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마법을 쓰는 타이탄 1권



마법을 쓰는 타이탄 1권(1화)
1장. 전장의 괴물(1)


“신이 스스로의 모습을 본 따 우리를 만들었다.
우리라고 못할 것이 있겠는가?”
―타이탄 초대 개발자, 로렌스 발드레이.

제국력 415년 여름.
시리온 제국 북동부 국경 지대 비탄의 초원.
찌는 듯한 무더위가 전장을 장악하고 있었다. 소금기를 머금은 땀방울이 병사들의 거친 피부를 쉴새없이 쓸어내렸다. 일만이 넘는 병사들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후덥지근한 열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힐 정도.
그 이글거리는 병사들의 너머, 태양을 등진 채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운 위압적인 존재가 있었다. 경외와 공포를 담아 신의 모사, 악마의 재림이라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 그것의 정식 명칭은 범용 인간형 육전 병기, 타이탄.
전장 8미터에 이르는 크기, 수십 톤에 달하는 육중한 무게.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간의 형상을 닮은 그것은 현재 보병들의 양쪽에 도열한 채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시리온 제국 제4군단 소속의 타이탄 수석 오퍼레이터, 레스터는 고개를 둘러 아군의 진영을 훑어보았다. 거대한 흰색 타이탄이 이글거리는 아지랑이 속에서 열을 지어 늘어선 모습은 신화 속 한 장면을 방불케 했다.
“엄청난 위압감이군.”
하지만 아군의 압도적 위용을 바라보는 레스터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그의 입가에서 자연스레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는 한 가지 고민거리를 안고 있었다.
자신이 몇 시간째 칙칙한 남자 한 명과 좁은 곳에 앉아 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찌는 듯한 무더위도 그가 앉아 있는 타이탄 내부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심지어 자신이 앞으로 상대해야 할 적이 동부 지역 최강의 국가인 크라수스 공화국이라는 것도 그에게는 큰 걱정거리가 아니었다.
그가 고민하고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그동안 숱하게 많은 기사, 즉 타이탄 오너들의 오퍼레이터 역할을 해 왔지만, 이번에는 그 어떤 기사보다도 달갑잖은 상대였기 때문이다.
그의 이름은 메로링거 올바드.
다름 아닌 4군단장 브루어 올바드의 아들, 즉 이번 전투 최고 상관의 자제인 것이다.
“오퍼레이터!”
고압적인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조종석을 울렸다. 레스터의 앞자리에 앉아 있는 기사의 목소리였다.
그는 순간 욕설을 내뱉을 뻔했다.
“네, 부르셨습니까.”
“대답이 늦다!”
“신경망의 연결 상태를 확인하느라 지체했습니다. 시정하겠습니다.”
“그렇게 느려서 이 몸을 보좌할 수 있겠는가?”
“황제 폐하를 위해, 저는 명령을 따를 뿐입니다.”
레스터는 위에서 내려온 명령을 떠올렸다. 털끝 하나 다치게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어려운 명령은 아니다. 타이탄에 탑승한 이상 죽거나 살거나 둘뿐이다. 산다면 털끝 하나 다치지 않을 것이고, 죽는다 해도 문책당할 일은 없다. 기사가 죽어 버릴 정도의 타격을 입었는데 그 안에 함께 타고 있는 오퍼레이터라고 멀쩡할 리가 없으니.
그러나 그런 것으로 위안을 삼기에는 눈앞의 기사가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딴 녀석과 공동 운명체라니.’
레스터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그의 고민은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오퍼레이터!”
기세등등하게 외치는 기사의 뒷모습에 레스터는 미간을 짚었다.
“네. 이번엔 무슨 일이십니까?”
“벨트가 너무 꽉 조인다.”
올바드가 온몸에 둘둘 감긴 연결선을 거세게 당기며 불평을 하고 있었다.
“원래 그렇습니다.”
“웃기지 마라, 이놈!”
오너의 언성이 높아졌다.
“올바드 경.”
“경어를 제대로 사용해라!”
“친애하는 올바드 경.”
