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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찬이 노트에 한 번 써 본다. 만년필이 끊김 없이 노트를 긁었다.
“이런 식으로요?”
“응, 딱 좋아.”
은석은 만족스러운 듯 웃음을 띠며 희찬의 노트를 쳐다봤다. 그사이 유진은 희찬과 제 몫의 아메리카노를 들고 테이블로 향했다. 슬쩍 노트를 보니 멋스럽게 휘갈긴 글이 눈에 들어왔다.
그대의 심장이 멈출 때까지
“내가 너랑 친구 한 지 꽤 된 것 같은데 너 이렇게 글씨 잘 쓰는지 이제 알았어.”
“너 원래 아는 거 없잖아.”
그러자 앞에 앉아 있던 은석도 희찬을 따라 유진을 보며 말한다.
“뭐야. 너 머리 비었어?”
“둘 다 일어나서 당장 나가. 가다가 넘어져서 꼭 한 군데쯤 다쳐 주고.”
둘은 못 들은 척 얘기를 계속했다.
툭. 툭.
유진은 괜히 희찬이 앉은 의자를 건드렸다. 허나 희찬은 그 정도는 귀엽다는 듯 유진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은석에게 집중했다.
“대충 이런 느낌이란 거네. 북 디자이너는 누가 좋으세요?”
“아무나. 네가 알아서, 원하는 대로.”
은석은 그런 유진을 머저리 보듯 흘겨보며 대답했다. 유진이 팔짱을 끼고 고개를 위로 치켜들자 그녀는 한심하단 뜻이 역력한 한숨을 내쉬며 컵을 든다.
희찬이 만년필을 손가락 사이로 한 번 굴렸다. 애매하게 끊긴 대화에 다 마셔 가는 초코라유를 쳐다보던 은석은 고개를 들었다. 희찬도 은석과 눈을 맞추더니 이내 마음을 굳힌 듯 말했다.
“마침 작가님을 꼭 만나고 싶다는 북 디자이너가 있어요.”
“나를? 굳이 만나야 하는 거야? 싫은데.”
원래 낯을 가리는 은석이었다. 예상 못 한 대답이 아니었기에 희찬은 당황스럽지도 않았다.
“저 아시죠? 어지간한 컨택은 싹 다 잘라내는 거.”
은석도 알고 있었다. 제 책이 꽤 유명해졌음에도 저에 대한 사진 한 장, 기사 한 줄 나가지 않았던 건 다 희찬의 덕이란 것을. 그런 희찬이 이리 말하는 것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건 제 책에 절대적인 도움이 될 거고.
“엄청나게 실력 좋은 디자이너라도 섭외했나 보다?”
“기대해도 좋아요. 이번 표지.”
“좋아. 그럼 한 달 뒤. 나 앞으로 한 달은 일 안 해.”
이번엔 희찬이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건 전혀 예상 못 한 조건이다.
“잠깐만요, 작가…….”
“절대 싫어.”
희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은석이 칼같이 잘라 냈다. 그 뒷말은 들으나 마나였다.
“우리 천천히 하자. 나 좀 쉬고.”
희찬의 말을 끊은 은석의 표정은 결연했다. 이것만은 절대 양보할 수 없다는 것처럼. 희찬의 얼굴엔 망연자실이라 쓰여 있는 듯했다.
유진은 둘의 공방을 가만히 지켜보다 씩, 웃었다. 일 대 일. 무승부.
한 달 전.
희찬은 담당하고 있던 작가에게서 메일을 받았다. 마감 시간을 지키는 것에 재주가 없었던 제 담당은 이번에도 역시나였다. 그래서 게으른 제 친구에게 오전부터 전화해 찾아가 보라고 주소를 불러 줬더니 기다리던 메일이 짠, 나타났다. 가끔 하찮지만 그래도 제법 쓸모 있는 녀석이다.
메일을 확인하고 창을 닫자마자 팀장이 말을 걸어왔다.
“희찬 씨, 우리 이 작가 만났어?”
“이번 작품은 메일로 받았어요. 직접 만난 건 아니고.”
