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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을 쓰는 타이탄1권(11화)
3장. 수도를 향해(5)


“펠리노 군.”
낯선 목소리였다. 뒤를 돌아보자 그곳에는 푸른 머리의 미청년이 있었다.
“처음 뵙습니다. 이번 전투에서 브루어 군단장의 작전 참모진으로 참가했지요.”
“아, 패잔병 나으리시군.”
“하하, 그런가요?”
그 참모진에서 나온 전략으로 자신의 친구와 함께 수천 명이 죽었다. 하지만 울컥한 마음에 툭, 하고 던진 말에도 청년은 부드럽게 웃었다. 보통의 귀족이라면 화를 내며 결투를 신청하거나 처벌을 주장하는 것이 당연할 터였다. 레스터가 어쩐지 미심쩍다는 표정으로 그를 살폈다. 그러거나 말거나 청년은 이번엔 율리아에게 인사를 건넸다.
“펠리노 양, 듣던 대로 아름다우십니다. 기사학교 정원의 꽃들은 아침마다 펠리노 양이 수련하는 모습을 보기 위해서 한 시간씩 일찍 봉우리를 피운다죠?”
그렇게 말하며 자연스레 율리아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율리아는 조금 당황한 듯 살짝 치마를 들어 올리며 인사했다.
“아, 안녕하세요. 그쪽은…….”
“제가 미인의 빛에 눈이 멀어 예의를 잊었군요. 카일 드 롬바드라고 합니다. 펠리노 양이 성년이 되신 걸 축하드립니다.”
카일은 그렇게 말하며 꽃을 한 송이 건넸다. 율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내밀어 꽃을 받았다. 그 모습을 보던 레스터가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율리아, 아는 사람이야?”
그 말에 대답한 것은 카일이었다. 그는 예의 웃음을 유지한 채 말했다.
“그저 소문을 들었을 뿐, 직접 만나 뵙는 것은 오늘이 처음입니다. 어쨌거나 저도 이번 전투의 보고를 폐하께 올려야 할 입장인데, 혹시 결례가 되지 않는다면 수도까지 동행할 수 있겠습니까?”
“뭐라구요?”
“마차의 공간은 충분한 것으로 보입니다만.”
카일은 고개짓으로 마차를 가리켰다. 그의 말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레스터는 카일이 영 미덥지 않았다. 자신 같은 평민에게 이토록 거리낌없이 접근하는 귀족은 막스 이후로 처음이었다. 하지만 결코 좋은 느낌은 아니었다. 카일에게는 무언가 자신에게 원하는 것이 있어 보였다.
“굳이 이런 식으로 저의 동의를 원하는 이유가 뭡니까? 마음만 먹으면 정식으로 요구할 수도 있을 텐데 말이죠.”
“그럼 함께 가는 의미가 없지요. 여행이란 마음이 맞는 사람끼리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좋습니다. 그럼 댁이 우리와 동행해서 이득을 줄 수 있는 부분을 세 가지만 말해 보시죠.”
“저는 칼과 활을 씁니다. 넉넉한 여행 자금, 그리고 함께할 여성분을 심심하지 않게 만들어 줄 재미있는 이야기들. 충분하지 않은가요?”
딱히 반박할 말이 없었다. 레스터는 동생의 표정을 살핀 뒤 하는 수 없이 승낙했다. 율리아가 ‘재미있는 이야기들’이라는 것에 흥미를 보이고 만 것이다. 세 명이 마차 위에 오르자 마부가 말했다.
“출발할까요?”
“출발!”
율리아가 신나게 외쳤다. 하지만 막 출발하려던 순간, 레스터는 마부를 멈춰 세웠다. 일행의 시선이 그에게로 몰렸다. 레스터는 관자놀이를 긁더니 한숨을 푹 쉬고는 말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한 사람 더 데리고 갑시다.”

전투가 끝난 지 수일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부상병들의 캠프는 바빴다. 끊임없이 패잔병들이 모여들었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는 신체가 절단되어 밤마다 울부짖는 사람도 있었고, 고통에 시달리다가 죽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살아 돌아온 대부분의 병사들은 이제 체력을 많이 회복하고 있었다.
그간 피아는 쉴 틈도 없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사제단 중에서 가장 어린 소녀인 그녀는 멀리서 보아도 가장 눈에 띄었다. 그녀는 부상병들의 상처를 닦아 내고, 치유력을 발휘한 뒤, 붕대를 감아 주기가 무섭게 다른 부상병을 향해 뛰어가야만 했다. 환자의 고름을 짜내고 대소변을 받는 것은 웬만한 정신력으로는 수행하기 힘든 것이었지만, 그녀는 묵묵히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아침 무렵, 완전히 녹초가 된 피아는 잠시 벽에 기대어 앉아 졸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를 어두운 곳에서 바라보는 몇 명의 병사들이 있었다.
