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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을 쓰는 타이탄1권(7화)
3장. 수도를 향해(1)
“더 오너라, 더! 운명의 해일이여!
최후의 방벽을 부수고 내 시체를 가져가라!”
―오를린 요새의 마지막 성주, 성(聖) 리르카 장군.
제도 그리크.
천만 인구의 시리온 제국을 실질적으로 다스리는 황제가 거처하는 이 거대한 도시는 제국의 틀이 잡히기 시작한 이후 급속도로 발전해 지금은 명실상부한 서대륙의 중심지가 되어 있었다. 이곳은 항시 온갖 물류가 드나들고 각지에서 밀려드는 뛰어난 인재들이 홍수를 이룬다. 미술과 음악이 발전하고 건축과 공예가 절정을 이루었다. 도시는 풍요롭고 넘쳐 나는 물자는 잉여 문화로 흡수된다. 매일매일 유행이 바뀌고 새로운 문화가 꽃핀다.
후세에 시니피앙이라 전해지는 이 문화 격변 시기의 제도는 어느 곳으로 눈을 돌려도 고급 문화의 조류가 흘렀다. 열 살 먹은 어린아이들도 글을 읽을 수 있었고, 길거리의 거지들조차 오페라 한 구절을 외고 다녔다. 이렇듯 유례없는 대호황에 겨운 제국의 신민들은 언제나 황제를 찬양하기에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도시는 평소와 다르게 침울함이 감돌고 있었다. 패전한 4군단의 소식이 수도로 전해졌기 때문이다. 죽은 병사의 유가족들이 사망 통보를 받고는 목을 놓아 통곡하거나 혼절했다. 그 목소리는 수도 이곳저곳에서 울려 퍼지고 있었다.
수도의 한가운데에는 마치 그 슬픔을 포용하듯 푸른빛으로 찰랑이는 커다란 호수가 있었다. 그 앞에는 하늘을 찌를 듯 한 첨탑 사이로 수백 미터 길이의 다리가 놓여 있는데, 거대한 호수 한가운데에 세워져 있는 성으로 이어진 유일한 길목이다. 그 길을 따라 멀리서 보면 성은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듯 보이는데,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 백조의 성. 그 한가운데 영광의 홀이라 불리우는 대전에 현 황제 테오도로스 2세가 있었다.
“……타이탄은 총 20기 중 7기만이 생환했으며, 일만의 병사 중 살아 돌아온 자는 채 오천에 미치지 못합니다. 그리고 수뇌진에서 브루어 군단장을 비롯해 3명의 사망자가 있습니다.”
대전은 침묵에 휩싸였다. 보고를 하는 군무장관 베르톨트 백작의 표정에도 침중함이 어려 있었다. 제국이 지금의 성세를 보인 이후에 처음으로 당하는 대패였다. 일개 군단이라 해도 타이탄이 이십 여기나 동원되었다. 단순히 사기의 차원을 떠나서 제국이 패배했다는 사실 자체가 지금 이곳의 사람들에게는 충격이었다.
황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짐의 백성들이 목숨을 잃었다.”
비록 짧은 한마디였지만, 그 안에 어떤 뜻이 담겨 있는지 모를 신하는 아무도 없었다. 그 정도 눈치도 없다면 이 백조의 성에 발을 디딜 자격조차 없는 것이다.
백성은 그 목숨마저도 황제의 소유물이다. 그것을 잃었을 때에는 그에 상응하는 승리가 당연히 따라야 했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제국은 오로지 잃기만 했다. 불패의 명성과 제국의 명예, 오천의 병사와 열세 기의 타이탄, 그리고 유능한 장수를 잃었다.
황제의 심기는 극도로 불편했다. 이미 육십 줄이 넘은 노령의 황제는 더 이상 젊은 시절의 혈기왕성한 패왕이 아니었다. 그는 늙어가고 있었고, 쇠약해져 있었다. 젊은 시절 그를 특징짓던 불타는 듯한 머리칼도 이제는 그 빛을 잃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장을 지배하던 카리스마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야수와 같은 황제의 눈빛이 대전을 훑었다. 보지 않고서도 그가 누구를 바라보고 있는지 모두가 느낄 수 있었다.
“대책을 이야기해 보라.”
“그, 그것이…… 이런 중대한 사안은 황제 폐하의 뜻을 따라…….”
군무장관 베르톨트가 군색하게 입을 열었다. 그는 매사에 자신감이 넘치는 명문가의 귀족이었다. 덕분에 황제 앞에서 기품과 예를 갖추면서도 당당함을 늘 잃지 않았던 인물이다. 하지만 그것은 늘 승전보만을 올려온 덕분이다. 황제의 진노 앞에서까지 당당히 고개를 쳐들고 있을 수는 없었다.
“내 뜻? 내 뜻이라고 했나?”
베르톨트는 숨이 막혔다. 황제가 분노하고 있었다. 그 분노를 온전히 뒤집어쓰고 있는 베르톨트에 대한 연민의 시선이 던져졌다.