레스터가 급히 정정했다.
“5년 전 비스토리오 회전에서 타이탄 오너의 경추 복합 골절 사고가 일어난 적이 있습니다. 원인이 무엇인지 알고 계십니까?”
“음…….”
오너의 말문이 막혔다. 레스터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정답은 안전벨트입니다. 느슨하게 조여진 벨트로 인해 기체의 충격을 흡수하지 못하고 오너의 경추 부분이 좌석에 부딪쳐 고리뼈가 산산조각 났습니다. 그 사고가 일어난 이후로 타이탄 탑승 규정에서 안전벨트는 최대한 밀착해서 착용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건 알고 있다.”
하지만 대답하는 기사의 목소리는 작아져 있었다. 이걸로 좀 조용해지겠지, 하고 레스터는 한숨을 돌렸다.
눈앞의 기사는 아버지 올바드 경의 후광으로 기사가 되어서는 공을 세울 수 있는 전투에 전격 투입되었다. 모든 것이 처음이고 어설프리란 것쯤은 각오했지만, 오퍼레이터와 소통이 힘들다는 것은 보통의 문제가 아니었다. 전투는 기사가 하지만, 주변의 상황을 파악하고 최선의 조언을 하는 것이 오퍼레이터였기 때문이다. 기사가 오퍼레이터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그 타이탄은 눈이 먼 것이나 다름없다.
‘생각보다 힘들지도 모르겠다.’
레스터는 몇 번째인지도 모를 한숨을 내쉬었다.

타이탄은 기본적으로 기사와 마법사, 즉 오너와 오퍼레이터라 불리는 두 명이 상호 간섭하며 움직인다. 임무 분담은 단순하다. 기사는 오로지 전투를 하고, 마법사는 기사가 전투를 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한다.
적과 아군의 위치 파악, 전황의 흐름, 상관의 지시, 작전의 설명 등 전술적인 사항뿐 아니라, 타이탄의 마력 흐름을 원활하게 한다든지, 기사와 타이탄 사이에 이루어지는 피드백 과정에서의 잡음을 없앤다든지 하는 기계적인 문제까지 총괄하는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기사가 사용하고 있는 마력의 총량을 통제하고 관리하는 일 역시 마법사인 오퍼레이터의 몫이다. 즉, 타이탄이라는 거대 병기의 운용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인 것이다.
[이봐, 레스터.]
문득 다른 종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기를 통해서 전달되는 육성이 아니라 마력의 힘을 빌린 전용 통신망, 오퍼레이팅 채널을 통해 들어오는 소리였다.
방금은 동료인 아이반이었다. 아이반 역시 타이탄 오퍼레이터로서, 바로 곁에 서 있는 타이탄의 조종석에 앉아 있었다.
[좀 할 만한가?]
아이반이 물었다. 그 말투에는 레스터를 놀리려는 악의가 가득했다. 그 의도를 느꼈는지 다른 오퍼레이터들이 낄낄대고 웃었다. 전투 직전 오퍼레이터들끼리는 이런 식으로 통신 채널을 열어 두고 잡담하는 일이 잦았다. 전투의 긴장을 풀기 위한 행동이었다.
레스터는 피식 웃고 대답했다.
[벨트를 꽉 조여 놨다.]
레스터의 말에 모두들 폭소를 터뜨렸다. 그중 몇 명은 실제로 목소리를 내어 웃다가 함께 탑승한 기사의 눈총을 받기도 했다.
[숨도 못 쉴 정도로 조여 놨더니 그제야 입을 닥치더군.]
벨트를 꽉 조여서 기사를 엿먹이는 방법은 아무것도 모르는 초보 기사들을 놀려먹을 때 사용하는 오퍼레이터들만의 장난이다. 사실 교본대로 안전벨트를 조일 필요는 없다. 목뼈가 부러질 정도의 충격을 받지 않기 위해 안전벨트를 단단하게 조이다 보면 반대로 장 파열의 위험이 있다. 결국 어느 쪽이 최악인가의 문제일 뿐, 보통은 적당히 숨쉬기 편한 정도로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때 뚜렷한 느낌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모두 주목.]