전화기를 들어 번호를 누르던 팀장은 아, 하고는 무언가 생각난 듯 다시 내려놓았다.
“이주비는, 만나 봤고?”
“네. 만났어요. 해 주겠대요.”
“그래서, 어땠어? 소문만큼 까칠해?”
희찬은 오전에 만났던 북 디자이너를 떠올렸다. 출판사 앞 사거리의 카페에서 만난 그녀는 앞에 놓인 매우 달아 보이던 커피와는 다르게 시원스런 말투를 가지고 있었다.
“까칠한 건 잘 모르겠고, 예쁘게 생겼어요.”
“늦어서 미안해요. 많이 기다렸어요?”
제 회사 앞에서 만나자는 말에 한가한 쪽이 움직여야죠, 하며 선뜻 말하더니 약속 시각을 40분이나 넘겨서 왔다. 희찬은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내밀며 인사했다.
“주희찬입니다.”
“이주비예요. 반가…….”
“바쁘니 일단 앉죠.”
말이 끊기자 잠시 희찬을 빤히 본 주비는 맞은편 의자를 빼 가방을 얹었다. 그러더니 지갑을 꺼내 희찬과 눈을 맞추고는 살짝 웃었다.
“화가 많이 나셨네요.”
희찬이 검지로 왼쪽 손목에 차고 있는 시계를 톡톡 치자 주비의 눈이 그리로 향했다. 10시 반에 만나기로 했지만 분침은 이미 숫자 3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희찬의 앞에 있는 커피가 바닥을 드러낸 것까지 확인한 주비는 살짝 허리를 숙여 테이블을 손으로 짚었다.
“사과의 뜻으로 사이드 메뉴 쏠게요. 치즈 케이크 좋아해요?”
이걸로 넘어가 말아. 잠시 고민하던 희찬은 아무거나, 라고 말했다. 단맛은 딱 질색이지만 이미 40분 넘게 지체된 시간에 빨리해치우잔 마음이 강했다.
주비가 주문하고 온다는 말을 하고 카운터로 향하자 그 틈에 희찬은 휴대폰을 들어 주소록을 뒤졌다. 잠시 후 ‘최딱지’라고 저장된 번호를 꾹 누르고는 이내 들리는 목소리에 입을 열었다.
“어, 부탁할 일이 있는데.”
주비가 주문을 마치고 테이블로 돌아올 때쯤 희찬 역시 제 친구에게 메일을 보내는지 확인만 하고 나오면 된다는 말을 마치고 전화를 끊었다. 주비가 의자에 앉자 드디어 둘은 이 만남의 목적에 관해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이 작가님 팬이시라고요.”
“맞아요. 이은석 작가 작품, 재밌게 읽었거든요.”
희찬은 처음 주비에게서 만나자고 연락이 왔을 때, 이쪽 업계에서 꽤 유명한 북 디자이너가 먼저 연락을 주기에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제 담당 작가의 팬이라며 이번 신작 디자인을 하고 싶다는데 이게 웬 떡인가 싶은 생각에 냉큼 오케이 한 것이었다.
“책 디자인을 하게 됐으니 한 번 만나 보고 싶은데.”
“상의하실 게 있으면 저한테 말씀하시면 됩니다.”
희찬의 말에 주비의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예쁘게 빠진 다리를 반대편으로 꼬고는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 번 두드린다. 조금 전 희찬이 그랬던 것처럼.
“이봐요, 편집자 님. 전 책이 온전히 작가의 것이라 생각하지 않아요. 앞으로 나올 그 책은 편집자 님의 작품이기도 하고, 제 작품이기도 하죠. 난 내 손 탄 책은 항상 최고로 만들고 싶어요. 그러려면 작가와의 커뮤니케이션이 당연히 따라와야 하지 않겠어요? 먼저 읽어 볼 순 없으니 그 책을 쓴 작가의 생각이라도 제대로 알아야죠.”
틀린 말이라곤 하나도 없는 주비의 말에 희찬은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앞에 앉은 여자와의 짧은 대화를 통해 깨달았다. 이 사람보단 제 작가를 설득하는 편이 쉽다는 것을.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야, 작가님과의 자리를 마련해 드려야죠.”
