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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을 쓰는 타이탄 1권(2화)
1장. 전장의 괴물(2)
“수호기사단!”
승리를 확신하는 제4군단장 브루어 장군의 외침이 드넓은 초원에 울려 퍼졌다. 그로서는 공을 세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차후 정계의 요직을 얻기 위해서도 대승이 필요한 그였기에 이번 전투에 그가 거는 기대는 각별했다.
브루어 장군이 허공을 쥔 손을 아래로 내리그었다. 승리를 상징하는 푸른색 깃발이 바람을 가르며 펄럭였다.
“제국에 영광을!”
“제국에 영광을!”
쿠웅! 쿠웅! 쿠웅! 쿠웅!
흙먼지와 함께 바닥이 들썩였다. 초원을 뒤흔드는 진동음. 그에 공명하여 브루어 올바드 총사령관의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다. 도열했던 병사들은 가까스로 중심을 잡으며 무시무시한 기세로 돌격하는 수십 톤의 거체를 경의에 찬 시선으로 보았다.
―우와아아아!
병사들이 함성을 질렀다. 이 순간, 모든 이들이 하나가 되어 함성을 질렀다. 그 함성의 한가운데서 브루어 장군이 계속해서 외쳤다.
“돌격! 돌격하라!”
그의 등줄기를 타고 전율이 흘렀다. 그의 뇌리에는 오로지 승리를 향한 열망만이 가득 차 있었다.
아무것도 없던 크라수스 진영의 왼쪽에서 타이탄 한 기가 홀연히 나타났다. 붉은색의 아우라를 뿌리며 갑작스레 나타난 타이탄에 제국의 인물들은 일순간이지만 동요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 해도 지금 그쪽으로 돌격하는 아군의 타이탄은 총 열 기에 이르렀다.
“고작 한 기? 죽으려고 환장을 했구나!”
기사 메로링거 올바드 경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고함을 질렀다. 10대 1이다. 상대가 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우익 타이탄 소대의 지휘관인 에밀리아 슈토크하우젠 자작이 검을 치켜들었다. 그는 수많은 전투를 치른 맹장 중의 맹장. 시선은 전방을 향한 채였다.
“우릴 우습게 보지 않고서야 저런 진형을 할 리가 없지. 기사들이여, 이런 모욕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그의 외침에 주변의 타이탄이 반응했다. 오오, 하고 아홉 기의 타이탄이 함성을 내질렀다. 폭풍 같은 바람이 불었다. 전투에 대한 본능과 피에 대한 갈망은 날카로운 바람이 되어 대지를 진동시켰다.
그러나 그 순간, 각 타이탄의 오퍼레이터들은 경악에 찬 얼굴을 하고 있었다. 눈앞에 있는 적에게 전의를 불태우기에 바쁜 기사들이라면 모를까, 그들을 보좌하는 마법사들까지도 멍청한 것은 아니었다. 모두의 머릿속에 하나의 문장이 떠올랐다.
‘저 타이탄은 어디에서 나타난 거지?’
오퍼레이터들은 고도로 정밀화된 암시를 통해 적진을 정찰한다. 그를 통해 마법사의 유무, 타이탄의 존재 여부 등을 세세하게 읽어 들일 수 있다. 심지어 그것은 아직 소환되지 않은 상태의, 즉, 아공간에 존재하는 타이탄이라 해도 읽어낼 수 있다. 제아무리 예상된 승리에 도취되었다고 해도 존재 자체가 마나의 흐름인 거대 병기 타이탄을 느끼지 못할 리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눈앞의 붉은 타이탄은 그야말로 귀신처럼 나타난 것이다.
[이봐, 저거…….]
[그래.]
오퍼레이터들은 불안함을 주고받았다.
“소대, 태세!”
태세! 한 명의 목소리가 아홉 명의 목소리로 분산되었다. 그들은 길다란 검을 앞으로 겨눴다.
“돌격 앞으로!”
―와아아!
