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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이상한 남자애
“뭐야, 이제 잘 웃잖아.”
서하는 한 아이스크림 집 앞에 멈춰서 광고 포스터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그 안에 있는 초콜릿 맛 아이스크림 따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직, 이 남자.
밝지 않은 차분한 애시퍼플 컬러가 머리에 물든, 웃는 인상이 참 매력적인 남자.
모던하게 머리를 꾸민, 부드러운 선을 가진 이 남자.
선한 눈 위로 둥글게 자리 잡은 쌍꺼풀, 그 아래로는 웃는 입에 너무도 잘 어울리는 선명한 콧대가 예술작품처럼 그려진 이, 공성운이라는 남자.
서하의 눈엔 오직 그 남자만이 가득했다.
“잘 지내려나?”
왠지 모르게 밀려드는 서운함에 양 볼을 부루퉁하게 부풀리며 몸을 획, 돌렸다.
스물 두 살의 가을이었다.
* * *
8년 전.
집으로 돌아온 서하는 꽁꽁 얼어버린 손발을 녹이기 위해 재빨리 제 방으로 향했다. 따뜻한 이불로 몸을 덮는 순간 짧은 탄성까지 새어 나왔다.
너무도 추운 날이었다. 창문 밖으로 하염없이 내리는 눈이 세상을 새하얗게 만들고 있었다. 기록적인 폭설이 며칠째 계속되는 통에 눈을 바라보는 마음이 설레지 않았다.
몽글몽글 천천히 떨어지는 눈들이 전혀 아름답지 않았다.
“제발 그만 좀 와라.”
아직 방학하려면 한 달이나 남았다구. 이 눈치 없는 눈아.
제 눈살을 잔뜩 찡그리며 창밖을 바라보았지만, 이내 고요하고 적막한 집안 분위기에 점점 표정이 풀려갔다. 굳게 닫힌 창문 틈으로 거센 바람 소리조차 들어오지 않았다.
이런 일상이 그녀에겐 너무도 익숙했다. 하릴없이 창밖을 바라보다, 혼자 밥을 먹고 잠시 TV를 보며 웃다가 잠이 들면 퇴근한 아빠의 얼굴을 며칠이나 못 보는 건 마치 일상 같은 일이었다.
“오늘은 몇 시에 오시려나.”
몸을 조금 녹이니 배가 고파지기 시작했다.
열다섯, 한창 많이 먹을 나이에 항상 겨우 아빠가 해놓은 밥과 간단한 김치로 밥을 때웠다.
가끔가다 고기반찬이라도 있으면 눈이 휘둥그레지곤 했었는데 오늘이 딱 그날이었다. 신이 난 듯 웃으며 냉장고에서 불고기를 꺼내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현관에서 도어록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 아빠인가?
웬일이시지, 이렇게 일찍 온 적은 없었는데 의아스러웠지만 서하의 입꼬리는 이미 귀까지 걸린 상태였다.
“아빠?!”
경쾌한 목소리로 현관으로 달려가 보니, 아빠가 한 남자애의 손을 잡고 집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서하, 집에 있었구나.”
다정하게 웃으며 서하를 쳐다보는 모습에 그녀 또한 싱긋 웃음 지었지만, 시선은 내내 옆에 서 있는 남자애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저와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남자아이는 연갈색의 얇은 머리칼을 휘날리며 웃어 주고 있었다.
처음 보는 제게 그렇게 환한 웃음을 지어 주다니, 품고 있던 경계심이 사그라들 때쯤 아빠의 입에서 처음 보는 남자애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인사해. 아빠 친구 아들, 성운이야.”
“…….”
“나이는 서하랑 동갑인데. 사정이 생겨서 한 달 정도 우리 집에서 같이 지내게 될 거 같아, 서하 괜찮지?”
잠시 정적이 흘렀다.
한 달이나 같이 지낸다고?
형제도 없이 줄곧 혼자 지내온 서하였다. 과연 가능한 일일까? 라는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뭐 나쁠 건 없다고 생각했다.
아빠가 이미 결정한 일이고 함께 온 남자애도 나쁜 애는 아닌 듯했으니까.
“네. 괜찮을 것 같아요.”