“어라, 그렇게 바로 수긍하시니 제가 맥이 좀 빠지네요.”
“네. 누가 봐도 전투태세이기에 그냥 빨리 백기 들었어요.”
제 말에 살짝 민망한 듯 주비가 웃는다. 때마침 주문한 커피와 치즈 케이크가 테이블에 놓였다. 냄새만으로도 달 것이라는 확신을 주는 주비의 커피에 희찬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거 되게 달아 보이네요.”
“아, 이거요? 맞아요. 되게 달아요.”
치즈 케이크를 제 앞으로 밀어 주고 휘핑크림을 떠먹는다. 보는 제 입에도 단 맛이 나는 것 같아 희찬은 포크를 들어 치즈 케이크를 한 입 먹었다.
그가 대뜸 기겁하며 포크를 내려놨다. 달다, 이것도. 희찬이 어찌할 줄 모르고 속으로 좌절하는 와중에 앞에서 푸핫, 하고 웃음소리가 들렸다.
“편집자 님, 단 거 너무 못 먹는다. 치즈 케이크 달 줄 몰랐어요?”
“아니요. 하지만 생각보다 훨씬 다네요.”
유쾌한 듯 저를 보고 웃는 주비를 보니 제가 어지간히 바보짓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 걸 먹으면 기분이 좋아진다는데 저는 왜 입맛만 버리는지. 아무래도 나가는 길에 아메리카노를 한 잔 더 마셔야겠다.
“그래서 편집자 님은 읽어 보셨어요? 이은석 작가 신작?”
이 여자는 어쩜 저리 본인에게 유리할 말만 골라 하는 걸까.
“아직요. 저희 작가님이 원체 지각쟁이라.”
“고생하시네요.”
“알아주니 고맙네요.”
작품도 아직 받아 보지 못한 편집자가 할 수 있는 말이라곤 별로 없었다. 그저 ‘작가님과 일정 잡고 연락드릴게요’ 하는 수밖에. 물론 희찬은 그 일정이 달력을 두 번이나 넘긴 날이라는 것을 이땐 알지 못했다.
* * *
“은석아, 이것 좀 마셔 봐.”
“누나.”
여느 날과 같이 카페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는 은석의 옆으로 유진이 머그컵을 놨다.
“그 누나 소리 좀 그만하고, 빨리.”
자신이 내온 것을 빨리 마셔 보라고 재촉하는 유진을 본체만체하며 은석은 그저 노트북만 들여다봤다. 못됐어. 유진은 속으로 꿍얼거리며 테이블 옆에 쭈그려 앉았다. 테이블 위에 양손을 턱! 그 위에 얼굴을 턱!
“뭐하니?”
“내 잘생긴 얼굴 보면 생각이 달라질까 해서.”
커다란 눈을 껌벅껌벅하며 유진이 자신 있게 말했다. 순간 어이가 없어진 은석은 오른손을 들어 두 번 털어 낸 후, 유진의 이마를 향해 힘차게 딱밤을 날렸다.
“아파!”
“주먹으로 안 때린 걸 다행으로 알아.”
진짜 아프다며 이마를 어루만지는 유진을 향해 사악한 웃음을 지은 은석이 머그컵을 들었다. 그러자 코끝에 와 닿는 익숙한 향.
“유자 넣었어?”
“향 진해? 맛은 어때? 유자즙을 넣은 건데 겉돌진 않아?”
“기다려. 아직 입에 대지도 않았거든? 그리고 하나씩 물어봐.”
유진의 질문 공세에 부담스러워진 은석은 살짝 맛을 보았다. 라테의 부드러운 맛에 유자의 상큼함이 제법 어울렸다. 하지만,
“나쁘진 않은데 그렇게 특출 난 맛도 아닌 것 같아.”
은석의 냉정한 평가에 기죽은 유진이 그대로 바닥에 철푸덕 주저앉았다. 은석이 고개를 유진쪽으로 돌리자 동그란 정수리가 눈에 들어온다.
“너 진짜 애 같다.”
“외동으로 부모님 사랑 듬뿍 받고 자라서 그래. 네가 이해해.”
