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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너도 싫지가 않아
붙잡지 않으면 부서져 버릴 것 같았던 그 애를 붙잡았는데 다음 날이 되니 머리가 깨질 것만 같았다.
서하는 흐릿한 시야에서 보이기 시작한 두 남자의 얼굴을 겨우 바라보았다.
아빠와 성운의 얼굴이었다.
“아저씨 출근하셔야 하니까, 제가…….”
뭐라고 하는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그저, 몸 안에서 활활 타오르는 불꽃이 쉽사리 진정이 되지 않아 정신이 아득해졌다.
“해열제는 먹였으니 무슨 일이…….”
정장재킷을 들고 있던 설준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겨우 옮기며 성운의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돌아와 줘서 고맙구나.”
이 말은 어제도 성운에게 했던 말이었지만 설준은 틈이 나면 성운에게 고맙다는 말을 건넸다.
갈 곳 없는 저를 보듬어 준 건 설준, 서하였기에 고마워할 사람은 성운이었지만 그 누구도 고마워해야 한다 눈치주지 않았다.
겨우 2주였다.
함께한지 2주가 된 사람들이 내게 보이는 미소와 행동엔 진심이 어려 있었다.
“감사합니다…….”
방에서 다급하게 나가려던 설준의 발걸음을 성운의 작은 목소리가 붙잡았다.
새벽부터 열이 오른 서하때문에 잠을 설쳐, 피곤한 얼굴을 하고 출근을 하려던 그의 얼굴에 설핏 미소가 떠올랐다.
“성운아. 네가 편히 지냈으면 좋겠구나.”
“…….”
“오늘 같은 날 서하 옆에 있어 줘서 고맙고.”
방학전이라 성운이 학교에 가야하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이미 아까 1차전을 끝낸 상태였다.
학교에 가라는 설준의 말을 제대로 듣지 않았다. 별수 없는 일이었다. 친구였던 혜선이도 그랬으니까.
성운의 얼굴엔 고집이 있어 보였다. 한사코 출근을 하라고 등을 떠밀던 모습에서 성운의 엄마인 혜선의 얼굴이 겹쳐졌다.
“오늘은 야근 안하고 일찍 올 테니, 함께 저녁 먹자.”
끝없이 다정한 음성이 성운의 코끝을 찡하게 울렸다. 아무것도 아닌 이 순간에 괜스레 가슴한쪽이 벅차올라 고개를 세차게 끄덕거렸다.
설준이 옅은 미소를 띤 채 방에서 나가자, 성운은 새근거리는 서하의 숨소리만이 가득한 이 방의 정취를 한가득 들이마셨다.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시간동안 지낸 낯선 공간.
낯선 시간. 그리고 낯선 현실.
이 모든 게 싫지가 않았다.
성운은 뒤편에서 열을 겨우 이겨내고 있는 서하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너도 싫지가 않아.”
미간을 깊게 모은 채 두 눈을 감고 있는 그 애의 모습에, 성운 또한 똑같이 미간을 모았다.
“그런데, 네가 아픈 건 싫다.”
느릿하게 검지를 들어올려, 잔뜩 찡그려진 서하의 미간을 꾹 눌렀다. 성운은 손끝에서 퍼지는 뜨거운 감촉에 잘게 움찔거렸다.
이 높은 열이 행여, 그녀를 잡아먹진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측은한 시선으로 열에 들뜬 서하의 얼굴을 멀거니 바라보다가 침대위에 가지런히 놓인 서하의 손위에 제 손을 포갰다.
“그러니까 빨리 나아.”
“…….”
“연극 보러 온다고 그랬잖아.”
“…….”
“아프지 마.”
* * *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흐릿한 시야로 두 남자를 본 후로, 멈춰 버린 제 시간 안에서 줄곧 잠만 잤었다.
밝은 빛이 눈꺼풀을 두드리는 순간, 서하의 눈이 느릿하게 떠졌다.
코를 스치는 알싸한 알코올 향이 정신을 번뜩 뜨이게 해 주었다. 필름에 사진이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처럼 눈앞의 현실이 또렷하게 자취를 드러냈다.