그 대답에 고맙다는 듯 아빠인 설준이 서하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설준이 그제야 신발을 벗으며 손에 들린 성운의 짐을 현관 옆에 두자, 멀뚱거리며 서 있던 성운이 서하에게 대뜸 손을 내밀었다.
잘 부탁한다는 뜻의 악수였다.
“잘 부탁해, 공성운이야.”
또 싱글거리며 웃는다. 성운의 머리칼은 내리는 눈 때문에 이미 살짝 젖어 있는 상태였다.
서하는 그의 젖은 머리칼에서 살짝 시선을 내려 눈을 마주했다. 웃는 입매와는 다르게 어딘지 모르게 성운의 눈은 슬퍼 보였다.
기다란 속눈썹 아래로 보이는 눈동자는 공허했고, 해맑은 웃음 뒤로 보이는 눈은 마치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그 모습에 잠시 말없이 서 있던 서하는 이내 정신을 차렸다. 턱 아래로 떨어지는 단발머리를 귀 뒤로 꽂으며 웃어 주었다.
“응, 난 강서하.”
맞잡은 손은 따뜻했다.
이 차갑고도 따뜻한 순간이 두 사람의 첫 만남이었다.
* * *
그날 밤, 성운이 잠시 씻는 틈을 타 설준이 서하를 조심스럽게 불렀다. 성운이 함께 있을 땐 전하지 못했던 그의 진짜 사정을 알려 주려는 듯했다.
어렵게 입을 연 아빠의 눈은 굉장히 구슬퍼 보였다. 서하는 이야기를 듣기 전부터 이미 성운에게 좋지 않은 사정이 있음을 예상했다.
“성운이는 이제껏 엄마랑 단둘이 살았었는데, 얼마 전에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어.”
“…….”
“친척들도 다 외국에서 지내고 있어서 그쪽에서 데려가는데 절차가 조금 복잡한 모양이야.”
성운의 가족들이 누가 애를 맡느냐로 언쟁이 불붙어 있는 상황이었지만, 그 사실을 서하에게 알려 줄 필요는 없었다.
그렇기에 설준은 그런 이야기를 복잡한 절차로 덮어 버리며 말을 이어 갔다.
“한 달 정도니까. 잘 지낼 수 있지?”
“…….”
“성운이 지금 많이 힘들 거야. 서하, 네가 잘 다독여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해.”
그건 당연한 말이었다. 처음 보는 남자애였지만, 서하 또한 어릴 적 엄마를 잃은 아픔을 겪어 보았기에 그 마음을 모른 체할 순 없었다.
그렇지만 아까 본 남자애의 표정은 너무도 해맑았다. 그 환한 웃음이 떠올라 서하가 고개를 끄덕이다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아빠, 그런데 쟤는 잘 웃던데?”
“…….”
“괜찮아 보였다구요.”
아주 잠시, 눈빛이 공허해 보였지만 그 이후 함께 식사하고 대화를 나누는 중엔 단 한 번도 그의 얼굴에서 그림자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설준의 말을 들으며 의아함을 느꼈다.
어떻게 엄마가 죽었는데 웃을 수가 있지? 어떻게? 감정이 없나?
이해가 되지 않는 듯 화장실 쪽을 가리키며 눈을 동그랗게 뜨자 설준이 서하의 어깨를 잡으며 입을 열었다.
“겉은 그렇게 보여도, 속은 아닐 거야.”
“…….”
“언젠가 네게 마음을 여는 순간이 오면, 아빠는 우리 딸이 꼭 성운이를 위로해 줬으면 좋겠구나.”
설준의 다정한 어투에 서하는 그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이후, 화장실에서 샤워를 끝마치고 나온 성운은 정말 아무런 이유가 없이도 서하에게 곧잘 웃어 주었다.
“설거지는 내가 할까?”
설준이 욕실로 들어가자 설거지를 하기 위해 고무장갑을 들어 올린 서하에게 성운이 물은 것이었다.
서하는 집에 가족이 아닌 누군가가 한 명 더 있다는 사실이 좀처럼 적응이 되지 않았다. 무심결에 움찔해 어깨를 들썩거리며 뒤를 돌아보자, 생글거리는 얼굴을 한 녀석이 서 있었다.
“아니. 방에 가서 쉬어.”
