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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 손님, 괜찮으세요? 어디가 많이 안 좋으신가요?”
흔들어 깨우는 손길에 해인이 눈을 번쩍 떴다. 승무원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해인은 그제야 온몸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있는 것을 알았다.
“괜찮습니다.”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몇 번이고 물어 오는 승무원을 안심시키고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 내는 사이 비행기는 어느새 인천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사고 후 오래 지나지 않아 민수와 은하가 결혼을 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아이는 어떻게 되었는지 모른다. 그간의 사정에 대해 묻고, 들을 여유 같은 건 없었으니까.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했다. 모든 것을 잃은 건 자신뿐이다.
게이트를 빠져나오자 유진과 영준의 모습의 보였다.
“오빠!”
한달음에 달려온 유진이 해인의 품에 안겼다. 귀여운 얼굴에 애교가 많은 유진은 해인의 약혼녀였다. 해인은 그녀를 제게서 떼어 내며 말했다.
“땀 많이 흘렸어.”
“괜찮아. 오빠는 땀 냄새도 좋아.”
오히려 더 매달려 오는 유진을 더 말릴 기운도 없었다.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몇 걸음 뒤에 서서 해인과 유진의 재회를 지켜보고 있던 영준이 말했다.
“잘 지냈지?”
“네.”
“나 어디로 가면 돼?”
“회사에서 마련해 둔 곳이 있습니다. 바로 모시겠습니다.”
영준이 해인의 짐 하나를 받아 들었다.
“오빠, 나도 가도 돼? 나도 갈래, 응?”
“다음에. 짐 정리도 해야 하고 할 일 많아.”
“같이 하면 되잖아. 우리 얼마 만에 보는 건지 알아?”
볼멘소리로 투덜거리는 유진을 보며 해인은 조금 어이가 없었다. 지난 3년 간 샌프란시스코에서 내내 옆집에 살았었다. 고작 일주일 전에 먼저 한국으로 돌아왔던 터라 엄청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사람처럼 구는 건 무리가 있어 보였다.
“일주일밖에 안 됐어.”
“일주일씩이나지!”
“아무튼 다음에.”
더는 졸라 봐야 소용없다는 걸 알고 있는 유진은 깨끗이 물러났다. 해인은 유진을 먼저 보내고 영준의 차에 올라탔다.
그날 사고로 해인의 가족은 그 자리에서 모두 사망했다. 처음엔 받아들이지 못했고, 그다음엔 부정했으며, 결국 받아들여야 할 수밖에 없음을 깨달았을 때 해인은 미련 없이 손목을 그었다.
차마 혼자 살아갈 수 없어 내린 결정이었지만 죽음은 매번 그의 등을 떠밀고, 삶은 그의 손을 움켜쥐었다. 해인은 삶을 저주했다. 이렇게 살아남은 것이 무슨 의미가 있냐고 외쳐 묻고 싶었지만 그 해답은 스스로 찾아야 했다.
“운전자는 현장에서 사망했다고 합니다.”
영준이 조사해 온 서류를 건네며 말했다.
해인은 유진과 함께 먼저 귀국한 영준에게 사고에 대해 알아보도록 지시했었다. 상대 운전자의 졸음운전으로 인해 일어난 사고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당시에는 너무 충격이 커서 더 알아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사고로 살아남은 사람은 운전자와 동승하고 있었던 여자뿐입니다.”
사고가 난 지점과 방향, 그리고 남자와 여자가 다니던 회사 위치로 보아 정황상 남자가 여자를 데리고 돌아가는 길에 일어난 사고가 분명했다.
서류에는 홀로 살아남은 여자가 일하고 있다는 카페 위치가 적혀 있었다.
해인은 그 밤으로부터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했다. 매일 밤 꿈에 피투성이의 가족들이 나타나 수면제가 아니면 잠을 자지 못했다. 일에 미친 듯이 몰두하는 것만이 유일한 구원이었다. 덕분에 또래들에 비해 높은 위치까지 올라갔지만 마음은 그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았다.
상처 또한 조금도 아물지 않았다. 그래서 궁금했다. 자신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그녀가 어떻게,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지.
