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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첫사랑의 두근거림
쏴아아아.
귓가를 경쾌하게 울려대는 빗소리에, 서하의 속눈썹이 꿈틀거렸다.
일요일 아침부터 듣는 소음에 가까운 빗소리는 자연히 미간을 찡그리게 만들었다.
“아, 아직 졸린데…….”
깨어 버린 정신을 어떻게든 잠재우려 두 눈을 질끈 감았지만 곧, 눈동자에 선명히 제 방이 담겼다.
두 눈을 끔뻑, 끔뻑거리다가 흐드러지게 하품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꼬리가 긴 눈가를 비비적거리며 방문을 여니, 사색이 된 아빠의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다.
“아빠…….”
시선을 한쪽으로 기울이며 설준을 부르자, 거실을 우왕좌왕 배회하던 그가 서하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아, 서하야. 깼니?”
“응. 왜 그래요, 아빠?”
“혹시 말이야, 성운이가 오늘 어디 간다고 따로 말했었니?”
“네? 아뇨.”
설준의 낯빛에서 좀처럼 조급함이 지워지지 않았다. 난감하다는 듯 머리를 한껏 흐트러트렸다. 토요일엔 늦잠을 자고, 일요일이면 아침부터 집안일을 시작하던 아빠의 평소 모습과는 확연히 달랐다.
자꾸만 성운의 방을 들락날락하며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리는 게 서하의 눈엔 이상하게만 보였다.
“아빠……?”
다시 한번 서하의 목소리가 공간을 울리자, 설준이 다급했던 발걸음을 멈추며 시선을 마주했다.
“아무래도, 성운이가 집을 나간 거 같아.”
“네……?”
그 애가 왜? 갑자기?
“휴대폰도 잃어버린 상태라, 연락할 수 있는 방법이…… 아무것도 없네.”
“집을 나갔다니요? 자, 잠깐 어디 간 거일 수도 있잖아요!”
이렇게 갑자기 집을 나가버린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잖아.
서하가 차분히 숨을 고르며 말했지만, 알 수 없는 불안감은 해소되지 않았다.
그리고 곧, 들려온 설준의 목소리에 서하의 불안감이 더욱이 몸집을 키웠다.
“방에 쪽지를 남겨 놨어, 그동안 감사했다고.”
“…….”
“내일 학교로 데리러 가면 되긴 하는데……. 서하야.”
“응?”
“우리 딸이 짐작 가는 곳은 없을까? 성운이가 갈만한 곳…….”
아빠는 항상 이랬다. 평소에도 다정한 사람이긴 하지만, 걱정이라는 걸 안게 되면 안절부절못했다.
지금도 급하게 말을 쏟아 내며 시선을 좀처럼 한곳에 두지 못하는 걸 보면 알 수 있었다.
오늘 온종일 걱정하겠구나.
아빠의 말마따나, 그 앤 지금 돈도, 휴대폰도 없는 상태일 텐데 대체, 어디를 간 걸까.
아까부터 귓가를 울려 대던 세찬 빗소리가 어째, 더 크게 들려 오는 것만 같았다.
세찬 빗방울은 거실 창가를 톡톡 두들겼고, 성운이 없는 텅 빈 공간이 눈에 담기자, 서하의 손끝이 살짝 움찔거렸다.
“아빠, 내가 찾아볼게요.”
“짐작 가는 데가 있어?”
“아니, 근데 일단 나가 볼래.”
서하는 대번에 방으로 향해 베이지색 패딩을 챙겼다.
“어디를 가겠다는 거야, 아빠가 나가볼 테니까. 집에 있어.”
“내가 갈래요!”
걱정 어린 설준의 말에도 서하의 어조는 단호했다.
순식간에 현관으로 향한 그녀는 뒤편에서 들리는 설준의 나가지 말란 목소리도 무시해 버렸다.
노란 우산을 챙기며, 운동화 끈을 질끈 동여 맸다.
나한텐, 인사도 없이 나갔다 그거지?
연극 보러 오라고 할 땐 언제고, 집을 나갔어?
서운함은 원동력이 되어 서하의 두 발에 속도를 더했다.
투둑, 투둑, 비 내리는 소리가 얇은 우산 위를 뭉툭하게 울려 댔다. 계획 없이 나온 탓에 전혀, 예상이 되지 않았지만 서하는 일단 아파트를 빠져 나갔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학교로 가는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느낌이 오묘하다. 단 한 번도 직감이란 게 맞아본 적 없었더랬다. 시험에서 찍기를 감행하면 다 틀려 대고, 길을 찾다가 갈림길을 마주해서 선택한 길은 미아가 되는 지름길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다르다. 이 오묘한 기운이 그곳이 맞다고 말해 주고 있었다.