열 기의 타이탄이 지면을 박차고 내달렸다. 현존하는 병기 중에서 가장 무지막지한 기동력을 가진 강철의 기사가 넓은 보폭으로 초원을 달렸다. 레스터는 이를 앙다문 채 당장에라도 끓어오를 듯한 마나의 격류를 통제했다.
붉은 타이탄과의 거리가 순식간에 줄어들었다.
“오퍼레이터!”
고압적인 목소리의 주인공은 레스터 앞자리의 기사 올바드였다. 그가 외쳤다.
“더 빨리 달린다! 저 붉은 기체는 내 몫이다!”
레스터가 경악했다.
“무슨 말입니까? 돌격 진영을 흐트러뜨리면 안 됩니다!”
“기사의 용맹함을 보여줄 때다!”
“이익, 웃기지 마! 전쟁의 전 자도 모르는 초짜 주제에……!”
“뭐라? 이 무엄한 놈!”
갑자기 마나가 폭발했다. 올바드가 일방적으로 과도하게 속도를 올린 탓이었다.
레스터는 욕지거리를 내뱉었지만 필사적으로 정신을 집중했다. 마나를 통제하는 일은 펄떡거리는 잉어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있는 일이나 다름없다. 조금만 방심하면 놓쳐 버리기 십상이다.
레스터의 타이탄이 선두에 나섰다. 붉은 타이탄이 더욱 가까워졌다.
“뭐…….”
그 짧은 시간, 레스터는 전율을 느꼈다.
일단 외관이 특이하다. 거인 병기는 어차피 기사의 신체 확장이다. 따라서 기사가 가급적이면 통제하기 수월한 방향으로, 즉 안정감을 잃지 않는 방향으로 발전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하지만 이 붉은 타이탄은 달랐다. 안정감 따위는 전혀 염두에 두지 않은 듯, 날렵한 몸체에 우악스러운 팔이 양쪽으로 붙어 있다.
파괴의 신.
그런 이미지가 레스터의 뇌리를 스쳤다.
그리고 그런 생각은 곧 행동으로 이어졌다.
“어엇!”
타이탄의 몸체가 기울어졌다. 레스터가 마나의 흐름을 의도적으로 방해한 것이다.
격류에 바위를 던지면 일시적으로 물살의 흐름이 바뀐다. 가장 먼저 돌격하던 백색의 타이탄은 다리의 움직임을 통제하지 못하고 기우뚱거리다가 붉은 기체의 옆으로 몸을 던졌다.
쿠궁!
거대한 몸집이 땅을 울렸다.
“뭐 하는 짓이냐, 오퍼레이터!”
올바드가 분노하며 외쳤다.
“이 몸에게 창피를 주다니!”
하지만 레스터는 그의 말 따위를 신경 쓰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목숨을 구해 줬으면 감사할 줄이나 알아!’
그는 속으로 그렇게 외치며, 하얗게 질린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붉은 타이탄이 칼을 뽑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빈손이었는데, 지금은 커다란 장검이 들려 있었다.
그 짧은 순간에 정확히 목을 노리고 칼을 빼어 휘두른 것이다. 만약 일부러 넘어지지 않았다면 지금쯤 목이 날아갔을 것이 분명했다.
“말도 안 돼!”
경악하고 있는 것은 레스터만이 아니었다. 모든 참모진이 붉은 타이탄을 보며 놀라고 있었다. 그 붉은 괴물은 다음으로 도착한 흰색 타이탄의 가슴에 검을 꽂아 넣었다. 조금의 기회도 주지 않는, 너무나도 깔끔한 일격이었다.
백색 타이탄이 고개를 떨구며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탑승하고 있는 기사가 어떻게 되었을지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갑작스레 펼쳐진 상황에 당황했을까, 거의 동시에 도착한 나머지 두 기의 타이탄 역시 별 힘을 쓰지 못한 채 순식간에 반파되었다. 순식간에 세 기의 타이탄이 전투 불능에 빠진 것이다.
“아이반!”
레스터가 소리질렀다. 파괴된 타이탄 중 하나에는 그의 친구인 아이반이 타고 있었다. 운이 나쁘면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피가 거꾸로 솟구쳤다.
