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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스물셋의 너와 나
지금껏 TV에 나오는 성운의 모습을, 화보나 포스터에 담겨 있는 모습을 봐 왔었다.
같은 세계에 살지만, 철저히 다른 세상의 사람 같았다.
닿을 듯 가까운데 닿지 않는 그런 사이.
사실, 8년이나 지난 일이라 그에겐 티끌만 한 기억이 되어 버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서하에겐 그의 존재가 선명했다.
언제나 꿈같은 존재로 제 곁에 머물러 있었으니까.
같은 학교에 입학하며 조금은 가까워졌을 거라 생각했는데, 역시나 먼 존재였다.
경영, 경제 계열과 건물과 예술과 건물은 학교의 끝과 끝인데다가 연예인인 그가 학교에 제대로 오지 않을게 불 보듯 뻔했다.
그래서 평소처럼 마음을 놓고 지냈다. 그 애를 찾으려는 노력이야, 예술관 쪽을 기웃거리는 것 외엔 하지 않았다.
보고 싶었지만, 볼 수 없으니까.
“서하야, 오늘 신입생 환영회 갈 거지?”
강의가 끝나고 걸어가는데, 은민이 옆에서 슬쩍 팔짱을 끼며 물어왔다. 봄기운이 완연한 캠퍼스엔 형형색색 꽃들이 피어 있었다.
널찍하고 유난히 봄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서한대 캠퍼스는 그저 걷기만 해도 기분 좋아지는 곳이었다.
서하가 입술을 다문 채 긴 고민에 휩싸이자, 은민이 단숨에 그녀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음흉하게 웃음 지었다.
“너 안 가면 후회해.”
“왜?”
“글쎄 있지, 경영과랑 연영과랑 신입생 환영회를 같은 데서 한다는 거야!”
“…….”
“그럼 누가 오겠어?”
성운이……?
“준이 오빠가 오지 않겠어? 가야겠어, 안 가야겠어!?”
환영회라는 건 결국 술을 마시게 된다는 이야기인지라 딱히 끌리지 않았다. 자율적으로 참여하되 신입생들은 웬만하면 와 줬으면 좋겠다는 과대의 말에도 흔들림이 없었다.
차라리, 집에 가서 두 발 뻗고 쉬는 게 훨씬 나으니까.
심지어 월요일 공강을 잡아 놔서 주말인 내일부터 쭉 3일이나 쉴 수 있었으니까.
굳이, 불금에 사람이 밀집한 곳에 가서 고생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그 애가 올 수도 있다니.
“걔도 올까?”
“누구?”
“공성운.”
“아, 걔도 복학했다더라. 너 참 은근히 걔 좋아하는 거 같단 말이야. 좋으면 맘껏 표현해도 돼. 오늘 걔 보러 가자.”
은민은 호쾌하게 웃으며 서하의 어깨를 두어 번 쳐댔다. 서하의 집엔 이미 성운의 사진이 꽤 많이 쌓여 있었지만 그걸 은민에겐 밝히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일찍이 눈치를 챈 것 같았다. 정준의 소식을 들고 오며 은근히 성운의 소식도 들고 와 주었기에 알 수 있었다.
서하가 떠름한 표정으로 멋쩍게 웃자, 은민이 이가 보이게 웃으며 팔을 쭉 끌어당겼다.
“가자! 가는 거다, 응?”
그렇게 물이 흐르듯 자연스레 고개를 끄덕거렸다.
바쁘니까, 오지 않을 수도 있지만 작은 기대라도 걸어보고 싶었다.
8년이 지난 넌,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사진으로 봐온 것처럼 진심이 담긴 웃음을 짓고 있을까.
그래, 그냥 궁금한 건.
넌 그동안 잘 지냈을까.
바로 이어서 교양이 있다는 은민은 손을 흔들며 멀어졌다.
인간과 사회를 저가 왜 신청했는지 모르겠다며 한탄이 섞인 소리를 내뱉다가도 그래도 출석만 하면 학점이 잘 나오는 수업으로 소문이 파다하다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밝은 기운을 내뿜던 은민이 곁에서 사라지고, 서하 또한 아직 남은 전공 수업에 가려고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A관에서 B관으로 넘어가는 하늘 다리를 걷다가 촥 펼쳐진 봄 하늘에 시선을 빼앗겼다.