그의 웃는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서하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며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 다시금 성운에게 고개를 돌리니, 그 녀석은 또 한 번 싱긋거리며 웃을 뿐이었다.
참, 이상한 녀석이야.
* * *
그 이상한 녀석이 더욱더 이상해 보인 건 3일이 지난 후였다.
등굣길에 오르자, 언제나처럼 제게 올곧게 웃어 주었다. 그래도 제게 슬픈 모습을 한 번이라도 비출 줄 알았다.
사람이라면 그럴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같은 학교가 아니었기에 두 사람은 각자 다른 버스를 타야 했지만, 정류장에서 함께 버스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녀는 결국 며칠간 궁금했던 것을 성운에게 물었다.
“넌 하나도 슬프지가 않아?”
“뭘?”
“나 실은 아빠한테 다 들었어. 네가 왜 우리 집에서 같이 살게 됐는지.”
성운을 담담하게 쳐다보았으나, 서하의 말투는 꽤 단호했다.
엄마가 죽는다는 게 그저 멀리 떠나 한동안 돌아오지 않는단 것으로 인식했던 어린 날의 자신조차도 며칠간을 울었던 아니, 지금도 떠오르면 눈물 나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아무렇지 않게 웃어 보이는 그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서하의 말에 성운의 눈빛이 갈 곳을 잃은 듯 잠시 흔들렸으나, 다시금 마음을 부여잡으며 또다시 입꼬리를 올렸다.
“그랬구나. 네가 마음 쓸 필요는 없어.”
힘 빠진 목소리를 내면서도 한결같이 웃음 짓고 있는 그 모습에 서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너무도 당혹스러운 상황에 말까지 더듬어 댔다.
“너, 너 말이야. 그러니까 좀 어디…… 감정이 결여된 건 아니야?”
“…….”
“왜 울지 않아? 당연히 슬퍼해야 하는 일 아닌가?”
여전히 웃고 있는 그 모습에 온몸에 소름이 돋아났다.
안 그래도 칼바람이 불어오는 매서운 추위에 손끝까지 오들오들 떨리고 있는데, 눈앞에 서 있는 이 남자애가 단단히 한몫하고 있었다.
성운의 표정은 오묘했다. 쌍꺼풀이 겹쳐질 정도로 생글생글 웃음을 짓다가도 입술이 차분하게 굳어졌다. 그 모습에 서하의 심장까지 소름이 일어 빠르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감정이 없는 건가? 사이코패스, 소시오패스. 뭐, 그런 거?
입술을 잘근 깨물며 쏟아 낸 질문들에 대한 답을 기다리고 있는데, 성운의 낮은 음성이 코끝을 스쳤다.
“내가 꼭 울어야 하는 건 아니잖아.”
“그런 건 아니지만…….”
“나한테 슬픔을 강요하지 마.”
성운은 자로 잰 듯 뚝 떨어지는 딱딱한 어조로 말하며 냉담한 시선을 퍼부었다.
나름대로 걱정이 되어서 건넨 말인데, 바로 반사되어 날아온 무심한 말들은 서하의 가슴에 비수처럼 꽂혀 들었다.
심지어 그가 타야 하는 버스가 먼저 도착해 획, 버스를 타고 떠나 버렸다.
“뭐야, 완전 재수 없어!”
그 탓에 뼛속까지 아려오는 추위가 쉬이 잊혔다.
온몸을 타고 흐르는 분노의 감각에 코끝이 벌게진 것조차 느끼지 못했다.
* * *
순전히 아빠 때문만은 아니었다. 같은 아픔을 공유하고, 같은 경험을 겪었던 그가 안쓰러워서 잘해 주려 했던 건데. 신경 썼던 건데!
획, 내팽개쳐진 배려의 손길에 마음이 상했다.
그날 밤, 양치를 하며 마주한 성운에게 흥, 소리를 내며 곁을 지나쳤다. 화장실에 들어서 양칫물을 오물거리고 있는데 화장실 문이 달칵, 열렸다.
서하의 눈에 둥근 공이 떠오르고 깜짝 놀라 콩알만 해진 심장을 겨우 부여잡으며 시선을 문 쪽으로 돌리고 나서야 알 수 있었다.
입 안 가득 민트 향을 풍기며 차올라있던 양칫물을 삼켜 버렸다는 사실을.
