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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을 쓰는 타이탄1권(12화)
4장. 의문의 습격(1)
“훔쳐다가 집에 모셔 놓고 싶은 달빛입니다.
가만, 어느새 당신의 눈 속에도 달빛이 있군요.
어디 자세히 좀 봅시다.”
―희대의 바람둥이, 쉴트.
반짝이는 금가루가 흩날린다. 수만의 함성 소리가 온몸을 저릿저릿하게 울린다. 희뿌연 연기들 사이로 공화국의 색깔인 붉은색 군기가 펄럭이고, 승리를 알리는 쟁쟁한 나팔소리가 축하를 알린다. 위대한 군사적 업적을 쌓은 이에게 주어지는 영광인 개선식의 행렬은 아침부터 계속되었고, 그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은 이 국가적 축제에 기뻐하며 저마다 자신들의 신에게 기도를 올렸다.
그 축제의 한가운데에 루시우스가 있었다. 개선식을 하는 장수에게 허용되는 붉은 망토를 휘날리며 그는 감격 어린 표정으로 손을 흔들었다. 그의 뒤로 진홍의 타이탄이 거대한 위용을 드러내며 말 스무 필이 이끄는 수레에 실린 채 천천히 움직이고, 수천의 병사들이 도열한 채로 걸음을 옮겼다. 유례없는 최연소 개선식 장수의 모습을 보려는 사람들은 크라수스 공화국의 수도 아페테이아로 몰려들었고, 거리는 발 디딜 틈 없이 가득 메워져 있었다.
진홍의 사령관 루시우스 아이밀리아 아이젠, 그의 명성은 이제 수도를 넘어 크라수스 공화국 전체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모습을 바라보는 사람들 모두가 그를 찬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군중 가운데 불편한 얼굴로 그를 지켜보는 사람들도 소수이지만 분명히 존재했다.
“아직 애송이에 불과한 줄 알았더니, 이미 다 자란 맹수였던 건가?”
목소리의 주인공은 몸을 돌려 군중에서 빠져나갔다. 사람들 사이에서 흐트러진 긴 옷소매를 추스르며 그가 향한 곳은 평의회 의전이 있는 아우메네스 신전이었다.
루시우스의 곁에 있던 루나 윈터스프링이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방금 티베리우스 의장이 지나갔습니다.”
인간에 비해 몇 배는 눈이 밝은 루나는 금세 그의 존재를 눈치챘다.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루시우스는 머리가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발부스 코르피니아노 티베리우스.
7년 전 있은 민중파 탄압 사건의 주동자이자, 귀족파의 중심 인물. 귀족들에게만 유리했던 조세법을 개정하기 위한 민중파의 움직임이 과격화될 조짐을 보이자, 평의회와의 합작 아래 비상 계엄을 선포하고 민중파 대부분을 숙청한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 루시우스의 아버지와 숙부가 목숨을 잃었다.
그 이름을 듣는 것조차도 루시우스에게는 불쾌했다. 하지만 오늘은 승리의 날이었다. 그렇기에 분통을 터뜨리고 있을 발부스의 얼굴을 떠올리는 것도 나름 즐거운 일이다.
“늙은 여우치고는 엉덩이가 가볍군. 표정은 어떻던가?”
“썩 즐거워 보이진 않았습니다. 황급히 어디론가 떠나는 듯한 모습이었습니다.”
“대책 논의라도 하고 있겠지. 개선식은 허가했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되는 건 아니니까. 아직도 칼자루를 쥐고 있는 것은 그쪽이거든.”
“꼭 남의 얘기를 하시는 것 같군요. 루시우스 님은 두렵지 않으십니까? 평의회를 적으로 돌리고서 무사한 인물은 지금까지 아무도 없었습니다. 일찍이 선친께서도…….”
순간적으로 루나는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실언이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괜찮아. 사과할 사람은 네가 아니라 지금쯤 머리를 쥐어짜고 있을 늙은이들의 몫이니까. 아버지의 일은 절대로 잊지 않겠지만, 그렇다고 일일이 분노하는 것도 못난 짓이지.”