선명한 파란 하늘에 누군가 장식이라도 해놓은 것처럼 구름 두 개가 동그랗게 멋을 더하고 있었다.
“예쁘다…….”
강의실에 일찍 도착해 봤자, 멍하니 정면만 바라볼 걸 알았기에 딱 맞춰 가는 게 낫겠다 싶어 아예 난간에 팔을 기댔다.
청명하게 물든 하늘을 본격적으로 구경하려 눈동자를 멈춘 순간 팔 안쪽에 들고 있던 물통이 툭, 떨어졌다.
물이 반쯤 남은 플라스틱 통을 주우려 발을 쭉 뻗었는데 손이 닿기 전에 무심코 물통을 발로 뻥 차버렸다.
아차!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재빨리 물병을 짚으려 데구루루 굴러가는 물통을 졸졸 쫓았다. 그런데 물통이 누군가의 신발 앞에서 멈춰 섰다.
본의 아니게 누군가에게 차버린 꼴이 된 것만 같아 서하는 곧바로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죄송…….”
아니, 사과하려다 말았다. 물병을 주우려 무릎을 굽혀 앉은 서하의 시야에 담긴 누군가의 얼굴 때문에 사과를 끝까지 이을 수 없었다.
그 누군가는 똑같이 무릎을 굽혀 앉으며 서하가 미처 잡지 못한 물통을 주워들었다.
“네 거야?”
당연한 물음에 서하가 고개를 느릿하게 끄덕거렸다. 그런 와중에도 눈동자는 그에게 멈춰 있었다. 그를 본 순간 시간의 흐름은 다시금 뒤틀렸다.
마치, 열다섯의 그 순간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부드럽고 선한 눈매는 여전했고 통통하던 볼살이 없어져 날렵한 턱선은 그의 얼굴에 남자다움을 더했다.
사진으로도 예상은 했었지만, 생각보다 훨씬 듬직한 어깨와 키를 가지고 있었다.
잔잔한 미성이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그의 음성은 서하의 귓가에 뚜렷하게 차올랐다.
“잘…… 지냈어?”
고개를 살짝 오른쪽으로 기울이며 말끝을 올린 그는 인사조차 없이 사라져 버렸던, 8년 전의 그 공성운이었다.
이게 어떤 기분인지 말로 형용할 수가 없어 서하는 제 입술을 꾹 다물어 버렸다.
속 깊은 곳에서 또다시 시작된 알 수 없는 메슥거림이 목 안쪽을 타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왈칵, 쏟아질 뻔한 눈물을 입술을 꽉 깨물며 버텨냈다. 성운의 얼굴을 마주하니, 그때의 그 감정이 되살아났다.
간지러운 두근거림, 설렘 가득한 떨림.
깊이 있는 눈동자에 서린 아픔이 서하의 적갈색 눈동자에 고스란히 닿았다.
오묘하게 일그러지는 서하의 표정에 성운의 얼굴엔 미비한 동요가 생겨 났다.
두 눈에 붉은 기운을 가득 담고 저를 보는 그녀에게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내가 많이 보고 싶었나?”
그 찰나, 8년이란 시간이 무색해질 만큼 시간은 거꾸로 흘렀다.
그때의 가짜 웃음을 한가득 담은 성운의 얼굴은 세월의 흐름에 무뎌지긴커녕 더욱 선명한 슬픔이 갇혀 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떠난 후, 단 한 번도 날 찾지 않았을 그가 미운데도.
그때의 그 감정이 생각났다.
생기 없던 내 세상에 먼저 발을 디딘 단 하나의 붉은색.
스물셋의 너와 내가, 열다섯의 너와 내가 된 것처럼.
* * *
서하를 만나기 전 2월의 어느 날, 서한 대학교의 입학식이 있는 날이었다.
성운은 집을 나서며 한 개의 메시지를 받았다.
<오늘 꼭 와야 된다. 너 꼭 온다고 약속했어.>
이 말을 어제도 하고 그제도 하더니, 당일인 오늘까지도 하고 있었다. 아주 진절머리가 날 지경이었다.
메시지를 보낸 이는 성운이 모델 일을 시작하게 된 때부터 줄곧 친분을 쌓아온 정준으로, 성운보다 두 살 위였다. 정준은 딱히 친구도 만들지 않고 언제나 성운에게 달라붙는 가깝지만, 부담스러운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또, 싫은 사람은 아니었다. 좋다면 좋은, 나쁘지 않은.
