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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을 쓰는 타이탄1권(9화)
3장. 수도를 향해(3)
그때, 어디선가 나타난 인영이 레스터의 품에 덥썩 안겼다.
“어이쿠, 냅다 안기기는…….”
“으허허엉, 나는 오라버니가 죽은 줄 알고…… 으허엉.”
난데없이 나타난 그녀는 꺽꺽거리면서 눈물을 쏟았다. 레스터는 가볍게 한숨을 쉬며 그녀의 등을 쓰다듬었다.
율리아 펠리노.
아주 어린 시절부터 그가 도맡아 키운 여동생이다. 그러던 것이 어느새 열여섯이다. 어엿한 성인이 된 것이다.
“율리아…….”
그녀가 슬퍼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는 다시금 살아 돌아온 것에 감사했다.
‘그래, 너무 많은 것을 바라진 말자. 지금 이렇게 살아 있지 않은가. 그래, 그건 그런데…….’
“으허헝허허헝, 오라버니 뒈진 줄 알았어.”
“야, 인마……! 다 큰 계집애가 말을 뭐 그렇게…….”
레스터는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떼어 내려 했지만, 율리아는 거의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로 울면서 놓아주질 않았다. 피아는 따뜻한 눈길로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어느 순간 인파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휘익∼ 좋겠다∼”
어디선가 동료 오퍼레이터 한 명이 레스터를 향해 휘파람을 불었다. 레스터는 얼굴이 붉어지는 걸 느끼며 율리아의 볼을 잡아당겼다.
“아, 쪽팔려. 그만 울어. 나 안 죽었어.”
“하지만…… 하지만…… 으흑흑, 응이잉잉.”
“으이구, 이 녀석.”
레스터는 품에 안겨 있던 율리아를 번쩍 들어 올렸다.
“꺄악!”
그리고는 그대로 율리아를 자신의 어깨에 올렸다. 시원한 두 다리가 허공을 향해 쭉 뻗은 것이 참으로 볼만했다. 휘파람 소리가 더욱 커졌다. 다 큰 처녀가 목마를 타는 것이 부끄럽지도 않은지 율리아는 해맑게 웃고 있었다.
“헤헤, 오라버니.”
“으이그…….”
레스터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지만, 이런 기분은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곁에 있던 막스가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뭔가 더 할 말이 있지만, 일단 여동생부터 달래는 게 급선무일 듯하네. 어쨌든 수고했네. 내일 비상 소집이 있을 테니까 그때 알아서 나오도록 하게나.”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 뵙죠.”
레스터는 막 돌아서려다가 생각났다는 듯 막스를 향해 입을 열었다.
“참,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는데요.”
“응? 뭔가?”
“타이탄을 탄 채로 마법을 쓴다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레스터의 질문은 의외의 것이었다. 막스가 눈을 커다랗게 뜨더니, 진지한 얼굴로 되물었다.
“뇌를 다친 게냐?”
“아니거든요.”
“열 개의 사과가 들어 있는 바구니에서 다섯 개를 꺼내어 먹으면 몇 개가 남느냐?”
“이제 저를 코흘리개 아이 취급하십니까?”
레스터는 영 힘이 빠진다는 듯 말했다.
막스는 그런 그를 향해 버럭 소리쳤다.
“이놈, 얼빠진 소리는 작작 해라! 수석이라는 놈이 머리를 다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런 망상을 한단 말이냐! 지금 네놈이 자의로 타이탄을 조종하고 외부인까지 탑승시킨 것도 모자라 마법까지 사용했다는 것을 믿으라는 말이냐?”
마지막 말은 낮은 외침이었다. 다행히 가까운 주변에는 율리아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레스터는 한숨을 푹 쉬고는 말했다.
“역시 알아채셨습니까? 눈치 빠른 영감 같으니라고.”
“시끄러워. 자초지종은 내일 듣도록 할 테니, 오늘은 헛소리 그만하고 휴식이나 취하도록.”
“아니, 그런데 정말이라니까요. 제가 이런 상황에서 허언이나 지껄일 놈으로 보이십니까?”
레스터의 눈빛이 사뭇 진지한 기색을 띠었다.
막스는 그의 말을 진지하게 생각해 보다가 이윽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리가 없다. 이론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너도 알지 않느냐? 전장 속에서 혼란스러운 도중 착각을 한 것에 불과할 것이다.”
막스가 그렇게 말하자 레스터도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상식을 벗어난 행위였다. 누군가 그렇게 말했다면 본인부터도 막스와 똑같이 이야기했을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한 레스터는 손가락을 딱, 하고 튕겼다. 어쩌면 함께 탑승하고 있던 피아라면 그때의 일을 증언해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피아는 이미 주위에 없었다.
“그 사제 아가씨는 부상병들을 치료하러 간 모양이더군. 먼 길을 오느라 피로했을 텐데…….”
막스의 말에 레스터는 멍한 눈길으로 피아가 사라진 인파를 바라보았다. 방금 전까지의 시간들이 마치 꿈처럼 낯설게 느껴졌다. 그는 문득 오래된 신전의 주춧돌에 새겨진 문구 중 하나를 떠올렸다.
