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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안에 머물러

2화



#2장



오후에 시작된 비가 눈이 되어 내리자 영상 기온은 금세 영하로 떨어졌다.

귀가 후 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고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는 손하가 걱정된 윤 씨는 망설이다 노크를 했다. 속이 말이 아니겠지만 이럴 때일수록 먹어야 힘을 내지 않겠는가.

집안 분위기가 엉망이었다. 집까지 넘어가 빈손으로 나가야 할 지경에 몰리니 그저 한숨만 흘러나왔다.

“저, 아가씨. 아…….”

“무슨 일이세요?”

“식사 좀 하세요. 그러다 쓰러지세요.”

걱정이 가득한 물기 어린 목소리를 차마 외면할 수 없었는지 작은 목소리로 손하가 대답했다.

“알았어요. 내려갈게요.”

뭐라도 먹겠다는 그녀의 대답이 반가워 날듯이 주방으로 돌아간 윤 씨는 부랴부랴 소화 잘되고 부담스럽지 않을 식단을 준비했다. 두부, 양배추 쌈, 오이 샐러드. 맘 같아선 단백질 풍부한 고기를 굽고 싶었지만 그녀가 소식하는 식습관을 알기에 담백한 찬으로 상을 차렸다.

먹여야 했다. 먹어야 힘을 내고 살 의지도 생기는 법이었다.

“드세요…….”

쉬었다가 젓가락질 한 번, 또 쉬었다가 한 번. 그 모양을 지켜보는 윤 씨는 애가 탔다.

“병나시겠어요. 먹고 힘내셔야죠. 그래야 사장님을……. 에구 주책없이 눈물이…….”

목이 메고 눈물이 맺혀 황급히 등 돌린 윤 씨가 앞치마에 눈물을 찍어 냈다. 자신이 이러면 안 되는데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아무리 부자가 삼대를 못 간다지만 하루아침에 집안이 몰락하다니. 누구보다 강인하고 세상 무서운 줄 모르던 문 사장이 쓰러져 수족을 움직이지 못해 회사까지 넘어간 지금의 상황이 믿기 힘든 현실이었다.

윤 씨는 그저 도우미일 뿐이었지만 나름 이 일을 천직으로 여기고 열심이었다. 손하가 초등학생일 때부터 집안일을 도맡아 했고 외동딸인 그녀를 자식처럼 돌보다시피 했다. 어릴 때부터 영재 소릴 듣던 총명한 아이, 어찌나 영특하고 재주가 많은지 정이 흠뻑 들었다. 게다가 일하는 아랫사람이라고 함부로 대하지도 않았다.

반면 괴기스럽고 과격하기까지 한 문 사장은 윤 씨를 타박하고, 험한 말을 내뱉기 일쑤였다. 그럴 때마다 그만두고 싶었지만, 그런 자신을 불안한 표정으로 숨어 지켜보던 어린 손하 때문에 꾹 눌러 참았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죄송한데, 그만 먹을게요.”

“……네.”

밥을 반도 비우지 못한 심정을 이해 못 하는 바 아니었지만, 남겨진 찬과 스산한 집안 분위기에 윤 씨는 눈치 없이 눈물이 흐르는 걸 앞치마에 황급히 닦아 냈다.

“아주머니, 여기 앉으세요. 할 이야기가 있어요.”

“……네? 네.”

“돌아가는 사정은 말씀드리지 않아도 짐작하고 계셨을 거예요. 오 기사님께는 따로 이야기해 두었어요.”

불길한 예감이 적중하려나. 흙빛으로 변해 가는 윤 씨의 안색을 살피던 손하가 어렵게 말을 이어 갔다.

“이제 빈털터리나 매한가지예요. 이 집도 한 달 안에 비워야 하구요.”

“흐흑, 이렇게 갑자기……. 세상에 이런 일이…….”

