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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기치 못한 사랑
프롤로그
정윤의 무감한 시선이 한여름의 무더운 열기를 뿜어내는 창밖의 도로로 향했다. 이런 날씨엔 폭우가 쏟아져야 제격일 것 같다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달그락, 찻잔을 놓는 소리에 그녀는 마주 앉은 여자를 바라봤다. 눈가의 자글거리는 주름과 거친 손마디가 여자의 힘든 삶을 대변하는 듯해 연민이 생겼다. 그래서였을까. 여자가 원하는 대로 해 주고 싶어진 것은.
어쩌면 잘된 건지도 몰랐다. 끈질기게 구애한 상현과 만난 지 채 한 달도 되지 않아 연인이라기에는 몹시 어설픈 단계였다. 때문에 더 미련이 없는지도.
겨우 몇 번 만난 사이인데, 어떻게 알았을까.
상현과 더 이상 만나지 않겠다는 정윤의 대답이 만족스러웠는지 여자가 근심을 내려놓은 얼굴로 말했다.
“아가씨가 싫어서 이러는 게 아니니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서른에 남편을 잃고 아들과 어떻게든 살아 보려고 이것저것 안 해 본 일이 없어요. 그 험난한 세월을 살아오면서 한 가지 바람밖에 없었어요. 우리 아들이 남부럽지 않게 잘 살아가는 것, 그것뿐이었어요. 그런데 아가씨의 환경이…….”
대뜸 전화를 해서 만나자고 한 여자의 질문에 너무 솔직하게 대답을 했나 보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사실과 어머니의 재혼, 함께 살던 할머니는 치매에 걸려 요양원에 계시다는 것마저 얘기를 했으니 말이다. 거기까지 들은 여자는 더 이상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손을 홰홰 저으며 그녀의 말을 끊어 버렸었다.
그 탓에 정윤은 부가 설명을 할 수 없었다. 아버지의 재산을 물려받은 덕분에 그런대로 편하게 살고 있다는 것과 탄탄한 중견 기업을 경영하는 새아버지와 재혼한 어머니의 얘기마저도.
여자가 나가고 난 후, 밖으로 나온 정윤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사이에 쨍쨍하던 하늘이 금방 소나기라도 쏟아질 듯이 잔뜩 흐려져 있었다.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한 그녀는 잠시 걷고 싶은 마음이 들어 근처에 위치한 고궁으로 들어갔다. 평일이라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느긋하게 걷다가 빗방울이 한두 방울 떨어지기 시작해 피할 곳을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마침 멀지 않은 곳에 쉼터가 보였다. 빗방울이 순식간에 굵어져 쉼터로 뛰어갔다. 머리카락에 달라붙은 물방울을 손가락으로 툭툭 털어 내던 정윤은 휴대폰의 계속되는 진동에 가장자리로 가서 전화를 받았다. 안절부절못하는 수진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정윤아, 시간 안에 회사에 못 들어오는 거야?
“그럴 것 같아. 오전에 부탁한 대로 네가 강의 좀 맡아 줘.”
─어떻게 널 대신해? 강의는 어찌어찌한다고 쳐도 와인 주문량은 바닥을 칠 텐데, 어떻게든 좀 빨리 올 수 없어?
걱정이 가득한 수진의 말에 정윤은 거세게 쏟아지는 빗줄기를 바라봤다.
“갑자기 비가 내려서 피하고 있는데, 최대한 빨리 갈게. 그리고 강의 중에 시음할 와인 리스트는 내 데스크에 있으니까 확인해 봐.”
─알았어. 그래도 제발 강의 전에 올 수 있으면 와 줘.
통화를 마친 그녀는 쏟아지는 빗줄기를 바라보다가 쉼터와 연결된 노천카페에서 따뜻한 커피를 사 왔다.
비와 커피의 향이라. 생일치곤 근사하네.
이미 상현의 일은 머릿속에서 지워진 건지 커피를 마시는 그녀의 얼굴은 무심해 보였다.