잠시 뒤 해인이 도착한 곳은 변두리에 있는 아주 작은 카페였다. 끊임없이 사람들이 드나들었다. 나무 간판에는 삐뚤삐뚤한 글씨로 ‘카페 봄’이라고 쓰여 있었다.
비가 내려 우산을 쓴 채 해인은 유리창 너머로 윤소의 모습을 쳐다보았다. 서류에 사진이 있었기 때문에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아담한 키에 하얀 얼굴을 가진 미인이었다. 서로에게 일어났던 불행한 일이 아니라면 한눈에 반했을지도 모를 정도로.
윤소는 딸기를 만지작거리며 옆에 있는 남자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작게 미소를 지었다. 그 잔잔한 미소를 잠시 지켜보다가 발걸음을 옮겼다.
해인은 그다음 날도 카페를 찾았다. 이번에도 밖에서 그냥 지켜보기만 했다. 오늘은 옆에 남자가 한 명 더 있었다. 다람쥐처럼 부산스럽게 뛰어다니는 남자가 무슨 말을 하면 윤소는 어제보다 조금 더 크게 웃었다.
또 그다음 날, 다다음날까지 카페 주변을 서성이며 해인은 윤소를 관찰했다. 이제는 조금 더 가까이에서 그녀를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사이 윤소는 꽤 오래 전부터 끈기 있게 치근거리던 손님 때문에 곤란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그러지 말고 오늘 저녁에 같이 영화라도 한 편 어때요?”
“죄송해요. 오늘은 안 될 것 같아요.”
“되는 날이 언젠데요. 그때 맞춰서 예매할게요. 어떤 영화 좋아해요? 액션? 코미디?”
싫으면 똑 부러지게 거절하면 그만이라는 건 알지만 카페의 오랜 단골손님이라 그럴 수가 없었다. 윤소는 제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최대한 정중하게 거절의 의사를 밝혔다.
“영화는 잘 안 봐서요.”
“그럼 밥만 먹어도 괜찮아요. 네? 윤소 씨.”
계산대 앞에서 좀처럼 떠날 줄 모르는 남자 옆에 와서 선 해인이 말했다.
“주문 다 하셨습니까?”
“아, 네. 하시죠.”
남자는 못내 아쉬운 얼굴이었지만 윤소는 마침 나타나 준 손님이 너무 고마웠다.
“주문하시겠어요?”
환한 미소의 윤소가 물었다. 그 미소에 담긴 여러 가지 의미를 그때의 해인은 몰랐다.
지금 이 순간, 해인은 너무도 분명하게 윤소는 자신과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이미 되찾은 일상을 살아가고 있었다. 남자들에 둘러싸여 웃고 떠들며.
남겨진 자의 상실감은 자신만의 것이었다. 물론 섣부른 판단일지도 모른다. 겉으로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닐지도.
“손님?”
윤소가 아무 말 없이 서 있는 해인을 불렀다. 퍼뜩 정신을 차린 해인은 대충 생각나는 메뉴를 주문했다.
“그린 티 라테 한 잔 부탁합니다.”
잘 마시지도 않는 메뉴를 사 가지고 나오며 해인은 잠시 바깥의 시선으로 안을 쳐다보았다. 해인이 나가자마자 다시 계산대 앞에 선 남자가 윤소를 향해 말을 건네고 있었다.
윤소가 지난 3년 간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살아왔는지 해인으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다만 미루어 짐작할 뿐, 지금의 윤소가 어떤지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겉으로 보이는 것이 다였다.
해인 스스로도 그 사고는 불행한 사고에 지나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누구도 탓할 수 없다는 것 또한. 하지만 조금 억울해졌다. 죽지 못해 사는 자신과는 너무도 다른 삶을 살고 있는 그녀를 보며 까닭 모를 분노를 품었다.
그녀는 적어도 조금 더 불행해야 맞았다. 그녀의 약혼자가 그녀를 데리러 가지 않았더라면 죽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사고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자신의 가족 또한 죽지 않았을 것이다.
