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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을 쓰는 타이탄 1권(4화)
1장. 전장의 괴물(4)
화아앗!
기체 내부에 뜨거운 피가 튀며 일순간 레스터의 동공이 크게 확대되었다. 타이탄과 감각이 공유되면서 마력 순환 기관인 엘레나트 코어에서부터 뿜어져 나오는 마나가 수십 톤 무게의 기체에 빠짐없이 흘러 들어가는 모습이 비현실적으로 생생하게 그의 신경을 자극했다.
동시의 그의 입에서 주문과도 같은 말들이 흘러나왔다.
“모든 연결 초기화. 피드백 오프. 감각 확장 시스템 온. 신체 확장 연결을 재구축한다……. 오브젝트 셀프(Object―Self), 메디테이션(Meditation). 오브젝트 리셋(Object―Reset), 소울(Soul), 인라지(Enlarge), 익스펜션(Expansion), 리버스 링키지(Reverse Linkage). 오브젝트 리셋, 타이탄(TITAN), 마나 오버플로우(Mana Overflow)…….”
그의 입에서 쏟아지는 말들은 하나같이 타이탄의 중추 연결 라인에 해당하는 핵심 코드였다. 멋대로 손대다간 엘레나트가 붕괴될 수도 있으며 연쇄 작용이 이어지면 폭발의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한 일들을 레스터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해치우고 있었다.
우우우웅!
검푸른 빛의 흐름이 작업에 열중하고 있는 레스터의 몸을 타고 돌았다.
“신체 확장 확인, 피드백 시스템 재기동, 설정 완성. 다음은 운동계 접속. 시스템 초기화. 머리, 몸, 팔, 다리, 파트 식스 올 그린. 마나 스트림 회로 재구축, 서클링 기본 계수는 3, 임계치는 6으로 설정…….”
우우우우우우!
타이탄의 진동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레스터의 몸을 감싸는 검푸른 빛의 마나가 이제는 타이탄 전체를 휘감고 있었다.
철컥!
타이탄 내부에서 알 수 없는 격철음이 들려왔다. 동시에 타이탄의 내부가 푸른색 신호로 가득 찼다.
올 클리어.
그 짧은 순간, 타이탄의 기동 공식이 완벽하게 뒤바뀐 것이다.
“후우…….”
레스터는 천천히 심호흡을 하며 기체 내부에 있는 타이탄의 기명을 확인했다.
제국 표준 기종인 출력 7의 슈바르츠 급 타이탄. 모델명 세피로스.
“기동. 세피로스.”
우우우웅!
타이탄의 내부에서 깊은 울림이 느껴졌다. 마력 순환 기관, 즉 엘레나트 코어가 기동하는 소리와 함께 8미터의 거대 병기가 마법사 레스터와 동조했다.
레스터는 자신도 모르게 크게 심호흡을 했다. 타이탄과 동조가 이루어지는 순간 경험하게 되는 경이적인 존재감이 그의 자아를 터질 듯이 팽창시켰다.
“끄아오! 성공이다! 성공했어! 이런 미친!”
레스터는 괴상한 환호성을 지르며 뒷통수를 조종석에 쾅쾅! 들이받았다.
2장. 조우(1)
“나는 천성이 도박꾼이다.
전장이 한 치의 변수도 없는 곳이었다면,
난 군인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에르발디 왕국의 전략가, 일 바리오 드 바스쿠치.
“아야야…….”
문득 들려오는 신음 소리에 레스터는 번득 정신이 들었다. 지금은 감상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었다.
“어이, 괜찮아?”
그는 타이탄의 팔 아래에 깔려 있던 여사제를 보았다. 다행히도 그녀는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운이 좋았군.’
그녀가 깔려 있던 곳은 팔의 관절 부분. 관절의 이음새 사이에 있던 약간의 틈이 목숨을 건지게 한 것이었다. 그녀는 몸을 일으킨 타이탄을 향해 슬쩍 고개를 까딱이고는 힘겹게 그 자리를 피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다시 픽, 쓰러졌다.
“저런…….”
레스터는 그녀가 절뚝거리는 것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 이상은 그녀의 운에 맡겨야 했다.
고개를 돌리자 개미 떼처럼 밀려오는 크라수스 병사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전혀 두렵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몰려드는 병사들은 아무런 위협도 되지 못했다. 타이탄에 타고 있는 이상 사로잡힐 걱정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저 소녀는…….
레스터는 잠시 머리를 긁적거리며 고민하다가 결단을 내렸다. 뒤끝이 미적지근하게 남는 것은 그의 성미에 맞지 않았다.
“어이, 아가씨!”
레스터가 타이탄의 팔을 움직여 그녀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그런 발걸음으로 도망칠 수나 있겠어?”