‘신의 딸들은 자신을 돌보는 법을 알지 못한다.’
바로 저 소녀를 두고 하는 말이로군, 레스터는 내심 그렇게 생각했다. 아쉬움은 없었다. 어쩐지 근일 내로 다시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다음 날, 레스터는 마법사의 탑으로 향했다. 시간은 이른 새벽이었다. 도시엔 안개가 짙게 깔려 있었고, 어둑한 지평선 너머에서 어스름한 햇볕이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마법사에게 있어서 탑이란 사제들의 신전과도 같은 곳이었다. 사제가 신전에서 기도를 올리고 종단의 대소사를 논하며 수공업으로 각종 물품들을 만들어 낸다면, 마법사들은 이곳에서 기술을 연마하고 정신을 수양하며 지식을 쌓고 물약을 만든다.
마법사의 탑은 어느 도시에나 존재했지만 그 생김새와 규모는 천차만별이었다. 이곳 군사도시 치차의 탑은 제법 규모가 큰 편이었다. 하지만 이른 새벽인데다가 격한 전투를 치른 후라 그런지 탑 내부는 제법 한산했고, 드문드문 수습 마법사들이 오갈 뿐이었다.
레스터는 곧장 수양의 방으로 향했다.
텅 빈 꼭대기층에는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그가 알기로 불규칙한 생활을 미덕으로 삼는 마법사 가운데 이렇게 부지런한 마법사는 단 한 사람밖에 없었다.
“계실 줄 알았습니다.”
연병장만 한 방 한가운데에는 막스 레벤톤이 정좌한 채 앉아 있었다.
“앉거라.”
막스는 짧게 대답한 뒤 황마 자루에서 푸르스름한 가루를 한 웅큼 집어 든 뒤 은접시 위에 뿌렸다. 가루는 수면 위에서 타닥거리며 춤을 추다가 나선을 그리며 불타올랐다. 곧 방 안에 은은한 향이 퍼졌다. 마나가 충만해지고 있었다.
레스터는 막스의 맞은 편에 앉자마자 품속에서 책 한 권을 꺼냈다.
“밤새도록 책을 읽었습니다.”
“무슨 책을?”
“타이탄을 탄 채로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에 해답을 찾기 위해서입니다. 작년 학회에 발표된 타이탄의 기동 이론에 대한 새로운 학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면 이론적으로 완전히 불가능한 것만은 아닙니다.”
레스터는 눈가에 다크서클이 가득한 채로, 보란 듯이 책을 펼쳐 보였다. 막스는 그런 그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나도 한 사람의 마법사로서 흥미가 가지 않는 건 아니다만, 지금은 그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지 않느냐. 대체 전장에서 무슨 짓을 한 게냐?”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구했습니다.”
“그걸 물어본 게 아니지 않느냐, 이 빌어서 3대를 처먹을 제자야. 니 저주받을 똑똑한 머리통이라면 이 일이 어떻게 흘러가게 될 건지는 잘 알겠지?”
레스터는 씁쓸한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지난 일주일간 뒈져 버린 올바드 경을 끌고 다니면서 그 생각만을 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갑작스러운 충동으로 타이탄을 써먹었다. 그리고 도망치는 아군의 등을 지켜 주었다.
거기까지는 참 아름다운 이야기였다. 하지만 세상일은 그렇게 만만하지만은 않다.
타이탄은 어디까지나 병기에 불과했지만, 그렇다고 단순한 병기는 아니었다. 타이탄 한 기에 쏟아부어지는 국가의 재정은 일반인은 상상도 못할 금액. 타이탄이라는 병기는 그야말로 제국의 힘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그런 신성한 공간에 제국의 귀족들이 오퍼레이터라는 이름으로 끼어드는 평민 마법사의 존재를 달가워하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 타이탄을 조종하는 오너들도 오퍼레이터들, 특히나 평민 출신 오퍼레이터들은 대놓고 무시하기 일쑤였다. 그런 상황에서 타이탄을 함부로 조작하고 심지어는 망가뜨리기까지 했다.
이런 사고를 쳐 놓고 그냥 넘어갈 거라고 생각하는 건 너무나도 순진한 발상이었다.
“혹시…… 타이탄은 어떻게 됐나?”
막스가 한 가닥 기대가 담긴 목소리로 조심스레 물었다.
레스터는 품속에서 조각상 하나를 꺼냈다. 여섯 개의 날개가 달린 까마귀가 새겨진 세피로스의 토템이었다. ‘토템’은 흔히 돌조각으로 만들어지며, 거대 병기 타이탄을 아공간으로부터 소환할 수 있는 매개체를 일컫는 말이었다.
“양팔이 완전히 절단된 상태입니다. 회수도 불가능했구요. 그나마 본체는 살려 왔지만…….”
레스터가 슬쩍 막스의 눈치를 보았다.
“그냥 얘기해.”
“현재 가용이 불가능한 상태입니다. 제가 조작하면서 기본 설정을 죄다 건드려 놓았거든요. 참고로 이제는 저도 원래대로 못 돌려요. 만약 재활용하고 싶으시면 완전 해체 후 재조립을 권장해 드립니다.”
