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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을 쓰는 타이탄1권(8화)
3장. 수도를 향해(2)
군사 도시 치차.
비탄 초원에서 패배한 4군단은 막스 레벤톤의 지휘 아래 가까스로 잔존 병력을 수습할 수 있었다. 브루어 장군이 사망하고 수뇌진이 붕괴된 상태에서 막스 외에는 다른 대안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위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훌륭하게 잔존 병력들을 수습하였고, 덕분에 살아남은 오천의 병사들은 큰 피해 없이 돌아올 수 있었다.
지금 그들은 수도에서 마차로 일주일 거리에 떨어져 있는 ‘치차’라는 군사 도시에 있었다. 애초에는 국경에 위치했지만, 영토가 확장된 지금은 중간 지역으로서 기능하고 있는 도시로, 공식적인 4군단의 주둔지였다.
패잔병들의 주둔지에는 마치 깊은 늪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암울한 기운이 맴돌았다. 백전노장인 막스마저도 무력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사랑하는 부하들을 여럿 잃었다. 심지어 아들처럼 아끼던 레스터까지도…….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막스는 오늘 아침 한 장교로부터 새로운 보고를 받았다.
“메로링거 올바드 경의 타이탄이 도망치는 아군의 등을 지켜 주었습니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피해는 이보다 더 커졌을 테죠. 어쩌면 지금 이곳에 있는 사람들 중 절반은 기마병의 말발굽에 짓밟혀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푸른 머리의 그 미남자는 자신의 이름을 카일이라 했다. 올바드 사령관 휘하의 막료로 전장에 참석했지만, 이름조차 들어 본 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서는 큰 발언권은 없었을 것이라고 막스는 그저 그렇게만 생각하고 있었다. 평생을 전장에서만 보낸 막스가 수도의 사교계에서 이름이 높은 카일을 알 리 없었다.
어쨌거나 그가 가지고 온 정보는 놀랄 만한 것이었다.
막스는 이마에 깊은 주름을 만들며 물었다.
“퇴각 시점에서 올바드 경의 타이탄이 움직였단 말인가?”
“바로 그렇습니다. 이상하지요?”
카일은 묘한 눈빛으로 어깨를 으쓱거렸다. 마치 새로운 정보를 던져 주고 막스의 반응을 시험하기라도 하는 듯한 태도였다. 노회한 막스는 그런 그의 기색을 알아챘지만, 그보다는 눈앞의 정보에 어떻게 대처할지를 결정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막스는 딱 잘라 말했다.
“그럴 리 없네. 최초의 교전에서 열 기의 타이탄이 적의 붉은 타이탄에 의해 분쇄되었네. 그 이후는 말하지 않아도 자네가 더 잘 알겠지. 그 시점에는 모든 아군의 타이탄이 가용 시간을 넘겼어.”
“하지만 제 눈으로 직접 보았습니다. 그리고 다른 병사들의 증언도 있지요.”
“만일 그렇다면 올바드 경은 대단한 기량과 용기를 가진 사람이겠군. 정보의 진위 여부를 검토해 볼 테니 이만 나가 보게.”
막스는 혼란스러운 가운데 그렇게 말했다. 혼자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하지만 눈앞의 카일이라는 자는 그리 쉽게 물러날 뜻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 올바드 경이란 말입니다. 그런 사람이 마지막까지 아군의 등을 지키고 전사하다니, 세상은 참 알 수 없는 일이지요.”
그의 말은 정곡이었다. 메로링거 올바드가 아버지의 후광으로 기사가 되었다는 것을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기사로서의 자격마저도 의심되는 이가 혼신의 힘을 다해 아군을 살리고 장렬하게 산화한다?
게다가 그의 오만불손한 성정은 이미 군 내에서도 화제가 될 정도였다.
그러나 막스는 모르는 척, 정색한 얼굴로 말했다.
“지금 자네는 전쟁에서 스러진 제국의 기사를 욕보일 셈인가?”
상대를 당황케 하려는 공격적인 질문이었지만, 의외로 카일의 대응은 능숙했다.
“아, 그럴 뜻은 없었습니다. 다만 저 역시 타이탄의 오퍼레이터와 오너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뿌리 깊은 갈등을 알고 있다는 것을 유념해 주십시오. 올바드 경이 여러모로 골치아픈 대상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탓에 특별한 오퍼레이터가 함께 동행했다는 것도요.”
막스는 카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카일의 눈은 매력적인 곡선을 그리며 웃고 있었지만, 그 안에는 가시가 있었다. 막스는 다시 한 번 상대방의 의도를 확인했다.
그리곤 이 청년이 나를 떠보려고 하는군, 하는 확신이 들었다.
막스는 짐짓 표정을 바꾸고는 말했다.
“그래, 레스터 펠리노…… 그 녀석은 매우 우수한 인력이었지. 게다가 나에겐 아들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네.”
“알고 있습니다.”
“아들을 잃은 자의 슬픔을 더욱 부추기고 싶은 게 아니라면 더 이상 그 말은 삼가 주지 않겠나? 그것이 교양있는 자의 도리라고 보네만.”