병원……?
팔을 들어 올리며 병원 침대를 짚자, 연결된 링거줄이 걸리적거렸다. 아득해졌던 정신에 병원에 옮겨지는 것까지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했다.
건조함에 바짝 말라 오는 입술을 맞물리며 눈동자를 굴리고 있는 사이, 병실 침대 앞쪽 커튼이 사락, 열렸다.
“서하야!”
설준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녀에게 한달음에 다가왔다. 좀처럼 생기를 잃은 듯한 얼굴색이 마음에 걸렸지만 두 눈을 마주하고 있다는 게 기쁠 따름이었다.
설준은 서하를 제 품에 가득 그러안으며 그녀의 짧은 단발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깨어나서 다행이다. 네가 많이 아팠었어.”
“…….”
“병원이라 놀란 건 아니지?”
멍한 시선으로 설준을 올려다보고 있는 딸의 얼굴에 그가 걱정 가득한 음성으로 그녀를 보듬었다.
서하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할 말이 있는 듯 몇 번 달싹거리다가 푹 잠겨 있던 목소리를 간신히 흘려 냈다.
“아빠…….”
“응?”
“오늘…… 무슨 요일이에요?”
불안감은 곧 이 공간에 꽉 들어찼다. 잠에 들어 있다가, 깨어난 것뿐인데 꽤 많은 시간이 흐른 것만 같았다.
온몸에 힘이 쭉, 빠져 있었지만 알고 싶은 게 있었다. 월요일쯤 잠이 들었는데 설마, 주말은 아니겠지.
아빠가 월차라도 내고 병원에 온 거겠지. 아니면, 지금이 화요일 밤이라던가.
“토요일인데, 왜?”
“토요일이요……?”
“응, 너 방학도 했어. 좋지?”
설준은 서하의 눈치를 살피며 슬쩍 장난이 섞인 말을 건넸다.
그의 말에 옅은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서하의 얼굴엔 아쉬움이 짙게 묻어 났다.
연극에 못 갔어.
꼭 오라고 했는데.
꼭 가고 싶었는데.
“아, 그리고…….”
설준이 잠시 말을 멈췄다. 망설이는 모습에 서하가 시선을 집중하자, 이내 그의 표정엔 난감한 빛이 역력해졌다.
“성운이가 떠났어. 성운이네 아버지가 데리러 오셨거든.”
“어, 언제요!?”
“오늘 아침에.”
아빠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서하의 눈동자가 깊게 일렁였다.
똑 떨어지는 단발머리로 얼굴을 가리며 고개를 숙인 서하는 물끄러미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5일이란 시간이 서하의 인생에서 댕강, 잘려 버렸는데.
앞으로 더욱 친하게 지내고 싶었던 그가.
열에 들뜬 손을 꼭 잡아주던 그가.
아직도 그 따스함이 짙게 남아 있는데, 그는 이미 떠난 후였다.
* * *
팔랑.
서하의 손끝에서 얇은 종이 한 장이 흔들거렸다. 제 방 안의 공기를 가르며 눈에 안착한 새하얀 종이는 정돈된 필체를 담고 있었다.
그가 떠났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 집에 오자마자 성운이 지내던 방을 들여다보았다.
아침까지 머물렀을 그의 온기가 피부에 스며들어 한참이나 그곳을 서성거리다가 제 방으로 돌아와 보니 종이 한 장이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앞으로의 네가 외롭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의 마지막 인사였다.
그 애와 깊은 관계는 아니었다. 알게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은데다가 서로에 대해 아는 거라곤 같은 아픔을 가졌다는 사실밖에 없었다.
그 애가 무슨 음식을 좋아하는지, 또 어떤 색깔을 좋아하는지.
평소에 읽는 책은 대체 무슨 내용인지, 제일 친한 친구는 있는지. 그 어떤 것도 알지 못했다.
앞으로 알아야 할 것들이 태산이었다.
그런데, 성운은 나무 밑에 잠시 머물러 기분 좋게 만들어 주는 바람처럼 어느덧 사라져 버렸다.