해인은 윤소가 싫었다. 그녀가 조금 더 불행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고통스러운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지금 이 시점에서 타당한 명분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다. 해인에게는 마음껏 증오할 수 있는 대상이 필요했다. 가족을 잃은 사고였고, 아직 무엇도 극복하지 못한 그에게 이성적인 판단은 가족이 전부 살아 돌아오는 일만큼이나 어려운 것이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정윤소는 마땅한 죄를 지었으므로.
* * *
아직 카페를 열 시간이 되지 않았는데 문이 열렸다. 신우일까 싶었지만 손님이었다.
“저 죄송하지만 아직 오픈 시간이 되지 않아서요.”
윤소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상대에게 부정적인 의미를 전달하는 건 참 곤혹스러운 일이었다.
“아, 죄송합니다. 문이 열려 있기에.”
돌아서는 남자를 잠시 쳐다보던 윤소는 아무리 그래도 손님을 이런 식으로 돌려보내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에서 자신은 무언가를 결정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카페는 신우의 얼굴이나 다름없었다. 그가 오랜 시간 공들여 쌓은 탑을 무너트릴 만한 행동은 하고 싶지 않았다.
“저기.”
윤소가 막 문을 여는 남자에게 말했다.
“네?”
“괜찮으시다면 이거라도…….”
윤소는 제가 마시려고 내려 두었던 커피를 내밀었다.
“커피는 원래 사장님이 내리셔서요. 맛은 좀 없겠지만.”
“…….”
“날이 추우니까요.”
잠시 말없이 서 있던 남자가 이내 웃으며 커피를 받아 들었다.
“감사합니다.”
지갑을 열어 카드를 꺼내려 하자 윤소가 손을 흔들었다.
“계산은 안 하셔도 괜찮아요. 돈 받고 팔 수 있는 커피가 아니라서요.”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대신 다음에는 사장님 계실 때 와 주세요. 정말 맛있거든요.”
“꼭 그러겠습니다. 잘 마실게요.”
컵을 살짝 들어 보인 남자가 카페를 나섰다. 여운을 남기며 작아지던 종소리가 완전히 멈추고 나서야 윤소는 드립 서버로 눈을 돌렸다. 남아 있는 양이 거의 없었다.
윤소는 아침에 딱 한 번밖에 커피를 마시지 않았다. 신우는 마시고 싶을 때 언제든 마셔도 좋다고 했지만. 그 한 잔의 커피를 양보할 수밖에 없는 아침이었지만 후회는 하지 않았다.
카페를 나선 해인은 저만치서 윤소의 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한참을 바쁘게 움직이던 윤소는 무엇을 하는지 이제는 보이지 않았다.
오픈 시간이 아님을 알고도 문을 열고 들어간 건 다분히 의도적이었다. 아무도 없는 사이에 방해받지 않고 그녀를 만나 보고 싶었다. 윤소는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아 보였다. 그 한 번으로 기억할 수 있을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넘치도록 담아 준 커피를 본다. 그 여자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쓸데없는 친절이었다. 해인은 들고 있던 커피를 화단에 쏟아 버렸다.
“그럴 필요 없어요, 앞으로.”
윤소로부터 오픈 시간 전에 찾아왔던 손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신우가 단호하게 말했다. 앞으로 또 그런 일이 생길 것을 대비해 물어보고자 꺼낸 말이었다.
“그치만…….”
“한 번 시작하면 계속 해 줘야 되요. 고마워하지도 않을 거고요. 그러니까 윤소 씨 개인적인 시간까지 뺏겨 가며 그러지 않아도 되요. 사장인 내가 안 된다는데 누가 뭐라고 할 거야.”
“네.”
“문 앞에 시간 다 써 있는데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예의가 없네요.”
윤소는 잠시 아침에 보았던 남자의 얼굴을 떠올렸다. 우수에 젖은 눈동자가 인상적인 사람이었다.
“윤소 씨, 오늘 카페 문 닫고 같이 꽃 시장에 가죠.”
“아, 네.”
신우는 2주에 한 번 혹은 한 달에 한 번 꽃 시장에 갔다. 주로 산세비에리아 같은 관엽 식물을 샀지만 가끔 꽃이 피는 화분을 사기도 했다. 버스로 두세 정거장 정도의 거리를 항상 걸어서 갔는데, 자동차로 가면 금방인 거리를 굳이 걸어서 가는 건 윤소 때문이었다.
