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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을 쓰는 타이탄1권(10화)
3장. 수도를 향해(4)


작은 소녀가 해진 신발을 신고 거리를 헤매고 있었다. 군데군데 찢어진 옷차림에 야윈 모습. 흔한 전쟁고아였다. 여섯 살의 율리아는 평소처럼 군인들에게 먹을 것을 얻기 위해 막사를 돌아다니던 중이었다. 그때 갓 성년이 된 사내 하나가 막사 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그는 다른 병사들과는 달리 하얀 얼굴에 반짝이는 눈을 빛내며 자신을 쳐다보았다.
그는 주머니를 뒤지더니, 커다란 막대사탕을 건네주었다. 율리아는 사탕을 손에 꼭 쥔 채 그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엄청 잘생긴 오라버니다.’
율리아는 그야말로 첫눈에 반했다. 이유라고 한다면 아침 햇살이 너무 눈부셨기 때문이라고 하자.
어쨌든 그녀는 반드시 이 오라버니와 결혼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왜 그러니? 내 얼굴에 뭐가 묻었어?”
“사탕 같은 건 배도 안 부르고 이빨만 썩어요.”
“이런…… 미안하구나. 난 좋아할 줄 알고.”
그가 율리아를 향해 손을 뻗자 그녀는 홱 돌아서며 얼굴을 붉혔다. 심장이 두근두근거렸다.
“……하지만 맛있으니까.”
다음날부터 율리아는 그가 가는 곳마다 쫓아다녔다. 그리고 밤중에 그의 숙소에 잠입하기 까지 했다. 대체 원하는 게 뭐냐고 묻기에 그녀는 솔직히 대답했다.
“오라버니, 저를 받아 주시와요.”
그는 몸을 비틀며 수줍게 웃는 그녀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왠지 모르겠지만, 엄청 서러워 밤새 울었다. 그러고도 그를 쫓아다니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런 관계가 1년 동안 지속되었다.
마침내 철군하는 제국의 부대에서 율리아는 떠날 준비를 하는 그를 찾아내었다. 놀란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는 그에게 율리아는 말했다.
“날 두고 떠나면 평생 동안 저주할 거야, 이 멍청아.”
겨우 일곱 살짜리 여자애에게 저주를 받기는 싫었던 모양인지, 그는 그녀를 데리고 치차를 향해 떠났다.
그의 이름은 레스터 펠리노, 그리고 그녀의 이름은 율리아 펠리노가 되었다.

끼이익.
바깥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율리아는 눈을 떴다. 창밖을 보니 이미 어둑한 저녁이었다. 그녀는 레스터가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호통쳤다.
“오라버니는 왜 이제 들어오는 거야!”
율리아는 씩씩거리며 다가가서는 레스터의 품에 덜컥 안겼다. 그는 한숨을 쉬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따뜻했다. 그것만으로도 율리아의 기분은 금방 풀렸다.
“오라버니를 위해서 안 하던 짓까지 했는데, 얼마나 기다렸는 줄 알아?”
“안 하던 짓이라니?”
“짜잔!”
율리아가 자랑스럽게 식탁보를 들추었다. 그러자 그곳엔 음식물 쓰레기가 있었다. 그것도 산더미만큼.
“오라버니를 위한 율리아의 특별 요리야!”
“……우와아!”
“뭐야, 그 한 박자 늦은 무성의한 감탄은?”
“아니야. 잘 먹을게. 고마워.”
레스터는 눈앞이 캄캄해지는 기분을 느꼈지만, 여동생을 실망시킬 수는 없었다. 그는 영 내키지 않는 손을 내밀어 그럭저럭 생닭에 가까운 고기를 입속에 밀어넣었다. 행복한 얼굴로 턱을 괴고 자신을 바라보는 율리아를 보며, 내 여동생은 정말 검술 외에는 소질이 하나도 없구나…… 어찌할꼬…… 아득해지는 머리로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러고 보니…… 기사학교는 이렇게 오래 쉬어도 되는 거야?”
“걱정 마. 오라버니가 죽었다고 해서 휴가를 받아 온 거니까. 정말이지 그때는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니까.”
율리아는 뾰로통한 말투로 대답했다.
그녀는 현재 수도에 있는 제국종합학교, 소위 말하는 수도 아카데미에 다니고 있었다. 그곳은 시리온의 미래를 책임질 인재를 양성하는 곳으로, 특히 기사를 양성하는 곳을 따로 일컬어 기사 아카데미 혹은 기사학교라고 부른다.
그곳은 실력만 있다면 평민도 아랑곳하지 않는 제국의 유일한 교육기관으로, 항상 엄청난 경쟁률을 기록하고 있었다. 레스터 역시 수도 아카데미 출신으로, 마법사의 자격을 얻었으며 그곳을 통해 오퍼레이터의 자리를 얻었다. 비록 다른 길이지만 율리아도 그곳을 통해 어엿한 기사로 성장할 수 있다면, 하는 것이 오빠로서의 바람이었다.
