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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을 쓰는 타이탄 1권(6화)
2장. 조우(3)


“루시우스 님!”
“루시우스 님이 오신다!”
적군의 보병들이 환호하는 소리가 들렸다.
레스터의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병사들이 일시에 양옆으로 갈라지며 공간을 만들었다. 그러자 붉은 타이탄이 썰물처럼 빠지는 병사들의 사이로 빠르게 쇄도하고 있었다.
레스터는 비로소 현실 감각을 되찾고는 외쳤다.
“제기랄, 너 이름이 피아라고 했지!”
“마, 맞는데 왜 그래요?”
“미리 사과해 두마! 구해 준다고 태웠는데, 여기서 같이 죽을지도 모르겠다!”
레스터는 이를 악물고는 맹렬한 기세로 칼을 빼 들었다.
붉은 타이탄은 날렵한 짐승처럼 경기병의 대열을 ‘뛰어넘어’ 달려왔다. 놀라운 도약이었다.
차앙!
예고도 없이, 달리던 자세 그대로 붉은 타이탄의 검이 뽑혔다. 성벽조차 무너뜨릴 것 같은 돌격과 함께 그 새카만 검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날아들었다. 엄청난 질량과 속도를 바탕으로 한 타이탄의 힘은 그야말로 상상초월. 그 검은 천지를 쪼갤 듯한 기세로 세피로스를 베어 왔다.
레스터는 황급히 검을 휘둘러 막았다.
그리고 충돌.
콰아앙!
온몸이 떨릴 정도의 충격이 레스터를 강타했다. 정신을 차려 보니 본래 있던 자리에서 이십여 미터 이상 밀려나 있었다. 또한 들고 있던 검은 산산조각 난 채로 허공을 날고 있었다.
멀리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크라수스 병사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우와아아아!
“크윽!”
레스터는 이를 악물었다. 죽을 각오로 휘두른 검이었지만 단 한 번의 검격에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 더 이상은 막을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고 고민할 시간 따위는 없었다.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한 가지.
‘선제공격!’
레스터는 한 손을 앞으로 뻗고 다른 한 손은 등 뒤로 돌린 뒤, 석궁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적이 두 번째로 달려들려는 순간, 적기 인페르날을 향해 화살을 날렸다.
쐐액!
공성병기와도 같은 거대한 석궁에서 날아간 화살은 허공을 찢으며 붉은 타이탄을 향해 쇄도했다.
그러나 상대는 역시 강했다. 달려들던 자세 그대로 단숨에 검을 들어 화살을 둘로 쪼개어 버린 것이다.
카앙!
“젠장!”
레스터의 입에서 절로 욕설이 튀어나왔다. 애초에 자신은 기사도 아니었다. 아니, 설령 그렇다 해도 저 괴물 같은 타이탄에게서 자신이 이길 확률은 0.1퍼센트도 없었다. 하지만 포기할 수도 없었다. 그 순간 자신은 죽게 될 것이 틀림없기에.
“좀 맞아라!”
레스터는 계속해서 석궁을 날렸다. 그러나 적은 모든 화살을 쳐 내고 있었다. 이윽고 붉은 타이탄이 지척에 다가오자 레스터는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우오오오오!
붉은 타이탄에게서 광포한 야수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놀이는 끝이다!”
외침과 함께 루시우스의 쾌검이 붉은 타이탄을 통해 폭사되었다. 지금까지와는 달랐다. 그걸 느낀 순간 레스터의 몸이 움직였다. 다행히 생각보다 몸이 빨랐다.
후웅!
무작정 뒤로 몸을 날린 세피로스의 가슴 위로 검이 스쳐 지나갔다. 황급히 피하느라 중심을 잃은 레스터를 향해 적의 검이 방향을 바꾸며 수직으로 떨어졌다. 상궤에서 벗어난 움직임이었다.
레스터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황급히 몸을 뒤집었다.
콰앙!
내려친 검에 땅이 터지며 엄청난 충격파가 세피로스를 덮쳤다. 수십 톤 무게의 타이탄이 종이짝처럼 나동그라졌다.
“우웩!”
충격파를 뒤집어쓴 레스터가 입에서 피를 쏟았다.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의 피비린내가 타이탄의 내부에 가득 찼다. 레스터는 힘겹게 입술을 훔치고는 다시 몸을 일으켰다. 아니,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세피로스는 레스터의 명령을 듣지 않았다.
‘젠장…….’