“…….”
“얼른 올라타.”
레스터는 가슴 앞으로 손바닥을 내밀고 무릎을 꿇었다. 아직 문이 열려 있는 조종석이 지면과 가까워졌다.
여사제는 아직도 어리둥절한지 가만히 서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어이, 뭐 해!”
“제가 거기 타도 돼요?”
여사제가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좁긴 해도 비집고 들어와 앉으면 어떻게든 돼.”
“정말요, 아저씨?”
“……뭐야, 그 신난 표정은?”
“그럼 염치 불구하고.”
여사제가 손 위에 올라타자 레스터는 타이탄을 일으키며 그녀를 조종석의 안쪽까지 조심스레 끌어당겼다.
철컹!
흉갑 안쪽에 자리하고 있는 조종석의 문이 닫혔다. 그러자 공간이 엄청나게 좁아졌다.
여사제는 마치 레스터를 끌어안는 듯한 자세가 되어 찰싹 붙어 버렸고, 덕분에 레스터는 꽤나 민망한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아무리 상대가 여동생 뻘의 어린 소녀라고는 해도 이렇게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몸을 맞대고 있으면 기분이 묘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봐, 조종에 방해되니까 저기 뒤쪽 자리에 가 있어.”
“저보고 오퍼레이터를 하라구요?”
“그냥 앉아만 있으라고! 사제가 무슨 오퍼레이터야!”
“그러는 아저씨는 마법사가 무슨 오너예요?”
뜻밖의 반론이었다. 할 말이 없어진 레스터는 말없이 여사제를 쏘아보았다.
“알았어요, 말 잘 들으면 되잖아.”
여사제는 그렇게 말하고는 레스터의 어깨를 짚으며 뒤쪽으로 넘어가려 했다. 하지만 다친 다리 때문에 힘이 모자랐는지, 이윽고 주르륵 미끄러져 버렸다.
“꺄악!”
퍽!
“억!”
레스터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아래로 미끄러지며 여사제의 무릎이 레스터의 중요한 부분을 정확하게 내리찍었던 것이다.
“괜찮아요, 아저씨?”
‘누, 누굴 고자로 만들 셈이냐?’
레스터는 격통을 참으며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많이 아파요?”
‘당연히 아프지! 눈물이 펑펑 쏟아질 만큼 아프다고!’
소리치고 싶은 레스터였지만, 하반신에서 밀려오는 고통에 입을 뗄 수가 없었다.
“어디 한 번 봐요.”
“에이잇! 세피로스 발진!”
레스터가 밀려오는 고통을 떨쳐 버리는 듯 크게 소리쳤다.
키이잉!
그 부름에 부응하듯, 세피로스의 몸이 크게 떨었다. 그리고 최초의 걸음을 내딛었다.
쿠웅, 쿠웅!
하지만 그것은 걸음걸이라기보다는 발을 구르는 행위에 가까웠다. 그가 발을 움직일 때마다 지면이 움푹 파였지만 정작 속도는 거북이와 호각을 다룰 정도로 느렸다. 조종이 미숙한 탓이었다.
“이 느낌이 아닌가…….”
레스터는 다시 한 번 시도했다. 이번에는 반대로 힘을 너무 줬는지, 갑자기 타이탄의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꺄악!”
갑작스러운 요동에 여사제가 레스터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쿵쿵쿵쿵!
타이탄은 넘어질 뻔하다가 용케 균형을 잡고 앞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상체와 하체의 움직임이 부자연스럽게 따로 놀았다. 덕분에 백색의 타이탄은 볼썽사나운 모습으로 지그재그를 그리며 초원을 가로질렀다.
이처럼 타이탄의 걸음이 어설퍼진 데에는 레스터의 조종이 미숙한 탓도 있지만, 더 큰 문제는 오퍼레이터가 없기 때문이었다. 오퍼레이터 없이 타이탄을 기동하는 오너는 몇 걸음도 못 가서 넘어지기 십상이다. 금방 마나의 불균형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그나마 균형을 유지하며 걷고 있는 것도 레스터가 아니라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사정을 알 리가 없는 여사제가 미심쩍다는 눈으로 레스터를 쳐다보았다.
“아저씨, 진짜 오너 맞아요?”
“진짜 오너는 저기 뒈져 계시잖아. 안 보여?”
“아!”
그제야 여사제는 조종실 한쪽에 축 늘어져 있는 한 구의 시체를 발견했다. 하지만 그녀는 시체를 무서워하기는커녕 오히려 적극적으로 몸을 기울여 눈을 까뒤집어 보는 등 간략한 검시를 했다. 그리고 곧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 혼자 고개를 끄덕끄덕거렸다.