그 말은 저항할 수 없는 카드였다. 카일은 잠시 의외라는 듯 막스를 쳐다보다가, 이윽고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는 한 발 물러나 뒤돌아서려다가 멈춰 서서 말했다.
“목숨의 무게를 재는 저울은 미풍에도 눈금이 요동치지요. 특히 전장의 일은 그 누구도 모르는 법이라지요? 아드님의 무사 생환을 빕니다.”
카일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사라졌다.
젊지만 비범한 사내…….
막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말속에 뼈가 있다. 매력적인 용모와 부드러운 언행 속에 교활함을 감출 줄 안다. 만약 차후 정계에서 활동한다면 피바람을 불러일으킬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눈빛이 살아 있다.
그리고 통찰력 또한 갖추고 있는 사내였다.
방금 전의 말은 레스터가 살아 있다는 것을 확신하는 투가 아니던가?
실제로 그가 가지고 온 정보가 사실이라면 가능성은 하나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레스터 펠리노가 오너를 대신하여 타이탄을 기동시켰다.
상식적으로는 말이 되지 않는 소리이기 때문에 그러한 생각을 해낼 만한 사람은 카일 같은 자 외엔 아무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막스는 다년간 레스터의 재능을 가까이서 보아 왔다. 때문에 일말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창밖으로 멀리 두 사람의 인영이 보였다. 키가 큰 청년과 그보다 훨씬 왜소해 보이는 소녀였다. 지금 같은 때에 이상한 조합은 아니었다. 유가족일 경우 남매가 함께 찾아오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막스의 눈은 그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7년을 함께 있었다. 이제는 거의 자식이나 마찬가지인 그의 모습을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50세를 넘긴 막스의 마음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정말로 살아 돌아왔단 말인가?
그는 황급히 집무실 건물을 빠져나왔다. 계단을 내려갈 때만 해도 그의 마음은 반가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당장에라도 달려가서 아들 같은 녀석을 끌어안고 싶었다. 하지만 계단을 내려가는 순간, 감정은 점점 사그라들어 1층에 도달했을 무렵엔 반가운 마음은 온데간데없어지고 괘씸한 마음이 먼저 들었다. 그래서 광장으로 뛰쳐나온 그가 외친 말은 처음의 마음과는 전혀 동떨어진 것이었다.
“너, 이 새끼! 어디 갔다가 이제 오는 거야!”
레스터는 별반 놀라지도 않은 듯, 고개를 돌려 막스를 바라보았다.
“어라, 살아 계셨습니까?”
“거지꼴이나 한 채 입 놀리는 걸 보면 네놈이 아직 멀쩡하구나.”
“뭐, 그렇게 됐습니다.”
레스터는 관자놀이를 긁적거리며 웃었다. 행색은 초라하고 온몸이 재투성이였다. 군데군데 생채기와 말라 붙은 핏덩어리로 가득하다. 어쩌면 며칠은 먹지도, 자지도 못했으리라. 그런 데도 불구하고 고작 하는 말이 웃으면서 ‘그렇게 됐습니다’인 것이다. 무사태평한 것도 정도가 있지, 막스는 기가 막혀 고개를 저었다.
이윽고 동료들도 그를 발견했다.
“이봐, 레스터가 살아 돌아왔다!”
곧 여기저기서 동료 오퍼레이터들이 몰려들어 그의 생환을 축하했다. 왁자지껄한 가운데에서도 레스터는 그저 덤덤하게 반응할 뿐이었다.
“왜 이렇게 소란들이야?”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레스터 역시 기쁜 것이 틀림없어 보였다. 그에게는 가족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막스는 그의 목숨 다음으로 중요한 것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올바드 경은?”
축하의 분위기가 단숨에 찬물을 맞은 듯 가라앉았다. 레스터는 자신의 뒤에 있는 작은 수레를 가리켰다. 막스가 수레를 덮은 짚을 들추니, 거기에는 흉하게 일그러진 메로링거 올바드의 시체가 있었다.
“후, 사고쳤구만.”
“뭐, 그렇게 됐습니다. 어쩌겠어요, 이미 죽은 사람을 살려낼 수도 없고.”
레스터는 너스레를 떨었다. 그나마 시신이라도 수습해 오느라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그대로 두면 썩어 버릴까 보존 마법을 썼습니다. 금빛 수의라도 입히면 어떻게든 볼만하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요? 귀족 자제는 죽어서도 귀족이라죠?”
“시끄럽다. 그래 봐야 문책을 면치는 못할 것이야.”
막스의 엄한 말에 모두가 불편한 침묵을 지켰다. 레스터는 관자놀이를 긁적거리며 말했다.
“까라면 까야죠. 근데 그거 아셔야 합니다. 저 인간 하나 때문에 도망가던 보병 부대가 전멸할 뻔했거든요. 만약 제가 없었으면 어떻게 됐을지 상상도 하기 싫습니다. 그건 확실히 하자구요. 참, 그리고 여기 있는 이 사제분도 죽었을걸요?”
