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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안에 머물러

3화



“사장님.”

“조사하라 지시한 건 어떻게 되었습니까?”

“자산 가치가 있는 건 경매로 넘어간 상태고 은닉한 재산도 없었습니다. 정리 수순을 밟아 부채까지 마무리하면 얼마 되지 않습니다.”

“더 알아보세요. 특이한 점은 없었습니까?”

“별일은 아니지만 집 안에서 연기가 나 알아보니 뭔가 태우는 것 같다고……. 짐을 줄이기 위해서인 것 같습니다. 일하던 운전기사와 도우미 아주머니도 내보냈다고 합니다. 부동산을 통해 알아보니 이사할 예정이랍니다. 집을 비워야 하니까요.”

이상한 침묵에 천 변호사가 고개를 들어 태진을 살폈다.

“어디입니까?”

“경기도 가평입니다. 집값도 집값이지만 서울보다 그곳이 환자에게 좋다 판단한 것 같습니다.”

환자는 문영강 사장을 말하는 것이었다. AD캐피탈의 주주로서 권리를 행사하지 않고 순순히 해성에 회사를 넘김으로 고소는 취하되었고, 반신불수로 장애인 1급 판정을 받아 정상 참작이 되었다.

이상하게 일이 쉽게 풀렸다. 동네 슈퍼를 인수해도 잡음이 일 텐데 알짜배기 캐피탈을 집어삼키는데 이렇다 할 반항 한번 하지 않고 회사를 순순히 넘기다니.

그리고 그것보다…… 그녀의 반응이 뜻밖이었다. 집어삼키는 주체가 그라는 걸 알고 난 후에도 따로 연락을 취해 오지 않았다. 가장 이상적인 흐름이었지만 이상했다. 정상이 아니었다.

“그럼, 전 다음 주 화요일까지 서류를 준비하겠습니다.”

천 변호사가 나가고 사무실 문이 닫히자 태진은 팔짱을 끼고 며칠 전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던 여자, 문손하 그녀를 떠올렸다. 배신감과 모욕감으로 소리 지르는 것까진 바라지 않았지만 지나칠 정도로 침착하고 차분한 그녀가 그를 조바심치게 만들었다.

불안하다고 해야 할까, 불쾌하다고 해야 할까. 터지기 직전의 화약고처럼 그의 잘난 머릿속이 뒤죽박죽이 되었다.

‘아직 상황 파악을 못 하는 건가? 그 정도로 바보는 아닐 텐데? 그런데…… 왜? 대체 왜?’

문손하. 바이올린과 피아노 실력은 수준급, 미술과 발레 공연 감상이 취미. 조용하고 차분한 성격, 아름답고 앳된 외모에 가녀린 몸매. 문영강 사장이 금지옥엽으로 키운 딸. 사립 학교를 거쳐 엘리트 코스인 국립 명문대 국문학과 졸업. 문 사장의 완벽한 비호로 공식 석상에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 인물이었다.

조사한 바로는 그랬지만, 분명 그가 모르는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아니라면 마치 이 모든 걸 예견한 사람처럼 초연하게 빈틈없이 일을 처리할 리 없었다.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상황이었다.

아니, 사실 그런저런 이유보다 그는 왜 자신이 오히려 그녀에게 패배감을 느끼고 있는 건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근래 도통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합병이 확정된 이후부터 불면의 밤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녀의 눈빛에 아무것도 담기지 않았다는 사실이 큰 충격이었다. 원망과 배신감도 아니었다. 그저 무심했다. 마주 잡은 손이 떨리길 바랐건만, 여자의 손은 그저 차가울 뿐이었다.


* * *




카드 결제를 하고 택시에서 내린 인물은 손하 그녀였다.

1월, 봄이 오려면 아직 멀었는데 그녀가 입은 의상은 하늘하늘한 흰빛 블라우스와 검은색의 정장 치마 그리고 재킷이었다. 늘씬한 각선미와 여성스러운 곡선이 고스란히 드러나 길 가던 남자들의 시선이 자연스레 그녀에게 집중되었다.