루시우스는 고개를 돌려 수많은 군중을 향해 손을 들었다. 그러자 함성 소리가 더욱 커지고, 모두들 루시우스의 이름을 연호했다. 이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 지금까지 수많은 사선을 넘어왔다. 하지만 앞으로 그가 걸어갈 길은 이보다 더 혹독할 것이다.
귀족파가 득세하는 현실. 귀족과 평민의 갈등은 점점 커지고, 시민과 비시민의 간극은 더욱 벌어지고 있었다. 속지와 직할지, 부유층과 서민층의 차별은 어제 오늘만의 일은 아니었다. 계속해서 팽창하는 공화국의 업적으로 간신히 봉합해 나가고 있는 실정인 것이다.
하지만 거짓으로 메꾸어 놓은 공화국의 상처는 날이 갈수록 아물기는커녕 보이지 않는 곳에서 썩어 가고 있었다. 언젠가는 이 모든 것이 한 번에 드러나게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모든 것을 뒤집어엎으리라. 그것이 이 썩어 빠진 공화국에서 유일하게 제대로 된 인간이었던 아버지에 대한 자식의 도리일 것이다.
개선식을 마친 직후, 루시우스 아이밀리아 아이젠 사령관이 평의회장에 도착하자 곧바로 평의회가 시작되었다. 의장인 발부스 코르피니아노 티베리우스는 화려한 언변으로 비탄 초원에서 세운 그의 공적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병사들에 대한 치하를 하며 루시우스를 추켜세웠다. 평의회 의원들 역시 하나같이 루시우스의 업적을 칭송하기에 바빴다. 의외의 환대에 루시우스는 심기가 뒤틀렸다.
‘이것들이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거지?’
지금까지 그에게 호의적으로 대했던 적이 단 한 번도 없던 이들이기에 그 수작은 빤했다. 마음을 가다듬은 루시우스는 차분히 기다렸다. 분명히 무언가 석연치 않은 수작이 있을 것이다.
“이하 본 의장은 크라수스 공화국의 높은 기개와 힘을 전 세계에 알린 뛰어난 그대의 업적을 높이 사 이에 합당한 지위와 명예를 보장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소이다.”
‘웃기는군.’
루시우스는 그의 말에 코웃음을 쳤다. 애초에 그럴 생각이었다면 삼천의 군세로 일만의 병사가 지키는 성을 빼앗으라는 비상식적인 명령은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결국 자신을 정치적으로 실각시키려는 의도일 뿐이었다.
그러나 불가능한 작전을 멋지게 성공시킴으로써 오히려 루시우스의 인기는 하늘을 치솟았다. 농성하는 병력을 초원으로 이끌어 내고, 기상천외한 전략으로 적들을 대파한 것이다. 반드시 참패할 거라 여겼던 발부스로서는 제대로 한 대 얻어맞은 셈이었다.
발부스는 평의회 의원들을 죽 훑어보더니 루시우스에 이르러 시선을 멈추었다. 여전히 자신만만해 보이는 젊은 사령관은 오만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발부스는 속으로 욕설을 내뱉으며 입을 열었다.
“의장의 직권으로 루시우스 아이밀리아 아이젠에게 속주의 총독 직을 부여할 것을 제안하는 바입니다.”
발부스의 발언에 평의회가 일순간 소란스러워졌다. 루시우스뿐만 아니라 귀족파의 의원들 조차도 놀랄 정도였다. 그만큼 발부스의 발언은 파격적인 것이었다.
갓 스무 살의 장군에게 개선식을 승인한 것도 모자라 속주의 총독 직을 제안한 것이다. 일단 속주 총독의 지위를 얻게 되면, 이후 평의회 의원의 자리를 보장받게 되며, 각종 고위직으로의 진출도 쉬워진다. 게다가 크라수스의 주요 행정을 수행하는 최고위직인 막시밀리움, 즉 집행관에 출마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된다.
