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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을 쓰는 타이탄 1권(5화)
2장. 조우(2)


레스터는 문득 무언가가 생각난 듯 손가락을 튕겼다.
“아참, 너 죽은 사람은 못 살리냐?”
“이 사람이요?”
피아가 기사 올바드의 뺨을 쿡쿡 찔렀다.
“그래, 그 사람. 죽으면 좀 많이 곤란한 사람인데 죽어 버렸거든? 어떻게 좀 안 될까?”
“죽은 사람을 살릴 줄 알면 제가 신이라도 되게요?”
“하긴, 그도 그렇다.”
레스터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 자신은 돌아가면 문책을 당할 것이다.
물론 얼마든지 변명은 댈 수 있다. 이 경우에는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붉은 타이탄’이라는 변수가 있었으며, 레스터 본인은 그 상황에 최선을 다해서 대처하지 않았는가. 오히려 책임이 있다면 이 작전을 방만한 태도로 계획한 지휘관에게 책임이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결과만 놓고 보자면 오너가 죽었다. 게다가 그 오너는 군단장의 아들씩이나 되는 도련님이라 오퍼레이터인 자신은 도저히 책임을 피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에잇, 몰라! 나중에 생각하자. 일단 살고 봐야지.’
일단 살아만 있다면 어떻게든 일은 풀릴 것이다.
마음을 굳힌 레스터는 타이탄의 속도를 높였다.
얼마 가지 않아 아군의 대열이 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대열이라고도 부를 수 없는 상태였다. 모두들 등을 돌리고 도망가느라 바빴던 것이다.
“저건……?”
레스터는 눈을 크게 떴다.
자세히 살펴보니 흙먼지 사이로 적군의 경기병대가 보였다. 그들은 빠른 속도로 전장을 휘저으며 도망치는 아군을 살육하고 있었다. 수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 흉포한 기세는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마치 수십 마리의 양이 한 마리의 늑대에게 쫓겨 도망다니는 듯한 꼴이었다.
“아악!”
“크아아악!”
도망치던 병사들이 적의 칼날에 쓰러졌다. 그 시체를 말발굽이 밟고 지나갔다. 기병이 한 번 쓸고 지나갈 때마다 비명 소리와 함께 수십의 시체가 생겨났다.
그런 광경을 보게 되자 레스터는 저도 모르게 피가 끓었다.
“저 새끼들이!”
그가 전투에 대한 의지를 강력하게 전달했다. 그러자 그 마음을 그대로 받아들인 듯 타이탄이 괴성을 내질렀다.
쿠아아아!
땅이 울릴 정도의 함성!
“우왓, 씨! 깜짝이야!”
레스터는 자기가 조종하는 타이탄의 소리에 자기가 놀라 버렸다.
타이탄이 내지르는 소리는 그 자체로도 하나의 무기였다. 적군의 사기를 꺾어 버리는 데 그만큼 효과가 좋은 것도 없기 때문이다.
세피로스의 괴성에 승승장구하던 적군의 기병대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타, 타이탄이다!”
“뭐야, 아직 남아 있는 게 있었나?”
“산개! 산개하라!”
지휘관의 다급한 명령에 기병대가 좌우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제각각 반원을 그리며 공화국 진영이 있는 쪽으로 후퇴했다. 그것은 실로 훌륭한 판단이었다. 레스터는 기병대의 움직임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하, 이 새끼들. 훈련 하나는 잘 받았구나.”
레스터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러자 피아가 뒤쪽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왜요, 아저씨?”
“아무리 진형을 잘 갖춘 기병대라도 타이탄의 일격을 버텨 낼 수는 없거든. 그러니까 이럴 경우에는 병력을 분산시켜서 피해를 최소화시키는 것이 올바른 판단이지.”
“호오, 그렇군요.”
“하지만 순간적인 판단에 이 정도의 움직임을 보여 준다는 건…….”
레스터는 끝까지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물러서던 기병대가 저만치에서 다시 진형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다만 이번에는 한 덩어리가 아니라 두 덩어리였다. 병력은 반토막으로 줄었다 하더라도 이미 도망치고 있는 보병들을 위협하기엔 충분했다. 게다가 이렇게 되면, 어느 한쪽이 타이탄에게 쫓기고 있더라도 다른 한쪽은 보병들을 몰아세우며 혼란에 빠뜨릴 수 있었다. 당연히 도망치는 보병을 보호하려는 레스터의 입장에서는 까다로운 작전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레스터의 행동은 두 가지로 제한되고 말았다.