꿀꺽.
“뭐야, 이제 잘 웃잖아.”
서하는 한 아이스크림 집 앞에 멈춰서 광고 포스터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그 안에 있는 초콜릿 맛 아이스크림 따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직, 이 남자.
밝지 않은 차분한 애시퍼플 컬러가 머리에 물든, 웃는 인상이 참 매력적인 남자.
모던하게 머리를 꾸민, 부드러운 선을 가진 이 남자.
선한 눈 위로 둥글게 자리 잡은 쌍꺼풀, 그 아래로는 웃는 입에 너무도 잘 어울리는 선명한 콧대가 예술작품처럼 그려진 이, 공성운이라는 남자.
서하의 눈엔 오직 그 남자만이 가득했다.
“잘 지내려나?”
왠지 모르게 밀려드는 서운함에 양 볼을 부루퉁하게 부풀리며 몸을 획, 돌렸다.
스물 두 살의 가을이었다.
* * *
8년 전.
집으로 돌아온 서하는 꽁꽁 얼어버린 손발을 녹이기 위해 재빨리 제 방으로 향했다. 따뜻한 이불로 몸을 덮는 순간 짧은 탄성까지 새어 나왔다.
너무도 추운 날이었다. 창문 밖으로 하염없이 내리는 눈이 세상을 새하얗게 만들고 있었다. 기록적인 폭설이 며칠째 계속되는 통에 눈을 바라보는 마음이 설레지 않았다.
몽글몽글 천천히 떨어지는 눈들이 전혀 아름답지 않았다.
“제발 그만 좀 와라.”
아직 방학하려면 한 달이나 남았다구. 이 눈치 없는 눈아.
제 눈살을 잔뜩 찡그리며 창밖을 바라보았지만, 이내 고요하고 적막한 집안 분위기에 점점 표정이 풀려갔다. 굳게 닫힌 창문 틈으로 거센 바람 소리조차 들어오지 않았다.
이런 일상이 그녀에겐 너무도 익숙했다. 하릴없이 창밖을 바라보다, 혼자 밥을 먹고 잠시 TV를 보며 웃다가 잠이 들면 퇴근한 아빠의 얼굴을 며칠이나 못 보는 건 마치 일상 같은 일이었다.
“오늘은 몇 시에 오시려나.”
몸을 조금 녹이니 배가 고파지기 시작했다.
열다섯, 한창 많이 먹을 나이에 항상 겨우 아빠가 해놓은 밥과 간단한 김치로 밥을 때웠다.
가끔가다 고기반찬이라도 있으면 눈이 휘둥그레지곤 했었는데 오늘이 딱 그날이었다. 신이 난 듯 웃으며 냉장고에서 불고기를 꺼내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현관에서 도어록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 아빠인가?
웬일이시지, 이렇게 일찍 온 적은 없었는데 의아스러웠지만 서하의 입꼬리는 이미 귀까지 걸린 상태였다.
“아빠?!”
경쾌한 목소리로 현관으로 달려가 보니, 아빠가 한 남자애의 손을 잡고 집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서하, 집에 있었구나.”
다정하게 웃으며 서하를 쳐다보는 모습에 그녀 또한 싱긋 웃음 지었지만, 시선은 내내 옆에 서 있는 남자애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저와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남자아이는 연갈색의 얇은 머리칼을 휘날리며 웃어 주고 있었다.
처음 보는 제게 그렇게 환한 웃음을 지어 주다니, 품고 있던 경계심이 사그라들 때쯤 아빠의 입에서 처음 보는 남자애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인사해. 아빠 친구 아들, 성운이야.”
“…….”
“나이는 서하랑 동갑인데. 사정이 생겨서 한 달 정도 우리 집에서 같이 지내게 될 거 같아, 서하 괜찮지?”
잠시 정적이 흘렀다.
한 달이나 같이 지낸다고?
형제도 없이 줄곧 혼자 지내온 서하였다. 과연 가능한 일일까? 라는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뭐 나쁠 건 없다고 생각했다.
아빠가 이미 결정한 일이고 함께 온 남자애도 나쁜 애는 아닌 듯했으니까.
“네. 괜찮을 것 같아요.”
