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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안에 머물러

1화



· 일러두기

본문 중에 외국어 대화는 「」로 표기했습니다.



#프롤로그



이제는 잊어야지 원래 그랬던 것처럼. 헤어날 수 없는 그리움에 잠 못 이루어도. 애모하는 맘이 깊고 질겨도. 흐렸다 밝아지는 달그림자 이지러짐을 예고한다면 감추고 숨겨야지. 부스러기로 남은 동정과 아주 작은 따스함이라도 붙잡고 싶은 마음 묻어 두어야지. 그리움이 독이 되지 않도록. 미련을 남겨 구차하지 않도록.

잘라 내도 잘라 내도 어느새 덩굴처럼 칭칭 감긴 올가미. 뒤늦은 후회가 덫이 되어 나의 목을 조른다. 잘라 냈지만 뿌리는 뽑히지 않았었나.

잊었겠지, 이만하면 되었겠지 위안하며 외면했지만 작은 기척에도 크게 반응하는 내가 무색하고 초라하다.

미움과 원망으로 시간을 허비하기에 짧은 인생이란 걸 알고 있지만 인간이기에 용서가 어렵고 힘들다. 죄는 미워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 이성적 판단이 지배할 땐 옳은 말일지라도 내 일이 된 경우엔 쉽지 않은 실천.

잘못된 자는 죄를 받아야 한다. 그 생각엔 변함없다. 왜냐하면 잘못한 사람을 내가 용서해 준다고 용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진정으로 뉘우쳐야 용서되기 때문이다. 진정한 용서를 받기 위해 진심으로 눈물을 흘릴 때야 난 비로소 악함을 잠재우고 평온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무너뜨리고 쓰러뜨리고 죽여야만 복수가 아니다. 평생 지은 죄의 무게를 체감하고 고통 속에 잠들지 못하는 생지옥이란 걸 알게 해 주고 싶다. 세상에 정의란 게 존재한다면.

용서하기 위해, 다시 사랑하기 위해 조금씩 조금씩 마음을 비워 가는 여자의 이야기.



#1장



햇살이 사선으로 비껴 흘러 두 남녀를 비추고 있었다. 빛이 내리는 그림자의 양면처럼 남자의 얼굴엔 승리감이, 여자의 얼굴엔 체념과는 다른 어떤 무엇이 찰나 비쳤다 사라졌다. 여자의 올곧은 시선은 정면과 아래를 향해 있지만 남자의 시선은 맞은편 여자 측을 살피듯 응시하고 있었다.

젊은 남자와 아름다운 여자의 간격은 제법 멀리 떨어져 있지만 끈끈한 인연의 실이 칭칭 그들을 감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무형의 실이었다.

분위기가 차분한 가운데 투표가 시작되었고 결과가 발표되었다.

“긴급 소집으로 상장된 안건이 과반수 이상의 찬성으로 가결되었습니다. 이로써 AD캐피탈이 해성그룹에 합병됨을 선언합니다. 제반 세부 사항은 신속히 논의하도록 하겠습니다.”

조용한 침묵이 흘렀다. 모두의 시선이 정중앙에 꽂혔지만 시선을 받는 당사자인 젊은 여자의 얼굴은 평온했다. 중병으로 인해 구속 집행 정지 상태로 자택에 구금 중인 문영강 사장의 외동딸 문손하였다.

작고 화장기 없는 하얀 얼굴, 야리야리한 몸매가 처연함을 더하고 있었다. 얼굴 절반을 차지한 커다란 검은 눈망울엔 아무런 감정이 담겨 있지 않았다. 충격이라면 충격일 상황에 젊은 여자는 변호사를 대동하고 나타나 귓속말로 의견을 주고받을 뿐, 이렇다 저렇다 큰소리 한 번 내지 않고 고개만 주억거렸다.

임원진은 복잡한 내부 사정을 몰라 그러는 것이라 짐작했지만 정작 그녀 곁에 자리한 박병호 변호사는 혀를 내두르고 있었다.