하나, 한쪽씩 확실하게 상대한다.
둘, 양쪽을 견제한다.
첫 번째 방법은 적군의 섬멸을 우선시한 판단이고, 두 번째 방법은 아군의 안전을 우선시한 판단이다.
‘만약 내가 첫 번째 방법을 선택한다면, 마음먹기에 따라 어느 한쪽을 몰살시킬 수 있어.’
레스터는 거기까지 생각하고는 오싹한 기분을 느꼈다. 적이 무서워서가 아니었다. 적의 각오가 무서운 것이다. 그들은 이미 어느 한쪽이 몰살당할 각오까지 하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어떤 훈련을 받았기에?’
그는 문득 적군의 지휘관이 궁금해졌다.

붉은 타이탄.
전장의 언덕 위에 붉은 타이탄 한 기가 서 있었다. 타이탄의 기동 시간은 대체로 삼십 분 내외. 이미 전투에서 승기를 잡은 크라수스 측의 타이탄은 이 한 기의 붉은 타이탄만 제외하고는 모두 역소환되어 아공간에서 잠자고 있었다.
“파괴한 것은 모두 열두 기인가…….”
붉은 타이탄, ‘인페르날’에 타고 있는 이는 크라수스 측 지휘관인 루시우스 아이밀리아 아이젠이었다. 길게 기른 금발과 날렵하고도 매혹적인 눈매, 그리고 칠흑의 제복.
그는 추격전으로 변한 전장을 내려다보았다.
―우와아아아!
도망치는 병력은 일만, 추격하는 병력은 삼천이다. 그러나 기세는 정반대. 도망치는 쪽에서도 타이탄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역소환되었거나, 그렇지 않다면 어딘가에서 마나의 고갈로 인해 기동을 멈추고 쓰러져 있을 것이다.
루시우스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사라졌다.
“평의회의 늙은이들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군.”
크라수스 공화국에서 자신의 승리를 바라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루시우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타이탄의 가슴을 열었다.
후우우우!
뜨거운 대지의 열기와 함께 진한 혈향이 그를 자극했다. 그러나 그 지독한 피비린내에도 그의 푸른 눈동자는 흔들림이 없었다.
“결국 이기셨군요, 아이젠 사령관님.”
루시우스의 귓가로 오퍼레이터의 청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눈처럼 하얀 머리칼과 대비되는 갈색 피부. 그 옆으로는 인간의 것으로 보이지 않는 뾰족한 귀가 있었다. 루나 윈터스프링, 북부 겨울나무숲 최후의 다크 엘프인 그녀는 틀어 올린 머리칼을 풀어 헤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녀에게서 상쾌한 향기가 퍼져 나왔다. 마치 숲 속에 있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루시우스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루나, 건국 서사시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던 부분을 기억해?”
“그대, 모든 것을 가져라. 대신 승리는 내 것이다…… 라는 노랫말이었죠.”
“그래. 승리는 처음부터 내 것이었지. 그러니까 새삼스레 일깨워 줄 필요는 없어.”
“기쁘지는 않으십니까?”
루나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녀의 물음에 루시우스는 웃음으로 대답했다.
“하하하!”
그는 정말로 재미있는 말을 들었다는 듯 호쾌하게 웃었다. 이제 갓 청년이 된 사내의 때 묻지 않은 웃음소리에 일시적으로 전장의 온도가 낮아지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한참 후에야 그는 웃음기를 머금은 얼굴로 뒤를 돌아보고는 말했다.
“루나.”
“예.”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예정된 결과를 맛보는 것에는 아무런 기쁨도, 즐거움도 없어. 그저 지루할 뿐이지.”
“그런가요?”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엄청난 열세 조건에서 시작한 싸움이었다. 어느 누가 보더라도 크라수스 공화국이 패할 것이 눈에 빤히 드러나는 전투. 하지만 이 남자, 루시우스 아이밀리아 아이젠은 전투가 시작되는 순간부터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미래에 대한 자신감과 그것을 현실로 이끌어 내는 재능. 그 모두를 가지고 있는 남자가 바로 루시우스였다. 그리고 어느새 자신도 그의 자신감에 전염되어 있었다. 이 남자와 함께라면 절대로 패하지 않는다. 그런 믿음이 그녀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었다.
“이제는 평의회에서도 개선식 요구를 거절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건 그렇고, 루나, 둘만 있을 때는 편하게 말하라고 했잖아.”