“너, 이 개새끼!”
레스터가 붉은 타이탄을 향해 외쳤다.
붉은 타이탄은 뒤늦게 도착한 여섯 기의 타이탄과 접전을 펼치기 시작했다. 올바드와 레스터의 타이탄도 뒤늦게 몸을 일으켜 가세했다.
그 엄청난 대전에 초원이 전율했다. 진홍의 타이탄은 7대 1이라는 전력의 열세를 힘으로 압도하고 있었다.
레스터 역시 이번만큼은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익숙한 솜씨로 마나의 흐름을 통제하며 초짜 오너인 올바드의 훌륭한 보좌 역할을 다했다. 그러나 능숙한 오퍼레이터인 그로서도 지금의 상황을 명확하게 판단할 수는 없었다.
그 순간, 불가능하다 생각해서 지워 버렸던 작전 하나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던 그 전술. 그것에는 반드시 필요한 전제가 있었다. 상상할 수 없는 그 무언가가 시리온 우익의 타이탄 열기를 막아 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 무언가의 정체가 밝혀졌다.
그것은 괴물이었다.
위이잉!
상식을 벗어난 과격한 움직임에 붉은 타이탄의 기체가 굉음을 울렸다. 커다란 검이 붉은 타이탄의 견갑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하지만 녀석은 몸을 살짝 비트는 것만으로 칼을 흘려보냈다. 놀랍도록 민첩한 움직임이었다.
다시 등으로 하나의 검이 파고들었다.
카앙!
불꽃이 튀며 스토퍼에 막힌 검이 튕겨 나갔다. 몸을 뒤집어 검을 쳐 낸 붉은 타이탄이 동체를 움직여 적극적인 공세에서 빠져나왔다. 어마어마한 도약력. 속도도, 힘도, 기술도 압도적이었다.
하지만 이쪽은 숫자가 많다. 시리온 제국의 백색 타이탄들이 거칠게 달려들자 붉은 타이탄도 다시 수세에 몰리기 시작했다.
백색의 검이 허리를 스치는 순간, 붉은 타이탄의 몸체가 180도 회전하며 팔꿈치로 자신을 공격한 상대의 안면을 후려쳤다.
콰직!
그 순간, 세 방향에서 날카로운 검이 날아들었다. 하지만 녀석은 어떤 기교도 없이 검을 한 번 휘두르는 것으로 그 모두를 쳐 내고는 뒤이어 한 기의 허리에 검을 꽂아 넣었다.
우지끈! 하는 육중한 금속음과 함께 공격을 받은 타이탄이 휘청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이, 이, 이, 이건 뭐야!]
오퍼레이터 하나가 비명을 질렀다. 누구보다도 침착해야 할 오퍼레이터가 안정을 잃은 이상, 그 타이탄의 운명은 불 보듯 빤했다.
붉은 기사의 검이 허공을 수놓았다. 속임수도, 화려함도 없는 검이 단 한 번의 헛손질도 없이 죽음의 궤적을 그리고 있었다. 지켜보는 자도, 검을 섞는 자도 누구 하나 입을 여는 이가 없었다.
죽음의 윤무.
한 기의 붉은 타이탄이 전장을 지배하고 있었다.
롬바드 가의 장자인 카일은 브루어 장군 휘하의 작전 참모로 이번 전투에 파견되었다. 푸른색의 머리를 질끈 묶은 그는 보기 드문 미남으로, 웬만해서는 입가에 미소를 지우지 않는 낙천적인 성격의 사내였다. 그러나 지금 전장을 바라보는 그의 표정은 짙은 그늘에 잠겨 있었다.
카일은 작전 회의 때 초원으로의 진격을 반대했던 유일한 참모였다. 아무리 병력의 우세가 확실하다 할지라도 수세의 입장에서 성 바깥으로 나가 적을 맞이하는 일은 쉽게 결단을 내려서는 안 될 일이다. 견고한 성벽은 수만 명의 병사보다 더 많은 역할을 한다. 포위되지도 않았는데 어째서 굳이 병력을 노출해야만 하는가.