그녀는 누구보다 회사 합병에 대해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법정 절차에 따라 해산하여도 청산 절차를 요하지 않으며, 사원의 흡수 합체와 회사 재산의 포괄 승계가 행하여진다는 것까지. 나아가 신설 합병이 아닌 일방적으로 해산하고 존속하는 타방의 회사가 그것을 흡수하는 흡수 합병을 협상안으로 내건 쪽도 그녀 의견이었다.

AD캐피탈이 통째 해성그룹에 삼켜지는 순간이었다.

문영강 사장의 행보에 대해서 해성그룹과 세부 사항을 다시 긴밀히 협의해야 하겠지만 양측이 원하는 바가 확실한 만큼 일사천리로 진행될 것이라 판단했다. 많은 재판을 경험했고 여러 범죄자들을 대면해 온 베테랑인 그조차 20대 여자의 강단과 배짱이 어디에 근거한 건지 의문이 들었다.

누가 보더라도 최악의 상황, 평생 일궈 온 부친의 회사가 넘어가기 직전, 하루아침에 거리로 나앉을 판국인데, 평생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고생 한번 안 해 보았을 것 같은 젊은 여자는 마치 이 상황을 예견이라도 한 듯 덤덤해 보였다. 초연한 태도는 위선일까, 아니면 감춰 둔 은닉 재산이 있는 것일까.

“고생하셨습니다, 이만 가시죠.”

의자를 뒤로 빼 주며 혹시나 쓰러질까 염려해 주는 박 변호사의 호의를 아는지 모르는지 손하가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나 걸쳐 둔 겉옷을 팔에 걸칠 때였다. 상대측 두 명의 남자가 빠르게 그들에게 접근했다.

“해성 측 변호사 천상국입니다. 경황이 없으시겠지만 절차를 따라 신속히 협상 자리를 마련했으면 합니다.”

갑과 을의 위치가 바뀌니 승냥이 떼들이 달려드는 거야 당연했지만, 성급히 구는 행동에 눈살이 절로 찌푸려져 박 변호사의 입에서 고운 말이 나오지 않았다.

“성급하십니다. 이쪽에도 시간적 여유를 줘야…….”

“괜찮아요, 박 변호사님.”

“하지만.”

박 변호사는 만류하는 손하의 손짓에 그대로 얼음이 되었다. 자신이 흥분할 일이 아닌데 당사자보다 화가 치미는 이유를 모르겠다. 예예 하니 사람을 바보로 아는지 대접이 이럴 수는 없었다.

문 사장이 졸지에 저리되니 언제 친분이 있었냐는 듯 사람들은 등을 돌려 버렸다. 세상인심 야박하기도 했다. 화가 나야 할 사람은 덤덤한데 냉정해야 하는 그가 오히려 흥분하는 상황이 우스꽝스러웠다.

“언제가 좋을까요?”

기분 나빠 하거나 눈살을 찌푸리지도 않고 되묻는 여자의 태도에 당황한 건 오히려 상대방이었다.

“아, 그게……. 사장님?”

“내가 말하지.”

말쑥한 정장 차림의 남자가 대화에 끼어들자 양측 변호사가 한 발 뒤로 물러났다.

오늘의 주인공, 해성그룹 젊은 오너 소태진. 젊은 남자는 훤칠한 키에 떡 벌어진 어깨를 하고 있었다. 태양을 등졌음에도 타고난 그 잘난 얼굴선은 뚜렷해 보였다. 굵은 눈썹과 둥그런 아치를 이루는 이마가 조화로웠다. 알짜배기 캐피탈을 꿀꺽 먹어 치운 괴물치고는 젊디젊은 CEO였다.

“삼 일 뒤 1시 어떠신가요? 차를 보내겠습니다.”

“삼 일 뒤……. 할 일이 있어서 일주일 뒤 화요일로 하죠. 그리고 호의는 고맙지만 차는 보내지 않아도 됩니다. 제가 회사로 찾아가겠습니다.”

한마디로 정중한 거절이었다. 대화가 오가는 동안 남녀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그건 승리에 도취된 우월감도 아니었고, 괴로워하는 패배자의 부끄러움도 아니었다.

“축하드려요. 앞으로도 번창하시길 바랍니다.”