유진이 뻔뻔하게 제 입으로 말하자 은석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진다. 초승달처럼 접힌 눈을 유진은 멍하니 바라봤다. 확실히 웃는 게 너무 예쁘다. 완전 내 취향.
“맛없다는 거 아니었어. 마니아들은 확실히 좋아할 것 같아.”
“됐거든.”
유진이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자 다시 시야가 위로 올라간다. 이제 유진이 은석을 내려다보게 되었다. 시야가 역전되자 유진의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너 어릴 때 못 먹었어? 왜 이렇게 작아?”
갑작스런 시비에 은석이 어이없다는 듯 대꾸했다.
“넌 가정 교육 잘 못 받았니? 진짜 그런 거라면 말해. 사과할게.”
“내가 작가님 상대로 말로 해 보겠다고 대들었네. 내가 건방졌어.”
입을 삐죽거리며 유진이 주방으로 들어갔다. 그 뒷모습에서 뿜어져 나오는 패배자의 오오라가 은석은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어딜 감히.
2화. 비가 오는 날엔
이제 와서 하는 이야기지만 유진은 은석에게 제법 호감이 있었다. 돈 있고 능력 있고 그 와중에 미모까지 갖춘 여자들을 안 만나 본 건 아닌데, 유진에게 은석은 왠지 색다르게 다가왔다.
“뭘 그렇게 쳐다봐. 변태 같아, 너.”
저런 점이 특히. 스스로 말하자니 잘난 척 같지만 실제로 저는 좀 잘났다. 돈 잘 버는 부모님이 계시고, 이 나이에 카페 사장이며, 외모도 준수한 편. 덩달아 잠자리 스킬도 평균 이상. 저를 놓치면 손해라는 걸 여자들은 알고 있다.
“너 봐. 예뻐서.”
“뭐 잘못 먹었니?”
근데 저 여자는 왜 모를까. 제가 이렇게 호감을 표시하는데도 아주 철벽이 따로 없다. 은석은 가만히 유진을 보더니 손을 이마에 올렸다. 어이구야, 얘 지금 나랑 밀당하나?
“이런 식으로요?”
“응, 딱 좋아.”
은석은 만족스러운 듯 웃음을 띠며 희찬의 노트를 쳐다봤다. 그사이 유진은 희찬과 제 몫의 아메리카노를 들고 테이블로 향했다. 슬쩍 노트를 보니 멋스럽게 휘갈긴 글이 눈에 들어왔다.
그대의 심장이 멈출 때까지
“내가 너랑 친구 한 지 꽤 된 것 같은데 너 이렇게 글씨 잘 쓰는지 이제 알았어.”
“너 원래 아는 거 없잖아.”
그러자 앞에 앉아 있던 은석도 희찬을 따라 유진을 보며 말한다.
“뭐야. 너 머리 비었어?”
“둘 다 일어나서 당장 나가. 가다가 넘어져서 꼭 한 군데쯤 다쳐 주고.”
둘은 못 들은 척 얘기를 계속했다.
툭. 툭.
유진은 괜히 희찬이 앉은 의자를 건드렸다. 허나 희찬은 그 정도는 귀엽다는 듯 유진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은석에게 집중했다.
“대충 이런 느낌이란 거네. 북 디자이너는 누가 좋으세요?”
“아무나. 네가 알아서, 원하는 대로.”
은석은 그런 유진을 머저리 보듯 흘겨보며 대답했다. 유진이 팔짱을 끼고 고개를 위로 치켜들자 그녀는 한심하단 뜻이 역력한 한숨을 내쉬며 컵을 든다.
희찬이 만년필을 손가락 사이로 한 번 굴렸다. 애매하게 끊긴 대화에 다 마셔 가는 초코라유를 쳐다보던 은석은 고개를 들었다. 희찬도 은석과 눈을 맞추더니 이내 마음을 굳힌 듯 말했다.
“마침 작가님을 꼭 만나고 싶다는 북 디자이너가 있어요.”
“나를? 굳이 만나야 하는 거야? 싫은데.”