그런 그가 학교 홍보 책자 모델을 하더니, 입학식에서 동아리 홍보를 한단다.
연극 동아리 회장이 그에게 ‘그 유명한 얼굴 좀 써먹자’라며 시킨 걸 자신까지 끌고 들어갈 심산이란 걸 모르지 않았지만, 성운은 못 이기는 척 학교로 향했다.
어느 순간부터 익숙해진 일상이었다.
어린 시절, 많은 감정들이 무너지고 차오르던 시간 안에서 자신만의 접점을 찾아냈다. 아니, 그냥 마음의 상처가 썩어 문드러진 상태로 손도 댈 수 없었다.
상처가 많은 곳에 또, 상처가 생겨도 무뎌졌다. 친아빠의 집에서 더욱이 또렷해진 마음의 공허함이 쉽사리 채워지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웃고 지내지만.
누군가와 평범하게 지내지만.
마음 한쪽이 뻥 뚫린 채로 위태로운 시간의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이마저도 익숙해져 갔다.
아픔에 익숙해진다는 건 곧, 모든 일에 초연해진다는 것과 같았다.
그냥 그렇게 쭉 지내게 될 줄 알았다.
그 애를 다시 보게 되기 전까진, 그런 줄로만 알았다.
모자를 푹, 눌러 쓰고 마스크를 끼고 학교에 들어선 성운의 뒤쪽에서 한 여자가 소리치며 달려왔다.
“야, 강서하!”
너무도 낯익은 이름에 성운의 발걸음이 멈칫거렸다. 간단한 세 글자에도 심장이 쿵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뒤에서 뛰어 오던 여자는 성운의 앞을 휙 지나치며 다시금 앞에 있는 여자의 이름을 불렀다.
“서하야, 같이 가!”
길게 찰랑거리는 머릿결에 끝이 살짝 웨이브 져 안으로 말려 있는 ‘강서하’라는 여자.
그녀가 뒤를 돌아보는 순간까지 설마 하는 마음이 절반이었다.
그런데, 뒤따라온 여자가 그녀의 팔짱을 끼자, 서하가 고개를 돌렸다.
“어, 은민아.”
겨우, 옆모습이었다. 눈이 살짝 접인 미소를 담은 얼굴은 겨우 찰나였다.
하지만, 성운의 심장이 먼저 반응하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을 두 눈으로 확인한 순간, 가슴 깊숙한 곳에서 시작된 떨림이 곧, 정신을 온통 헤집어놓았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사람이었다.
그 집을 떠나고 겨우 한 달이 지난 후, 그 집을 다시 찾아갔는데 그곳엔 이미 내가 아는 사람들은 없었다. 어디로 이사를 갔는지, 행방조차 알 수 없었다. 연락처도 모르는 탓에 페이스북, 인스타그램과 같은 SNS를 샅샅이 뒤졌지만 찾지 못했다.
그렇게 노력했던 꿈같은 그녀가 지금 내 눈앞에 8년 만에 꿈처럼 나타났다.
내가 지금 다가가도 되는 걸까.
8년이란 시간의 거리가 금세 채워질 수 있을까.
그의 그림자에 짙은 망설임이 들어섬과 동시에 그녀는 사람들 틈으로 사라져 버렸다.
온몸에 힘을 주고 바짝 긴장했던 성운의 몸에 맥없이 힘이 탁, 풀려 버렸다. 정처 없이 허공을 떠돌던 눈동자가 좀처럼 진정하지 못하고 흔들거렸다.
보통과 같이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일이 대단한 일인 것처럼 느껴졌다. 꽉 숨이 조인 듯 제 속에 밀려드는 답답함을 이겨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확연하게 떠오른 것.
언제부터인지 무뎌져서 마음 한쪽이 뻥 뚫렸던 시간의 태엽이 거꾸로 흐르기 시작했다.
열다섯, 사랑이란 감정도 제대로 몰랐던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갔다.
아까 두 눈에 가득 담았던 서하의 뒷모습이 텅 비었던 가슴 한편의 정점에 다다랐다.
어느 순간 마음 가득히 그녀의 얼굴이 만연해졌다.
같은 아픔을 공유했던, 내게 웃었으면 좋겠다고 그림을 그려 주었던.
그래, 넌 여전히 나의 첫사랑이었다.