통상의 목소리보다 몇 배나 강한 울림. 몇몇 신참 오퍼레이터들은 깜짝 놀라 헉! 하는 소리를 내기도 했다.
그의 이름은 막스 레벤톤.
현재 4군단 오퍼레이터들의 총책임자였다.
[곧 전투 명령이 있을 거다. 잡담하다가 신호를 놓치면 어떻게 되는지 잘 알겠지? 다들 정신 차리고 이제 곧 있을 전투에 집중하도록.]
그는 오퍼레이터들을 일일이 확인하며 통신 상태를 점검했다.
[특히 레스터. 네가 모시는 기사가 누군지는 잘 알겠지?]
[친애하는 메로링거 올바드 경이십니다. 어찌나 용맹하신지 벌써부터 마나를 쭉쭉 뽑아 쓰고 계시네요.]
레스터는 올바드 경에게서 빠져나가는 마력의 통로를 일시적으로 끊었다. 흥분한 기사가 자신도 모르게 타이탄에 마력을 주입하고 있었던 것이다. 잠시 동안 채널에 웃음이 흘렀다.
[자네가 할일이 뭔지는 잘 알고 있겠지?]
[털끝 하나 다치지 말고 살려서 오라. 뭐, 그렇게 들었습니다.]
[그래. 아카데미에서 낙제하고도 아버지의 후광 덕에 기사 서임을 받은 그분을 잘 모시는 게 네 몫이다.]
그의 말투에서 약간 미안한 기색이 엿보였다. 레스터는 머리를 긁적였다. 그로서도 내키지 않는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상부에서 받은 명령을 거절할 순 없는 일. 오히려 그런 일의 적임자로 선택한 것이 자신이라는 점에서 레스터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처음 실전에 투입된 타이탄 오너가 이런 대회전에서 살아 돌아올 확률은 칠 할 정도. 대부분의 오퍼레이터들이 사망하는 주 요인은 초보 기사들과의 불협화음 때문이었다. 하지만 레스터에게 맡겨진 기사들은 지금까지 모두 살아서 돌아왔다. 불사(不死)의 오퍼레이터라고 불릴 정도로 그의 활약은 대단한 것이었다.
전투에서 용맹하게 무훈을 세우는 것이 기사의 몫이라면, 그 기사를 살려서 돌아오는 것은 오퍼레이터의 몫이다. 그런 면에서 레스터는 최고의 오퍼레이터였다.
[귀찮은 일은 꼭 저만 시키십니다.]
[네가 아니면 누가 하냐?]
막스의 심술궂은 얼굴이 상상되었다. 레스터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이 은혜는 꼭 갚아 드리죠.]
[지랄하고는…… 다치지나 마라.]
막스의 말을 마지막으로 오퍼레이터들의 통신 채널이 일제히 닫혔다. 아득히 뒤쪽으로부터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군, 대기!”
대기, 대기, 대기…….
한 목소리는 열 갈래가 되어, 그리고 그 열 갈래는 다시 백 갈래, 천 갈래가 되어 전장에 울려 퍼졌다. 나팔 소리가 대지를 진동시켰다. 곧이어 줄곧 눕혀져 있던 깃발이 일제히 고개를 들었다.
“오!”
레스터의 앞에 앉아 있던 올바드 경이 격양된 표정으로 외쳤다. 때마침 구름이 걷히며 태양이 온전히 제 모습을 드러내고 아낌없이 빛을 쏟아 내고 있었다.
“시작이군.”
레스터는 입술을 핥았다.

“전체 기동!”
우우웅!
이번 비탄 초원 회전의 총사령관인 브루어 올바드 제4군단장이 명령을 내리자, 맨 앞 열의 타이탄이 일제히 검을 뽑아 들었다.
―우오오오!
타이탄의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병사들이 일제히 함성을 질렀다. 8미터에 달하는 순백색의 타이탄이 일제히 기동하는 장면은 누가 봐도 장관이었다.