다행히도 율리아는 뛰어난 검술로 이미 소문이 자자했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그런 것을 당연하게 여길뿐더러 관심사로 여기지도 않고 있었다.
“학교에 있어 봤자 귀찮기만 해. 선생들은 저마다 자기 밑으로 들어오라고 난리를 치지, 남자애들은 자꾸 접근하지. 냅다 결혼하자는 말부터 꺼내는 놈도 있었다니까. 남자들은 왜 다들 그 모양일까 몰라.”
“너도 이제 성인이니까.”
“그래, 나도 이제 성인이야.”
율리아는 천진한 표정으로 빙긋 웃었다.
정신연령은 아직 성인이 아닐지 모르지만…….
그런 말이 레스터의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나도 너에게 선물이 있어.”
레스터는 더 이상 율리아의 요리를 먹는 것이 무리다 싶어 화제를 돌렸다. 율리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선물이라니?”
“가만 있어 봐.”
레스터는 한구석에 놓인 짐더미를 풀었다. 그가 꺼낸 것은 은은하게 반짝이는 갑옷이었다. 율리아의 눈이 커졌다.
“이…… 이건?”
갑옷을 받아 들자 그녀의 놀라움은 더욱 커졌다. 부피와 강도에 비해 무게가 놀라울 정도로 가벼웠다. 경량화의 마법이 깃든 금속으로 주조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위해 레스터는 마법사의 탑에서 꾸준히 모아 두었던 재료와 그동안 오퍼레이터 일을 하면서 벌어들인 전재산을 털어야 했다.
“성인이 된 걸 축하한다, 율리아.”
그 말에 율리아가 울음을 터뜨렸다. 그 모습을 보며 레스터가 한숨을 푹 쉬었다.
“이런…… 역시나 울어 버릴 줄 알았어.”
레스터는 그렇게 말하며 동생을 부드럽게 안아 주었다. 언젠가 율리아가 기사단의 행진을 보며 멋있다고 감탄했던 갑옷을 레스터는 줄곧 기억하고 있었다. 하여 성인이 되는 해 꼭 그 갑옷을 선물해 주리라 하고 벼르고 있었던 것이다. 율리아는 한참을 훌쩍거리다가 갑옷을 레스터에게 건넸다.
“오라버니가 채워 줘.”
“지금? 뭐 하러. 싸우러 나갈 것도 아니면서.”
“갑옷 입은 모습을 보여 주고 싶어.”
율리아가 붉어진 눈으로 입을 열었다. 레스터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갑옷을 채워 주기 위해 그녀의 등 뒤로 돌아섰다. 사실 그녀가 어린 시절에는 종종 이렇게 옷을 입혀 주곤 했다.
‘많이 자랐구나…….’
매번 전장에서 돌아올 때마다 율리아는 한 뼘씩 자라 있었다. 항상 잘해 주고 싶었지만 남자 혼자 키우기에는 모자란 것이 너무나도 많았다. 그럼에도 율리아는 잘 자라 주었다. 그녀는 늘 자신에게 고마워하지만, 감사하고 싶은 것은 오히려 이쪽이었다.
“조만간 수도로 가야 할 거야. 너도 이제 돌아가야지.”
“응응.”
“그곳에서 후원자를 찾아 줄게.”
레스터는 등의 가죽끈을 조이며 그렇게 말했다.
순간, 갑자기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율리아가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레스터는 차분히 설명했다.
“아카데미의 졸업생은 성인이 되는 순간 명예 작위를 수여받고 자신의 진로를 결정할 수 있어. 네 인생을 네가 결정하는 거야. 하지만 그러려면 든든한 후원자가 필요하지. 너 정도의 실력과 명예면 제국에서 제일가는 귀족 가문의 후원도 받을 수 있을 거야. 아마 나중이 되면 배우자도 찾아 주겠지. 그러니까 이제…….”
레스터는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율리아의 눈초리가 매섭게 변한 것이다.
“그러니까 이건 이별 선물이라는 거야?”
“꼭 그런 건 아니야. 하지만…….”
“웃기지 마. 난 죽을 때까지 오라버니 곁에 있을 거야.”
레스터는 여동생의 어리광에 한숨을 쉬었다.
“바보야, 어리광 부리지 마. 든든한 후원자를 찾으면 부족함없이 살 수 있다고. 어릴 때처럼 추운 데서 자고 배고플 일도 없어.”
“그런 게 무슨 소용이야!”
율리아는 레스터의 손을 뿌리치고는 갑옷을 내팽개쳤다. 방금까지의 기쁜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뭐 하는 거야?”
“나 이런 거 필요없어. 후원자도 마찬가지고. 오라버니야말로 뭐 하는 거야? 대체 왜 이런 얘기를 하는 거야!”
율리아는 납득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소리쳤다. 레스터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사실을 이야기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난 오퍼레이터를 그만둘 거다. 이제 더 이상 네 뒤를 봐주거나 할 수도 없을 거고…….”
율리아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레스터는 관자놀이를 긁적이며 말을 이었다.
“뭐, 갑자기 이런 말 해서 미안하다. 하지만 가끔 수도로 네 얼굴 보러 가는 정도는…….”