윤 씨는 쏟아져 내리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일을 그만두고 나가야 해서가 아니었다. 경력도 있고 자식들도 출가해 돈 들어갈 일도 없었다. 그녀가 걱정하는 건 평생 반신불수로 살아가면서 돌봐 줘야 하는 사람이 필요한 환자였고, 혹독한 그녀의 앞길이었다.

“사람이 이럴 수는 없어요. 소 사장님 그분이 어떻게 이럴 수 있답니까?”

“전 괜찮아요. 그러니 울지 마세요.”

과거와 겹쳐지는 그림이었다. 사장에게 타박 아닌 타박을 듣고 맘 상해 구석에서 눈물을 훔칠 때면 어린 그녀가 조용히 다가와 자신을 위로해 주었다. 바로 오늘처럼.


‘아줌마, 울지 마. 울지 마요. 내가…… 내가 더 잘할게요. 그러니까 울지 마요.’


도우미에게 정을 붙일 만하면 나가 버리기 일쑤니 아이가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아무리 문 사장이 딸을 감싸고돌아도 사업상 출장으로 집을 비우는 일이 잦았던 탓에 외로움과 기다림이 일상이 돼 버린 외로운 아이였다.

윤 씨는 그녀가 우산이 없어 비를 홀딱 맞고 하교할 때도, 밤새 열이 나 끙끙대며 신음할 때도 곁을 지켰고, 계절마다 찾아오는 운동회에도 부모 대신 참석했다. 그만큼 손하는 윤 씨에게 딸 같은 소중한 존재였다.

“이거 받으세요.”

영문을 몰라 윤 씨가 식탁 위에 놓인 통장과 손하를 번갈아 보았다.

“퇴직금입니다. 많이 드리지 못해 죄송해요.”

“네……?”

“그동안 해 주신 것에 비하면 조촐해요. 비밀번호는 생일입니다.”

퇴직금이라니. 집도 넘어가고 거리로 나앉을 판에 퇴직금을 챙겨 주다니, 말도 안 된다.

“아가씨 이러지 마세요. 저도 경우 있는 사람입니다. 돌아가는 사정 뻔히 아는데, 이러지 마세요.”

윤 씨가 한사코 거부하며 통장을 받으려 하지 않자 손하가 나지막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아주머니, 급여를 드리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입니다. 그동안 일해 주신 대가로 지급해 드리는 퇴직금이니 받아 주세요. 그래야 제 맘도 편해요. 부탁이에요.”

“그렇게 못 합니다. 어떻게…….”

“절 위해서예요. 훌훌 털어 버리고 싶어서. 돈으로 환산할 수 없지만 성의는 표시하고 싶어요. 아주머니를 빈손으로 가시게 하면…… 저 잠 못 자요. 아시잖아요.”

“흐흑, 흑…….”

“정리하시는 대로 떠나세요. 저도 챙길 건 챙기고 나머진 어떻게든 처리하거나 태울 생각이니까.”

“……어디로 가시는데요?”

“모르시는 편이 나아요.”

“집은 구하셨어요? 사장님 간호할 요양사는요? 당분간만이라도 제가…….”

단호하게 고개를 좌우로 흔드는 손하를 보며 윤 씨는 입이 얼어붙어 말을 하지 못했다. 사람이 무섭다고, 가까운 사람이 가장 무서운 거라고 어른들이 당부하던 말이 이렇게 절실하게 와닿을 날이 올 줄 누가 알았을까.

믿었던 사람에게 뒤통수를 맞고 보니 새삼 태진을 향한 적대감에 절로 주먹이 쥐어졌다. 좋은 사람인 척, 다정하고 예의 바른 남자인 척하던 그 빌어먹을 놈은 실상 발톱을 숨긴 늑대였다. 그것도 모르고…… 백년손님이라며 살뜰히 대접했는데.

“소 사장님, 천벌받으실 겁니다. 암요. 그렇고말고요.”

“그 사람은…… 사업상 만남을 가졌을 뿐이에요. 이제 와 탓하면 뭐 하겠어요.”