커피의 향이 식어 갈 쯤, 언제 비가 내렸냐는 듯이 금세 하늘이 맑아졌다. 고궁을 나온 정윤은 서둘러 택시를 타고 회사로 향했다.
사무실에 들어서자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수진이 살았다는 듯이 만세 부르는 시늉을 했다. 정윤은 재빠르게 준비를 마치고 강의실로 향했다.
그녀의 직장인 세우와인인터내셔널은 업계에서 가장 큰 와인 수입 회사로 프랑스를 비롯한 이탈리아, 칠레, 미국 등 여러 나라에서 와인을 수입하고 판매하는 일을 한다.
판매 전략의 일환으로 와인 스쿨을 진행해 잠재적인 고객을 늘리고 여러 파티에 맞춰 와인을 공급한다. 뿐만 아니라 다양한 가격의 와인을 수입해 레스토랑과 와인 바, 칵테일 바, 백화점 등을 타깃으로 삼아 치열한 영업을 펼치고 있다. 그 덕분인지 급속하게 매출이 늘어난 회사는 몇 년 전부터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로 눈을 돌려 일본과 중국까지 영업력을 넓히는 중이었다.
정윤은 강의실에 들어가기 전에 이름표를 확인했다.
세우와인인터내셔널 영업팀 박정윤 대리.
흐뭇한 얼굴로 이름표를 만진 그녀는 와인 기초반의 수강생들과 눈인사를 나누고 강의를 시작했다.
“저번 시간에는 보르도 고급 와인의 샤토(Chateau)가 집중된 ‘오 메독 지역’과 다른 지구들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오늘은 부르고뉴 와인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먼저 포도 품종부터 보죠. 보르도 와인의 포도 품종은 카베르네 소비뇽과 메를로, 카베르네 프랑 그리고 화이트 와인의 대표 품종인 샤르도네라는 포도가 중심이 되고 부르고뉴 포도의 품종은 피노 누아입니다. 포도 품종과 테루아르(Terroir)에 따라 와인의 맛은 달라집니다. 혹시 이 중에서 부르고뉴 와인과 보르도 와인을 비교하면서 시음해 보신 분이 계신가요?”
몇 명의 수강생들이 손을 들자 정윤은 싱긋 미소를 지으며 설명을 이어 나갔다.
“보르도 와인의 등급은 샤토의 레벨과 생산자에 의해 결정되지만 부르고뉴 와인은 포도가 나는 밭에 따라 등급을 매깁니다. 포도를 재배하는 환경이 특히 뛰어난 특급 포도원은 그랑크뤼, 1급 포도원은 프리미에 크뤼, 그리고 마을이나 지역 단위의 와인으로 나뉩니다. 개인 생산자는 도멘(Domaine)으로 불립니다. 대부분 알고 계실 DRC(Domaine de la Romanee Conti)도 마을 단위에 해당됩니다. 그다음으로는 부르고뉴 루쥬가 있는데…….”
준비한 영상 자료를 띄워 놓고 한참 동안 강의하던 정윤은 수진의 도움을 받아 와인 시음 준비를 마쳤다.
“빈티지(Vintage)에 따라 다르지만 일단 등급별로 와인을 시음하면서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알아보겠습니다.”
시음 과정을 마친 후에 이어진 고객들의 주문 상황까지 점검한 정윤이 사무실로 돌아왔을 때는 벌써 퇴근 시간이었다. 직원들은 정윤의 생일을 축하하는 자리에 참석하는 이들을 체크하고 있었다. 조용히 쉬고 싶어 슬그머니 일어서던 그녀는 눈치 빠른 직원들에게 붙잡혀 술자리에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로 식사를 마치자마자 나와 단골 와인 바로 향했다.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바에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스툴에 앉자 안주를 플레이팅 하던 주영이 그녀의 안색을 살피며 다가왔다. 두 사람은 소믈리에 과정을 함께 공부하면서 친해진 사이였다.
“우울한 일 있어?”
“아니.”