동조에 이상이 온 것이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 갔다. 절체절명의 순간, 단 일초의 허점에 목숨이 날아갈 수도 있는 이 순간에 타이탄과의 동조가 깨진 것이다.
“피아…… 피아!”
아득한 정신으로 뒷자리에 있을 피아를 불러 보았지만, 대답은 없었다. 이 정도 충격이었으니 아마도 정신을 잃었으리라.
쿠웅!
순간, 엄청난 굉음과 함께 붉은 타이탄이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그 손에는 검게 칠해진, 거대한 검이 들려 있었다.
“하아앗!”
적의 외침. 레스터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그다음 순간 찾아온 것은 고통도, 죽음도 아니었다. 그는 등 뒤로부터 다가와 자신의 어깨를 감싸는 부드러운 두 손의 감촉을 느꼈다.
“아직, 이곳은 당신의 무덤이 아니에요.”
분명한 목소리로 피아는 그렇게 속삭였다.
일순간 시간이 멈춘 듯한 기분이 들었다.

쿠웅!
루시우스의 검이 아무것도 없는 빈 땅을 내려쳤다. 상대가 피한 것이 아니었다. 이미 적기가 항거 불능의 상태라는 것을 깨닫고 검의 경로를 틀어 버린 것이다.
“적기, 침묵했습니다. 동조가 깨진 듯 합니다.”
루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루시우스는 어이없다는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뭔가 대단한 놈인 줄 알았더니…… 생명 반응은?”
“반응하는 개체는 둘입니다. 살아 있습니다.”
루나의 보고에 루시우스가 흥이 깨졌다는 듯 검을 집어넣었다.
“병사들에게 명령해서 타이탄을 해체시켜 생포하도록. 아무래도 마나를 모두 써 버린 것 같으니까. 귀족 급의 포로 하나쯤 있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루시우스는 탑승했던 기사가 마나를 모두 소진해 기절한 것이라 판단했다. 그리고 천천히 뒤로 돌아섰다.
그러나 그 순간, 이변이 일어났다.
“응?”
오퍼레이터 루나 윈터스프링, 그녀의 감각에 미세한 이상이 감지되었다. 그녀는 황급히 시야를 움직여 후방을 체크했다.
“적기 반응.”
“음?”
루시우스가 몸을 틀었다. 그의 시선에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있는 세피로스의 모습이 보였다.
“귀찮군. 그냥 죽여 버리지.”
루시우스가 다시 검을 꺼내 들었다. 날카로운 검에서 칙칙한 죽음의 빛이 퍼지고 있었다.
붉은 타이탄, 인페르날이 막 비틀거리며 일어선 세피로스에게 다가갔다.
카앙!
세피로스가 마지막 남은 무기인 단검을 손에 쥐려던 찰나, 그의 무기가 두 조각으로 박살이 나고 말았다. 루시우스가 번개 같은 속도로 칼을 휘두른 것이다.
콰앙!
두 번째 일격에는 오른팔이 통째로 날아가고 말았다. 어떠한 화려한 동작도 없는 무미건조한 휘두름이었지만, 기껏해야 비틀거리기나 하는 상태인 세피로스를 상대하기에는 충분했다. 타이탄 열 기를 상대로도 압도적인 무력을 보여 준 루시우스인만큼 기운이 다한 듯한 세피로스로서는 도저히 대적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콰드득!
세 번째 일격은 상대의 흉갑을 갈랐다. 소름 끼치는 파열음과 함께 파편이 사방으로 비산했고 그와 동시에 크라수스 병사들의 환호성이 초원에 울려 퍼졌다. 만약 조금만 더 깊게 베어 들어갔더라면 칼날이 조종석 안쪽까지 들어갔으리라는 것은 누가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대의 죽음을 자랑스럽게 여기도록 하라!”
루시우스는 마지막 일격을 펼칠 속셈으로 흡사 맹수의 기세로 칼을 찔렀다. 목표는 흉갑 안쪽의 조종석이었다. 하지만 세피로스는 왼팔로 흉갑을 감싸 안음으로써 최후의 방어를 펼쳤다. 그것은 살고자 하는 몸부림, 그 이상도 아니었다.
“흉하다!”
루시우스가 노한 목소리로 외쳤다. 그와 동시에 루시우스의 인페르날이 세피로스의 왼팔마저 뜯어 버렸다.
와드득.
굉음과 함께 거대한 강철의 팔이 땅 위에 떨어졌다. 양팔을 잃은 세피로스에게 더이상 저항할 수단은 없었다.
루시우스는 조용히 검을 치켜들었다. 그리고 일순간, 온 힘을 다해 내리그었다.
