛있네요, 뭐.”
한 방울도 남지 않은 컵을 받아 든 여자는 유진의 대답이 맘에 들었는지 생긋 웃는다. 유진은 카페를 오래 비워 둘 수 없어 이내 소파에서 일어났다.
“이제 그만 가 봐야겠네요.”
여자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현관까지 유진의 뒤를 졸졸 따라 나왔다. 신발을 신고 돌아선 유진이 인사를 하려 하자 먼저 질문이 날아든다.
“그래서 희찬이 친구분, 이름이 뭐예요?”
그 말에 빙긋 웃은 유진이 문고리를 잡으며 말했다.
“최유진이에요.”
유진이 현관문을 열고 한 발을 내딛다가 다시 은석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이번엔 조금 더 활짝.
“이 건물에서 나와서 왼쪽으로 한 블록 걸어가면 빨간 문 카페가 있어요. 나중에 한 번 놀러 오세요. 제가 진짜 맛있는 커피 드릴게요.”
유진은 여자에게 인사를 하고는 집을 나섰다.
* * *
놀러 오란다고 이렇게 빠른 행동력을 보일 줄이야.
우리의 재회는 다음 날 이루어졌다. 출근 시간이 지나 한가한 평일 오전, 여자는 노트북을 옆구리에 끼고 카페에 들어왔다.
“어서 오……. 어라? 작가님 오셨네요.”
여자는 건넨 말이 들리지도 않는지 메뉴판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우리 가게 메뉴판에 그렇게 볼 게 많던가. 그러더니 대뜸 입을 열었다.
“맛있는 커피요. 기분 좋아지게 달달한 걸로.”
드디어 유진과 눈을 맞추고 주문을 한다 싶더니 메뉴판에 적히지 않은 것을 말했다. 가까이서 마주 보니 하얀 얼굴이 더욱 맑게 빛나는 것 같아 조금 예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음에 튀어나온 말은 전혀 예쁘지 않았다.
“뭐라고요?”
“말 놔도 되냐고요. 제가 두 살 더 많잖아요. 싫은가?”
그래도 어쩔 수 없단 듯이 여자는 말을 이었다.
“싫으면 너도 반말해. 난 관대한 사람이니까. 은석이 누나라 불러도 돼.”
딱딱한 호칭은 딱딱한 분위기를 만들고, 그럼 딱딱한 글이 나온다며 나름대로의 논리를 펼치고 웃는다. 유진은 할 말을 잃어 여자를 빤히 봤다.
지금 나, 뭔가 되게 휘둘리는 느낌이야.
“앞으로 자주 올 거야. 어쩌면 매일. 여기 맘에 들어.”
아, 저희 카페가 맘에 드셨군요. 근데 그거랑 우리가 말 놓는 거랑 무슨 관계가?
방긋방긋 웃는 얼굴과는 반대로 상당히 직설적인 말투다. 하긴, 어제 고등학생은 족히 될 법한 남자애한테 꼬마라고 칭한 것만 봐도 알 만하다. 유진은 간만에 투쟁 욕구가 불타올랐다.
“야.”
유진의 머릿속엔 이쪽도 한 방 날려 주마, 라는 기특한 생각이 들었다. 막상 보는 앞에서 야, 라고 불릴 거라고 예상 못 했는지 여자에게 잠시 버퍼링이 걸렸다. 여기서 주도권을 놓치면 안 된다는 생각에 유진은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맘에 드는 자리에 앉아 있어. 커피 가져다줄게. 달고 맛있는 걸로.”
버퍼링에서 벗어난 여자가 유진을 보고 귀엽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그래, 착하네.”
그리고 유진은 또다시 생각했다.
아, 예쁘네.
* * *
이은석. 29살. 국내 로맨스 소설의 선두 주자. 2년 전, 데뷔작 <요정의 언어>로 화려하게 입문. 현재 <그대의 심장이 멈출 때까지> 연재 중.
이 유명 작가님이 유진의 카페로 출근 도장을 찍은 지 벌써 한 달이 지났다. 그 정도는 서로를 알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유진아, 나 커피 좀.”
아침잠이 많다는 점. 커피도 좋아하지만, 핫초코도 즐겨 마신다는 점. 얌전한 얼굴과 다르게 성격이 꽤 못됐다는 점. 그리고 주기적으로 병원에 간다는 점까지.
어느 날은 어디가 안 좋아서 병원을 다니냐 물었더니 난감한 듯 웃기에 굳이 알지 않기로 했다. 그날의 미소는 한 달간 봤던 은석의 웃음 중 가장 못생겼었다. 눈썹과 눈꼬리가 축 처져서는.
“이거 마셔 봐.”
은석은 내려놓은 커피를 보더니 이게 뭔가 하는 눈빛으로 유진을 올려다봤다.
일단 마셔 보렴. 너를 위한 특별 메뉴이니.
유진은 이 모든 뜻을 담은 제스처를 보이고 맞은편에 앉았다.
“매일 핫초코와 아메리카노 사이에서 고민하는 널 위해 만들었어. 걔 이름은 초코 라테야.”