고민 끝에 차려입은 옷이었다. 집안이 기울어 오갈 데 없는 불쌍한 처지가 되었다 광고할 필요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화려한 명품으로 치장하고 아무렇지 않은 척하기는 우습다 판단했다.

앞을 향해 걷던 그녀가 걸음을 멈추고 높은 빌딩을 올려다보았다. 해성그룹 본사 사옥 K타워는 평당 가장 비싸다는 종로 한복판에 위치해 있었다. 초행길인 데다 약속 시간에 늦을까 우려되어 카카오 택시를 예약하고 이용했다.

약속한 시간보다 10분 전에 도착한 그녀는 선뜻 1층 회전문을 밀고 들어가지 못하고 주저했다. 하지만 어차피 부딪쳐야 할 일, 주먹을 꼭 쥔 채 떨리는 가슴을 추스르며 힘차게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섰다.

미리 연락해 두었는지 로비에서 대기 중이던 여직원이 그녀를 알아보곤 사장실 직통 엘리베이터로 안내했다.

박 변호사가 세부 사항을 꼼꼼히 체크했지만 사인하기 전 신중해야 피해를 줄일 거라 충고한 말을 떠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부친인 문영강 사장이 앞을 향해 달리는 동안 인심을 많이 잃었었나 보다. 그를 불쌍하다 안됐다 동정하는 사람들보다 그럴 줄 알았다며 오래 버틴 거라느니 천벌받은 거라느니 비꼬는 말들이 더 많았다. 오죽하면 캐피탈 직원들이 합병을 쌍수 들고 환영했겠는가.

최소한 피해를 줄이고자 노력했지만 갑은 해성 측이고 을은 AD캐피탈이다. 그녀는 오늘 해성 측의 요구를 무조건 수용해야 하는 불리한 위치에 서 있었다. 자존심은 버린 지 오래였지만 그렇다고 비굴해지고 싶진 않았다. 지금도 충분히 비참하니까.

그는 그걸 바라겠지만…….


“어서 오십시오.”

양측 변호사가 소파에서 일어나 묵례하자 조용히 박 변호사 옆에 앉아 고개만 끄덕이던 손하의 안색은 파리하다 못해 실핏줄이 한눈에 보일 지경이었다.

“어디 아프십니까. 안색이…….”

“괜찮아요. 날씨가 추워 감기 기운이 있네요.”

박 변호사는 이제야 그녀가 제 나이답게 보였다.

‘아무리 태연자약해도 젊은 아가씨가 이 상황에 아프지 않다면 비정상이겠지. 그동안 잘 버티더니…… 쯧쯧.’

AD캐피탈 전속 변호사가 협상 건을 맡기 거부하는 통에 그가 이번 일을 맡게 되었지만, 손하를 보는 그의 맘도 편치 않았다. 제 딸도 손하만 한 나이인데 세상모르는 철부지에 천방지축이었다. 입장 바꿔 생각해 그가 이런 일을 당하였더라면 딸과 부인은 어떻게 대처했을까 떠올려 보니 남 일 같지 않았다.

문 사장이 제 딸을 밖으로 내돌리지 않아 이쪽 바닥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지만, 어려서부터 영재 소릴 들을 만큼 뛰어난 재원이라더니 손하는 하나를 알려 주면 둘을 깨우치는 비범함을 보였다.

네 사람의 평범함을 가장한 치열한 문답이 오갔다.

“합병 시 세무법상의 평가 차익은 어떻게 결정짓나요?”

“자산과 부채를 승계하면서 합병 법인의 영업권으로 계상하는 경우, 임원단을 조직해 심의 후 결정합니다.”

“주식 매수 청구권 행사가 관건이겠군요.”

“반대 의사를 밝힌 주주 몇몇이 이달 말까지 권리를 행사할 시 주총에서 반대 의사를 표시한 주식 3만 주가 매수 청구권을 행사할 수 있는 최대한도로 예상됩니다. 하지만 현 주가가 낮은 관계로 대규모로 행사될 가능성은 낮다고 판단됩니다.”

“주가 변동이 변수로 작용되겠군요. 합병에 반대하는 주주라고 해도 시장 가격에 비해 주식을 파는 것이 더 많은 이익을 본다면 다행이겠지만. 투자자들의 차익 실현 물량이 맞물린다면……. 다음 주까지 지켜봐야 답이 나오겠네요.”