그야말로 크라수스 정권의 중추로 들어가는 핵심 코스인 셈이다. 그런 자리를 민중파의 대표 인사격으로 여겨지는 루시우스에게 선뜻 쥐어 준다는 것은 귀족파의 입장에서는 납득하기 힘든 것이었다.
어찌 보면 루시우스로서는 오히려 환영해야 할 일이었다. 그러나 뒷맛이 좋지 않았다. 눈앞의 달콤한 먹이에 현혹되다간 막다른 골목으로 몰릴 수도 있는 것이다.
“저런 애송이한테 총독이라고……?”
“말도 안 되오. 어찌 그런 제안을…….”
이어 총독의 지위를 부여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에 대한 토론이 이어졌다. 거의 대부분의 의원들이 반대 의견을 피력했다. 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발부스의 입김이 닿는 귀족파 의원들. 이대로 발부스가 의견을 굽히지 않는다면 그들로서는 결국 찬성에 표를 던질 수밖에 없었다.
‘저 늙은 여우가 대체 무슨 꿍꿍이지……?’
루시우스의 머릿속에서 수많은 생각이 뒤얽혔다.
총독의 지위를 준다?
그것은 매우 달콤한 유혹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제안한 인물이 다름 아닌 발부스 코르피니아노 티베리우스였다. 자신에게 전혀 호의적인 인간이 아닌 만큼 거기에는 반드시 독이 있을 것이다.
한 의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평의회에 몇 안 되는 민중파 의원인 메르카토르 미트라 데 드미트리우스였다.
“그것은 안 될 말이십니다. 이제 막 개선식이 끝난 장군에게 총독 직을 수여하다니, 너무 성급한 일 처리가 아닙니까? 적어도 충분한 시간을 걸쳐 논의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됩니다.”
그의 발언에 소란스럽던 평의회의 분위기가 차갑게 식었다. 민중파로 알려진 루시우스의 총독 부임 건에 민중파가 거부권을 행사한다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다음의 일이었다. 루시우스 역시 거절의 의사를 표한 것이다.
“티베리우스 의장님의 말씀은 고맙지만, 총독 직은 사양하겠습니다. 전투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지금은, 그저 집에서 쉬고 싶은 생각뿐이군요.”
루시우스의 앓는 소리에 의원석 여기저기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거의 대부분은 유약해 보이는 그를 비웃는 소리였다. 비록 삼천의 병력으로 시리온 제국을 완파했다고는 하지만, 아직까지 그를 애송이로 보는 의원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단 한 사람, 발부스만은 그런 루시우스를 비웃지 않았다.
“개선식을 행한 장수는 자동적으로 속주 총독이 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게 됩니다. 공화국으로서는 뛰어난 장수를 집에서 놀리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부디 이 늙은이의 청을 거절하지 말았으면 하는군요.”
발부스의 의지는 강경했다. 공화국의 평의회 의장이라면 크라수스에서는 가장 큰어른이나 마찬가지다. 그런 인물이 자존심을 굽히고 나온다는 것은 루시우스로서도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게다가 스무 살의 총독은 전례가 없을 정도로 영광스러운 일. 그것을 무기로 들고 나온 이상 더는 거절하기가 어렵게 된 것이다.
‘늙은 생강이 역시 맵군.’
평온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발부스의 표정이 그 어느 때보다도 가증스러웠다. 그는 고개를 한껏 쳐들어 발부스를 노려보았다. 두 사람의 눈빛이 허공에서 충돌했다. 아직은 그 생각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그렇다면 지금은 물러서야 할 때였다. 제안을 거부하고 더 이상의 문제를 일으키지 말아야 했다.
그러나, 루시우스는 물러서지 않았다.
“공화국의 영광을 위해 제안을 받아들이겠습니다.”
도망치는 것은 그의 방식이 아니었다. 비록 그 노림수가 무엇이든, 상대가 발부스 코르피니아노 티베리우스라면 그는 절대로 도망칠 수 없었다. 결국 루시우스는 노련한 정치가인 발부스와의 정면 대결을 선택한 것이다.