“사제님, 사제님!”
병사 한 명이 피아에게로 뛰어갔다. 피아는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무슨 일인가요, 병사님?”
“제 동료 녀석이 방금 도착했습니다. 당장에라도 죽을 것 같아요!”
“어디에 있죠?”
병사는 건물 뒤쪽을 향해 가리켰다. 피아는 졸린 와중에 비틀대면서도 그곳을 향해 뛰어갔다. 하지만 막상 도착해 보니 환자는커녕 아무도 없는 텅 빈 공간이었다.
“환자는 어디 있어요?”
피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병사들 몇 명이 나타났다. 모두 그녀가 치료해 주었던 병사들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병사들의 눈은 수상하게 희번득거리고 있었다.
“아, 이제 다들 몸이 괜찮으신 모양이네요.”
피아는 싱긋 웃으며 묻자 병사들은 무심결에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들은 한결같이 무언가를 주저하는 듯한 몸짓이었다. 결국 그중 가장 키가 큰 병사가 나섰다.
“이봐, 사제 아가씨. 이쯤 되면 상황을 파악해야지.”
“안녕하세요, 양조장의 보르도 씨. 다리의 상처는 다 나으신 모양이에요.”
피아의 말에 병사가 움찔거렸다. 옆에 서 있던 한 명의 병사가 무릎을 털썩 꿇으며 중얼거렸다.
“안 돼…… 난 도저히 못해.”
하지만 피아는 여전히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환자는 어디에 있어요?”
“이 바보 같은 여자야!”
키 큰 병사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는 땀을 뻘뻘 흘리는 가운데도 눈을 사납게 희번득거리며 말했다.
“우리는 지금부터 너를 겁…… 겁…….”
그다음 말이 차마 떨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결국 그는 욕설을 내뱉으며 피아를 벽 쪽으로 밀쳤다. 피아는 영문을 몰라 눈을 깜빡거렸다. 키 큰 남자가 거칠게 숨을 쉬며 말했다.
“이봐, 사제 아가씨. 남자는…… 욕망을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걱정 마세요. 곧 건강해져서 고향의 아내에게로 돌아갈 수 있어요.”
“이 여자야! 지금 너한테 하는 말이잖아!”
피아는 그 말을 듣고서야 상황을 파악했다. 그녀는 자신을 둘러싼 병사들을 둘러보더니 말했다.
“곤란한데요.”
“으이익! 더 이상은 못 참는다!”
키 큰 병사가 결국 욕망을 참지 못해 달려들었다. 아니, 달려들려고 했다. 하지만 그 순간, 남자의 몸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그는 당황한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라, 이게 뭐지?’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강력한 힘이 그를 멀리 날려 보냈다.
“으아악!”
그는 날아가다가 건물 이층 벽에 부딪친 뒤 바닥으로 추락했다. 떨어지는 순간, 그의 다리가 기괴한 각도로 부지는 것이 보였다.
“으악, 뭐야!”
또 한 명의 병사가 같은 꼴을 당했다. 그는 붕 떠서 날아가 어딘가에 처박히며 혼절하고 말았다. 심상찮음을 느낀 병사 한 명이 주머니칼을 꺼냈지만, 다음 순간 자신의 목 아래 장검의 칼날이 들어와 있는 것을 보고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하여간 남자들은 믿을 수 없는 동물이라니까. 오라버니만 빼고.”
율리아는 분노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이런, 당신들 때문에 저까지 도매금으로 취급받았습니다. 이를 어쩌죠?”
카일은 싱긋 웃으며 활시위를 내렸다. 자신이 나설 필요까지 없는 것으로 판단했던 것이다. 활을 잡은 손에는 단도를 거꾸로 쥐고 있었다.
“자신을 치료해 준 사제를 겁탈하려고 들어? 너희 같은 쓰레기들을 살려 준 내가 죽일 놈이다.”
마지막으로 나타난 것은 레스터였다. 그의 양손에는 이글거리는 불덩이가 타오르고 있었다. 처음의 병사들을 날려 버린 것도 레스터의 힘이었다. 남아 있는 병사들은 그것을 보고 사색이 되어 뒷걸음질쳤다. 반면, 피아는 싱긋 웃으며 레스터를 향해 인사했다.
“오랜만이에요, 아저씨.”
“뭐가 오랜만이에요야! 이 얼빠진 여자야!”
레스터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고는 공포에 떨고 있는 병사들을 향해 외쳤다.
“이봐, 쓰레기들. 지금부터 너희를 불태워 죽일지 찢어서 죽일지를 이 사제 아가씨에게 물어보려고 하는데, 이의있나?”
