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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음직스러운 잡채를 젓가락으로 집어 든 정윤의 눈가가 붉어졌다.
어렸을 때는 이해하지 못했던 그들의 미움과 냉대가 무엇 때문인지 이제는 안다.
김 여사는 제 가족 안에 이물질 같은 남의 자식이 끼어드는 것을 참을 수 없었고 아내를 몹시 사랑하는 현석 역시 신애가 정윤을 만나는 걸 꺼려 했다.
신애에게 전남편을 떠올리게 하는 존재였으니 더 그랬는지도 모른다.
게다가 정윤이 와인과 관련된 일을 선택한 것 또한 거슬렸으리라. 뛰어난 소믈리에인 동시에 와인 수입상이었던 아버지와 똑같은 일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눈가가 붉어진 정윤을 말없이 바라보던 선후가 정윤에게 물컵을 건네며 말했다.
“물 한 모금 마시고 조금만 더 먹자.”
“그럼 오빠도 같이 먹어.”
“다 뺏어 먹어도 뭐라고 하지 마라.”
선후는 정윤이 먹는 모습을 바라봤다. 붉어진 눈동자를 길고 풍성한 속눈썹으로 가리고 있는 모습에 한숨이 나왔다.
새하얀 옆 목덜미에 위아래로 콕 찍혀 있는 두 개의 작은 점을 제외하곤 새어머니와 참 많이 닮았다.
몇 년 전에 우연히 들었던 아버지와 할머니의 대화의 일부가 떠오르자 그의 눈빛에 애잔함이 가득해졌다.
아직도 할머니의 목소리가 잊히지 않았다.
“그 애 눈빛이 마음에 안 든다. 오기와 고집이 가득한 눈빛이야. 아무리 혼을 내도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마치 왜 그러느냐는 듯 뻔히 바라보기만 했어. 그 성격이 지금이라고 변했을 리가 없겠지. 순진해 보이지만 마음만 먹으면 어떤 남자든지 잡아먹을 상이야. 그러니 어떻게든 선후와 떼어 놔라. 둘이 남매처럼 사이가 좋다지만 어쨌든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남이 아니냐?”
선후는 할머니의 목소리를 떨쳐 내려는 듯 머리를 흔들었다.
그에게 정윤은 사랑스러운 동생일 뿐이다.
가족의 예쁨을 받으면서 자라는 막냇동생 지연을 볼 때마다 홀로 쓸쓸하게 살아가는 정윤에 대한 미안함과 안쓰러움이 커졌다.
“오빤 왜 안 먹어?”
“음, 먹고 있어.”
부지런히 젓가락질을 하던 선후는 빈 공간마다 책이 빽빽이 들어찬 오피스텔을 둘러보며 미소 지었다.
역시 책벌레인 정윤의 오피스텔답다는 생각을 하면서.
정윤이 회사에 입사한 해에 그녀의 할머니가 치매 판정을 받았고 1년이 지나자 병세가 심각해졌다.
결국 할머니를 요양원에 모신 정윤은 할머니와 살던 주택은 세를 주고 작은 오피스텔로 옮겨 왔다.
정윤이 배가 불러서 더는 못 먹겠다며 젓가락을 내려놓자 그가 대뜸 물었다.
“여기서 사는 거 불편하지 않아? 조금 더 큰 데로 알아보는 게 좋지 않을까?”
“여기가 편해. 안전하고 관리도 잘해 주니까 특별히 불편한 건 없어.”
“일은 어때? 힘들면 언제든지 말해.”
“일은 당연히 재밌지. 오빤 내 걱정 말고 본인이나 챙기셔. 서른셋이면 슬슬 결혼 얘기 나올 때잖아. 아직도 사귀는 사람 없어?”
“그러게. 결혼은 인연이 닿아야 한다는데 쉽지가 않네. 안 되면 어쩔 수 없이 선이라도 봐야지.”
식탁을 정리하려고 일어선 선후의 등을 밀어낸 정윤은 반찬을 냉장고에 넣고 설거지를 시작했다.
생일 케이크와 선물까지 챙겨 준 선후가 가고 나자 정윤은 고무장갑을 벗고 소파에 앉았다.
토요일인 내일은 아버지를 모신 절에 들렀다가 할머니가 계시는 요양원에 갈 계획이었다. 정윤은 아버지가 좋아하시던 와인을 가져갈 생각으로 와인셀러로 향했다.