루시우스의 대답에 회장이 소란스러워지자 발부스가 손을 들어 분위기를 가라앉혔다.
“그럼 아이젠 사령관의 뜻을 받아들여 총독 부임 건에 대한 투표를 실시하겠습니다. 상례대로 부임지는 현재 총독 직이 공석인 곳을 선택하도록 하겠습니다.”
발부스의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반대쪽 의견을 피력하던 의원들의 표정이 일변했다. 대부분 안도하는 분위기였다. 다만 민중파 의원인 메르카토르만이 침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상황을 모르는 루시우스로서도 이쯤 되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할 수 있었다. 발부스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부임지는 스토크나 속주, 기간은 3년입니다. 전례를 따라 총독에게는 1개 군단의 편성권을 부여하겠습니다. 이의를 가지신 분 있으십니까?”
발부스의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루시우스가 입을 열었다.
“티베리우스 의장 각하, 그곳은 분명히 베르기오스 총독이 부임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아직 소식을 못 들으셨나 보군요. 불행히도 베르기오스 총독께서는 급환으로 영면하셨소이다. 공화국의 큰 손실이지요.”
루시우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전투를 위해 본국을 떠나 있던 사이에 그런 일이 있었던가. 그는 정보원에 대한 필요성을 절감했다. 진즉 알았더라면 이런 식으로 당하지는 않았을 터다.
그렇다면 문제가 되는 스토크나 속주는 어떤 곳인가.
스토크나는 크라수스의 북동부에 위치한 속주였다. 그곳은 부유한 동부 속주, 즉 황금의 땅이라 불리는 마르나시아에 비해 처참할 정도로 척박한 지역이었다. 속주에서 기대하는 향신료도, 황금도, 뛰어난 문명에서 기원하는 사치품도 존재하지 않는 야만족의 땅. 추운 겨울을 피해 남하하는 스토크 족을 견제하기 위해 정복한 지역으로, 주민의 대부분이 크라수스에 반감을 가지고 있는 야만족이며 지역색마저도 거칠기 그지없어 크라수스로서도 골치 아픈 문제가 많이 벌어지는 곳이다.
때문에 크라수스의 고위직 관료들 사이에서 스토크나 속주로의 전출은 좌천이라는 인식이 팽배해 있었다. 관료들이 가장 꺼리는 지역이며, 꿈에서도 가기를 원하지 않는 곳인 것이다.
모르긴 해도 베르기오스 총독 역시 스토크 족과의 싸움에 휘말렸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들은 겉으로는 굴복하면서도 항상 뒤를 칠 준비를 한다. 당장은 힘으로 눌러 놓고 있지만, 약간의 빈틈이라도 보이면 언제든지 들고 일어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럼 의결에 붙이겠습니다.”
귀족들은 발부스의 안건에 아무도 반대 의견을 제시하지 않았다. 단지 메르카토르만이 한숨을 내쉬며 조용히 평의회장을 빠져나갔을 뿐이다. 이미 대세는 굳혀졌다. 루시우스의 스토크나 행은 확정적이었다.
발부스는 승리의 통쾌함을 느끼며 루시우스를 바라보았다. 모든 것이 자신의 생각대로 흘러갔다. 예상대로 애송이는 눈앞의 달콤한 먹이에 정신이 팔려 지옥으로 발을 내딛었다. 이제는 스스로 파멸해 가는 것을 지켜보기만 하면 끝이었다.
루시우스는 생각에 잠겼다. 이제 와서 거절하는 것은 힘들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생각해야 할 것은 스토나크 속주의 총독이라는 이 현실을 어떻게 이용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투표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단 한 명의 기권표를 제외하고는 모두 찬성이었다.
“공화국의 영광을 위해, 그럼 이로써 오늘의 평의회의 주요 안건은 끝난 것으로 보고…….”
“아직, 기다려 주십시오.”
발부스가 평의회의 마무리를 지으려던 순간, 루시우스가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모두의 시선이 루시우스에게 모여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