지금껏 TV에 나오는 성운의 모습을, 화보나 포스터에 담겨 있는 모습을 봐 왔었다.
같은 세계에 살지만, 철저히 다른 세상의 사람 같았다.
닿을 듯 가까운데 닿지 않는 그런 사이.
사실, 8년이나 지난 일이라 그에겐 티끌만 한 기억이 되어 버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서하에겐 그의 존재가 선명했다.
언제나 꿈같은 존재로 제 곁에 머물러 있었으니까.
같은 학교에 입학하며 조금은 가까워졌을 거라 생각했는데, 역시나 먼 존재였다.
경영, 경제 계열과 건물과 예술과 건물은 학교의 끝과 끝인데다가 연예인인 그가 학교에 제대로 오지 않을게 불 보듯 뻔했다.
그래서 평소처럼 마음을 놓고 지냈다. 그 애를 찾으려는 노력이야, 예술관 쪽을 기웃거리는 것 외엔 하지 않았다.
보고 싶었지만, 볼 수 없으니까.
“서하야, 오늘 신입생 환영회 갈 거지?”
강의가 끝나고 걸어가는데, 은민이 옆에서 슬쩍 팔짱을 끼며 물어왔다. 봄기운이 완연한 캠퍼스엔 형형색색 꽃들이 피어 있었다.
널찍하고 유난히 봄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서한대 캠퍼스는 그저 걷기만 해도 기분 좋아지는 곳이었다.
서하가 입술을 다문 채 긴 고민에 휩싸이자, 은민이 단숨에 그녀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음흉하게 웃음 지었다.
“너 안 가면 후회해.”
“왜?”
“글쎄 있지, 경영과랑 연영과랑 신입생 환영회를 같은 데서 한다는 거야!”
“…….”
“그럼 누가 오겠어?”
성운이……?
“준이 오빠가 오지 않겠어? 가야겠어, 안 가야겠어!?”
환영회라는 건 결국 술을 마시게 된다는 이야기인지라 딱히 끌리지 않았다. 자율적으로 참여하되 신입생들은 웬만하면 와 줬으면 좋겠다는 과대의 말에도 흔들림이 없었다.
차라리, 집에 가서 두 발 뻗고 쉬는 게 훨씬 나으니까.
심지어 월요일 공강을 잡아 놔서 주말인 내일부터 쭉 3일이나 쉴 수 있었으니까.
굳이, 불금에 사람이 밀집한 곳에 가서 고생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그 애가 올 수도 있다니.
“걔도 올까?”
“누구?”
“공성운.”
“아, 걔도 복학했다더라. 너 참 은근히 걔 좋아하는 거 같단 말이야. 좋으면 맘껏 표현해도 돼. 오늘 걔 보러 가자.”
은민은 호쾌하게 웃으며 서하의 어깨를 두어 번 쳐댔다. 서하의 집엔 이미 성운의 사진이 꽤 많이 쌓여 있었지만 그걸 은민에겐 밝히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일찍이 눈치를 챈 것 같았다. 정준의 소식을 들고 오며 은근히 성운의 소식도 들고 와 주었기에 알 수 있었다.
서하가 떠름한 표정으로 멋쩍게 웃자, 은민이 이가 보이게 웃으며 팔을 쭉 끌어당겼다.
“가자! 가는 거다, 응?”
그렇게 물이 흐르듯 자연스레 고개를 끄덕거렸다.
바쁘니까, 오지 않을 수도 있지만 작은 기대라도 걸어보고 싶었다.
8년이 지난 넌,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사진으로 봐온 것처럼 진심이 담긴 웃음을 짓고 있을까.
그래, 그냥 궁금한 건.
넌 그동안 잘 지냈을까.
바로 이어서 교양이 있다는 은민은 손을 흔들며 멀어졌다.
인간과 사회를 저가 왜 신청했는지 모르겠다며 한탄이 섞인 소리를 내뱉다가도 그래도 출석만 하면 학점이 잘 나오는 수업으로 소문이 파다하다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밝은 기운을 내뿜던 은민이 곁에서 사라지고, 서하 또한 아직 남은 전공 수업에 가려고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A관에서 B관으로 넘어가는 하늘 다리를 걷다가 촥 펼쳐진 봄 하늘에 시선을 빼앗겼다.