물론 한 번의 전투가 아니라 장기적인 안목으로 바라보았을 때, 그리고 두 나라의 정치적 알력 싸움을 생각해 보았을 때 그것이 나쁜 판단이라고만은 볼 수 없다. 때로는 과감한 결단으로 상대방 국가의 기를 죽이는 일이 필요한 것이다.
카일도 물론 그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대표를 던질 수밖에 없던 것은 지금은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별의 흐름도 좋지 않았다. 점성술을 맹신하는 것은 아니지만, 천체의 흐름이 인간 세계의 운명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은 역사가 입증하고 있다.
보아라, 예감이 들어맞질 않았는가!
그는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며 혼돈의 전장을 바라보았다. 이변의 중심은 우익을 휘젓고 있는 붉은 타이탄이었다.
“왼쪽은?”
카일은 고개를 돌렸다. 12대 10의 열세 상황이라 해도 압도적으로 불리한 것은 아니었다. 어떻게든 좌익이 버텨 준다면 그사이에 중보병으로 적군을 밀어 버릴 수 있었다.
“저건……!”
촤르르르!
쇠사슬. 시리온 제국의 타이탄과 크라수스 공화국 측의 타이탄이 부딪치려는 순간, 타이탄의 발목 지점에서 쇠사슬이 튀어 올랐다. 미리 설치해 두었던 거대 병기용 강철 구속기였다.
갑작스러운 함정에 몇 기의 타이탄이 바닥을 굴렀다.
“저런 애들 장난 같은 함정에 당하다니!”
그의 곁에 있던 올바드 사령관이 외쳤다. 카일은 고개를 저었다. 애초에 상대를 얕보았던 게 문제였다. 애송이 지휘관이라는 선입견에 전장의 선택권을 넘겨 준 것도, 먼저 돌격한 것도, 저런 초보적 함정에 당한 것도 상대방을 너무 얕보았기 때문이다.
겉으로 보기에 아직 전세는 시리온 측의 우세였다. 비록 세 기의 타이탄을 잃었다 하나, 아직 수로는 압도적이었다. 아군 타이탄의 발을 묶은 쇠사슬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타이탄의 거력은 그 정도 쇠사슬쯤 어렵지 않게 풀어낼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시작하기도 전에 평정심을 잃었다는 사실, 전투 중 한시라도 다른 곳에 신경을 쏟아야 한다는 사실인 것이다. 그리고 그런 우려는 금세 결과로 드러났다.
콰직!
흰색 타이탄, 시리온 제국의 타이탄 하나가 적 회색 타이탄의 철퇴에 맞아 머리가 으깨졌다. 그 타이탄은 몇 번 저항하는 듯하더니 결국 가슴을 꿰뚫리며 기능을 정지했다. 흩뿌려지는 타이탄의 잔해가 태양빛을 반사하며 눈부시게 반짝거렸다.
카일은 고개를 돌려 브루어 장군을 보았다. 퇴각하려면 지금 해야 했다. 다소의 피해는 있었지만, 정체불명의 붉은 타이탄이라는 새로운 전력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수확이 있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브루어 장군은 생각이 다른 듯했다.
“전군 돌격하라!”
카일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우아아아아!
두 개의 붉은색 깃발이 나부끼고, 일순간 언덕 위에 있던 시리온의 중앙 병력이 돌격을 시작했다.
“무슨 짓입니까!”
피가 끓어오른 카일이 브루어 장군에게 외쳤다. 엄연한 하극상이었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아무도 그것을 지적할 여유가 없었다.
“아직 우리의 병력이 더 많다! 이대로 밀어붙이면 틀림없이 승리할 수 있어!”
궁색하다. 그렇게 믿고 싶은 것뿐이다. 카일은 붉게 물들어 버린 브루어 장군의 눈을 보았다. 너무나 유리해 보였다. 절대로 질 수 없는 전투였다. 눈에 보이는 압도적인 전력 차이가 경험 많은 브루어 장군의 눈을 어둡게 만들었다.
카일은 눈을 감았다. 병사들은 죽음을 향해 돌격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