이 집엔 그의 흔적만이 진하게 남아 있었다. 그가 쓰던 칫솔도, 잠옷도, 책상 위 손목시계도 모든 게 그대로였다.
모든 게 그대로인데 그 애만 없다.
언제고, 앞으로도 혼자였으면 좋았을까.
정말 스쳐 지나가는 정도로 그와 함께 지낸 시간들이 앞으로도 이어지지 않는다 생각하니 벌써부터 외로웠다.
따뜻한 방 안에서 이유 모를 한기가 품 안에 자리 잡고 요동치기 시작했다.
“제대로, 인사도 안 하고…….”
아쉬움이 다분히 묻은 음성은 기운 없이 땅바닥을 향했다. 기분 좋게 파도가 일던 바다에 삽시간에 침울함이 찾아왔다.
아빠를 따라 떠났다는 성운에게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
그 애는 휴대폰을 잃어버린 상태로 우리 집에 왔고, 같이 지내는 시간 내내 거의 함께했기에 딱히 연락의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고로, 서하는 그 애의 나이가 열다섯이라는 것과 남자라는 것, 아빠의 친구 아들이라는 것, 그리고 이름이 공성운이라는 것 외엔 아는 것이 없었다.
조금은 가까웠다고 생각했던 사이였는데, 막상 멀어져 보니 역시나 서로를 모르는 남남이었다.
“외롭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잖아. 그럼 넌 이제 외롭지 않고 잘 살아가게 된 걸까. 그랬으면 좋겠는데…….”
의미 없는 혼잣말만이 허공을 맴돌았다.
* * *
성운의 얼굴을 다시 보게 된 건 그 후로 5년이나 지난 후였다.
재수생 생활을 하느라, 학원에서 온종일 시간을 보내던 때였는데, 재수 생활을 함께하며 친해진 은민이 서하에게 휴대폰을 들이밀었던 그 순간이었다.
“야야, 서하야. 얘 좀 봐!”
은민의 결 좋은 머리칼이 움직임에 휘날렸다.
다급하게 다가온 그녀는 휴대폰 액정 속 한 남자를 손으로 가리키며 흥분한 어투를 구사했다.
“이 오빠가 정준이란 사람인데, 요즘 엄청 핫한 모델이래! 진짜 완전 내 스타일이야!”
은민이 가리킨 남자는 눈꺼풀에 깊게 곡선이 져, 그윽한 눈을 가진 분위기 있는 모델이었지만, 서하의 눈은 그 바로 옆에 자리한 남자에게 머물렀다.
옆모습만 나왔지만 알 수 있었다. 건조한 표정인데도 밝은 기운을 머금은 선한 눈매에 준수한 외모를 가진 그가 공성운이라고.
서하의 동공이 숨이 멎은 것처럼 똑, 멈춰 버리자 그걸 캐치한 은민의 입에서 곧바로 그의 이름이 쏟아졌다.
“아, 걔는 공성운이라고. 걔도 요즘 핫한 모델인데, 잘생기긴 했지?”
“…….”
“그래도 난 여기, 정준! 준이 오빠가 내 취향이야.”
“…….”
“둘이 같은 학교라던데, 우리 목표로 하는 서한대 연영과래. 우리의 목표는 결국, 서한대인 것인가!”
크, 하고 은민의 입술 사이에서 쏟아지는 감탄사는 마치 이곳이 술자리인 양 착각을 일게 만들었다.
대한민국의 탑이라 불리 우는 서한대에서도 가장 들어가기 힘들다는 경영과가 서하와 은민의 목표였다.
목표로 한 대학에 다니고 있다는 그의 소식은 은민이 발 빠르게 전해 주었다.
“둘 다 내년에 군대 간다더라. 우리 입학하면 학교에 없단 말이지.”
아쉬움이 한가득 들어찬 은민의 말은 실은, 아쉬울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우린 그해 수능에서도 낙방했고, 결국 그 두 남자가 제대를 하고 다시 학교에 돌아올 때가 돼서야 합격의 기쁨을 맞이할 수 있었다.
서한대 경영과에 은민과 함께 입학할 때의 나이는 남들보다 많이 늦은 스물 셋이었다.