흔들어 깨우는 손길에 해인이 눈을 번쩍 떴다. 승무원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해인은 그제야 온몸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있는 것을 알았다.
“괜찮습니다.”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몇 번이고 물어 오는 승무원을 안심시키고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 내는 사이 비행기는 어느새 인천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사고 후 오래 지나지 않아 민수와 은하가 결혼을 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아이는 어떻게 되었는지 모른다. 그간의 사정에 대해 묻고, 들을 여유 같은 건 없었으니까.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했다. 모든 것을 잃은 건 자신뿐이다.
게이트를 빠져나오자 유진과 영준의 모습의 보였다.
“오빠!”
한달음에 달려온 유진이 해인의 품에 안겼다. 귀여운 얼굴에 애교가 많은 유진은 해인의 약혼녀였다. 해인은 그녀를 제게서 떼어 내며 말했다.
“땀 많이 흘렸어.”
“괜찮아. 오빠는 땀 냄새도 좋아.”
오히려 더 매달려 오는 유진을 더 말릴 기운도 없었다.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몇 걸음 뒤에 서서 해인과 유진의 재회를 지켜보고 있던 영준이 말했다.
“잘 지냈지?”
“네.”
“나 어디로 가면 돼?”
“회사에서 마련해 둔 곳이 있습니다. 바로 모시겠습니다.”
영준이 해인의 짐 하나를 받아 들었다.
“오빠, 나도 가도 돼? 나도 갈래, 응?”
“다음에. 짐 정리도 해야 하고 할 일 많아.”
“같이 하면 되잖아. 우리 얼마 만에 보는 건지 알아?”
볼멘소리로 투덜거리는 유진을 보며 해인은 조금 어이가 없었다. 지난 3년 간 샌프란시스코에서 내내 옆집에 살았었다. 고작 일주일 전에 먼저 한국으로 돌아왔던 터라 엄청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사람처럼 구는 건 무리가 있어 보였다.
“일주일밖에 안 됐어.”
“일주일씩이나지!”
“아무튼 다음에.”
더는 졸라 봐야 소용없다는 걸 알고 있는 유진은 깨끗이 물러났다. 해인은 유진을 먼저 보내고 영준의 차에 올라탔다.
그날 사고로 해인의 가족은 그 자리에서 모두 사망했다. 처음엔 받아들이지 못했고, 그다음엔 부정했으며, 결국 받아들여야 할 수밖에 없음을 깨달았을 때 해인은 미련 없이 손목을 그었다.
차마 혼자 살아갈 수 없어 내린 결정이었지만 죽음은 매번 그의 등을 떠밀고, 삶은 그의 손을 움켜쥐었다. 해인은 삶을 저주했다. 이렇게 살아남은 것이 무슨 의미가 있냐고 외쳐 묻고 싶었지만 그 해답은 스스로 찾아야 했다.
“운전자는 현장에서 사망했다고 합니다.”
영준이 조사해 온 서류를 건네며 말했다.
해인은 유진과 함께 먼저 귀국한 영준에게 사고에 대해 알아보도록 지시했었다. 상대 운전자의 졸음운전으로 인해 일어난 사고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당시에는 너무 충격이 커서 더 알아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사고로 살아남은 사람은 운전자와 동승하고 있었던 여자뿐입니다.”
사고가 난 지점과 방향, 그리고 남자와 여자가 다니던 회사 위치로 보아 정황상 남자가 여자를 데리고 돌아가는 길에 일어난 사고가 분명했다.
서류에는 홀로 살아남은 여자가 일하고 있다는 카페 위치가 적혀 있었다.
해인은 그 밤으로부터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했다. 매일 밤 꿈에 피투성이의 가족들이 나타나 수면제가 아니면 잠을 자지 못했다. 일에 미친 듯이 몰두하는 것만이 유일한 구원이었다. 덕분에 또래들에 비해 높은 위치까지 올라갔지만 마음은 그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았다.
상처 또한 조금도 아물지 않았다. 그래서 궁금했다. 자신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그녀가 어떻게,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지.