선명한 파란 하늘에 누군가 장식이라도 해놓은 것처럼 구름 두 개가 동그랗게 멋을 더하고 있었다.
“예쁘다…….”
강의실에 일찍 도착해 봤자, 멍하니 정면만 바라볼 걸 알았기에 딱 맞춰 가는 게 낫겠다 싶어 아예 난간에 팔을 기댔다.
청명하게 물든 하늘을 본격적으로 구경하려 눈동자를 멈춘 순간 팔 안쪽에 들고 있던 물통이 툭, 떨어졌다.
물이 반쯤 남은 플라스틱 통을 주우려 발을 쭉 뻗었는데 손이 닿기 전에 무심코 물통을 발로 뻥 차버렸다.
아차!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재빨리 물병을 짚으려 데구루루 굴러가는 물통을 졸졸 쫓았다. 그런데 물통이 누군가의 신발 앞에서 멈춰 섰다.
본의 아니게 누군가에게 차버린 꼴이 된 것만 같아 서하는 곧바로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죄송…….”
아니, 사과하려다 말았다. 물병을 주우려 무릎을 굽혀 앉은 서하의 시야에 담긴 누군가의 얼굴 때문에 사과를 끝까지 이을 수 없었다.
그 누군가는 똑같이 무릎을 굽혀 앉으며 서하가 미처 잡지 못한 물통을 주워들었다.
“네 거야?”
당연한 물음에 서하가 고개를 느릿하게 끄덕거렸다. 그런 와중에도 눈동자는 그에게 멈춰 있었다. 그를 본 순간 시간의 흐름은 다시금 뒤틀렸다.
마치, 열다섯의 그 순간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부드럽고 선한 눈매는 여전했고 통통하던 볼살이 없어져 날렵한 턱선은 그의 얼굴에 남자다움을 더했다.
사진으로도 예상은 했었지만, 생각보다 훨씬 듬직한 어깨와 키를 가지고 있었다.
잔잔한 미성이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그의 음성은 서하의 귓가에 뚜렷하게 차올랐다.
“잘…… 지냈어?”
고개를 살짝 오른쪽으로 기울이며 말끝을 올린 그는 인사조차 없이 사라져 버렸던, 8년 전의 그 공성운이었다.
이게 어떤 기분인지 말로 형용할 수가 없어 서하는 제 입술을 꾹 다물어 버렸다.
속 깊은 곳에서 또다시 시작된 알 수 없는 메슥거림이 목 안쪽을 타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왈칵, 쏟아질 뻔한 눈물을 입술을 꽉 깨물며 버텨냈다. 성운의 얼굴을 마주하니, 그때의 그 감정이 되살아났다.
간지러운 두근거림, 설렘 가득한 떨림.
깊이 있는 눈동자에 서린 아픔이 서하의 적갈색 눈동자에 고스란히 닿았다.
오묘하게 일그러지는 서하의 표정에 성운의 얼굴엔 미비한 동요가 생겨 났다.
두 눈에 붉은 기운을 가득 담고 저를 보는 그녀에게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내가 많이 보고 싶었나?”
그 찰나, 8년이란 시간이 무색해질 만큼 시간은 거꾸로 흘렀다.
그때의 가짜 웃음을 한가득 담은 성운의 얼굴은 세월의 흐름에 무뎌지긴커녕 더욱 선명한 슬픔이 갇혀 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떠난 후, 단 한 번도 날 찾지 않았을 그가 미운데도.
그때의 그 감정이 생각났다.
생기 없던 내 세상에 먼저 발을 디딘 단 하나의 붉은색.
스물셋의 너와 내가, 열다섯의 너와 내가 된 것처럼.
* * *
서하를 만나기 전 2월의 어느 날, 서한 대학교의 입학식이 있는 날이었다.
성운은 집을 나서며 한 개의 메시지를 받았다.
<오늘 꼭 와야 된다. 너 꼭 온다고 약속했어.>
이 말을 어제도 하고 그제도 하더니, 당일인 오늘까지도 하고 있었다. 아주 진절머리가 날 지경이었다.
메시지를 보낸 이는 성운이 모델 일을 시작하게 된 때부터 줄곧 친분을 쌓아온 정준으로, 성운보다 두 살 위였다. 정준은 딱히 친구도 만들지 않고 언제나 성운에게 달라붙는 가깝지만, 부담스러운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또, 싫은 사람은 아니었다. 좋다면 좋은, 나쁘지 않은.