붙잡지 않으면 부서져 버릴 것 같았던 그 애를 붙잡았는데 다음 날이 되니 머리가 깨질 것만 같았다.
서하는 흐릿한 시야에서 보이기 시작한 두 남자의 얼굴을 겨우 바라보았다.
아빠와 성운의 얼굴이었다.
“아저씨 출근하셔야 하니까, 제가…….”
뭐라고 하는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그저, 몸 안에서 활활 타오르는 불꽃이 쉽사리 진정이 되지 않아 정신이 아득해졌다.
“해열제는 먹였으니 무슨 일이…….”
정장재킷을 들고 있던 설준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겨우 옮기며 성운의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돌아와 줘서 고맙구나.”
이 말은 어제도 성운에게 했던 말이었지만 설준은 틈이 나면 성운에게 고맙다는 말을 건넸다.
갈 곳 없는 저를 보듬어 준 건 설준, 서하였기에 고마워할 사람은 성운이었지만 그 누구도 고마워해야 한다 눈치주지 않았다.
겨우 2주였다.
함께한지 2주가 된 사람들이 내게 보이는 미소와 행동엔 진심이 어려 있었다.
“감사합니다…….”
방에서 다급하게 나가려던 설준의 발걸음을 성운의 작은 목소리가 붙잡았다.
새벽부터 열이 오른 서하때문에 잠을 설쳐, 피곤한 얼굴을 하고 출근을 하려던 그의 얼굴에 설핏 미소가 떠올랐다.
“성운아. 네가 편히 지냈으면 좋겠구나.”
“…….”
“오늘 같은 날 서하 옆에 있어 줘서 고맙고.”
방학전이라 성운이 학교에 가야하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이미 아까 1차전을 끝낸 상태였다.
학교에 가라는 설준의 말을 제대로 듣지 않았다. 별수 없는 일이었다. 친구였던 혜선이도 그랬으니까.
성운의 얼굴엔 고집이 있어 보였다. 한사코 출근을 하라고 등을 떠밀던 모습에서 성운의 엄마인 혜선의 얼굴이 겹쳐졌다.
“오늘은 야근 안하고 일찍 올 테니, 함께 저녁 먹자.”
끝없이 다정한 음성이 성운의 코끝을 찡하게 울렸다. 아무것도 아닌 이 순간에 괜스레 가슴한쪽이 벅차올라 고개를 세차게 끄덕거렸다.
설준이 옅은 미소를 띤 채 방에서 나가자, 성운은 새근거리는 서하의 숨소리만이 가득한 이 방의 정취를 한가득 들이마셨다.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시간동안 지낸 낯선 공간.
낯선 시간. 그리고 낯선 현실.
이 모든 게 싫지가 않았다.
성운은 뒤편에서 열을 겨우 이겨내고 있는 서하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너도 싫지가 않아.”
미간을 깊게 모은 채 두 눈을 감고 있는 그 애의 모습에, 성운 또한 똑같이 미간을 모았다.
“그런데, 네가 아픈 건 싫다.”
느릿하게 검지를 들어올려, 잔뜩 찡그려진 서하의 미간을 꾹 눌렀다. 성운은 손끝에서 퍼지는 뜨거운 감촉에 잘게 움찔거렸다.
이 높은 열이 행여, 그녀를 잡아먹진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측은한 시선으로 열에 들뜬 서하의 얼굴을 멀거니 바라보다가 침대위에 가지런히 놓인 서하의 손위에 제 손을 포갰다.
“그러니까 빨리 나아.”
“…….”
“연극 보러 온다고 그랬잖아.”
“…….”
“아프지 마.”
* * *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흐릿한 시야로 두 남자를 본 후로, 멈춰 버린 제 시간 안에서 줄곧 잠만 잤었다.
밝은 빛이 눈꺼풀을 두드리는 순간, 서하의 눈이 느릿하게 떠졌다.
코를 스치는 알싸한 알코올 향이 정신을 번뜩 뜨이게 해 주었다. 필름에 사진이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처럼 눈앞의 현실이 또렷하게 자취를 드러냈다.