뜻밖에 내밀어진 하얀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할 뿐 미동조차 하지 않는 태진을 보던 해성 측 천 변호사가 낮은 목소리로 그를 재촉했다.

“……사장님?”

“그럼 그렇게 하죠.”

물끄러미 여자를 바라보던 남자가 내밀어진 하얀 손을 마주 잡았다. 이후에도 남자의 시선이 떨어질 줄 몰랐지만 여자는 앞만 응시할 뿐 입을 다문 채 잡은 손에서 힘을 뺐다. 힘겹게 잡았던 손은 상대의 체온을 느끼기도 전에 빠르게 떨어져 나갔다.

그녀가 퇴장하고 나서야 합병을 축하하는 환호와 기쁨의 함성이 회의장을 가득 메웠지만 정작 당사자인 해성그룹 소태진의 가슴에 설명할 수 없는 회오리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원하던 바를 이루었는데 왜…….’

보호막이 사라진 지금 그에게 매달려 애원해도 시원찮을 판에 고개 꼿꼿이 쳐들고 애쓰는 모습이라니. 그래 봤자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여자는 그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강인화고 치밀하고 이성적이고 냉철했다. 자존심을 지키려는 꼿꼿함이 거슬렸지만 비단 그뿐 아닌 무언가가 더 있었다.


* * *




손하는 자신에게 꽂히는 따가운 시선을 피해 최대한 꼿꼿하게 몸을 세워 회의장을 빠져나갔다.

누군가 내게 봄이었으면 하고 바랐다. 하지만 그 대상은 따스한 봄이 아닌 눈 내리는 겨울이었다. 가는 마음 멈추지 못해 혹시나 그래도 혹시나 요행을 바랐건만 가시를 숨긴 채 얼어 버린 그의 마음을 녹일 수 없었다.

아주 잠깐 행복했다. 따스함을 줄 수 있다고 내게 빛이 될 수 있다고 노력하면 될 거라는 희망을 가졌었다. 따스한 봄이고 위안이 되리라 믿는 동안만은 행복했다.

하지만 헛된 바람이었다. 손에 잡힐 듯 잡힐 듯 빠져나가는 모래알처럼 잠깐 동안의 기쁨이었고 또 예정된 절망이었다. 눈치챘을 땐 이미 그에게 맘을 빼앗겨 버린 후였다. 초월적인 존재가 아니기에, 나도 인간이고 여자이기에 작은 희망을 품은 지금까지도 그를 온전히 놓지 못했다. 차가운 시선과 얼음장 같은 예의 바름이 비수가 되어 깊이깊이 찔러 와 아릿했다.

자신은 그저 그에게 원수의 딸이자 복수의 대상일 뿐이었다는 확실한 진실 앞에 머릿속은 아득하기만 했다.

외롭지 않기 위해 선택한 사람이기에 잠재우기 힘들겠지만 이젠 시간의 흐름 속에 추억으로 묻어 둬야 하나 보다. 거짓된 약속인 줄 알면서도 믿고 싶어 끝까지 부여잡던 한 줄기 희망이 이렇게 체념이라는 무기력함을 동반한 허탈감으로 남아 힘겹다. 추억이 아쉽고 다가오는 모든 것이 두렵다. 뭘 하고 있는지 뭘 해야 하는지 순서를 정하지 못하고 멈칫대는 내가 싫다.

“바래다드리겠습니다.”

“아니에요. 잠시 걷고 싶네요. 먼저 가세요.”

“하지만.”

박 변호사가 채 말리기 전, 엘리베이터가 1층에 서자마자 내린 손하는 차가운 공기를 폐부 깊숙이 빨아들이며 크게 심호흡을 했다.

언젠가 시간이 지나면 지금의 슬픔보다 곱절 큰 행복 안에서 숨 쉴 수 있을까. 살갗으로 스며든 추위보다 곁에 아무도 없다는 현실이 너무 힘들었다. 고지를 눈앞에 두고 단단히 맘을 다잡자 하면서도 변수였던 그의 확인 사살에 휘청이는 자신이 싫었다. 뭘 바란 걸까.

‘문손하 참 아둔하다. 아직도 기대를 버리지 않은 거니? 그래?’

연극 1막이 막을 내리고 2막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