후우우웅!
손끝이 찌르르 하고 울렸다. 이 타이밍, 이 감각이라면 틀림없이 적을 베어낼 수 있었다. 그것은 경험으로 다져진 그만의 감각이었다. 타고난 것도, 누구에게 배운 것도 아닌, 오로지 그만의 것이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그 확신은 틀린 적이 없었다.
그랬어야 하는데…….
“위험합니다!”
오퍼레이터 루나의 다급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와 동시에 루시우스의 눈도 커다래졌다.
“매직 실드?”
그 직후, 두 타이탄 사이에 거대한 힘이 휘몰아쳤다. 검을 내려치던 인페르날이 맹렬한 기세로 튕겨져 나갔다.

정적이 흘렀다.
크라수스의 병사들은 한동안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방금 그들이 목격한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장면이었다. 한쪽은 혼자서 열 기의 타이탄을 파괴할 정도로 막강한 아이젠 사령관, 그리고 다른 한쪽은 양팔이 뜯겨져 나간 채 비틀거리고 있는 제국의 타이탄. 결코 상대가 될 수 없는 싸움인 것은 분명했다.
사람들이 루시우스의 검을 칭하길, 공간을 가르는 검이라 했다. 그런 그가 전력으로 검을 휘둘렀으니 다음 순간에 세피로스는 두 조각이 났어야 했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두 기체 사이의 공간이 이그러지더니, 오히려 인페르날이 튕겨져 나간 것이다.
루시우스는 금방 자세를 가다듬었지만, 다시 섣불리 공격하는 대신 검을 내리고 상대방을 바라보았다. 상대방 역시 비록 처참한 몰골이지만 지지 않으려는 듯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서 있었다.
한참 동안 두 기의 타이탄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전장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 정적을 깬 것은 인페르날의 기사, 루시우스 아이밀리아 아이젠이었다.
“재미있군.”
“……그래? 이쪽은 별로 재미가 없어.”
세피로스 안에서 다소 지친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 이름은 루시우스 아이밀리아 아이젠. 크라수스 공화국의 기사다. 그쪽은?”
“레스터. 시리온 제국의 타이탄 오퍼레이터.”
“오퍼레이터?”
루시우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오너와 대화하고 싶다. 오너는 벙어리인가?”
“아니, 내가 대리운전 중이야.”
레스터의 대답에 루시우스는 웃음을 터뜨렸다. 오퍼레이터가 오너 대신 타이탄을 기동하다니, 지금껏 들어 보지도 못한 이야기였다.
전장에 나서기 시작한 이후로 인페르날을 타고 있는 자신의 검을 제대로 받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본신의 실력만으로도 이미 공화국의 상급 기사를 능가했다. 그런 자신의 검을 일개 오퍼레이터에 불과한 인물이 막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방금의 기묘한 힘.
“이봐, 순수하게 타이탄 오너로서 궁금해서 묻는 건데 말이야, 어떻게 한 거지?”
루시우스가 물었다.
하지만 상대방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하긴, 애초에 대답을 기대하고 던진 질문은 아니었다.
“하핫.”
짧게 웃은 뒤, 루시우스는 입을 열었다.
“어떤가, 나와 손을 잡지 않겠는가? 공화국으로 온다면 내가 자네의 힘이 되어 주지. 그런 곳에서 시간을 보내기에는 자네의 능력이 아깝지 않은가.”
“아니, 됐어.”
“왜지? 그 잘난 애국심 때문인가?”
루시우스의 질문에는 일종의 빈정거림이 섞여 있었다.
레스터는 그 빈정거림에서 오히려 동질감 비슷한 것을 느끼고는 대답했다.
“아니, 유감스럽게도 내일 동생의 생일 파티를 해 줘야 하거든.”
“하하하!”
루시우스가 유쾌하다는 듯이 크게 웃었다.
“그런가? 하지만 결국 다시 전장에서 만나게 되겠지. 그때가 되면 이번처럼은 끝나지 않을 거야. 약속하지.”
“…….”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 레스터는 천천히 세피로스의 동체를 움직였다.
루시우스는 더 이상 쫓지 않았다. 이미 기동 시간의 한계를 넘어서 움직이고 있었던데다가, 기묘한 힘에 의한 피해로 모든 마나를 소진해 버린 것이다. 그 정도는 오퍼레이터가 일일이 말해 주지 않아도 스스로가 잘 알고 있었다.
“재미있어지겠어.”
루시우스의 낭랑한 목소리가 초원의 하늘로 흩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