병원……?
팔을 들어 올리며 병원 침대를 짚자, 연결된 링거줄이 걸리적거렸다. 아득해졌던 정신에 병원에 옮겨지는 것까지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했다.
건조함에 바짝 말라 오는 입술을 맞물리며 눈동자를 굴리고 있는 사이, 병실 침대 앞쪽 커튼이 사락, 열렸다.
“서하야!”
설준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녀에게 한달음에 다가왔다. 좀처럼 생기를 잃은 듯한 얼굴색이 마음에 걸렸지만 두 눈을 마주하고 있다는 게 기쁠 따름이었다.
설준은 서하를 제 품에 가득 그러안으며 그녀의 짧은 단발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깨어나서 다행이다. 네가 많이 아팠었어.”
“…….”
“병원이라 놀란 건 아니지?”
멍한 시선으로 설준을 올려다보고 있는 딸의 얼굴에 그가 걱정 가득한 음성으로 그녀를 보듬었다.
서하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할 말이 있는 듯 몇 번 달싹거리다가 푹 잠겨 있던 목소리를 간신히 흘려 냈다.
“아빠…….”
“응?”
“오늘…… 무슨 요일이에요?”
불안감은 곧 이 공간에 꽉 들어찼다. 잠에 들어 있다가, 깨어난 것뿐인데 꽤 많은 시간이 흐른 것만 같았다.
온몸에 힘이 쭉, 빠져 있었지만 알고 싶은 게 있었다. 월요일쯤 잠이 들었는데 설마, 주말은 아니겠지.
아빠가 월차라도 내고 병원에 온 거겠지. 아니면, 지금이 화요일 밤이라던가.
“토요일인데, 왜?”
“토요일이요……?”
“응, 너 방학도 했어. 좋지?”
설준은 서하의 눈치를 살피며 슬쩍 장난이 섞인 말을 건넸다.
그의 말에 옅은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서하의 얼굴엔 아쉬움이 짙게 묻어 났다.
연극에 못 갔어.
꼭 오라고 했는데.
꼭 가고 싶었는데.
“아, 그리고…….”
설준이 잠시 말을 멈췄다. 망설이는 모습에 서하가 시선을 집중하자, 이내 그의 표정엔 난감한 빛이 역력해졌다.
“성운이가 떠났어. 성운이네 아버지가 데리러 오셨거든.”
“어, 언제요!?”
“오늘 아침에.”
아빠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서하의 눈동자가 깊게 일렁였다.
똑 떨어지는 단발머리로 얼굴을 가리며 고개를 숙인 서하는 물끄러미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5일이란 시간이 서하의 인생에서 댕강, 잘려 버렸는데.
앞으로 더욱 친하게 지내고 싶었던 그가.
열에 들뜬 손을 꼭 잡아주던 그가.
아직도 그 따스함이 짙게 남아 있는데, 그는 이미 떠난 후였다.
* * *
팔랑.
서하의 손끝에서 얇은 종이 한 장이 흔들거렸다. 제 방 안의 공기를 가르며 눈에 안착한 새하얀 종이는 정돈된 필체를 담고 있었다.
그가 떠났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 집에 오자마자 성운이 지내던 방을 들여다보았다.
아침까지 머물렀을 그의 온기가 피부에 스며들어 한참이나 그곳을 서성거리다가 제 방으로 돌아와 보니 종이 한 장이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앞으로의 네가 외롭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의 마지막 인사였다.
그 애와 깊은 관계는 아니었다. 알게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은데다가 서로에 대해 아는 거라곤 같은 아픔을 가졌다는 사실밖에 없었다.
그 애가 무슨 음식을 좋아하는지, 또 어떤 색깔을 좋아하는지.
평소에 읽는 책은 대체 무슨 내용인지, 제일 친한 친구는 있는지. 그 어떤 것도 알지 못했다.
앞으로 알아야 할 것들이 태산이었다.
그런데, 성운은 나무 밑에 잠시 머물러 기분 좋게 만들어 주는 바람처럼 어느덧 사라져 버렸다.