“내 앞에 적장의 목을 가져다 놓을 수 있는가?”
“그, 그것은…….”
“지금 당장 3개 군단의 편성권을 주겠다. 할 수 있는가?”
베르톨트는 대답하지 못했다. 비탄 초원의 문제만이라면 3개 군단이 아니라 1개 군단을 준다고 해도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리 단순하지 않았다. 비탄 초원을 장악하게 된 크라수스는 틀림없이 더 많은 병력을 그곳에 주둔시킬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번에야말로 정면 대결을 피할 수 없다.
제아무리 제국이라 해도 크라수스 공화국은 동부의 강호. 전면전을 벌였을 경우에는 제국 또한 막심한 피해를 감수할 수밖에 없다.
“10개 군단을 주셔도 그것은 할 수 없습니다.”
나직하지만 힘있는 목소리가 대전에 울려 퍼졌다. 황제와 닮은 붉은 머리를 한 사내. 그러나 젊은 시절의 황제와는 달리 부드러운 미소를 항상 입가에 머금고 있는 남자.
테오도르 황태자였다.
황제가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어째서인가?”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말해 보라.”
황태자가 몸을 일으켜 천천히 황제 앞으로 나아갔다. 베르톨트는 그제야 참았던 숨을 내쉬며 한숨을 돌렸다. 어느새 그의 온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던 것이다.
황태자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첫째, 곧 겨울이 오기 때문입니다. 지리상 북쪽 고지대에 속한 비탄 초원은 겨울이 오면 숨을 쉬는 것조차 어려울 정도의 칼바람이 불어옵니다. 신들의 산맥이라 불리는 글라시고르 대산맥에서 밀려오는 차가운 공기 때문입니다. 지금부터 병사를 조직하여 북쪽으로 파견한다고 해도 도착할 때쯤에는 이미 계절이 바뀌어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몇 달을 지체하고 나면 병사들은 지치고 피로해 더 이상 싸울 기력이 남아 있지 않을 것입니다. 전략적 가치가 높지 않은 비탄 초원에 그런 희생을 감수할 만한 이유는 없습니다.”
황태자는 잠시 숨을 고르고는 말을 이었다.
“둘째, 적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습니다. 옛 병서에 ‘적을 아는 것은 나를 아는 것만큼이나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이번 전쟁 전까지 크라수스에 대해서 아는 장수가 얼마나 있었습니까. 이번 패배는 우리가 적을 우습게 보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지금 또다시 병력을 일으켜 적을 패배시킨다 해도 그것은 임시방편에 불과한 일입니다. 크라수스 공화국은 큰 나라입니다. 지금까지처럼 병력만을 앞세워 정벌하기에는 어렵습니다. 크라수스 정벌은 국가의 대계로 삼아 차근차근히 시도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번 패배했다고 해서 제국이 몸을 사려야 한단 말이냐?”
황제의 말투에는 은은한 노기가 어려 있었다. 하지만 황태자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로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몸을 사리는 것이 아니라, 가볍게 움직이지 않는 것입니다. 아이에게 맞았다고 칼을 꺼내 드는 어른은 없습니다. 지금은 외부의 적을 응징하기보다는 가족을 잃고 슬픔에 빠진 백성들을 돌보는 것이 우선입니다. 지금의 패배를 곱씹어 내부를 다지고 충분한 전력을 앞세워 단번에 숨통을 쥐어야 합니다. 그것이 제국의 방식이자, 강자의 논리입니다.”
황태자의 말이 끝나자 대전 안에 무거운 침묵이 찾아들었다. 황제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그의 말은 구구절절 옳은 말이었다.
그때, 누군가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에게 3개 군단을 주신다면 당장 비탄 초원을 점령하고 적장의 목을 베어 오겠습니다.”
금발의 미남자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의 시선은 황태자를 향하고 있었다.
“형님의 말씀은 일견 그럴듯하나 결국 겁쟁이의 논리에 불과하오. 이 베르키우스 데 마그누스 시리온이 제국의 이름을 걸고 저 건방진 공화국의 무뢰배들에게 교훈을 내리고 오겠소.”
베르키우스 데 마그누스 시리온.
시리온이라는 성을 쓰는 이들은 많지 않다. 그리고 그는 그중 하나인 황자의 둘째 아들이었다. 형에게 밀려 황태자의 직위를 빼앗긴 비운의 황자. 그는 스스로 그렇게 자신을 정의했다.
“그것은 아니 될 말이다. 게다가 아직 의문의 타이탄에 대한 정체도 밝혀지지 않았다. 단 기로 한 소대의 타이탄을 전멸시킨 붉은 타이탄에 대한 정보가 확인되지 않는 이상 또 다른 원정은 위험을 자초하는 일이다.”
“그것은 떠도는 소문일 뿐이오. 형님은 설마하니 적에게 겁을 먹은 것입니까?”
“이황자님, 말씀이 지나치시오. 이곳은 대전이외다. 예의를 갖추시지요.”