“……그렇습니다.”

천 변호사는 손하가 전문 용어를 사용하며 박 변호사와 주거니 받거니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그녀가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가 아님을 깨달았다. 순진하고 단순하기는커녕 그녀는 치밀하고 주도면밀하기까지 했다. 호랑이 새끼는 역시 호랑이인 건가?

“그럼 다음으로 영업 양수와 위임장 대결 문제인데…….”

“경영상의 노하우 전수와 숙련된 전문 인력은 합의한 대로 2년간 유지하기로 결정하고 인수를 통한 시장 점유율이 하락하는 경우를 대비해 대책을 마련하는…….”

네 사람 앞에 놓인 찻잔이 싸늘하게 식고 세 시간이 훌쩍 지나 오후 4시가 되자, 목 뒤가 뻐근한 박 변호사가 무의식중에 머리를 뒤로 젖혀 목덜미를 주물렀다. 천 변호사는 안경을 벗어 피곤한 눈두덩이를 문지르며 잠시 숨을 돌렸다. 당장 오늘 중으로 일이 마무리되길 기대한 바는 아니지만 날카로운 질문에 대답하느라 진땀을 빼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합시다.”

“괜찮은데요.”

“제가 괜찮지 않습니다. 오늘만 날이 아니니까요. 따로 시간 내기 곤란하십니까?”

정중함 속에 날이 선 질문의 뜻을 못 알아들을 리 없었지만, 되도록 오늘 안으로 협상을 마무리 짓고 싶었다. 하지만 곧 집을 비워야 하고 환자가 있어서, 라는 구차한 변명은 늘어놓고 싶지 않았다. 물론 씨알도 먹히지 않을 소리였지만.

“아닙니다.”

“천 변호사님과 박 변호사님은 먼저 일어나세요. 준비할 서류가 많을 겁니다.”

“네.”

“네.”

사실이었다. 우호적 M&A(기업의 인수, 합병을 상대 기업의 동의를 얻는 경우)였지만 기업과 기업이 하나로 합쳐지는 흡수 합병이었다. 세무 회계와 서류 준비로 업무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수고하십시오.”

두 변호사가 두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사장실을 나가 버리자 덜렁 남은 건 손하뿐이었다. 숨 막히는 침묵 속에 입 꼭 다물고 앉아 있던 그녀를 말끄러미 바라보던 태진이 말문을 열었다.

“버틸 만한가 봅니다.”

“죽을 수는 없으니까요.”

손하는 제 대답이 우스워 비소가 절로 흘러나왔다. 빈정거림을 무시하면 되는데, 후벼 파며 반응을 살피는 그에게 건재하다는 걸 과시하고 싶었을까. 통 큰 사람은 못 되나 보다.

내 가슴에서 떠나 이젠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 인정하기엔 그를 향한 감정에 발부리가 걸리고도 남았다. 여기까지 오르기까지 당신이 쏟아부은 노력이 얼마일까? 무엇을 얼마만큼 희생했을까? 나만큼? 나보다? 비교는 불가능했지만 생경하게 느껴지는 그의 싸늘한 시선에 주눅 드는 스스로가 싫었다.

“언제부터 눈치챈 거지? 내 본명이 소태진이 아니라는 걸.”

남자의 말투와 표정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그녀가 익히 알아 온 남자였다.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홀로 추리한 그가 그녀를 떠보는 거란 걸 눈치챈 그녀는 말을 아꼈다.

“이제 와 그게 왜 궁금한 거죠?”

“나름 완벽했다 생각했는데 어디에서 실수한 건지 몰라서.”

“내게 궁금증을 해결해 줄 의무는 없는 것 같아요. 알아서 추리하세요. 그럼 이만 일어날게요.”

“문손하.”

어르듯 달래는 낮은 음성에 살뜰히 반응하는 자신이 싫어 없던 치기가 그녀를 부추겼다.

“사람 헷갈리게 하네요. 소태진 씨 아니, 강선학 씨라 부를까요?”

“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