“오늘 생일이지? 박정윤, 생일 축하해.”
주영의 말에 희미하게 웃던 정윤은 콧속으로 스며든 향기에 고개를 돌렸다. 조금 떨어진 자리에 깔끔한 슈트 차림의 키 큰 남자가 우아하게 와인 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가 다시 와인을 따르자 귀부 와인의 대표라 불리는 샤토 디켐의 향이 훅 끼쳐 왔다. 어렸을 때 부모님이 결혼기념일에 마시던 와인의 향이었다. 어렸을 때라 부모님과 함께 와인을 즐기진 못했지만 회사에 취직한 뒤 와인 파티를 맡았을 때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마셔 본 적이 있었다.
눈을 가늘게 떠서 슬쩍 와인의 빈티지를 확인한 정윤은 침을 꿀꺽 삼켰다. 파티에서 마셨던 맛이 생생하게 떠올라서였다. 목젖을 타고 흘러들어 가던 단맛과 독특한 향, 긴 숙성 기간을 지녔으면서 청량감을 유지하고 있던 맛과 향이 생생하게 떠오르자 저도 모르게 입안에 침이 고였다. 평소에 마시기에는 너무 비싼 와인이 그녀의 후각과 미각을 자극했다.
간신히 마셔 보고 싶다는 열망을 누르고 주영에게 주문을 했다.
“하우스 와인으로 한 잔 줘.”
정윤은 주영이 건넨 와인을 천천히 마시며 생각에 잠겼다.
생일이니 집에 와서 저녁을 먹고 가라던 신애에게 여느 때처럼 바쁘다는 핑계를 댔지만 역시나 상처 받았다.
엄마는 잊어버린 걸까. 내일이 아버지의 기일이라는 걸.
정윤은 휴대폰에서 아버지와 찍은 사진을 찾아 확대했다. 사진 속의 젊은 아버지는 어린 그녀를 안아 올리며 싱그럽게 웃고 있었다.
“우리 공주님, 생일 축하해.”
그리운 아버지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엄마와 할머니의 웃음소리도 그 뒤를 따랐다. 시간이 한참이나 흘렀는데도 왜 추억이란 건 바래지지 않는 것일까.
갑작스럽게 툭 떨어진 눈물에 사진 속 아버지의 얼굴이 흐릿해졌다. 머리를 만지는 척하며 눈물을 닦아 낸 정윤은 남은 와인을 단숨에 마셨다.
그런 그녀를 지켜보던 주영이 새 와인 잔을 내밀었다. 뭐냐는 정윤의 눈빛에 그녀는 옆자리의 남자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정윤과 시선이 마주친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이렇게 달콤한 와인은 여성분에게 어울릴 것 같습니다.”
“네? 아닙니다. 전 됐습니다.”
정윤의 거절에도 눈인사를 한 남자가 바를 나가 버리자 주영이 물었다.
“아는 사람이야?”
“전혀. 혹시 여기 단골이야?”
“아니, 오늘 처음 온 손님인데.”
정윤은 의아한 얼굴로 남자가 나간 문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
어깨를 한 번 으쓱해 보인 그녀가 결국 와인 잔을 잡았다. 달콤한 귀부 와인의 향에 취한 정윤은 다시 되돌아오지 않을 추억을 연신 되감았다. 주영이 가방을 손에 쥐여 주며 다정하게 등을 쓸어 주자 상념을 떨칠 수 있었다.
바를 나온 정윤은 택시를 타 오피스텔 앞에서 내렸다.
“박정윤!”
여전히 입안을 감돌고 있는 와인 향을 음미하면서 오피스텔 쪽으로 걸어가던 정윤은 익숙한 남자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양손에 가득 짐을 든 남자가 그녀를 보며 활짝 웃었다.
“오빠! 왔으면 연락이라도 하지. 오래 기다렸어?”
“아니.”
그의 대답에 정윤은 피식 웃었다. 그녀가 유일하게 오빠라고 부르는 사람, 권선후. 비록 그녀에게서 엄마의 존재를 가져간 사람이지만 밉지 않았다.