막스는 그제야 레스터의 곁에 있던 소녀를 보았다. 멀리서 볼 때는 그냥 아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자세히 보니 예사롭지가 않았다. 그때까지도 조용히 미소만 짓고 있던 피아가 입을 열었다. 조그만 입술에서 새어 나온 음성은 놀랍도록 맑았다.
“아저씨들은 영혼의 세공사군요.”
뜬금없는 소리에 모두가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 비유를 바로 알아들은 것은 막스뿐이었다.
“저희에겐 과분한 표현이군요. 그저 일개 오퍼레이터들일 뿐입니다.”
“신은 그 거대한 아이에게 영혼을 부여한 적이 없어요. 그걸 움직이는 것은 아저씨들이죠.”
어떠한 아첨의 의도도 없는 순수한 경의의 표현이었다. 이 소녀는 티없이 맑군, 그렇게 생각하며 막스는 짧게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사제님들은 보통 타이탄을 좋아하지 않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제 눈앞의 아가씨는 예외인가 봅니다.”
“사제도 사제 나름이죠. 전 계속 궁금했거든요. 타이탄에 탄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하고. 덕분에 이번엔 정말로 새로운 경험을…….”
피아는 여기까지 말하고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레스터가 맹렬한 기세로 헛기침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허가받지 않은 자를 타이탄에 태우는 것은 군법을 위반하는 것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강력하게 처벌받을 수도 있었다. 피아는 한 박자 느리게 자신의 말실수를 깨달았지만, 별로 당황하지는 않았다.
“……경험을 좋아하는 제 이름은 신명으로 에피알게나스, 피아라고 합니다. 빛이 그대의 새벽과 영혼에 늘 함께하기를.”
구렁이 담 넘어가는 듯한 화제 전환이었다. 일말의 표정 변화도 없이 피아는 꾸벅 고개를 숙였고, 오퍼레이터들 역시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막스만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갔을지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막스는 그녀의 모습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사제복 곳곳에 피가 묻어 있는 것으로 봐서 4군단에 소속되어 있던 사제인 모양이었다. 대체로 그런 일들은 남자들이 맡는 것이 보통이었다. 어쩌다 이런 여자아이가 전쟁에 나서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막스는 무심결에 피아의 인사를 받았다.
“엘을 모시는 사제분이시군요. 빛이 그대의 새벽과 영혼에 늘 함께하시기를.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번엔 신이 우리 편이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신은 누구의 편도 들지 않아요. 다만 우리를 굽어 살필 뿐이지요.”
생각지도 못한 지적을 받은 막스는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런. 사제분 앞에서 결례를 범했군요.”
사제와 신에 대해서 논쟁을 하고 싶은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는 그가 한걸음 물러섰다. 그때, 가까운 곳에서 통곡 소리가 들려왔다.
레스터는 고개를 돌려 통곡 소리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익히 알고 있는 사람이다. 아이반 잭 하우저의 아내. 그녀의 발치에는 아이반이 생기를 잃고 누워 있었다. 레스터는 그녀에게 다가가 몇 마디 위로의 말을 남기고 아이반의 명복을 빌었다.
“좋은 친구였습니다.”
몇몇 오퍼레이터들이 그녀를 위로하기 위해 한쪽 구석으로 데려갔고, 레스터는 광장 한구석에서 이제 막 시작된, 떠나는 전우들의 운구 행렬을 바라보았다. 피로 물든 거적때기 한 장이 그들의 수의였다. 살아남은 자들이 죽은 자들을 배웅했다. 그마저도 사지가 멀쩡히 붙어있는 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다. 부상병들의 신음은 천막 안쪽 여기저기서 간헐적으로 울려 퍼지고 있었다. 거리의 악사는 느릿한 장송곡을 연주했다.
‘이것밖에 못 살렸나.’
레스터는 착잡한 마음으로 패잔병들의 주둔지를 둘러보았다. 전쟁은 늘 이런 법이다. 더이상 새로울 것도 없었다. 하지만…….
‘젠장.’
레스터는 속으로 한차례 넌더리를 쳤다. 이제 피의 잔치라면 지긋지긋했던 것이다.
“무슨 생각 해요?”
어느새 다가온 피아가 물었다. 레스터는 잠시 말을 고르다가 짧게 대답했다.
“적장이 훌륭했구나.”
“비참하다는 생각은 안 드나요?”
“그건 위선이지. 만일 우리가 이겼으면 이 통곡은 저쪽 사람들의 것이었을 테니.”
입장에 따라서 매정하다고도 비난할 수 있는 말이었다. 피아는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역시 아저씨는 특별해요.”
“무슨 소리야?”
갑작스러운 피아의 말에 레스터는 그녀를 쳐다보았다.
“전 알 수 있어요.”
심장이 두근거릴 정도로 묘한 웃음이었다.
레스터의 얼굴이 자기도 모르게 붉어졌다.
“오라버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