그 대답에 고맙다는 듯 아빠인 설준이 서하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설준이 그제야 신발을 벗으며 손에 들린 성운의 짐을 현관 옆에 두자, 멀뚱거리며 서 있던 성운이 서하에게 대뜸 손을 내밀었다.
잘 부탁한다는 뜻의 악수였다.
“잘 부탁해, 공성운이야.”
또 싱글거리며 웃는다. 성운의 머리칼은 내리는 눈 때문에 이미 살짝 젖어 있는 상태였다.
서하는 그의 젖은 머리칼에서 살짝 시선을 내려 눈을 마주했다. 웃는 입매와는 다르게 어딘지 모르게 성운의 눈은 슬퍼 보였다.
기다란 속눈썹 아래로 보이는 눈동자는 공허했고, 해맑은 웃음 뒤로 보이는 눈은 마치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그 모습에 잠시 말없이 서 있던 서하는 이내 정신을 차렸다. 턱 아래로 떨어지는 단발머리를 귀 뒤로 꽂으며 웃어 주었다.
“응, 난 강서하.”
맞잡은 손은 따뜻했다.
이 차갑고도 따뜻한 순간이 두 사람의 첫 만남이었다.
* * *
그날 밤, 성운이 잠시 씻는 틈을 타 설준이 서하를 조심스럽게 불렀다. 성운이 함께 있을 땐 전하지 못했던 그의 진짜 사정을 알려 주려는 듯했다.
어렵게 입을 연 아빠의 눈은 굉장히 구슬퍼 보였다. 서하는 이야기를 듣기 전부터 이미 성운에게 좋지 않은 사정이 있음을 예상했다.
“성운이는 이제껏 엄마랑 단둘이 살았었는데, 얼마 전에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어.”
“…….”
“친척들도 다 외국에서 지내고 있어서 그쪽에서 데려가는데 절차가 조금 복잡한 모양이야.”
성운의 가족들이 누가 애를 맡느냐로 언쟁이 불붙어 있는 상황이었지만, 그 사실을 서하에게 알려 줄 필요는 없었다.
그렇기에 설준은 그런 이야기를 복잡한 절차로 덮어 버리며 말을 이어 갔다.
“한 달 정도니까. 잘 지낼 수 있지?”
“…….”
“성운이 지금 많이 힘들 거야. 서하, 네가 잘 다독여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해.”
그건 당연한 말이었다. 처음 보는 남자애였지만, 서하 또한 어릴 적 엄마를 잃은 아픔을 겪어 보았기에 그 마음을 모른 체할 순 없었다.
그렇지만 아까 본 남자애의 표정은 너무도 해맑았다. 그 환한 웃음이 떠올라 서하가 고개를 끄덕이다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아빠, 그런데 쟤는 잘 웃던데?”
“…….”
“괜찮아 보였다구요.”
아주 잠시, 눈빛이 공허해 보였지만 그 이후 함께 식사하고 대화를 나누는 중엔 단 한 번도 그의 얼굴에서 그림자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설준의 말을 들으며 의아함을 느꼈다.
어떻게 엄마가 죽었는데 웃을 수가 있지? 어떻게? 감정이 없나?
이해가 되지 않는 듯 화장실 쪽을 가리키며 눈을 동그랗게 뜨자 설준이 서하의 어깨를 잡으며 입을 열었다.
“겉은 그렇게 보여도, 속은 아닐 거야.”
“…….”
“언젠가 네게 마음을 여는 순간이 오면, 아빠는 우리 딸이 꼭 성운이를 위로해 줬으면 좋겠구나.”
설준의 다정한 어투에 서하는 그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이후, 화장실에서 샤워를 끝마치고 나온 성운은 정말 아무런 이유가 없이도 서하에게 곧잘 웃어 주었다.
“설거지는 내가 할까?”
설준이 욕실로 들어가자 설거지를 하기 위해 고무장갑을 들어 올린 서하에게 성운이 물은 것이었다.
서하는 집에 가족이 아닌 누군가가 한 명 더 있다는 사실이 좀처럼 적응이 되지 않았다. 무심결에 움찔해 어깨를 들썩거리며 뒤를 돌아보자, 생글거리는 얼굴을 한 녀석이 서 있었다.
“아니. 방에 가서 쉬어.”
