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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을 쓰는 타이탄 1권(3화)
1장. 전장의 괴물(3)
일만여의 시리온 측 보병이 적 본대에 접촉하기 직전, 풀로 가득한 초원 지대에 엎드려 매복하고 있던 일천의 창병이 일어섰다.
―우와아아아!
5미터가 넘는 창이 시리온 병사들의 가슴을 꿰뚫었다.
“끄아아아!”
“으아아아아악!”
끔찍한 비명이 초원을 가득 채웠다. 삽시간에 엄청난 피해를 입은 중장보병의 전열이 주춤하는 사이, 뒤에서 밀려오는 아군 병사가 앞쪽의 병사를 떠밀기 시작했다. 브루어 장군의 무리한 돌격 명령으로 인해 전열이 흐트러진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화살비가 하늘을 뒤덮었다.
혼란에 빠져 화살에 대한 대비를 할 여력이 없던 시리온 병사들의 피해가 속출했다.
솟구치는 선혈이 태양을 가렸다.
카일의 얼굴에 비통함이 어렸다. 그의 시선은 속절없이 죽어 나가는 전장의 병사들에게 향해 있었다.
‘이 얼마나 허무한 죽음이냐.’
그는 분노했다. 전쟁에는 사람이 죽어 나가기 마련이다. 특히나 군인이라면 반쯤은 죽음에 걸쳐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런 식이라면…….
‘이대로는 모두가 죽는다.’
최고 사령관의 잘못된 선택은 언제나 참혹한 대가를 요구한다. 병사들은 광기를 내뿜으며 죽음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그들을 절벽으로 떠밀고 있는 것은 대체 누구인가. 카일의 분노한 시선이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지르고 있는 브루어 장군을 향했다.
“돌격! 돌격하라!!”
흐릿해진 레스터의 의식이 기억의 세계를 맴돌았다.
“두려운가?”
붉은 타이탄으로부터 흘러나온 목소리는 맑고 깊었다.
“두려움을 접어라. 생의 건너편에는 고요함만이 있을 뿐이다.”
길다란 검이 하늘로 치솟는다. 금방이라도 몸이 두 조각이 날 것 같은 위압감에 사로잡혔던 레스터는 현실로 되돌아왔다.
“헉!”
그는 눈을 번쩍 떴다.
조종실 안이었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언제부터 기절해 있던 거지?’
그는 기억을 더듬었고, 곧 모든 것을 기억해 냈다.
이쪽에서 총 일곱 기의 타이탄이 붉은 타이탄을 에워싸고 한꺼번에 덤벼들었다. 하지만 붉은 타이탄은 놀라운 움직임으로 모든 공격을 피하거나 막아 내며 시리온 제국의 타이탄을 하나씩 격파해 나갔다.
물론 이쪽이 결정적인 기회를 잡은 적도 있었다. 세 기의 타이탄이 붉은 타이탄의 움직임을 완전히 제한했을 때 순간적으로 빈틈이 보였던 것이다.
“올바드 경, 지금!”
“알고 있다!”
레스터의 외침에 올바드가 반응했다. 그의 타이탄은 검을 뒤로 크게 당겼다가 앞으로 찔렀다. 마지막 힘을 쥐어짠 혼신의 일격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붉은 타이탄의 모습이 순간적으로 사라진 것이다.
“뭣?!”
그리고 정신을 차려 보니 주위의 모든 타이탄이 쓰러져 있었다.
쿠웅!
산산조각 난 여섯 기의 타이탄을 짓밟은 채, 붉은 타이탄은 관절마다 검은색의 연기를 내뿜으며 우두커니 서 있었다. 혼자서 정예 소대를 모조리 박살 낸 것이다.
“으, 으…….”
기사 올바드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부들부들 떨었다. 나름대로 자신감을 가지고 전투에 임했다. 앞길을 가로막는 적은 누구라도 박살 낼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서 있는 괴물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올바드 경, 도망쳐야 합니다!”
레스터가 냉철한 목소리로 외쳤다. 하지만 올바드는 이미 옴짝달싹도 못할 정도로 공포에 사로잡혀 있는 상태였다.
붉은 타이탄이 고개를 천천히 돌렸다.
“두려운가?”
레스터는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두려움을 접어라. 생의 건너편에는 고요함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칼을 높이 쳐들더니, 이쪽으로 한 걸음을 내딛었다. 단지 그뿐이었는데 엄청난 위압감이 느껴졌다.
올바드가 발작적으로 비명을 질러댔다.
“으, 으아아아아아!”
그리고 곧바로 몸을 돌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이미 마나는 고갈 직전이었다. 하지만 이때만큼은 목숨이 달려 있었기에 아무것도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쿵, 쿵, 쿵!