“우오오!”
올바드도 잔뜩 격양되어 소리를 질렀다. 뒷자리에서 듣고 있던 레스터는 눈살을 찌푸렸다. 좁은 조종실 내부에서 지르는 소리는 조금의 가감도 없이 오퍼레이터에게 들어온다. 레스터는 귀를 막으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전투의 흥분은 빠르게 전염된다. 오퍼레이팅 채널에서도 앞으로의 전투에 대한 이야기들이 오가기 시작했다.
[적장이 스무 살짜리 애송이라며?]
[그 나이에 뭘 해 봤겠어. 자잘한 소탕전이나 했겠지.]
레스터는 적진을 훑어보았다.
적군의 수장은 루시우스 아이밀리아 아이젠.
그에 대한 정보는 이제 갓 스물이 넘었다고 하는 나이뿐이었다.
크라수스 공화국은 제국과 마찬가지로 16살에 성인식을 치른다. 성인이 된 귀족은 자동적으로 전쟁에 참여할 의무가 부여되기 때문에 아마도 전투 경험은 제법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 봐야 애송이에 불과할 뿐이다.
스무 살의 총사령관을 믿고 따를 병사가 얼마나 있을까.
그에 비해 브루어 장군은 20년이 넘는 지휘관의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경험과 지식의 차이는 절대적이라 할 수 있었다.
[전력 차도 상당해 보이고…… 이런 전투에서 진다는 것도 생각하기 힘들지.]
선임 오퍼레이터인 에반스가 입을 열었다. 막스를 제외하면 현재 4군단에서 가장 오랜 경력을 자랑하는 오퍼레이터였다.
그의 말대로 크라수스 공화국의 병력은 엄청난 열세를 안고 있었다. 제국의 병력은 타이탄 스무 기에 보병이 일만에 달하는 반면, 공화국은 타이탄 열두 기에 보병 삼천에 불과했다.
엄청난 병력의 열세마저 안고 있는 공화국 장수는 겁을 먹은 듯 섣불리 전진하지 못하고 언덕 아래의 넓은 초원 지대에서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진지의 형태가 묘했다. 시리온의 좌익, 크라수스 측에서 보면 우익에 해당하는 위치에 타이탄 전력의 모두인 열두 기를 배치해 둔 것이다.
[각개격파라도 하려는 모양이지?]
에반스가 비웃듯 말했다. 그에 동조하는 오퍼레이터들이 웃음을 흘렸다.
[보병을 버리려는 건지…… 이건 뭐, 기본적인 용병술조차 모르는 것 같은데?]
아이반이 경쾌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매사에 신중하지 못한 면이 있지만, 그래도 어디서든 시종일관 유쾌한 기분을 유지하는 것이 그의 장점이었다.
레스터는 조심스럽게 눈앞에 펼쳐져 있는 적의 진영을 훑어보았다.
시리온 제국은 좌익과 우익에 균등하게 열 기씩 배치했다. 즉, 좌익에는 12대 10의 싸움이 맞추어졌다고 하나 우익에는 시리온 제국의 타이탄을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었다. 타이탄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3천 병력은 시리온의 우익에 있는 열 기의 타이탄에게 순식간에 짓밟힐 것이다.
[레스터, 어떻게 생각해? 저놈들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거 같아?]
아이반이 물었다.
[글쎄…… 모르겠어.]
[응?]
[아마도 절대적인 열세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인 것 같은데, 이래서는 보병이 노출되지.]
레스터가 말했다.
전투는 타이탄이, 전쟁은 보병이 한다는 것이 상식적인 전쟁론이다. 보병을 사나운 타이탄 앞에 먹이로 던져 놓는 것이 작전이라면 그야말로 똥 같은 작전이다. 자신을 사지로 내모는 지휘관을 따를 부하가 어디 있겠는가.
[다만…….]
[응?]
아이반이 되묻자 레스터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그럴 리가 없다. 레스터는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른 하나의 그림을 지웠다. 그것은 상식적으로 불가능하다. 괜한 말로 웃음거리가 될 필요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