와인을 고르고 침실로 향하려는데 배가 뒤틀리는 것을 느껴 급히 화장실로 뛰어가 먹었던 것을 다 토해 냈다.
1장. 시고 떫은 인생엔 달달한 와인이 필요해
아침 일찍 일어나 준비를 마친 정윤은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훅 끼쳐 오는 열기에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어제 내린 소나기로 잠시나마 시원해질 줄 알았더니 폭염의 기세는 꺾이지 않고 있었다.
서둘러 차에 탄 그녀는 에어컨을 최대치로 틀고 주차장을 빠져나와 복잡한 도로의 한복판으로 들어섰다.
한참을 달려 서울을 벗어나 인적이 끊긴 산속으로 들어서자 더위가 한풀 수그러진 느낌이었다. 차창을 활짝 여니 싱그러운 나무 향기를 가득 품은 바람 냄새가 났다. 정윤은 청량한 공기를 들이마시며 구불거리는 길을 달려 절에 도착했다.
어렸을 때부터 할머니를 따라 자주 다니던 절이라 익숙한 걸음으로 대웅전으로 향했다. 스님의 독경 소리에 맞춰 아버지의 극락왕생을 염원하는 절을 했다. 아버지가 하늘나라에서 행복하기를, 할머니의 남은 생이 부디 힘들지 않기를 기도하면서.
스님과 잠시 얘기를 나눈 정윤은 오솔길을 내려와 계곡의 평평한 돌에 앉았다. 신발을 벗고 바지를 걷어 올렸다. 시원한 물에 발을 담그자 다리를 타고 올라오는 서늘함이 기분 좋게 더위를 식혀 줬다. 손수건에 물을 묻혀 얼굴과 목덜미의 땀을 닦아 냈다. 다리를 쭉 뻗으며 한결 개운해진 느낌을 즐겼다.
느긋히 산의 정취를 느끼던 정윤은 자리에서 일어나 작은 아이스박스를 들고 30년은 족히 되어 보이는 나무 아래에 놓인 널찍한 바위로 갔다. 아버지가 살아 계셨을 때의 추억이 담긴 곳이었다.
할머니와 함께 절에 오곤 했지만 어린 그녀는 절보다 이곳을 더 좋아했다. 더위를 식혀 주는 시원한 물과 매끌매끌한 바위들이 가득한 이곳에서 물놀이를 하고 엄마가 준비해 온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행복한 웃음을 터뜨렸었다.
온 가족이 즐겁게 놀던 곳에 혼자 덩그러니 앉아 있자니 저도 모르게 커다란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그녀의 시선이 하늘로 향했다. 그 시절처럼 여전히 이곳의 하늘은 맑고 푸르렀다. 아담한 절도, 차가운 물이 흐르는 계곡도 변하지 않았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가족들의 삶이 왜 이렇게 변해 버린 것일까.
“아빠.”
오랜만에 불러 보는 애달픈 단어에 그리움이 물밀 듯이 몰려오자 서둘러 아이스박스에서 와인과 잔을 꺼냈다. 생전에 즐겨 드시던 화이트 와인이었다. 정윤은 와인을 잔에 부으며 말했다.
“아빠가 좋아하시던 화이트 와인이에요. 아직 햇포도주가 나오지 않아서 작년 걸로 가져왔는데 그래도 상큼하고 맛있을 거예요.”
정윤은 바위 옆의 나무 주위에 와인을 천천히 뿌렸다. 와인 한 병을 다 비우고 돌에 앉아 나무에 등을 기댔다. 고개를 드니 커다란 나뭇잎 사이로 햇살이 황금빛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얼굴에 햇볕을 가득 받으면서 눈을 감았다. 이렇게 등을 기댈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녀가 갈 수 없는 곳에서 살고 있는 엄마와 손녀를 알아보지 못하는 할머니가 아닌 따뜻한 누군가가…….
그런 바람으로 상현의 마음을 받아들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제 마음은 그에게 반응하지 않았다. 그녀의 심장과 마음은 마치 죽은 것처럼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함께한 시간이 짧아서 그런 거라고 위안하고 있을 때 그의 어머니에게 내쳐졌으니, 오히려 잘된 것이 아닐까.
깜박 잠이 들었나 보다. 눈을 떴을 때는 얼굴에 일렁이던 햇살이 옆으로 비켜나 있었다. 주춤거리며 일어난 정윤은 짐을 챙겨 트렁크에 넣은 후 요양원 방향으로 차를 몰았다.