신애는 재혼하면서 정윤을 데려갔었다. 하지만 그 집에서 어린 정윤은 채 1년 반도 살지 못했다. 선후 할머니인 김 여사의 못마땅해하는 눈초리와 새아버지 현석의 냉담함은 어린 그녀를 두렵게 했다.
그래도 견딜 수 있었다. 그녀에겐 엄마가 있었으니까. 무서울 땐 엄마의 뒤에 숨으면 됐었다. 게다가 네 살 터울의 선후와는 친남매 못지않게 사이가 좋아서 그들의 매서운 눈빛을 애써 밀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짧은 행복은 엄마의 임신으로 끝이 났다. 엄마의 나이 때문에 태교에 더 신경을 써야 한다면서 그녀를 잠시 친할머니에게 맡기라던 김 여사 때문이었다.
신애가 무사히 아이를 낳은 후에도 정윤은 쭉 할머니와 둘이서 살아야 했다.
오피스텔에 들어온 정윤은 서둘러 상을 차리려는 선후의 모습에 생각에서 벗어났다.
“오빠, 뭐 하려고?”
“생일인데 미역국은 먹어야지.”
“저녁 먹었어.”
“어머니께서 열심히 만들어 주신 거야. 한 숟갈이라도 먹자. 얼른 손 씻고 나와.”
간단히 씻은 후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어느새 식탁에는 그녀의 생일상이 풍성하게 차려져 있었다. 선후가 어서 먹으라며 손에 수저를 쥐여 주는 바람에 정윤은 마지못해 미역국을 한 숟가락 가득 떠서 먹었다. 좀 전까지 입안에서 향기롭게 감돌던 와인 맛 때문인지 미역국이 깔깔하게 느껴졌다.
그래도 먹어야겠지.
노골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지만 정윤을 못마땅해하는 게 역력한 김 여사와 현석의 눈치를 보며 신애가 마련했을 음식들일 테니.
프롤로그
정윤의 무감한 시선이 한여름의 무더운 열기를 뿜어내는 창밖의 도로로 향했다. 이런 날씨엔 폭우가 쏟아져야 제격일 것 같다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달그락, 찻잔을 놓는 소리에 그녀는 마주 앉은 여자를 바라봤다. 눈가의 자글거리는 주름과 거친 손마디가 여자의 힘든 삶을 대변하는 듯해 연민이 생겼다. 그래서였을까. 여자가 원하는 대로 해 주고 싶어진 것은.
어쩌면 잘된 건지도 몰랐다. 끈질기게 구애한 상현과 만난 지 채 한 달도 되지 않아 연인이라기에는 몹시 어설픈 단계였다. 때문에 더 미련이 없는지도.
겨우 몇 번 만난 사이인데, 어떻게 알았을까.
상현과 더 이상 만나지 않겠다는 정윤의 대답이 만족스러웠는지 여자가 근심을 내려놓은 얼굴로 말했다.
“아가씨가 싫어서 이러는 게 아니니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서른에 남편을 잃고 아들과 어떻게든 살아 보려고 이것저것 안 해 본 일이 없어요. 그 험난한 세월을 살아오면서 한 가지 바람밖에 없었어요. 우리 아들이 남부럽지 않게 잘 살아가는 것, 그것뿐이었어요. 그런데 아가씨의 환경이…….”
대뜸 전화를 해서 만나자고 한 여자의 질문에 너무 솔직하게 대답을 했나 보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사실과 어머니의 재혼, 함께 살던 할머니는 치매에 걸려 요양원에 계시다는 것마저 얘기를 했으니 말이다. 거기까지 들은 여자는 더 이상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손을 홰홰 저으며 그녀의 말을 끊어 버렸었다.
그 탓에 정윤은 부가 설명을 할 수 없었다. 아버지의 재산을 물려받은 덕분에 그런대로 편하게 살고 있다는 것과 탄탄한 중견 기업을 경영하는 새아버지와 재혼한 어머니의 얘기마저도.