원래 낯을 가리는 은석이었다. 예상 못 한 대답이 아니었기에 희찬은 당황스럽지도 않았다.
“저 아시죠? 어지간한 컨택은 싹 다 잘라내는 거.”
은석도 알고 있었다. 제 책이 꽤 유명해졌음에도 저에 대한 사진 한 장, 기사 한 줄 나가지 않았던 건 다 희찬의 덕이란 것을. 그런 희찬이 이리 말하는 것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건 제 책에 절대적인 도움이 될 거고.
“엄청나게 실력 좋은 디자이너라도 섭외했나 보다?”
“기대해도 좋아요. 이번 표지.”
“좋아. 그럼 한 달 뒤. 나 앞으로 한 달은 일 안 해.”
이번엔 희찬이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건 전혀 예상 못 한 조건이다.
“잠깐만요, 작가…….”
“절대 싫어.”
희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은석이 칼같이 잘라 냈다. 그 뒷말은 들으나 마나였다.
“우리 천천히 하자. 나 좀 쉬고.”
희찬의 말을 끊은 은석의 표정은 결연했다. 이것만은 절대 양보할 수 없다는 것처럼. 희찬의 얼굴엔 망연자실이라 쓰여 있는 듯했다.
유진은 둘의 공방을 가만히 지켜보다 씩, 웃었다. 일 대 일. 무승부.
한 달 전.
희찬은 담당하고 있던 작가에게서 메일을 받았다. 마감 시간을 지키는 것에 재주가 없었던 제 담당은 이번에도 역시나였다. 그래서 게으른 제 친구에게 오전부터 전화해 찾아가 보라고 주소를 불러 줬더니 기다리던 메일이 짠, 나타났다. 가끔 하찮지만 그래도 제법 쓸모 있는 녀석이다.
메일을 확인하고 창을 닫자마자 팀장이 말을 걸어왔다.
“희찬 씨, 우리 이 작가 만났어?”
“이번 작품은 메일로 받았어요. 직접 만난 건 아니고.”
전화기를 들어 번호를 누르던 팀장은 아, 하고는 무언가 생각난 듯 다시 내려놓았다.
“이주비는, 만나 봤고?”
“네. 만났어요. 해 주겠대요.”
“그래서, 어땠어? 소문만큼 까칠해?”
희찬은 오전에 만났던 북 디자이너를 떠올렸다. 출판사 앞 사거리의 카페에서 만난 그녀는 앞에 놓인 매우 달아 보이던 커피와는 다르게 시원스런 말투를 가지고 있었다.
“까칠한 건 잘 모르겠고, 예쁘게 생겼어요.”
“늦어서 미안해요. 많이 기다렸어요?”
제 회사 앞에서 만나자는 말에 한가한 쪽이 움직여야죠, 하며 선뜻 말하더니 약속 시각을 40분이나 넘겨서 왔다. 희찬은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내밀며 인사했다.
“주희찬입니다.”
“이주비예요. 반가…….”
“바쁘니 일단 앉죠.”
말이 끊기자 잠시 희찬을 빤히 본 주비는 맞은편 의자를 빼 가방을 얹었다. 그러더니 지갑을 꺼내 희찬과 눈을 맞추고는 살짝 웃었다.
“화가 많이 나셨네요.”
희찬이 검지로 왼쪽 손목에 차고 있는 시계를 톡톡 치자 주비의 눈이 그리로 향했다. 10시 반에 만나기로 했지만 분침은 이미 숫자 3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희찬의 앞에 있는 커피가 바닥을 드러낸 것까지 확인한 주비는 살짝 허리를 숙여 테이블을 손으로 짚었다.
“사과의 뜻으로 사이드 메뉴 쏠게요. 치즈 케이크 좋아해요?”
이걸로 넘어가 말아. 잠시 고민하던 희찬은 아무거나, 라고 말했다. 단맛은 딱 질색이지만 이미 40분 넘게 지체된 시간에 빨리해치우잔 마음이 강했다.
주비가 주문하고 온다는 말을 하고 카운터로 향하자 그 틈에 희찬은 휴대폰을 들어 주소록을 뒤졌다. 잠시 후 ‘최딱지’라고 저장된 번호를 꾹 누르고는 이내 들리는 목소리에 입을 열었다.