할머니가 계시는 요양원은 절에서 차로 30분 정도의 거리에 있었다.
요양원에 도착하니 마침 점심 식사를 마쳤는지 담당 요양 보호사가 할머니의 휠체어를 밀면서 식당을 나오고 있었다.
“할머니!”
반가워하는 정윤의 목소리에 얼굴에 자잘한 주름이 가득한 여자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아가씨는 누구요?”
“할머니, 정윤이에요. 할머니 손녀요.”
“난 그런 사람 모르는데.”
요양 보호사에게 눈인사를 한 정윤이 할머니의 휠체어를 대신 밀면서 말했다.
“할머니가 좋아하는 단팥빵 사 왔어요. 음료수도요. 식사하셨으니까 이따가 한 개만 드셔야 해요.”
“단팥빵?”
단팥빵을 유난히 좋아했던 할머니의 눈에 그제야 반가운 기색이 비쳤다. 가끔 단팥빵을 사다 주는 아가씨란 걸 기억해 냈나 보다.
더위 때문에 밖으로는 나갈 수가 없었다. 정윤은 휠체어를 밀면서 복도를 몇 번 돌다가 널찍한 휴게실로 향했다. 넓은 통유리창 너머 초록이 가득한 정원과 산이 그림처럼 아름답게 다가왔다. 그사이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할머니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녀는 다정하게 할머니의 주름진 손을 잡았다.
“할머니, 아빠가 계시는 절에 들렀다 왔어요.”
“아빠?”
“사진 보여 드릴까요?”
정윤은 고개를 끄덕이는 할머니에게 가방에서 앨범을 꺼내 보여 주었다. 앳되어 보이는 할머니의 품에 안긴 갓난아기 적의 아버지 사진부터 돌아가시기 전까지의 사진을 정리해 놓은 앨범이었다.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보던 할머니가 아버지의 초등학교 사진에 반응을 보였다. 친구들과 축구를 하고 난 뒤에 찍은 사진이라 헝클어진 머리에 볼이 빨간 아버지의 사진. 한 발로 공을 차는 시늉을 하며 천진한 얼굴로 웃고 있는 아버지는 몹시 행복해 보였다.
“우리 아들 재윤이! 재윤아, 재윤아!”
앨범을 휙 뺏어 간 할머니가 연신 아버지의 사진을 쓰다듬었다. 자신이 누군지 조차 잊어버린 할머니이지만 가끔 정신이 돌아올 때가 있다. 그럴 때도 정윤은 알아보지 못했지만 아득한 기억 속의 아버지는 알아본다.
아버지의 사진에 뺨을 비비던 할머니가 물었다.
“우리 아들은 언제 오나?”
“할머니, 곧이요. 곧 아버지를 만나실 수 있을 거예요.”
“우리 재윤이가 사 달라고 떼를 썼는데. 아가씨, 자전거를 사야 해. 어디서 사는지 알아?”
“다음에 제가 사 올게요.”
앨범을 가슴에 품고 있던 할머니가 갑자기 정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아가씨는 신애를 닮았네.”
“…….”
“신애가 참 예뻤다오. 같은 동네에 살아서 우리 재윤이랑 얼마나 사이가 좋았는지 몰라. 우리 아들에게 오빠, 오빠 하면서 졸졸 따라다녔지.”
“그랬군요.”
“그런데 아가씬 누구요?”
“할머니…….”
정윤의 눈에서 기어이 참았던 눈물이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할머니의 기억 속에 그녀는 없다. 할머니가 떠올릴 수 있는 건 먼 과거뿐이다. 그 과거 속에 아버지가 있고 이따금 엄마를 기억해 내는 정도다.
서둘러 눈물을 닦아 낸 정윤은 할머니에게 단팥빵을 드렸다. 맛있게 단팥빵을 먹는 할머니에게 간간이 음료수를 먹여드리던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다시 솟구치려는 눈물을 억지로 참아 냈다.
할머니가 단팥빵을 다 드시자 정윤은 바쁘게 움직였다. 직접 할머니의 목욕을 시켜 드리고 옷을 갈아입힌 뒤 머리를 정성스럽게 말려 드렸다. 기분이 좋은지 꾸벅꾸벅 조는 할머니를 요양 보호사의 도움을 받아 침대에 눕혀 드리고 잠자는 모습을 내내 지켜보았다.