“이런, 올바드 경! 침착하십시오!”
“저, 저리 가! 오지 마!”
레스터의 다급한 조언을 무시한 채 올바드는 뛰었다. 순간적으로 마나의 양을 폭발적으로 늘려 주입하자 속도가 더욱 빨라졌지만, 정작 타이탄의 다리는 통제 불가능의 영역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타이탄은 정신없이 도망치며 아군의 보병 진영으로 들어갔다. 병사들이 혼비백산 흩어지는 것이 보였다.
“이익, 멈춰! 우리 편 병사를 다 밟아 죽일 셈이야?”
“아악! 아악!”
올바드는 이미 말을 들을 수가 없는 상태였다.
초보 오너가 가장 경계해야 할 점은 타이탄에게 과도한 활동을 요구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자신의 몸이 혹사당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부작용에 의한 부담감은 오퍼레이터에게도 고스란히 돌아온다.
마나의 흐름이 소용돌이치며 이리저리 튀었다.
“윽, 아아악!”
레스터는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비명을 질렀다. 타이탄이 온몸에서 시커먼 연기를 내뿜으며 초원 위에 쓰러짐과 동시에 레스터도 정신을 잃었다.
얼마나 정신을 잃고 있었을까.
레스터는 벨트를 풀고 앞자리로 상체를 숙였다.
“올바드 경.”
올바드는 반쯤 벌린 입 사이로 피거품을 물고 있었다. 눈은 위로 뒤집힌 채 흰자위를 보이고 있다.
“이런, 올바드 경!”
레스터는 황급히 그의 맥박을 재었다. 하지만 이미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평정심을 잃고 마음대로 날뛴 대가로 그의 몸은 안쪽에서부터 망가져 있었다.
죽음의 음산한 분위기가 조종석을 가득 메웠다.
“이런, 젠장! 미친놈!”
레스터는 아무도 듣지 못할 욕을 쏟아 냈다.
“네가 죽으면 어쩌란 말이야, 이 거지 똥 같은 놈아아아!”
망자는 답이 없었다.
실컷 소리를 질렀더니 감정이 가라앉았다. 사실 그 욕설의 반은 자신을 향한 것이다. 모든 것이 분했다. 새로 태우게 된 오너가 아무리 오만하고 제 주제를 모르는 골칫덩어리라지만 전쟁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초짜 도련님일 뿐이었다. 오퍼레이터로서 지켜 냈어야 했다.
레스터는 손을 뻗어 그의 눈을 감겼다. 그나마 표정이라도 곱게 해서 보내야 했다.
그리고는 조종실의 문을 열었다.
―와아아!
흙먼지가 섞인 햇빛과 함께 전장의 소음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레스터는 드러누운 타이탄의 가슴 위에 서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전장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저 멀리서 크라수스 공화국의 보병 군단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그들은 이런 순간에도 냉정하게 대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 반면 이쪽의 병사들은 이미 통제권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 걸음이 빠른 자가 느린 자를 밀치고, 그 등을 다른 병사들이 밟고 지나간다. 병력의 차이가 컸음에도 불구하고 패색은 이미 짙게 나타나고 있었다.
‘패전이란 말인가?’
레스터는 이를 악물었다.
“우리 편 병사들을 혼란시켜서 어쩌겠다는 거야, 이 멍청한 놈아!”
그는 울컥, 화가 치밀어올라서 시체의 머리통을 때렸다. 하지만 이제 와선 모두 부질없는 짓이었다. 죽은 놈이야 어쨌든 일단 자신의 살 궁리부터 해야 하지 않겠는가. 자칫하면 전쟁 포로가 될 수 있으니 한시라도 빨리 도망쳐야 했다.
그때 목소리가 들렸다.
“저기요…….”
힘없는 소녀의 목소리였다.
레스터는 깜짝 놀라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웬 사제복을 입은 여자애가 땅바닥에 드러누워 있었다.
“이것 좀 치워 주시면 안 될까요?”
“응?”
“이거 말예요, 이거.”
그녀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다리를 가리켰다. 타이탄의 커다란 팔이 그녀를 짓누르고 있었다.
레스터는 깜짝 놀랐다.
“억, 이런!”
“그렇게 놀랄 시간에 좀 치워 주세요.”
“너 괜찮냐?”
“안 괜찮으니 일단 좀 치워 달라고요.”
여자애가 뾰로통한 얼굴로 말했다.