“어, 부탁할 일이 있는데.”
주비가 주문을 마치고 테이블로 돌아올 때쯤 희찬 역시 제 친구에게 메일을 보내는지 확인만 하고 나오면 된다는 말을 마치고 전화를 끊었다. 주비가 의자에 앉자 드디어 둘은 이 만남의 목적에 관해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이 작가님 팬이시라고요.”
“맞아요. 이은석 작가 작품, 재밌게 읽었거든요.”
희찬은 처음 주비에게서 만나자고 연락이 왔을 때, 이쪽 업계에서 꽤 유명한 북 디자이너가 먼저 연락을 주기에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제 담당 작가의 팬이라며 이번 신작 디자인을 하고 싶다는데 이게 웬 떡인가 싶은 생각에 냉큼 오케이 한 것이었다.
“책 디자인을 하게 됐으니 한 번 만나 보고 싶은데.”
“상의하실 게 있으면 저한테 말씀하시면 됩니다.”
희찬의 말에 주비의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예쁘게 빠진 다리를 반대편으로 꼬고는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 번 두드린다. 조금 전 희찬이 그랬던 것처럼.
“이봐요, 편집자 님. 전 책이 온전히 작가의 것이라 생각하지 않아요. 앞으로 나올 그 책은 편집자 님의 작품이기도 하고, 제 작품이기도 하죠. 난 내 손 탄 책은 항상 최고로 만들고 싶어요. 그러려면 작가와의 커뮤니케이션이 당연히 따라와야 하지 않겠어요? 먼저 읽어 볼 순 없으니 그 책을 쓴 작가의 생각이라도 제대로 알아야죠.”
틀린 말이라곤 하나도 없는 주비의 말에 희찬은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앞에 앉은 여자와의 짧은 대화를 통해 깨달았다. 이 사람보단 제 작가를 설득하는 편이 쉽다는 것을.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야, 작가님과의 자리를 마련해 드려야죠.”
“어라, 그렇게 바로 수긍하시니 제가 맥이 좀 빠지네요.”
“네. 누가 봐도 전투태세이기에 그냥 빨리 백기 들었어요.”
제 말에 살짝 민망한 듯 주비가 웃는다. 때마침 주문한 커피와 치즈 케이크가 테이블에 놓였다. 냄새만으로도 달 것이라는 확신을 주는 주비의 커피에 희찬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거 되게 달아 보이네요.”
“아, 이거요? 맞아요. 되게 달아요.”
치즈 케이크를 제 앞으로 밀어 주고 휘핑크림을 떠먹는다. 보는 제 입에도 단 맛이 나는 것 같아 희찬은 포크를 들어 치즈 케이크를 한 입 먹었다.
그가 대뜸 기겁하며 포크를 내려놨다. 달다, 이것도. 희찬이 어찌할 줄 모르고 속으로 좌절하는 와중에 앞에서 푸핫, 하고 웃음소리가 들렸다.
“편집자 님, 단 거 너무 못 먹는다. 치즈 케이크 달 줄 몰랐어요?”
“아니요. 하지만 생각보다 훨씬 다네요.”
유쾌한 듯 저를 보고 웃는 주비를 보니 제가 어지간히 바보짓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 걸 먹으면 기분이 좋아진다는데 저는 왜 입맛만 버리는지. 아무래도 나가는 길에 아메리카노를 한 잔 더 마셔야겠다.
“그래서 편집자 님은 읽어 보셨어요? 이은석 작가 신작?”
이 여자는 어쩜 저리 본인에게 유리할 말만 골라 하는 걸까.
“아직요. 저희 작가님이 원체 지각쟁이라.”
“고생하시네요.”
“알아주니 고맙네요.”
작품도 아직 받아 보지 못한 편집자가 할 수 있는 말이라곤 별로 없었다. 그저 ‘작가님과 일정 잡고 연락드릴게요’ 하는 수밖에. 물론 희찬은 그 일정이 달력을 두 번이나 넘긴 날이라는 것을 이땐 알지 못했다.