어렸을 때는 이해하지 못했던 그들의 미움과 냉대가 무엇 때문인지 이제는 안다.
김 여사는 제 가족 안에 이물질 같은 남의 자식이 끼어드는 것을 참을 수 없었고 아내를 몹시 사랑하는 현석 역시 신애가 정윤을 만나는 걸 꺼려 했다.
신애에게 전남편을 떠올리게 하는 존재였으니 더 그랬는지도 모른다.
게다가 정윤이 와인과 관련된 일을 선택한 것 또한 거슬렸으리라. 뛰어난 소믈리에인 동시에 와인 수입상이었던 아버지와 똑같은 일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눈가가 붉어진 정윤을 말없이 바라보던 선후가 정윤에게 물컵을 건네며 말했다.
“물 한 모금 마시고 조금만 더 먹자.”
“그럼 오빠도 같이 먹어.”
“다 뺏어 먹어도 뭐라고 하지 마라.”
선후는 정윤이 먹는 모습을 바라봤다. 붉어진 눈동자를 길고 풍성한 속눈썹으로 가리고 있는 모습에 한숨이 나왔다.
새하얀 옆 목덜미에 위아래로 콕 찍혀 있는 두 개의 작은 점을 제외하곤 새어머니와 참 많이 닮았다.
몇 년 전에 우연히 들었던 아버지와 할머니의 대화의 일부가 떠오르자 그의 눈빛에 애잔함이 가득해졌다.
아직도 할머니의 목소리가 잊히지 않았다.
“그 애 눈빛이 마음에 안 든다. 오기와 고집이 가득한 눈빛이야. 아무리 혼을 내도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마치 왜 그러느냐는 듯 뻔히 바라보기만 했어. 그 성격이 지금이라고 변했을 리가 없겠지. 순진해 보이지만 마음만 먹으면 어떤 남자든지 잡아먹을 상이야. 그러니 어떻게든 선후와 떼어 놔라. 둘이 남매처럼 사이가 좋다지만 어쨌든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남이 아니냐?”
선후는 할머니의 목소리를 떨쳐 내려는 듯 머리를 흔들었다.
그에게 정윤은 사랑스러운 동생일 뿐이다.
가족의 예쁨을 받으면서 자라는 막냇동생 지연을 볼 때마다 홀로 쓸쓸하게 살아가는 정윤에 대한 미안함과 안쓰러움이 커졌다.
“오빤 왜 안 먹어?”
“음, 먹고 있어.”
부지런히 젓가락질을 하던 선후는 빈 공간마다 책이 빽빽이 들어찬 오피스텔을 둘러보며 미소 지었다.
역시 책벌레인 정윤의 오피스텔답다는 생각을 하면서.
정윤이 회사에 입사한 해에 그녀의 할머니가 치매 판정을 받았고 1년이 지나자 병세가 심각해졌다.
결국 할머니를 요양원에 모신 정윤은 할머니와 살던 주택은 세를 주고 작은 오피스텔로 옮겨 왔다.
정윤이 배가 불러서 더는 못 먹겠다며 젓가락을 내려놓자 그가 대뜸 물었다.
“여기서 사는 거 불편하지 않아? 조금 더 큰 데로 알아보는 게 좋지 않을까?”
“여기가 편해. 안전하고 관리도 잘해 주니까 특별히 불편한 건 없어.”
“일은 어때? 힘들면 언제든지 말해.”
“일은 당연히 재밌지. 오빤 내 걱정 말고 본인이나 챙기셔. 서른셋이면 슬슬 결혼 얘기 나올 때잖아. 아직도 사귀는 사람 없어?”
“그러게. 결혼은 인연이 닿아야 한다는데 쉽지가 않네. 안 되면 어쩔 수 없이 선이라도 봐야지.”
식탁을 정리하려고 일어선 선후의 등을 밀어낸 정윤은 반찬을 냉장고에 넣고 설거지를 시작했다.
생일 케이크와 선물까지 챙겨 준 선후가 가고 나자 정윤은 고무장갑을 벗고 소파에 앉았다.
토요일인 내일은 아버지를 모신 절에 들렀다가 할머니가 계시는 요양원에 갈 계획이었다. 정윤은 아버지가 좋아하시던 와인을 가져갈 생각으로 와인셀러로 향했다.