“너, 뭐 하냐?”
“마나 역류에 의한 쇼크사. 오너가 초보였나 봐요?”
그녀의 추리에 레스터는 헉! 하고 놀랐다.
“너, 되게 잘 안다?”
“뭐, 죽은 사람 한두 번 보는 것도 아니고…….”
여사제의 말에 레스터는 납득한 듯 입을 다물었다. 하기야, 사제이니만큼 죽음에 대해서는 자신보다 더 익숙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린 여자애가 이렇듯 긴장감없이 시체를 만지고 있다는 게 도무지 적응되지 않았다.
그는 문득 자신의 관자놀이에 부드러운 감촉을 느꼈다. 고개를 돌려보니 여사제가 깨끗한 천으로 자신의 얼굴을 닦아 주고 있었다.
“뭐 해?”
“다쳤잖아요.”
“누가? 내가?”
레스터가 얼빠진 목소리로 물었다.
여사제는 말없이 피가 흥건한 천을 눈앞에 흔들었다. 그제야 레스터는 자신의 몸 역시 성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까 타이탄이 넘어지며 기절하는 순간, 어딘가에 부딪쳐 다친 모양이었다.
“안 아팠어요? 꽤 크게 찢어졌는데.”
“됐어.”
레스터는 그녀의 손을 만류했다.
“가만히 있어요. 이건 지금 치료하는 게 좋아요.”
“됐다니까…….”
“아, 좀 가만있어 봐요!”
여사제는 버럭 소리를 지르며 레스터의 안면을 찰싹 때렸다.
‘여동생에게도 얼굴은 맞아 본 적이 없는데!’
그가 벙찐 표정을 하고 있는 사이, 그녀는 두 손을 가슴 앞으로 모았다. 잠시 후, 그녀의 손으로부터 황금색의 빛이 뿜어져 나왔다. 마나의 힘이 활성화될 때 나오는 빛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빛이었다.
레스터는 놀란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손에서 흐르는 신비로운 빛이 레스터의 관자놀이를 수차례 쓰다듬었다. 그러자 상처가 점차적으로 아물어 갔다. 처음엔 피가 멎더니, 살이 봉합되고, 결국 약간의 흔적만 남긴 채 치유되었다.
“다 됐어요.”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말투로 여사제가 말했다. 레스터는 기가 막혀 아무 말도 하지 못하다가 겨우 목소리를 냈다.
“어이, 아가씨.”
“피아.”
“뭐?”
“신명(神名) 에피알게나스. 피아라고 불러요.”
그녀가 자신을 소개했다.
레스터는 처음으로 그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이지적인 초록빛 눈은 극도로 차분해서 어떠한 감정도 읽기 힘들었다.
“……그래, 피아. 너, 신성력을 쓸 수 있는 거냐?”
“대단하지는 않지만요.”
그녀의 대답에 레스터는 머리가 다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방금 피아가 보여 준 정도의 신성력을 사용할 수 있게 되려면 엄청난 수련이 필요했다. 사제라고 해서 모두 신성력을 쓸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좋은 혈통과 올곧은 신앙심, 그리고 피나는 자기 수련 등이 수반되어야 비로소 가능한 영역이다. 때문에 피아처럼 어린 소녀가 신성력을 쓸 수 있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하지만 레스터가 어처구니없어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너, 그럼 아까 도망칠 때 자기 다리를 치료하면 되는 거였잖아?”
“…….”
피아는 멍한 표정으로 잠시 천장을 올려다보더니, 갑자기 자기 다리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정말로 그제야 생각이 난 모양이었다.
‘뭐야, 얘는?’
진심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남 상처 신경 쓸 시간은 있고, 자기 상처는 치료할 생각을 못하는 거냐?”
“사제는 타인의 고통에 민감한 법이거든요. 그리고 제가 좀 착해서요.”
“야, 그건 착한 게 아니라 멍청한 거지!”
“멍청한 거 아니거든요! 좀 멍하다는 소리는 듣지만.”
“그거나 그거나! 너, 그 정신으로 어떻게 전장에 나왔냐?”
“누군 나오고 싶어서 나온 줄 알아요?”
피아가 눈을 흘겼다.
“강제로 나온 건 아니잖아. 기본적으로 신전에 대해서는 징병권이 적용되지 않기도 하고. 결국 네가 스스로 자원해서 나온 거 아냐?”
레스터의 물음에 피아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사람이 제일 많이 다치는 곳이니까요.”
“…….”
그녀의 말에 레스터는 입을 다물었다. 괜시리 무거운 이야기로 흐르는 바람에 둘 사이엔 침묵이 흘렀다. 그사이에 피아는 자신의 다리를 치료하고 뒷좌석으로 엉금엉금 넘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