여자가 나가고 난 후, 밖으로 나온 정윤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사이에 쨍쨍하던 하늘이 금방 소나기라도 쏟아질 듯이 잔뜩 흐려져 있었다.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한 그녀는 잠시 걷고 싶은 마음이 들어 근처에 위치한 고궁으로 들어갔다. 평일이라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느긋하게 걷다가 빗방울이 한두 방울 떨어지기 시작해 피할 곳을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마침 멀지 않은 곳에 쉼터가 보였다. 빗방울이 순식간에 굵어져 쉼터로 뛰어갔다. 머리카락에 달라붙은 물방울을 손가락으로 툭툭 털어 내던 정윤은 휴대폰의 계속되는 진동에 가장자리로 가서 전화를 받았다. 안절부절못하는 수진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정윤아, 시간 안에 회사에 못 들어오는 거야?
“그럴 것 같아. 오전에 부탁한 대로 네가 강의 좀 맡아 줘.”
─어떻게 널 대신해? 강의는 어찌어찌한다고 쳐도 와인 주문량은 바닥을 칠 텐데, 어떻게든 좀 빨리 올 수 없어?
걱정이 가득한 수진의 말에 정윤은 거세게 쏟아지는 빗줄기를 바라봤다.
“갑자기 비가 내려서 피하고 있는데, 최대한 빨리 갈게. 그리고 강의 중에 시음할 와인 리스트는 내 데스크에 있으니까 확인해 봐.”
─알았어. 그래도 제발 강의 전에 올 수 있으면 와 줘.
통화를 마친 그녀는 쏟아지는 빗줄기를 바라보다가 쉼터와 연결된 노천카페에서 따뜻한 커피를 사 왔다.
비와 커피의 향이라. 생일치곤 근사하네.
이미 상현의 일은 머릿속에서 지워진 건지 커피를 마시는 그녀의 얼굴은 무심해 보였다.
커피의 향이 식어 갈 쯤, 언제 비가 내렸냐는 듯이 금세 하늘이 맑아졌다. 고궁을 나온 정윤은 서둘러 택시를 타고 회사로 향했다.
사무실에 들어서자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수진이 살았다는 듯이 만세 부르는 시늉을 했다. 정윤은 재빠르게 준비를 마치고 강의실로 향했다.
그녀의 직장인 세우와인인터내셔널은 업계에서 가장 큰 와인 수입 회사로 프랑스를 비롯한 이탈리아, 칠레, 미국 등 여러 나라에서 와인을 수입하고 판매하는 일을 한다.
판매 전략의 일환으로 와인 스쿨을 진행해 잠재적인 고객을 늘리고 여러 파티에 맞춰 와인을 공급한다. 뿐만 아니라 다양한 가격의 와인을 수입해 레스토랑과 와인 바, 칵테일 바, 백화점 등을 타깃으로 삼아 치열한 영업을 펼치고 있다. 그 덕분인지 급속하게 매출이 늘어난 회사는 몇 년 전부터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로 눈을 돌려 일본과 중국까지 영업력을 넓히는 중이었다.
정윤은 강의실에 들어가기 전에 이름표를 확인했다.
세우와인인터내셔널 영업팀 박정윤 대리.
흐뭇한 얼굴로 이름표를 만진 그녀는 와인 기초반의 수강생들과 눈인사를 나누고 강의를 시작했다.
“저번 시간에는 보르도 고급 와인의 샤토(Chateau)가 집중된 ‘오 메독 지역’과 다른 지구들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오늘은 부르고뉴 와인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먼저 포도 품종부터 보죠. 보르도 와인의 포도 품종은 카베르네 소비뇽과 메를로, 카베르네 프랑 그리고 화이트 와인의 대표 품종인 샤르도네라는 포도가 중심이 되고 부르고뉴 포도의 품종은 피노 누아입니다. 포도 품종과 테루아르(Terroir)에 따라 와인의 맛은 달라집니다. 혹시 이 중에서 부르고뉴 와인과 보르도 와인을 비교하면서 시음해 보신 분이 계신가요?”