와인을 고르고 침실로 향하려는데 배가 뒤틀리는 것을 느껴 급히 화장실로 뛰어가 먹었던 것을 다 토해 냈다.
1장. 시고 떫은 인생엔 달달한 와인이 필요해
아침 일찍 일어나 준비를 마친 정윤은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훅 끼쳐 오는 열기에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어제 내린 소나기로 잠시나마 시원해질 줄 알았더니 폭염의 기세는 꺾이지 않고 있었다.
서둘러 차에 탄 그녀는 에어컨을 최대치로 틀고 주차장을 빠져나와 복잡한 도로의 한복판으로 들어섰다.
한참을 달려 서울을 벗어나 인적이 끊긴 산속으로 들어서자 더위가 한풀 수그러진 느낌이었다. 차창을 활짝 여니 싱그러운 나무 향기를 가득 품은 바람 냄새가 났다. 정윤은 청량한 공기를 들이마시며 구불거리는 길을 달려 절에 도착했다.
어렸을 때부터 할머니를 따라 자주 다니던 절이라 익숙한 걸음으로 대웅전으로 향했다. 스님의 독경 소리에 맞춰 아버지의 극락왕생을 염원하는 절을 했다. 아버지가 하늘나라에서 행복하기를, 할머니의 남은 생이 부디 힘들지 않기를 기도하면서.
스님과 잠시 얘기를 나눈 정윤은 오솔길을 내려와 계곡의 평평한 돌에 앉았다. 신발을 벗고 바지를 걷어 올렸다. 시원한 물에 발을 담그자 다리를 타고 올라오는 서늘함이 기분 좋게 더위를 식혀 줬다. 손수건에 물을 묻혀 얼굴과 목덜미의 땀을 닦아 냈다. 다리를 쭉 뻗으며 한결 개운해진 느낌을 즐겼다.
느긋히 산의 정취를 느끼던 정윤은 자리에서 일어나 작은 아이스박스를 들고 30년은 족히 되어 보이는 나무 아래에 놓인 널찍한 바위로 갔다. 아버지가 살아 계셨을 때의 추억이 담긴 곳이었다.
할머니와 함께 절에 오곤 했지만 어린 그녀는 절보다 이곳을 더 좋아했다. 더위를 식혀 주는 시원한 물과 매끌매끌한 바위들이 가득한 이곳에서 물놀이를 하고 엄마가 준비해 온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행복한 웃음을 터뜨렸었다.
온 가족이 즐겁게 놀던 곳에 혼자 덩그러니 앉아 있자니 저도 모르게 커다란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그녀의 시선이 하늘로 향했다. 그 시절처럼 여전히 이곳의 하늘은 맑고 푸르렀다. 아담한 절도, 차가운 물이 흐르는 계곡도 변하지 않았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가족들의 삶이 왜 이렇게 변해 버린 것일까.
“아빠.”
오랜만에 불러 보는 애달픈 단어에 그리움이 물밀 듯이 몰려오자 서둘러 아이스박스에서 와인과 잔을 꺼냈다. 생전에 즐겨 드시던 화이트 와인이었다. 정윤은 와인을 잔에 부으며 말했다.
“아빠가 좋아하시던 화이트 와인이에요. 아직 햇포도주가 나오지 않아서 작년 걸로 가져왔는데 그래도 상큼하고 맛있을 거예요.”
정윤은 바위 옆의 나무 주위에 와인을 천천히 뿌렸다. 와인 한 병을 다 비우고 돌에 앉아 나무에 등을 기댔다. 고개를 드니 커다란 나뭇잎 사이로 햇살이 황금빛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얼굴에 햇볕을 가득 받으면서 눈을 감았다. 이렇게 등을 기댈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녀가 갈 수 없는 곳에서 살고 있는 엄마와 손녀를 알아보지 못하는 할머니가 아닌 따뜻한 누군가가…….
그런 바람으로 상현의 마음을 받아들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제 마음은 그에게 반응하지 않았다. 그녀의 심장과 마음은 마치 죽은 것처럼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함께한 시간이 짧아서 그런 거라고 위안하고 있을 때 그의 어머니에게 내쳐졌으니, 오히려 잘된 것이 아닐까.
깜박 잠이 들었나 보다. 눈을 떴을 때는 얼굴에 일렁이던 햇살이 옆으로 비켜나 있었다. 주춤거리며 일어난 정윤은 짐을 챙겨 트렁크에 넣은 후 요양원 방향으로 차를 몰았다.