마치 토라진 듯한 말투였다. 방금까지의 날카로운 기색이라고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평범한 스무 살의 청년이 있었다.
“지금은 전장이니까요.”
루나는 고개를 숙였다.
이십 년 전, 공화국과의 종족 전쟁에서 패배해 포로로 사로잡힌 그녀는 루시우스의 아버지인 파비우스에 의해 노예로 사들여졌다. 노예라고는 해도 엘프, 특히 다크 엘프는 그 희소성 덕에 비싼 가격에 거래된다. 그녀는 그만큼의 대우를 받았고, 그 믿음에 걸맞게 이십 년간 아이젠 가에 충성을 바쳐 왔다. 현재 그녀는 아이젠 가의 가신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융통성없는 건 여전하구나.”
“그건…….”
루나는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더욱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그때, 그녀의 안색이 급변했다.
“변수가 생겼습니다!”
“응?”
루나를 따라 시선을 돌린 루시우스의 시야 안으로 한 기의 타이탄이 보였다.
그 흰색의 타이탄은 퇴각하는 시리온 제국 병사를 지키듯이 서서 크라수스 병사들의 길을 막고 있었다.
“모두 도망치지 않았나?”
“식별 타입 TX 106, 시리온의 슈바르츠 급 타이탄. 전투 중 도망쳤던 기체로 추정됩니다. 하지만…….”
루시우스 역시 의아한 눈으로 그 흰색 타이탄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전력을 다해 도망치던 타이탄이 어느새 반전해 다시 전열을 가다듬는다?
그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타이탄의 기동 시간이 문제였다. 전투가 개시된 지 두 시간여가 가까워지는 지금까지 타이탄을 기동하는 것은 상식에 어긋난 일이었다.
“지원군인가? 그럴 리는 없을텐데…….”
루시우스가 중얼거렸다. 적들은 이 전투를 매우 유리하다고 판단했을 터. 그런 전투에 지원군을 보낼 리는 없었다. 게다가 오퍼레이터의 확언이 있었다. 루시우스는 그녀의 정보를 절대적으로 신뢰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후퇴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만…….”
“아니. 일단 가 보자.”
“네?”
루나는 당황한 눈으로 자신의 오랜 친우이자 주인을 내려다보았다. 루시우스는 어깨까지 흘러내리는 금발을 쓸어 올리며 천천히 타이탄의 흉갑을 닫았다.
“전투가 개시된 지 두 시간이 넘었다. 아직까지 저기 서 있을 수 있는 타이탄이 있다는 건 뭔가 이상하지 않아?”
“이상하긴 하지만…….”
“이상하다면 부딪쳐 봐야겠지. 몸을 빼는 건 그때라도 늦지 않아.”
루시우스의 눈이 반짝였다. 전장에서는 잔혹한 야수이지만, 이럴 때는 단순히 호기심 많은 청년으로만 보였다.
“그렇다면 남아 있는 열 기의 타이탄을 모두 동원하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무리야. 대부분이 이미 기동 시간을 넘겼어. 이미 다 이긴 전투에서 아군 기사를 혹사시킬 필요는 없잖아.”
“그건 루시우스 님도 마찬가집니다.”
“그건 오퍼레이터로서의 판단인가, 오랜 친구로서의 염려인가?”
루시우스가 갑자기 분위기를 바꾸어 차갑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죄송합니다.”
루나는 즉각 고개를 숙였다. 그제야 루시우스가 싱긋 웃어 보이며 원래의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달라. 이 타이탄과 네가 있는 이상.”

타이탄의 기동 시간은 대체로 삼십 분 내외. 뛰어난 기사라도 한 시간을 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지금은 전투가 개시된 지 두 시간째. 제아무리 날고 기는 기사라도 지금 레스터를 제지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 전장에서 나 혼자만 타이탄을 타고 있다!’
그 생각이 잠시 동안 레스터에게 도취감을 준 것은 사실이었다. 그래서 도망치지 않고 몰려오는 적군의 기병대를 적당히 몰아내며 시간을 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판단은 레스터의 생각일 뿐, 지금 이곳에는…… 괴물이 있었다.
“아저씨, 저거!”
갑작스런 피아의 말에 레스터는 고개를 돌려 그녀가 가리킨 방향을 바라보았다.
‘응?’
처음에는 붉은 점이었다. 그러나 그 붉은 점이 점점 커짐에 따라 레스터의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붉은 타이탄!’
혼자서 열 기를 상대한 희대의 괴수. 진홍의 타이탄이 빠른 속도로 자신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