황태자 테오도르의 곁에 있던 노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재무장관 마르티니 에쉔베일 후작이었다. 그는 이미 황태자비로 자신의 손녀를 내정하고 있다고까지 알려진 유명한 황태자파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정예 부대로 이름 높은 로열 그리핀 기사단장 포해머 쿤네발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다혈질로 유명한 그는 인간과 오우거의 혼혈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거대한 몸집의 사내였다.
“재무장관, 그대야말로 황족에 대한 예의를 갖추시오! 감히 그대가 끼어들 자리가 아니지 않는가!”
두 사람을 시작으로 이제 논쟁은 황태자파와 이황자파 사이로 옮겨 갔다. 그 어느곳에도 속하지 않은 이들은 그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보거나 황제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논쟁이 극도로 치달을 무렵, 마침내 황제가 입을 열었다.
“그만들 하라.”
그 한마디에 폭풍처럼 휘몰아치던 장내가 일순간 가라앉았다. 두 황자는 명을 기다리는 듯 황제를 향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한참 후, 논쟁의 열기가 가라앉자 황제는 근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두 사람의 이야기가 모두 옳다. 태자의 이야기는 정론이다. 그것이 제국이 나아가야 할 방향임은 분명한 일이다. 하지만 이황자의 의견도 타당하다. 우려해야 할 문제는 국내의 일만은 아니다. 오히려 생각해야 할 것은 내부보다는 동맹국의 동향이다. 이번 패배로 인해 먼 동맹국들이 크라수스 공화국의 영향권을 자처한다면 그것은 여타 국가들의 연쇄 이탈에도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이하 대신들의 생각은 어떠한가?”
황제의 말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가 그의 뜻에 동의하고 있었다. 아니, 설령 그의 뜻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지금의 황제에게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었다. 황제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군무장관!”
“네, 폐하.”
베르톨트가 황급히 몸을 낮추며 대답했다.
“베르키우스에게는 3개 군단의 편성권을 주어 비탄 초원을 점령케 하라. 다만, 시기는 내년 봄으로 늦추고 이후 제국의 모든 비선을 동원해 크라수스 제국의 내부를 정탐케 하라. 크라수스는 제국의 패권에 항거하는 적으로 규정하고 이번 전투를 이후 동부 대륙 정벌을 위한 초석으로 삼으라.”
“명을 받들겠습니다!”
황제의 말이 떨어지자 대전의 모든 이가 몸을 낮추어 크게 외쳤다.
다소 무거운 표정의 테오도르와 정반대의 표정으로 기뻐하는 베르키우스.
젊은 두 황자는 서로의 생각에 빠져 앞날을 내다보고 있었다.
잠시 후, 홀을 빠져나가는 테오도르의 등 뒤에서 누군가가 말했다.
“형님은 너무 주저함이 많아.”
베르키우스였다. 그의 눈은 항상 적대감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오늘만큼은 극히 만족스러운 기색을 띠고 있었다. 마치 승자가 패자를 대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테오도르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진중한 태도로 대답했다.
“무리한 짓을 했다.”
“뭐요?”
베르키우스의 눈이 금방 사나워졌다.
“강자는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한다. 감정에 휩쓸려서는 나라를 제대로 돌볼 수 없다. 폐하를 부추겨서 어쩔 셈이냐?”
“흥, 내년 이맘때 즈음이면 형님 입에서 그런 말도 못 나오게 될걸. 결국 마지막 순간에 폐하의 신임을 받게 되는 것이 누구인지 두고 봅시다.”
“너는 어째서 그렇게도…….”
테오도르는 무언가 더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그와 동생 사이에는 늘 거대한 벽이 가로막고 있었다. 때문에 그는 더 이상의 대화가 불가능할 것임을 경험을 통하여 알고 있었다. 그는 동생을 훈계하려는 것을 그만두고 보다 현실적인 것을 물었다. 아무래도 동생이 하려는 일이 미덥지 않았던 것이다.
“당장은 어쩔 셈이냐, 베르키우스?”
“그건 물어서 무엇 하려고?”
“걱정이 되어 하는 말이다.”
“칼자루는 내가 쥐고 있다고. 형님이 생각하는 것보다 나의 능력은 훨씬 높아. 걱정 말고 형님의 안위나 잘 살피는 게 좋을 거외다. 엉덩이가 무거운 맹수는 결국 더 사나운 맹수에게 잡아먹히는 법 아니겠소?”
그것은 듣기에 따라 협박으로도 들릴 수 있는 말이었다.
테오도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베르키우스는 즐겁다는 듯 홀 바깥으로 나가려다가 문득 뒤돌아보고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뭐, 일단 패전의 책임자를 색출해서 목을 쳐야 하지 않겠소? 누군가는 실패에 대한 대가를 받아야지. 언제나 희생양은 필요한 법이니까.”
그 말을 남기고 베르키우스는 사라졌다.
홀로 남은 황태자는 고개를 돌려 백색 기둥의 그림자가 일렁이는 호수를, 그리고 그 너머로 펼쳐진 황금의 도시를 바라보았다.
제국의 미래가 불투명하게 흔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