“그걸 농담이라고 하는 거냐?”
“이왕이면 그냥 폐기하라고 하고 싶은 걸 참는 겁니다.”
“그게 얼마짜린 줄 잘 알지?”
“아마도…… 10억 제국 마르크 정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정확히 9억 8천만 마르크다. 네 월봉이 일만 마르크쯤 되니까 8천 년 정도면 갚겠구만.”
너무 비현실적이어서 웃음도 나오지 않는다. 도시국가의 1년 예산에 육박하는 금액인 것이다. 레스터로서는 그런 비정상적인 금액을 지불할 생각 따윈 추호도 없었다.
“사람이 죽으라는 법이야 있나요?”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셈이냐?”
막스가 태평한 말만 늘어놓고 있는 레스터를 향해 물었다.
“별로 내키지 않긴 한데…….”
그는 뺨을 긁적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올바드 경을 구국의 영웅으로 만드는 겁니다. 메로링거 올바드 경은 대열을 잃고 도망치는 아군을 보호하며 적들을 물리쳤다. 마나가 역류하고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그는 손에서 검을 놓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 사실을 날조하는 겁니다.”
막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문제는 남아 있었다.
“그렇다 해도 네 녀석이 책임을 면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 정도는 알고 있겠지?”
막스의 말에 레스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오너를 지키지 못한 오퍼레이터의 숙명이었다. 부조리하다고 느껴질지라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만 했다. 운이 좋다면 외진 곳으로 쫓겨나거나 정직 정도의 벌로 그칠 것이다.
“그래서 말인데, 이번 일이 해결되고 나면 그만두고 싶습니다.”
“무엇을?”
“오퍼레이터 일 말입니다.”
막스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레스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제자의 표정은 극히 편안해 보였지만, 동시에 단호해 보였다. 중년의 마법사는 한참 뒤에야 입을 열 수 있었다.
“이유는?”
“글쎄요……. 제 적성이 아니라서요. 저는 아무래도 산골에 처박혀서 소박하게 연구나 하고, 농부들 밭 일구는 거 도와주고, 그런 게 맞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또…….”
레스터는 말끝을 흐리며 관자놀이를 긁적거렸다. 하지만 마땅히 더 생각나는 변명이 없는 듯, 한숨을 쉬고는 속내를 털어놓았다.
“피를 너무 많이 보았습니다.”
“전시(戰時)다. 받아들여야 한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은 안 되겠습니다. 이번 전투에서도 소중한 동료들을 많이 잃었습니다. 특히 아이반은 아카데미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친구였습니다. 술버릇, 잠버릇까지 다 알고 있었어요. 더 이상 가까운 누군가를 잃긴 싫습니다.”
레스터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오랜 시간 동안 생각해 왔던 것이다. 일단 말을 꺼내자 그동안 가슴속에 담아 두었던 말이 계속해서 쏟아져 나왔다.
“스승님을 존경해서 오퍼레이터가 되기로 자원했습니다. 그런데 점점 처음에 꿈꿔 왔던 마법사의 길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만 해도 저는 스승님과 함께 토론을 하고 싶었습니다. 마법사가 타이탄을 조작할 수 있는지, 마법은 사용하는 것이 가능한지 말입니다. 아마 3일 밤낮을 토론해도 모자랄 지경이겠지요. 그런 것이 마법사의 즐거움이자 삶의 이유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우리가 이야기했던 것은 뭐였습니까?”
레스터의 말투가 점점 격해지기 시작했다. 그의 눈빛이 타오르는 마나의 빛에 따라 크게 일렁였다.
“어떻게 하면 빌어먹을 올바드 경을 영웅으로 만들까! 그래서 사람들의 눈을 속이고, 귀족들의 눈치를 보며 안신을 도모할 수 있을까! 그런 이야기나 하고 있어야 하는 겁니다! 언제부터 마법사가 윗사람들의 눈치나 보고 있어야 하는 시종이 되어 버린 겁니까? 이 혼탁한 구정물의 한가운데서 20여 년이나 같은 일을 수행한 스승님을 존경합니다! 하지만 저는 스승님처럼 살아갈 수 없습니다!”
이야기를 마친 레스터는 단호한 눈빛으로 스승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 무던해 보이는 성격 아래 이토록이나 많은 생각을 감추고 있었다는 것은 스승인 막스로서도 놀라울 따름이었다. 레스터는 숨을 고른 뒤, 마지막 말을 내뱉었다.
“저를 보내 주십시오.”
그것은 이별의 선언이었다.
이제 그만 당신의 곁에서 떠나겠다고, 아들 같은 제자가 아버지 같은 스승에게 고하는 것이었다. 막스는 순식간에 10년은 늙어 버린 듯한 상실감을 느꼈지만, 그를 비난하는 대신 따뜻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너의 뜻을 존중한다, 이 빌어먹을 제자 녀석아.”
막스는 편안한 몸동작으로 은 접시 위로 푸르스름한 가루를 한 웅큼 더 뿌렸다. 레스터는 고개를 떨군 채 한동안 들지 못했다. 차오르는 눈물을 감추기 위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