그다음 말을 하기도 전에 율리아가 레스터의 품으로 달려들었다.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듯 꼬옥 끌어안은 채, 율리아는 물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나도 그만둬. 기사따위 안 될 거야.”
“으이구, 이 녀석아. 어리광은 그만 좀…….”
“내가 왜 기사가 되고 싶어 했는 줄 알아? 오라버니가 오퍼레이터가 되었기 때문이야. 같은 타이탄에 탑승하면 언제든 함께 있을 수 있잖아. 나도 이제 어른이야. 언제까지고 함께 있을 수만은 없다는 걸 알아. 오라버니도 결혼을 하고, 나도 결혼을 하겠지. 하지만 적어도 전장에서 함께 있을 수 있다면 오라버니가 언제 죽을지 불안해하지 않아도 되잖아. 오라버니는 나한테 유일한 가족인걸!”
레스터는 조금 놀라 율리아를 바라보았다. 율리아는 고개를 들어 레스터와 눈을 마주쳤다. 단호한 눈빛이었다.
“내 인생의 처음이자 마지막 후원자는 오라버니야.”
결국 레스터는 더 이상 강요할 수 없었다. 그날 밤 레스터는 율리아를 재우며 미래의 계획을 머릿속으로 채워 나갔다.
이번 일의 책임을 진 뒤에는 깔끔하게 물러나, 가급적 전쟁이 일어나는 곳과는 거리가 먼 곳에 집을 한 채 마련하고 싶다. 향토 마법사의 일이라고 해 봤자 별다를 것이 없다. 소소한 마법으로 농부들의 일을 도와주거나 질병을 이겨 낼 수 있는 약을 만들면 되는 것이다. 율리아에게는 건실하고 착한 남편을 찾아 주자. 그리고 자신도 시골에서 소박하고 예쁜 아내를 얻으면 된다. 그렇게 된다면 어릴 적부터 꿈꿔 왔던 ‘남들 같은 가족’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율리아가 이불 밖으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오라버니.”
“왜.”
“나 역시 오라버니랑 결혼하면 안 될까?”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레스터는 골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는 거야?”
“왜에, 진짜 남매도 아닌데…….”
“그거랑 무슨 상관이야.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게 자꾸 이상한 소리 할래?”
“나도 이제 성인이거든! 정 못 믿겠으면 보여 줄까?”
“야, 인마! 뭘 보여 준다는 거야!”
율리아는 기겁하는 오빠의 반응이 재미있다는 듯 킥킥대며 이불에 얼굴을 파묻었다.
저 녀석은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아는 걸까.
레스터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다음 날. 한 통의 서신이 치차에서 수도로 향했다. 그 서신에는 메로링거 올바드 경의 사망 소식과 함께 또 하나의 새로운 소식이 들어 있었다. 바로 후퇴하는 메로링거 올바드 경의 마지막 순간을 담은 글이었다. 그 주요 내용은 한 줄로 압축되었다.

메로링거 올바드 경이 목숨을 걸고 도망치는 아군의 등을 지켰다.

동시에 그 사실은 군단 전체에 빠르게 퍼져 나갔다. 귀족의 위치에서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한 올바드 경에 대한 찬사가 줄줄이 이어졌다. 그것은 이내 치차를 넘어 수도에 퍼지기 시작했으며, 이내 전 국토로 퍼져 나갔다. 소문을 퍼뜨린 레스터마저 생각지 못한, 경이로운 속도였다.
날이 갈수록 백성들 사이에서 메로링거 올바드의 이름은 드높아지기 시작했다. 제국의 패배라는 현실에서 눈을 돌리고 싶어 했던 제국의 관료들은 한술 더 떠 새로운 영웅의 탄생을 놀라울 정도로 환영했다.
이번 전투에서 사망한 올바드 부자를 제국을 위해 목숨 바친 영웅으로 대우하는 동시에, 패장에게는 이례적으로 백작의 작위를 수여한 것이다. 전례에 없는 일이었다. 살아남은 올바드 가의 여인들에게는 보다 넓은 영지와 그에 상응하는 황금이 내려졌다.
그리고 레스터에게도 수도로의 소환 명령이 떨어졌다. 사전 계획은 잘 흘러가고 있었다. 하지만 진짜 고비는 이제부터 시작인 셈이다.
레스터는 막스에게 인사를 전하기 위해 마법사의 탑으로 향했다. 두 사람 사이에 더 이상의 말은 필요없었다. 그저 눈인사를 하는 것으로 그동안의 감사를 표현한 레스터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성 밖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벌써부터 율리아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치차에서 수도까지는 가도가 잘 닦여 있어 마차로는 일주일이면 도착할 수 있다. 성 밖에 미리 수도에서 보내 온 마차가 준비되어 있었다. 간단한 짐만 챙기면 별 어려움 없이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성문 밖에서 그는 고개를 돌려 치차를 바라보았다. 4군단에 배속된 이후로 7년간 살아온 곳이다. 어쩌면 이곳을 다시는 못 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