“누나라 안 할래? 그리고 너, 네이밍 센스 저급해.”
은석은 한심한 언어 능력이라며 비웃었다.
“얼씨구, 마시기 싫나 봐?”
유진이 곧바로 일어나 컵을 다시 들려 하자 재빨리 컵을 양손으로 잡는다.
“미안해.”
사과도 참 빠르다. 유진은 봐준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도록 한숨을 한 번 내쉬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럼 고귀하신 작가님, 그 아이에게 센스 있는 이름을 하사해 주시지요.”
“뭐?”
당황한 듯 저를 쳐다보는 이은석. 뭐해. 얼른 생각해 내지 않고.
유진은 고개로 컵을 한 번 가리키는 것으로 재촉했다. 졸지에 작가의 센스 수준을 선보여야 하는 은석은 오른손 중지 손톱으로 엄지 살을 살살 긁는다.
아, 나 저거 알아. 저건 생각이 막혔을 때 이은석의 버릇.
1분 남짓을 생각하던 이은석은 슬쩍 유진의 눈치를 한 번 보더니 우물쭈물 입을 열었다.
“초코라……유?”
이 여자야. 그래도 글 쓰는 게 직업인데 좀 더 기발해 보지 그랬니.
유진은 여기서 제대로 비웃어 줘야 할지 정색해야 할지 헷갈려 반응을 보일 타이밍을 놓쳤다. 본인도 민망한 듯 다시 노트북에 집중한다. 아니, 집중한 척을 했다.
귀여우니까 이 오빠가 한 번 져 줄게.
“좋네, 초코라유. 그걸로 하자. 어차피 너만 마실 건데 뭐.”
실실 웃으며 말하자 저를 가볍게 흘겨보며 누나, 라고 고쳐 준다.
참 질기다, 너도. 백날 고쳐 줘 봐라. 내가 널 누나라고 부를 날이 오나. 자, 그럼 우리의 2차전을 시작해 볼까.
어깨를 으쓱하며 유진은 시계를 봤다.
“그나저나 조금 있으면 희찬이 올 거야. 6시쯤 온다 했으니 거의 도착했겠네.”
혼자 중얼거리듯 덧붙이며 유진이 은석의 눈치를 슬쩍 봤다. 아니나 다를까, 손으로 재빨리 노트북을 종료시키며 발로는 사정없이 유진의 정강이를 깐다.
“아! 아파! 아프다고, 이 기지배야!!”
“내가 오늘 아침 10시부터 여기 죽치고 앉아 있었는데 넌 그게 이제 생각났어? 아무래도 네 머리는 어떤 게 중요한지 우선순위를 모르나 보네. 그거 왜 들고 다녀, 무겁게.”
첫 만남 때 유진을 멘붕 오게 했던 은석의 독설이 간만에 빛을 발한다. 하지만 완벽한 자신의 승리를 예감한 유진은 까짓것 들어주마, 란 마음으로 여유롭게 은석을 바라봤다. 가방을 들고 막 일어나려는 은석의 뒤에 서 있는 인영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왔어, 친구?”
유진이 자신의 뒤를 향해 손을 살랑살랑 흔들며 인사하자 일어나려던 은석의 행동이 딱 멈춘다. 은석에게 호환 마마보다 무서울 그의 친구는 돌처럼 굳은 그녀를 지나쳐 인사를 건넸다.
“나 아메리카노 한 잔.”
오케이.
산뜻하게 주문을 받은 유진이 일어난 자리에 희찬이 앉았다.
“작가님, 우리 참 오랜만이죠. 그래도 내가 작가님 담당인데 얼마 만에 얼굴 보는 것인지 모르겠네.”
은석은 희찬의 얼굴을 보지도 않고 주섬주섬 노트북을 다시 꺼낸다.
오랜만이야, 희찬아. 인사도 덧붙이며.
“메일로 보내 준 <그심장> 1부 읽어 봤어요. 전화는 왜 안 받으세요?”
“그냥.”
우와, 지금 쟤 완전 뻔뻔했어.
희찬도 할 말을 잃었는지 한동안 둘 사이에는 침묵만 흘렀다. 별수 없다는 듯 가볍게 한숨을 내쉰 희찬은 가방을 열어 노트를 꺼냈다.
“재밌던데요. 지금 교정 들어갔어요. 표지 디자인으로 생각해 둔 거 있어요?”
잠시 고민하던 은석은 제 앞에 다 식어 가는 컵을 만지작거렸다.
“그을쎄에.”
어울리지 않게 말꼬리를 길게 늘린다. 생각할 시간을 벌려는 속셈이었다. 은석의 중지 손톱이 다시 한번 엄지 위를 살살 긁는다. 꽤 침묵이 흘렀는데도 희찬은 재촉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은 희찬에겐 아주 익숙했다.
이윽고 생각을 정리한 듯 은석의 입이 열렸다.
“화려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바탕은 어두운 색이 좋고, 제목은 휘갈긴 듯 두 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