잠시 뒤 해인이 도착한 곳은 변두리에 있는 아주 작은 카페였다. 끊임없이 사람들이 드나들었다. 나무 간판에는 삐뚤삐뚤한 글씨로 ‘카페 봄’이라고 쓰여 있었다.
비가 내려 우산을 쓴 채 해인은 유리창 너머로 윤소의 모습을 쳐다보았다. 서류에 사진이 있었기 때문에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아담한 키에 하얀 얼굴을 가진 미인이었다. 서로에게 일어났던 불행한 일이 아니라면 한눈에 반했을지도 모를 정도로.
윤소는 딸기를 만지작거리며 옆에 있는 남자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작게 미소를 지었다. 그 잔잔한 미소를 잠시 지켜보다가 발걸음을 옮겼다.
해인은 그다음 날도 카페를 찾았다. 이번에도 밖에서 그냥 지켜보기만 했다. 오늘은 옆에 남자가 한 명 더 있었다. 다람쥐처럼 부산스럽게 뛰어다니는 남자가 무슨 말을 하면 윤소는 어제보다 조금 더 크게 웃었다.
또 그다음 날, 다다음날까지 카페 주변을 서성이며 해인은 윤소를 관찰했다. 이제는 조금 더 가까이에서 그녀를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사이 윤소는 꽤 오래 전부터 끈기 있게 치근거리던 손님 때문에 곤란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그러지 말고 오늘 저녁에 같이 영화라도 한 편 어때요?”
“죄송해요. 오늘은 안 될 것 같아요.”
“되는 날이 언젠데요. 그때 맞춰서 예매할게요. 어떤 영화 좋아해요? 액션? 코미디?”
싫으면 똑 부러지게 거절하면 그만이라는 건 알지만 카페의 오랜 단골손님이라 그럴 수가 없었다. 윤소는 제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최대한 정중하게 거절의 의사를 밝혔다.
“영화는 잘 안 봐서요.”
“그럼 밥만 먹어도 괜찮아요. 네? 윤소 씨.”
계산대 앞에서 좀처럼 떠날 줄 모르는 남자 옆에 와서 선 해인이 말했다.
“주문 다 하셨습니까?”
“아, 네. 하시죠.”
남자는 못내 아쉬운 얼굴이었지만 윤소는 마침 나타나 준 손님이 너무 고마웠다.
“주문하시겠어요?”
환한 미소의 윤소가 물었다. 그 미소에 담긴 여러 가지 의미를 그때의 해인은 몰랐다.
지금 이 순간, 해인은 너무도 분명하게 윤소는 자신과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이미 되찾은 일상을 살아가고 있었다. 남자들에 둘러싸여 웃고 떠들며.
남겨진 자의 상실감은 자신만의 것이었다. 물론 섣부른 판단일지도 모른다. 겉으로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닐지도.
“손님?”
윤소가 아무 말 없이 서 있는 해인을 불렀다. 퍼뜩 정신을 차린 해인은 대충 생각나는 메뉴를 주문했다.
“그린 티 라테 한 잔 부탁합니다.”
잘 마시지도 않는 메뉴를 사 가지고 나오며 해인은 잠시 바깥의 시선으로 안을 쳐다보았다. 해인이 나가자마자 다시 계산대 앞에 선 남자가 윤소를 향해 말을 건네고 있었다.
윤소가 지난 3년 간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살아왔는지 해인으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다만 미루어 짐작할 뿐, 지금의 윤소가 어떤지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겉으로 보이는 것이 다였다.
해인 스스로도 그 사고는 불행한 사고에 지나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누구도 탓할 수 없다는 것 또한. 하지만 조금 억울해졌다. 죽지 못해 사는 자신과는 너무도 다른 삶을 살고 있는 그녀를 보며 까닭 모를 분노를 품었다.
그녀는 적어도 조금 더 불행해야 맞았다. 그녀의 약혼자가 그녀를 데리러 가지 않았더라면 죽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사고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자신의 가족 또한 죽지 않았을 것이다.
해인은 윤소가 싫었다. 그녀가 조금 더 불행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고통스러운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지금 이 시점에서 타당한 명분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다. 해인에게는 마음껏 증오할 수 있는 대상이 필요했다. 가족을 잃은 사고였고, 아직 무엇도 극복하지 못한 그에게 이성적인 판단은 가족이 전부 살아 돌아오는 일만큼이나 어려운 것이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정윤소는 마땅한 죄를 지었으므로.