몇 명의 수강생들이 손을 들자 정윤은 싱긋 미소를 지으며 설명을 이어 나갔다.
“보르도 와인의 등급은 샤토의 레벨과 생산자에 의해 결정되지만 부르고뉴 와인은 포도가 나는 밭에 따라 등급을 매깁니다. 포도를 재배하는 환경이 특히 뛰어난 특급 포도원은 그랑크뤼, 1급 포도원은 프리미에 크뤼, 그리고 마을이나 지역 단위의 와인으로 나뉩니다. 개인 생산자는 도멘(Domaine)으로 불립니다. 대부분 알고 계실 DRC(Domaine de la Romanee Conti)도 마을 단위에 해당됩니다. 그다음으로는 부르고뉴 루쥬가 있는데…….”
준비한 영상 자료를 띄워 놓고 한참 동안 강의하던 정윤은 수진의 도움을 받아 와인 시음 준비를 마쳤다.
“빈티지(Vintage)에 따라 다르지만 일단 등급별로 와인을 시음하면서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알아보겠습니다.”
시음 과정을 마친 후에 이어진 고객들의 주문 상황까지 점검한 정윤이 사무실로 돌아왔을 때는 벌써 퇴근 시간이었다. 직원들은 정윤의 생일을 축하하는 자리에 참석하는 이들을 체크하고 있었다. 조용히 쉬고 싶어 슬그머니 일어서던 그녀는 눈치 빠른 직원들에게 붙잡혀 술자리에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로 식사를 마치자마자 나와 단골 와인 바로 향했다.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바에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스툴에 앉자 안주를 플레이팅 하던 주영이 그녀의 안색을 살피며 다가왔다. 두 사람은 소믈리에 과정을 함께 공부하면서 친해진 사이였다.
“우울한 일 있어?”
“아니.”
“오늘 생일이지? 박정윤, 생일 축하해.”
주영의 말에 희미하게 웃던 정윤은 콧속으로 스며든 향기에 고개를 돌렸다. 조금 떨어진 자리에 깔끔한 슈트 차림의 키 큰 남자가 우아하게 와인 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가 다시 와인을 따르자 귀부 와인의 대표라 불리는 샤토 디켐의 향이 훅 끼쳐 왔다. 어렸을 때 부모님이 결혼기념일에 마시던 와인의 향이었다. 어렸을 때라 부모님과 함께 와인을 즐기진 못했지만 회사에 취직한 뒤 와인 파티를 맡았을 때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마셔 본 적이 있었다.
눈을 가늘게 떠서 슬쩍 와인의 빈티지를 확인한 정윤은 침을 꿀꺽 삼켰다. 파티에서 마셨던 맛이 생생하게 떠올라서였다. 목젖을 타고 흘러들어 가던 단맛과 독특한 향, 긴 숙성 기간을 지녔으면서 청량감을 유지하고 있던 맛과 향이 생생하게 떠오르자 저도 모르게 입안에 침이 고였다. 평소에 마시기에는 너무 비싼 와인이 그녀의 후각과 미각을 자극했다.
간신히 마셔 보고 싶다는 열망을 누르고 주영에게 주문을 했다.
“하우스 와인으로 한 잔 줘.”
정윤은 주영이 건넨 와인을 천천히 마시며 생각에 잠겼다.
생일이니 집에 와서 저녁을 먹고 가라던 신애에게 여느 때처럼 바쁘다는 핑계를 댔지만 역시나 상처 받았다.
엄마는 잊어버린 걸까. 내일이 아버지의 기일이라는 걸.
정윤은 휴대폰에서 아버지와 찍은 사진을 찾아 확대했다. 사진 속의 젊은 아버지는 어린 그녀를 안아 올리며 싱그럽게 웃고 있었다.
“우리 공주님, 생일 축하해.”