윤 씨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녀는 남기를 원했지만 손하가 원치 않아 했다. 윤 씨는 지금의 손하가 낯설었다. 오랜 시간 보아 온 그녀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이럴 때일수록 그녀가 자신에게 도와 달라 남아 달라 부탁할 줄 알았는데, 어린애로만 보았던 작은 숙녀는 심지 곧고 누구보다 강인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었다.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자꾸 돌아보는 윤 씨를 애써 무시하고 손하는 방으로 돌아와 한참을 우두커니 어둠 속에 서 있었다. 우선 당장 내일부터 해야 할 일을 떠올리다 자연스럽게 책상 서랍 안쪽에 설치해 둔 비밀 공간에서 빛바랜 사진 한 장을 꺼내 들었다.

남자가 여자 어깨에 다정히 팔을 걸치고 렌즈를 향해 환히 웃고 있는 젊은 연인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었다. 흰 모자를 쓰고 빨간 망토를 입은 여자는 눈부시게 아름다웠고 날렵한 몸매에 투박하지만 파란 스웨터를 입은 남자는 매우 준수한 외모였다.

뚫어지게 사진을 내려다보던 그녀가 조용히 눈을 감자 어디선가 그녀를 다정하게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엄마 아빠 이제 다 왔어요. 곧 끌날 거예요. 그곳에서 편안하세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그녀의 두 눈이 허공 어딘가를 맴돌았다.


‘까르르르.’

‘우리 딸. 우리 보물.’

‘민하야.’

‘민……하야.’


선명하게 떠오르는 행복했던 추억과 아련한 음성이 펼쳐졌다. 부드러운 음성과 아름다운 선율, 따스한 잠자리, 그 이상 완벽할 수 없었던 그런 순간들. 조각처럼 떠오르는 단편적인 기억들이 그녀를 버티게 했다. 이 말도 안 되는 복수극을 실행하게 만든 원동력이 되었다.

막연했던 계획은 소태진 그로 인해 탄탄하고 구체적인 구도를 갖추었고, 그를 이용해 목적을 이룬 지독히도 영리하고 교활한 여자가 바로 저였다. 스스로 괴물이 돼 버린 지금과 사탕 하나에도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깔깔대며 웃던 작은 꼬마 아이의 모습이 겹쳐졌다. 두 이미지 사이의 극명한 거리 차가 그녀로 하여금 헛웃음을 뱉어 내게 만들었다.

이제 해야 할 일은 다 끝냈다. 휑한 빈 공간에 둥둥 떠다니는 회한, 혹시나 들킬까 염려하고 조바심 냈던 시간도 훌쩍 지나갔다.

나만 힘든 게 아닌데, 나보다 힘든 사람이 많은데 꼭 이런 선택을 해야 했을까. 수없이 고민하고 고민하다 결정했다. 목적 하나만 생각하고 좇아 이룬 현재의 허탈하고 비참한 결과 앞에 순수하게 기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단 한 사람도 없었다. 한 사람도.



#3장



해성그룹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합병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쥔 지금, 누구보다 기뻐 날뛰어도 모자랄 판에 기분이 하향 곡선을 그리며 곤두박질치는 중인 오너 태진의 눈치를 보느라 직원들은 숨도 제대로 못 쉬었다.

“왜 저러시는지 몰라?”

“모르겠어요.”

사흘, 오늘로 딱 사흘 동안 오너는 말도 붙이지 못할 정도로 살벌한 분위기를 풍겼다. 사흘 전이라면 AD캐피탈의 흡수 합병이 결정된 역사적인 날인데 기분 좋지 않을 일이 무엇이란 말인가. 하늘을 날아도 부족할 판에 무슨 이유에선지 그는 무거운 침묵만 유지하고 있었다.

마침 천 변호사가 사무실로 들어서자 직원들은 일제히 입을 다물고 자리로 돌아갔다.

사장실에선 태진이 문을 등지고 창가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