* * *
“은석아, 이것 좀 마셔 봐.”
“누나.”
여느 날과 같이 카페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는 은석의 옆으로 유진이 머그컵을 놨다.
“그 누나 소리 좀 그만하고, 빨리.”
자신이 내온 것을 빨리 마셔 보라고 재촉하는 유진을 본체만체하며 은석은 그저 노트북만 들여다봤다. 못됐어. 유진은 속으로 꿍얼거리며 테이블 옆에 쭈그려 앉았다. 테이블 위에 양손을 턱! 그 위에 얼굴을 턱!
“뭐하니?”
“내 잘생긴 얼굴 보면 생각이 달라질까 해서.”
커다란 눈을 껌벅껌벅하며 유진이 자신 있게 말했다. 순간 어이가 없어진 은석은 오른손을 들어 두 번 털어 낸 후, 유진의 이마를 향해 힘차게 딱밤을 날렸다.
“아파!”
“주먹으로 안 때린 걸 다행으로 알아.”
진짜 아프다며 이마를 어루만지는 유진을 향해 사악한 웃음을 지은 은석이 머그컵을 들었다. 그러자 코끝에 와 닿는 익숙한 향.
“유자 넣었어?”
“향 진해? 맛은 어때? 유자즙을 넣은 건데 겉돌진 않아?”
“기다려. 아직 입에 대지도 않았거든? 그리고 하나씩 물어봐.”
유진의 질문 공세에 부담스러워진 은석은 살짝 맛을 보았다. 라테의 부드러운 맛에 유자의 상큼함이 제법 어울렸다. 하지만,
“나쁘진 않은데 그렇게 특출 난 맛도 아닌 것 같아.”
은석의 냉정한 평가에 기죽은 유진이 그대로 바닥에 철푸덕 주저앉았다. 은석이 고개를 유진쪽으로 돌리자 동그란 정수리가 눈에 들어온다.
“너 진짜 애 같다.”
“외동으로 부모님 사랑 듬뿍 받고 자라서 그래. 네가 이해해.”
유진이 뻔뻔하게 제 입으로 말하자 은석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진다. 초승달처럼 접힌 눈을 유진은 멍하니 바라봤다. 확실히 웃는 게 너무 예쁘다. 완전 내 취향.
“맛없다는 거 아니었어. 마니아들은 확실히 좋아할 것 같아.”
“됐거든.”
유진이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자 다시 시야가 위로 올라간다. 이제 유진이 은석을 내려다보게 되었다. 시야가 역전되자 유진의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너 어릴 때 못 먹었어? 왜 이렇게 작아?”
갑작스런 시비에 은석이 어이없다는 듯 대꾸했다.
“넌 가정 교육 잘 못 받았니? 진짜 그런 거라면 말해. 사과할게.”
“내가 작가님 상대로 말로 해 보겠다고 대들었네. 내가 건방졌어.”
입을 삐죽거리며 유진이 주방으로 들어갔다. 그 뒷모습에서 뿜어져 나오는 패배자의 오오라가 은석은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어딜 감히.
2화. 비가 오는 날엔
이제 와서 하는 이야기지만 유진은 은석에게 제법 호감이 있었다. 돈 있고 능력 있고 그 와중에 미모까지 갖춘 여자들을 안 만나 본 건 아닌데, 유진에게 은석은 왠지 색다르게 다가왔다.
“뭘 그렇게 쳐다봐. 변태 같아, 너.”
저런 점이 특히. 스스로 말하자니 잘난 척 같지만 실제로 저는 좀 잘났다. 돈 잘 버는 부모님이 계시고, 이 나이에 카페 사장이며, 외모도 준수한 편. 덩달아 잠자리 스킬도 평균 이상. 저를 놓치면 손해라는 걸 여자들은 알고 있다.
“너 봐. 예뻐서.”
“뭐 잘못 먹었니?”
근데 저 여자는 왜 모를까. 제가 이렇게 호감을 표시하는데도 아주 철벽이 따로 없다. 은석은 가만히 유진을 보더니 손을 이마에 올렸다. 어이구야, 얘 지금 나랑 밀당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