그리운 아버지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엄마와 할머니의 웃음소리도 그 뒤를 따랐다. 시간이 한참이나 흘렀는데도 왜 추억이란 건 바래지지 않는 것일까.
갑작스럽게 툭 떨어진 눈물에 사진 속 아버지의 얼굴이 흐릿해졌다. 머리를 만지는 척하며 눈물을 닦아 낸 정윤은 남은 와인을 단숨에 마셨다.
그런 그녀를 지켜보던 주영이 새 와인 잔을 내밀었다. 뭐냐는 정윤의 눈빛에 그녀는 옆자리의 남자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정윤과 시선이 마주친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이렇게 달콤한 와인은 여성분에게 어울릴 것 같습니다.”
“네? 아닙니다. 전 됐습니다.”
정윤의 거절에도 눈인사를 한 남자가 바를 나가 버리자 주영이 물었다.
“아는 사람이야?”
“전혀. 혹시 여기 단골이야?”
“아니, 오늘 처음 온 손님인데.”
정윤은 의아한 얼굴로 남자가 나간 문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
어깨를 한 번 으쓱해 보인 그녀가 결국 와인 잔을 잡았다. 달콤한 귀부 와인의 향에 취한 정윤은 다시 되돌아오지 않을 추억을 연신 되감았다. 주영이 가방을 손에 쥐여 주며 다정하게 등을 쓸어 주자 상념을 떨칠 수 있었다.
바를 나온 정윤은 택시를 타 오피스텔 앞에서 내렸다.
“박정윤!”
여전히 입안을 감돌고 있는 와인 향을 음미하면서 오피스텔 쪽으로 걸어가던 정윤은 익숙한 남자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양손에 가득 짐을 든 남자가 그녀를 보며 활짝 웃었다.
“오빠! 왔으면 연락이라도 하지. 오래 기다렸어?”
“아니.”
그의 대답에 정윤은 피식 웃었다. 그녀가 유일하게 오빠라고 부르는 사람, 권선후. 비록 그녀에게서 엄마의 존재를 가져간 사람이지만 밉지 않았다.
신애는 재혼하면서 정윤을 데려갔었다. 하지만 그 집에서 어린 정윤은 채 1년 반도 살지 못했다. 선후 할머니인 김 여사의 못마땅해하는 눈초리와 새아버지 현석의 냉담함은 어린 그녀를 두렵게 했다.
그래도 견딜 수 있었다. 그녀에겐 엄마가 있었으니까. 무서울 땐 엄마의 뒤에 숨으면 됐었다. 게다가 네 살 터울의 선후와는 친남매 못지않게 사이가 좋아서 그들의 매서운 눈빛을 애써 밀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짧은 행복은 엄마의 임신으로 끝이 났다. 엄마의 나이 때문에 태교에 더 신경을 써야 한다면서 그녀를 잠시 친할머니에게 맡기라던 김 여사 때문이었다.
신애가 무사히 아이를 낳은 후에도 정윤은 쭉 할머니와 둘이서 살아야 했다.
오피스텔에 들어온 정윤은 서둘러 상을 차리려는 선후의 모습에 생각에서 벗어났다.
“오빠, 뭐 하려고?”
“생일인데 미역국은 먹어야지.”
“저녁 먹었어.”
“어머니께서 열심히 만들어 주신 거야. 한 숟갈이라도 먹자. 얼른 손 씻고 나와.”
간단히 씻은 후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어느새 식탁에는 그녀의 생일상이 풍성하게 차려져 있었다. 선후가 어서 먹으라며 손에 수저를 쥐여 주는 바람에 정윤은 마지못해 미역국을 한 숟가락 가득 떠서 먹었다. 좀 전까지 입안에서 향기롭게 감돌던 와인 맛 때문인지 미역국이 깔깔하게 느껴졌다.
그래도 먹어야겠지.
노골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지만 정윤을 못마땅해하는 게 역력한 김 여사와 현석의 눈치를 보며 신애가 마련했을 음식들일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