그런 그가 학교 홍보 책자 모델을 하더니, 입학식에서 동아리 홍보를 한단다.
연극 동아리 회장이 그에게 ‘그 유명한 얼굴 좀 써먹자’라며 시킨 걸 자신까지 끌고 들어갈 심산이란 걸 모르지 않았지만, 성운은 못 이기는 척 학교로 향했다.
어느 순간부터 익숙해진 일상이었다.
어린 시절, 많은 감정들이 무너지고 차오르던 시간 안에서 자신만의 접점을 찾아냈다. 아니, 그냥 마음의 상처가 썩어 문드러진 상태로 손도 댈 수 없었다.
상처가 많은 곳에 또, 상처가 생겨도 무뎌졌다. 친아빠의 집에서 더욱이 또렷해진 마음의 공허함이 쉽사리 채워지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웃고 지내지만.
누군가와 평범하게 지내지만.
마음 한쪽이 뻥 뚫린 채로 위태로운 시간의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이마저도 익숙해져 갔다.
아픔에 익숙해진다는 건 곧, 모든 일에 초연해진다는 것과 같았다.
그냥 그렇게 쭉 지내게 될 줄 알았다.
그 애를 다시 보게 되기 전까진, 그런 줄로만 알았다.
모자를 푹, 눌러 쓰고 마스크를 끼고 학교에 들어선 성운의 뒤쪽에서 한 여자가 소리치며 달려왔다.
“야, 강서하!”
너무도 낯익은 이름에 성운의 발걸음이 멈칫거렸다. 간단한 세 글자에도 심장이 쿵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뒤에서 뛰어 오던 여자는 성운의 앞을 휙 지나치며 다시금 앞에 있는 여자의 이름을 불렀다.
“서하야, 같이 가!”
길게 찰랑거리는 머릿결에 끝이 살짝 웨이브 져 안으로 말려 있는 ‘강서하’라는 여자.
그녀가 뒤를 돌아보는 순간까지 설마 하는 마음이 절반이었다.
그런데, 뒤따라온 여자가 그녀의 팔짱을 끼자, 서하가 고개를 돌렸다.
“어, 은민아.”
겨우, 옆모습이었다. 눈이 살짝 접인 미소를 담은 얼굴은 겨우 찰나였다.
하지만, 성운의 심장이 먼저 반응하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을 두 눈으로 확인한 순간, 가슴 깊숙한 곳에서 시작된 떨림이 곧, 정신을 온통 헤집어놓았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사람이었다.
그 집을 떠나고 겨우 한 달이 지난 후, 그 집을 다시 찾아갔는데 그곳엔 이미 내가 아는 사람들은 없었다. 어디로 이사를 갔는지, 행방조차 알 수 없었다. 연락처도 모르는 탓에 페이스북, 인스타그램과 같은 SNS를 샅샅이 뒤졌지만 찾지 못했다.
그렇게 노력했던 꿈같은 그녀가 지금 내 눈앞에 8년 만에 꿈처럼 나타났다.
내가 지금 다가가도 되는 걸까.
8년이란 시간의 거리가 금세 채워질 수 있을까.
그의 그림자에 짙은 망설임이 들어섬과 동시에 그녀는 사람들 틈으로 사라져 버렸다.
온몸에 힘을 주고 바짝 긴장했던 성운의 몸에 맥없이 힘이 탁, 풀려 버렸다. 정처 없이 허공을 떠돌던 눈동자가 좀처럼 진정하지 못하고 흔들거렸다.
보통과 같이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일이 대단한 일인 것처럼 느껴졌다. 꽉 숨이 조인 듯 제 속에 밀려드는 답답함을 이겨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확연하게 떠오른 것.
언제부터인지 무뎌져서 마음 한쪽이 뻥 뚫렸던 시간의 태엽이 거꾸로 흐르기 시작했다.
열다섯, 사랑이란 감정도 제대로 몰랐던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갔다.
아까 두 눈에 가득 담았던 서하의 뒷모습이 텅 비었던 가슴 한편의 정점에 다다랐다.
어느 순간 마음 가득히 그녀의 얼굴이 만연해졌다.
같은 아픔을 공유했던, 내게 웃었으면 좋겠다고 그림을 그려 주었던.
그래, 넌 여전히 나의 첫사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