할머니가 계시는 요양원은 절에서 차로 30분 정도의 거리에 있었다.
요양원에 도착하니 마침 점심 식사를 마쳤는지 담당 요양 보호사가 할머니의 휠체어를 밀면서 식당을 나오고 있었다.
“할머니!”
반가워하는 정윤의 목소리에 얼굴에 자잘한 주름이 가득한 여자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아가씨는 누구요?”
“할머니, 정윤이에요. 할머니 손녀요.”
“난 그런 사람 모르는데.”
요양 보호사에게 눈인사를 한 정윤이 할머니의 휠체어를 대신 밀면서 말했다.
“할머니가 좋아하는 단팥빵 사 왔어요. 음료수도요. 식사하셨으니까 이따가 한 개만 드셔야 해요.”
“단팥빵?”
단팥빵을 유난히 좋아했던 할머니의 눈에 그제야 반가운 기색이 비쳤다. 가끔 단팥빵을 사다 주는 아가씨란 걸 기억해 냈나 보다.
더위 때문에 밖으로는 나갈 수가 없었다. 정윤은 휠체어를 밀면서 복도를 몇 번 돌다가 널찍한 휴게실로 향했다. 넓은 통유리창 너머 초록이 가득한 정원과 산이 그림처럼 아름답게 다가왔다. 그사이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할머니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녀는 다정하게 할머니의 주름진 손을 잡았다.
“할머니, 아빠가 계시는 절에 들렀다 왔어요.”
“아빠?”
“사진 보여 드릴까요?”
정윤은 고개를 끄덕이는 할머니에게 가방에서 앨범을 꺼내 보여 주었다. 앳되어 보이는 할머니의 품에 안긴 갓난아기 적의 아버지 사진부터 돌아가시기 전까지의 사진을 정리해 놓은 앨범이었다.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보던 할머니가 아버지의 초등학교 사진에 반응을 보였다. 친구들과 축구를 하고 난 뒤에 찍은 사진이라 헝클어진 머리에 볼이 빨간 아버지의 사진. 한 발로 공을 차는 시늉을 하며 천진한 얼굴로 웃고 있는 아버지는 몹시 행복해 보였다.
“우리 아들 재윤이! 재윤아, 재윤아!”
앨범을 휙 뺏어 간 할머니가 연신 아버지의 사진을 쓰다듬었다. 자신이 누군지 조차 잊어버린 할머니이지만 가끔 정신이 돌아올 때가 있다. 그럴 때도 정윤은 알아보지 못했지만 아득한 기억 속의 아버지는 알아본다.
아버지의 사진에 뺨을 비비던 할머니가 물었다.
“우리 아들은 언제 오나?”
“할머니, 곧이요. 곧 아버지를 만나실 수 있을 거예요.”
“우리 재윤이가 사 달라고 떼를 썼는데. 아가씨, 자전거를 사야 해. 어디서 사는지 알아?”
“다음에 제가 사 올게요.”
앨범을 가슴에 품고 있던 할머니가 갑자기 정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아가씨는 신애를 닮았네.”
“…….”
“신애가 참 예뻤다오. 같은 동네에 살아서 우리 재윤이랑 얼마나 사이가 좋았는지 몰라. 우리 아들에게 오빠, 오빠 하면서 졸졸 따라다녔지.”
“그랬군요.”
“그런데 아가씬 누구요?”
“할머니…….”
정윤의 눈에서 기어이 참았던 눈물이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할머니의 기억 속에 그녀는 없다. 할머니가 떠올릴 수 있는 건 먼 과거뿐이다. 그 과거 속에 아버지가 있고 이따금 엄마를 기억해 내는 정도다.
서둘러 눈물을 닦아 낸 정윤은 할머니에게 단팥빵을 드렸다. 맛있게 단팥빵을 먹는 할머니에게 간간이 음료수를 먹여드리던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다시 솟구치려는 눈물을 억지로 참아 냈다.
할머니가 단팥빵을 다 드시자 정윤은 바쁘게 움직였다. 직접 할머니의 목욕을 시켜 드리고 옷을 갈아입힌 뒤 머리를 정성스럽게 말려 드렸다. 기분이 좋은지 꾸벅꾸벅 조는 할머니를 요양 보호사의 도움을 받아 침대에 눕혀 드리고 잠자는 모습을 내내 지켜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