“히익!”
사색이 된 병사들은 손이 발이 되도록 빌기 시작했다. 그중 한 놈은 바지에 오줌을 지리기까지 했다. 그 추잡한 모습에 율리아가 토할 것 같다는 표정으로 얼굴을 찌푸렸다.
“피아, 어떻게 할까?”
레스터가 물었다. 그러자 모두의 시선이 피아에게로 향했다. 피아는 몇 번 눈을 깜빡이는가 싶더니, 곧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모두가 놀랄 만한 말을 했다.
“그들을 용서해 주세요.”
“뭐……?”
레스터가 바보처럼 눈을 껌벅였다. 집중력을 잃은 탓에 손의 불덩이도 사라져 버렸다. 율리아는 손에 쥔 칼을 떨어뜨릴 뻔했다.
“하아, 이것참.”
카일마저 기가 막히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 순간, 경비병들이 나타났다. 소란스러운 소리를 듣고 달려온 것이다. 레스터는 진노한 표정으로 말했다.
“모조리 잡아들여 군법으로 처벌하시오. 감히 사제를 겁탈하려고 한 놈들입니다.”
결국 병사들은 경비병들에 의해 어디론가 끌려갔다. 상황이 모두 정리되었지만 레스터는 그 자리에 선 채 묵묵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율리아와 카일은 레스터의 눈치를 보고 있었지만, 피아만큼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그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감사 인사를 드려야겠죠, 아저씨?”
“이 멍청한 여자야!”
레스터는 눈을 동그랗게 뜬 피아를 향해 소리쳤다. 어느 때보다도 화가 난 말투였다.
“너, 방금 무슨 짓을 당할 뻔한지 알기나 해? 자기 몸은 스스로 보호해야 할 거 아니야!”
“하, 하지만…… 부상자가 있다고 해서…….”
피아가 다급히 변명을 해 보지만 레스터의 분노는 사그러들지 않았다.
“그렇다면 살려달라고 소리라도 질렀어야지! 넌 왜 매사가 그런 식이야? 언제 죽어도 상관없다는 듯이, 자기보다 남이 더 소중하다는 듯이, 그렇게 살다가 죽으면 신이 ‘아이구, 잘했구나’ 하며 칭찬이라도 해 줄 것 같아? 웃기지 마. 신은 목숨을 체념한 자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아. 살아서 뭐든 해 보려고 진탕 속에서 발버둥치는 사람에게도 잔인한 게 신이야!”
피아를 향해 쏟아지는 폭언에 율리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로서는 처음 보는 광경이다.
오라버니가 이런 식으로 말한 적이 있었던가?
자신의 잘못에 대해 따끔하게 지적하고 입바른 소리를 한 적은 있어도 이렇게 일방적으로 매도한 적은 없었다. 그녀로서는 오라버니의 이런 태도가 당혹스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화낼 줄도 모르지, 자기 몸 챙길 줄도 모르지. 그러면서 착하기 때문이라고 자기변명에만 바쁘지. 모르나 본데, 그건 착한 게 아니라 병이야, 병! 지독한 정신병이라고! 남을 치료할 정신이 있으면 자기 머리부터 치료하는 편이 어때? 그렇다면 적어도 이런 곳에서 이런 일을 당하진 않을 거고, 이런 소리도 듣지 않을 테니까!”
그 말을 마지막으로 레스터는 뒤돌아섰다. 율리아는 어찌할 바를 몰라 머뭇거리다가 종종걸음으로 오빠의 뒤를 따랐다. 카일은 씁쓸하게 웃으며 피아에게 목례한 뒤 자신도 건물 저편으로 사라졌다.
혼자 남은 피아는 잠시 그대로 서 있었다. 마치 길을 잃은 아이와 같은 표정이었다. 하지만 아이처럼 울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저 하늘을 잠시 바라보다가 골목 바깥쪽으로 터덜터덜 걸어나왔다.
그곳에는 마차가 한 대 기다리고 있었다.
“아…….”
피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차의 한쪽 문은 열려 있었다. 그 안쪽에서 레스터는 팔짱을 낀 채 한결 차분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뭐 해? 타.”
“저 말인가요?”
“네가 아니면 군사 재판에서 누가 날 변호해 줄 건데? 증인이 필요해. 없는 것보다야 낫겠지.”
레스터는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율리아는 그런 오빠의 얼굴을 재미있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카일은 만면에 부드러운 미소를 띤 채 마차에서 내렸다.
“타시죠, 자애로운 사제 아가씨.”
피아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녀는 부상자들이 있는 천막 쪽을 한 번 바라보았다가, 이윽고 카일이 내민 손을 잡았다.
말의 울음소리와 함께 수도로 향하는 마차의 바퀴가 힘차게 구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