이 집엔 그의 흔적만이 진하게 남아 있었다. 그가 쓰던 칫솔도, 잠옷도, 책상 위 손목시계도 모든 게 그대로였다.
모든 게 그대로인데 그 애만 없다.
언제고, 앞으로도 혼자였으면 좋았을까.
정말 스쳐 지나가는 정도로 그와 함께 지낸 시간들이 앞으로도 이어지지 않는다 생각하니 벌써부터 외로웠다.
따뜻한 방 안에서 이유 모를 한기가 품 안에 자리 잡고 요동치기 시작했다.
“제대로, 인사도 안 하고…….”
아쉬움이 다분히 묻은 음성은 기운 없이 땅바닥을 향했다. 기분 좋게 파도가 일던 바다에 삽시간에 침울함이 찾아왔다.
아빠를 따라 떠났다는 성운에게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
그 애는 휴대폰을 잃어버린 상태로 우리 집에 왔고, 같이 지내는 시간 내내 거의 함께했기에 딱히 연락의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고로, 서하는 그 애의 나이가 열다섯이라는 것과 남자라는 것, 아빠의 친구 아들이라는 것, 그리고 이름이 공성운이라는 것 외엔 아는 것이 없었다.
조금은 가까웠다고 생각했던 사이였는데, 막상 멀어져 보니 역시나 서로를 모르는 남남이었다.
“외롭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잖아. 그럼 넌 이제 외롭지 않고 잘 살아가게 된 걸까. 그랬으면 좋겠는데…….”
의미 없는 혼잣말만이 허공을 맴돌았다.
* * *
성운의 얼굴을 다시 보게 된 건 그 후로 5년이나 지난 후였다.
재수생 생활을 하느라, 학원에서 온종일 시간을 보내던 때였는데, 재수 생활을 함께하며 친해진 은민이 서하에게 휴대폰을 들이밀었던 그 순간이었다.
“야야, 서하야. 얘 좀 봐!”
은민의 결 좋은 머리칼이 움직임에 휘날렸다.
다급하게 다가온 그녀는 휴대폰 액정 속 한 남자를 손으로 가리키며 흥분한 어투를 구사했다.
“이 오빠가 정준이란 사람인데, 요즘 엄청 핫한 모델이래! 진짜 완전 내 스타일이야!”
은민이 가리킨 남자는 눈꺼풀에 깊게 곡선이 져, 그윽한 눈을 가진 분위기 있는 모델이었지만, 서하의 눈은 그 바로 옆에 자리한 남자에게 머물렀다.
옆모습만 나왔지만 알 수 있었다. 건조한 표정인데도 밝은 기운을 머금은 선한 눈매에 준수한 외모를 가진 그가 공성운이라고.
서하의 동공이 숨이 멎은 것처럼 똑, 멈춰 버리자 그걸 캐치한 은민의 입에서 곧바로 그의 이름이 쏟아졌다.
“아, 걔는 공성운이라고. 걔도 요즘 핫한 모델인데, 잘생기긴 했지?”
“…….”
“그래도 난 여기, 정준! 준이 오빠가 내 취향이야.”
“…….”
“둘이 같은 학교라던데, 우리 목표로 하는 서한대 연영과래. 우리의 목표는 결국, 서한대인 것인가!”
크, 하고 은민의 입술 사이에서 쏟아지는 감탄사는 마치 이곳이 술자리인 양 착각을 일게 만들었다.
대한민국의 탑이라 불리 우는 서한대에서도 가장 들어가기 힘들다는 경영과가 서하와 은민의 목표였다.
목표로 한 대학에 다니고 있다는 그의 소식은 은민이 발 빠르게 전해 주었다.
“둘 다 내년에 군대 간다더라. 우리 입학하면 학교에 없단 말이지.”
아쉬움이 한가득 들어찬 은민의 말은 실은, 아쉬울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우린 그해 수능에서도 낙방했고, 결국 그 두 남자가 제대를 하고 다시 학교에 돌아올 때가 돼서야 합격의 기쁨을 맞이할 수 있었다.
서한대 경영과에 은민과 함께 입학할 때의 나이는 남들보다 많이 늦은 스물 셋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