그의 웃는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서하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며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 다시금 성운에게 고개를 돌리니, 그 녀석은 또 한 번 싱긋거리며 웃을 뿐이었다.
참, 이상한 녀석이야.
* * *
그 이상한 녀석이 더욱더 이상해 보인 건 3일이 지난 후였다.
등굣길에 오르자, 언제나처럼 제게 올곧게 웃어 주었다. 그래도 제게 슬픈 모습을 한 번이라도 비출 줄 알았다.
사람이라면 그럴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같은 학교가 아니었기에 두 사람은 각자 다른 버스를 타야 했지만, 정류장에서 함께 버스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녀는 결국 며칠간 궁금했던 것을 성운에게 물었다.
“넌 하나도 슬프지가 않아?”
“뭘?”
“나 실은 아빠한테 다 들었어. 네가 왜 우리 집에서 같이 살게 됐는지.”
성운을 담담하게 쳐다보았으나, 서하의 말투는 꽤 단호했다.
엄마가 죽는다는 게 그저 멀리 떠나 한동안 돌아오지 않는단 것으로 인식했던 어린 날의 자신조차도 며칠간을 울었던 아니, 지금도 떠오르면 눈물 나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아무렇지 않게 웃어 보이는 그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서하의 말에 성운의 눈빛이 갈 곳을 잃은 듯 잠시 흔들렸으나, 다시금 마음을 부여잡으며 또다시 입꼬리를 올렸다.
“그랬구나. 네가 마음 쓸 필요는 없어.”
힘 빠진 목소리를 내면서도 한결같이 웃음 짓고 있는 그 모습에 서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너무도 당혹스러운 상황에 말까지 더듬어 댔다.
“너, 너 말이야. 그러니까 좀 어디…… 감정이 결여된 건 아니야?”
“…….”
“왜 울지 않아? 당연히 슬퍼해야 하는 일 아닌가?”
여전히 웃고 있는 그 모습에 온몸에 소름이 돋아났다.
안 그래도 칼바람이 불어오는 매서운 추위에 손끝까지 오들오들 떨리고 있는데, 눈앞에 서 있는 이 남자애가 단단히 한몫하고 있었다.
성운의 표정은 오묘했다. 쌍꺼풀이 겹쳐질 정도로 생글생글 웃음을 짓다가도 입술이 차분하게 굳어졌다. 그 모습에 서하의 심장까지 소름이 일어 빠르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감정이 없는 건가? 사이코패스, 소시오패스. 뭐, 그런 거?
입술을 잘근 깨물며 쏟아 낸 질문들에 대한 답을 기다리고 있는데, 성운의 낮은 음성이 코끝을 스쳤다.
“내가 꼭 울어야 하는 건 아니잖아.”
“그런 건 아니지만…….”
“나한테 슬픔을 강요하지 마.”
성운은 자로 잰 듯 뚝 떨어지는 딱딱한 어조로 말하며 냉담한 시선을 퍼부었다.
나름대로 걱정이 되어서 건넨 말인데, 바로 반사되어 날아온 무심한 말들은 서하의 가슴에 비수처럼 꽂혀 들었다.
심지어 그가 타야 하는 버스가 먼저 도착해 획, 버스를 타고 떠나 버렸다.
“뭐야, 완전 재수 없어!”
그 탓에 뼛속까지 아려오는 추위가 쉬이 잊혔다.
온몸을 타고 흐르는 분노의 감각에 코끝이 벌게진 것조차 느끼지 못했다.
* * *
순전히 아빠 때문만은 아니었다. 같은 아픔을 공유하고, 같은 경험을 겪었던 그가 안쓰러워서 잘해 주려 했던 건데. 신경 썼던 건데!
획, 내팽개쳐진 배려의 손길에 마음이 상했다.
그날 밤, 양치를 하며 마주한 성운에게 흥, 소리를 내며 곁을 지나쳤다. 화장실에 들어서 양칫물을 오물거리고 있는데 화장실 문이 달칵, 열렸다.
서하의 눈에 둥근 공이 떠오르고 깜짝 놀라 콩알만 해진 심장을 겨우 부여잡으며 시선을 문 쪽으로 돌리고 나서야 알 수 있었다.
입 안 가득 민트 향을 풍기며 차올라있던 양칫물을 삼켜 버렸다는 사실을.
꿀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