* * *
아직 카페를 열 시간이 되지 않았는데 문이 열렸다. 신우일까 싶었지만 손님이었다.
“저 죄송하지만 아직 오픈 시간이 되지 않아서요.”
윤소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상대에게 부정적인 의미를 전달하는 건 참 곤혹스러운 일이었다.
“아, 죄송합니다. 문이 열려 있기에.”
돌아서는 남자를 잠시 쳐다보던 윤소는 아무리 그래도 손님을 이런 식으로 돌려보내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에서 자신은 무언가를 결정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카페는 신우의 얼굴이나 다름없었다. 그가 오랜 시간 공들여 쌓은 탑을 무너트릴 만한 행동은 하고 싶지 않았다.
“저기.”
윤소가 막 문을 여는 남자에게 말했다.
“네?”
“괜찮으시다면 이거라도…….”
윤소는 제가 마시려고 내려 두었던 커피를 내밀었다.
“커피는 원래 사장님이 내리셔서요. 맛은 좀 없겠지만.”
“…….”
“날이 추우니까요.”
잠시 말없이 서 있던 남자가 이내 웃으며 커피를 받아 들었다.
“감사합니다.”
지갑을 열어 카드를 꺼내려 하자 윤소가 손을 흔들었다.
“계산은 안 하셔도 괜찮아요. 돈 받고 팔 수 있는 커피가 아니라서요.”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대신 다음에는 사장님 계실 때 와 주세요. 정말 맛있거든요.”
“꼭 그러겠습니다. 잘 마실게요.”
컵을 살짝 들어 보인 남자가 카페를 나섰다. 여운을 남기며 작아지던 종소리가 완전히 멈추고 나서야 윤소는 드립 서버로 눈을 돌렸다. 남아 있는 양이 거의 없었다.
윤소는 아침에 딱 한 번밖에 커피를 마시지 않았다. 신우는 마시고 싶을 때 언제든 마셔도 좋다고 했지만. 그 한 잔의 커피를 양보할 수밖에 없는 아침이었지만 후회는 하지 않았다.
카페를 나선 해인은 저만치서 윤소의 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한참을 바쁘게 움직이던 윤소는 무엇을 하는지 이제는 보이지 않았다.
오픈 시간이 아님을 알고도 문을 열고 들어간 건 다분히 의도적이었다. 아무도 없는 사이에 방해받지 않고 그녀를 만나 보고 싶었다. 윤소는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아 보였다. 그 한 번으로 기억할 수 있을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넘치도록 담아 준 커피를 본다. 그 여자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쓸데없는 친절이었다. 해인은 들고 있던 커피를 화단에 쏟아 버렸다.
“그럴 필요 없어요, 앞으로.”
윤소로부터 오픈 시간 전에 찾아왔던 손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신우가 단호하게 말했다. 앞으로 또 그런 일이 생길 것을 대비해 물어보고자 꺼낸 말이었다.
“그치만…….”
“한 번 시작하면 계속 해 줘야 되요. 고마워하지도 않을 거고요. 그러니까 윤소 씨 개인적인 시간까지 뺏겨 가며 그러지 않아도 되요. 사장인 내가 안 된다는데 누가 뭐라고 할 거야.”
“네.”
“문 앞에 시간 다 써 있는데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예의가 없네요.”
윤소는 잠시 아침에 보았던 남자의 얼굴을 떠올렸다. 우수에 젖은 눈동자가 인상적인 사람이었다.
“윤소 씨, 오늘 카페 문 닫고 같이 꽃 시장에 가죠.”
“아, 네.”
신우는 2주에 한 번 혹은 한 달에 한 번 꽃 시장에 갔다. 주로 산세비에리아 같은 관엽 식물을 샀지만 가끔 꽃이 피는 화분을 사기도 했다. 버스로 두세 정거장 정도의 거리를 항상 걸어서 갔는데, 자동차로 가면 금방인 거리를 굳이 걸어서 가는 건 윤소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