레스터는 허둥지둥 내려와 타이탄의 팔을 등으로 받쳐 들어 올리려고 했다. 하지만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어떻게든 해야만 했다. 눈앞에 있는 것은 어린 소녀였다. 게다가 비전투 요원인 사제. 이런 곳에서 허무하게 죽을 목숨 아닌 것이다.
“으으…… 이익!”
하지만 거대한 기체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팔의 무게만으로도 이미 수톤에 달하니만큼 그런 무게를 일개 마법사인 자신이 어떻게 할 수는 없었다.
적 병사들은 당장에라도 이곳으로 들이닥칠 것처럼 몰려오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타이탄의 역소환을 감행하는 것은 무리였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은 둘째 치고, 역소환에는 고도의 집중력과 방대한 마나가 필요한데, 그 와중에 적병을 만나게 되면 자신도 위험했다. 레스터는 갈등했다.
내버려 두고 도망칠 것인가.
“도망치세요.”
보다 못한 소녀가 말했다.
“뭐라고?”
“됐으니까 도망가라구요.”
“아니, 그래도 어떻게…….”
“아, 좀! 아저씨!”
소녀가 버럭 화를 냈다. 레스터는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여자는 언제 화를 냈냐는 듯 평온한 표정으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하늘이 파랗네……. 죽기 좋은 날이죠? 여기서 삶을 마감하는 것도 그리 나쁘진 않은 것 같아요.”
소녀는 그렇게 말하며 체념한 듯 눈을 감았다. 도대체 이 여자애는 뭐야,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때, 한 무리의 적군이 몰려들었다.
“잡아!”
“우오오!”
칼과 방패를 든 보병 너댓 명이 레스터를 향해 달려들었다. 레스터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주문을 외웠다.
콰과광!
그가 가리킨 방향으로 한 줄기의 벼락이 내리꽂혔다. 병사들이 처절한 비명을 내지르며 사방으로 튕겨져 나갔다. 모든 오퍼레이터는 기본적으로 뛰어난 마법사다. 결코 일반 병사들이 상대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닌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적군은 점점 더 많이 몰려들 것이다. 그렇게 되면 레스터라고 할지라도 무사할 수 없었다.
소녀를 두고 이대로 도망쳐야 하는가?
긴 속눈썹 사이로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는 자신의 여동생과 비슷할 정도의 나이였다.
“젠장!”
마침내 레스터는 결단을 내렸다. 그리고 바닥에 쓰러져 있는 타이탄의 가슴으로 올라섰다.
타이탄은 애초부터 기사의 육체를 모델로 설계되었다. 사방에서 빗발치는 화살과 날카로운 창 앞에서 전투를 지속하기 위해 기사의 갑옷은 더욱 두꺼워지고 무거워질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따르는 기동성 문제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전하지 못한 갑옷을 개량하기 위해 연구를 하던 끝에 탄생한 것이 바로 타이탄이었다.
점점 출력이 발달해 나감에 따라 타이탄의 크기도 초기의 2미터 정도에서 10미터에 육박하는 거대한 병기로 탈바꿈되었고, 기사의 갑옷이라는 개념에서 탈피해 사람이 탑승하는 마도 병기라는 개념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는 기사와 마법사의 2인 1조라는 공식이 성립된 것이다.
“저리 비켜!”
레스터는 축 늘어진 기사 올바드의 시체를 한쪽으로 치우고는 메인 조종석에 앉았다.
“어디부터 건드려야 되나…….”
레스터는 콘솔 박스를 열었다. 그 안에는 복잡하게 세공된 금박이 씌워진 기판과 드워프의 손길을 거친 미스릴 극세사가 신경망처럼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인간으로 치면 동맥과 신경 다발이 모여 있는 셈이다. 각 기판들은 유기적으로 마나의 흐름을 이어 주는 미스릴 다발들에 병렬로 연결되어 있었다. 이것들은 한 부분의 연결에 문제가 생긴다 해도 전체 타이탄의 기동에는 문제가 없도록 하기 위한 장치였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함부로 건드렸다간 타이탄 자체가 망가질 우려가 있었다.
“자, 그럼 어디…….”
드드득!
레스터는 콘솔 박스의 연결선들을 죄다 뽑았다. 타이탄 정비사가 본다면 혼절할 만한 일이었지만, 그의 손놀림은 전혀 거침이 없었다. 일단 뽑아낸 연결선을 순차적으로 재연결한 레스터는 가장 크고 두꺼운 연결선 하나를 집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하나이자, 가장 중요한 작업으로 이끌 열쇠였다. 레스터는 그 연결선의 끝을 잘라 내었다.
뽑혀진 연결선에서 푸르스름하게 가시화된 마나가 유실되고 있었다. 레스터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그 날카로운 끝을 손등에 가져다 박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