철퍽, 철퍽.
운동화가 비에 젖은 땅에 맞닿는 마찰음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신고 있던 흰 양말에 검은 얼룩이 피어올랐을 때쯤, 서하는 서서히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드디어 칸막이가 설치된 투명한 버스 정류장 의자에서 익숙한 뒷모습을 발견했다.
처음으로 직감이라는 게 들어맞았다. 인사도 없이 떠나려 했던 서운함을 꾹꾹, 눌러 담아 소리쳤다. 빗소리에 묻히지 않게, 꼭 그 애가 들을 수 있게.
“야, 공성운!”
하루도 채 되지 않았는데, 고개를 돌린 그의 얼굴은 꽤 반갑게 느껴졌다.
“너, 어디가!”
* * *
누군가에겐 일반적인 게 남에겐 일반적이지 않은 것.
내가 엄마와 둘이 사는 게 남들에겐 일반적이지 않았다. 친한 친구들 모두, 정상적인 가정환경에서 지냈고 그 미묘한 외로움은 그 누구도 알아차려 주지 못했었다.
그런데 세상에 정말로 혼자가 되고 나서야 외로움을 알아주는 사람이 생겨났다.
“학원도 안 다니고, 학교랑 집만 왔다갔다했으면…… 너, 정말 외로웠겠다.”
함께 버스를 기다렸던 어느 날, 그 애가 대뜸 내게 했던 말이었다.
곱게 뻗은 눈썹을 측은하게 내리는 그 애의 얼굴이 파란하늘 아래서 선명하게 비쳤다.
“나는 그래도 학원도 다니고 그랬는데.”
거창하지 않은 말이었다. 어떻게 보면 누구에게나 들을 수 있는 보잘것없는 공감일 뿐이었다.
그런데, 이 여자아이. 강서하라는 이 여자애가 조금씩 내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네가 혼자 지냈다는 말을 들은 후로, 그 말이 꽤 오래 떠다녔어.”
“…….”
“내 머릿속에서…….”
“…….”
“지금의 넌, 그때의 너와 같은 상황이겠구나.”
그 애가 슬쩍, 눈을 피했다. 발음은 또박또박 내뱉으면서도 부끄러운지 입술을 작게 오므리는 모습에 무의식적으로 집중했다.
“네가, 많이 외롭겠구나.”
“…….”
“예전의 나처럼…….”
작고 동그란 얼굴에 저도 모르게 시선을 빼앗겼다. 그때의 난 외롭지만 외로움을 말할 상대가 없었다.
그리고 말해도 진심으로 공감해 주는 사람도 없었다.
내 앞으로의 외로움 또한 알아주는 사람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생각지도 못한 상대가 내게 위로를 건넨다.
“그때의 너와 지금의 너는 좀 외로울지라도…….”
“…….”
“앞으로의 너는 좀, 덜 외로웠으면 해서…….”
작고 여린 손이 성운의 몸 앞에 다가왔다. 잘 부탁한다는 의미로 건넨 악수 위에 떠오른 환한 미소는 손끝조차 움찔거리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 공간이 멈춰 버린 것처럼, 숨조차 멎어버린 것처럼 부드럽게 부서지는 음성을 듣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우리가 앞으로도 좋은 친구로 지내면 좋지 않을까?”
가슴 안쪽이 간질거렸다.
차디찬 겨울바람이 살결을 스치며 지나도, 그 바람에 눈이 시려도 차마 이 순간을 떨쳐 내기가 싫었다.
누군가와 함께하게 된 지금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서하가 멋쩍은 듯 웃으며 내밀었던 손을 그러쥐었다.
빨갛게 달아오른 손끝을 손바닥에 비벼보며, 괜스레 오지 않는 버스를 원망했다.
“아, 추운데 왜 이렇게 안 와.”
그게 어떤 감정인지 알 수 없어 성운은 끝까지 입 한번 벙긋거리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
갈 곳 없는 내가 무작정 집을 나온 지금.
미친 듯이 쏟아지기 시작하는 비마저 피할 곳이 없어 버스 정류장에 가만히 앉아있는 게 다였던 지금, 그 애의 음성이 귓가를 또렷하게 울렸다.
“야, 공성운!”
내 이름을 부르며, 그 애가 한달음에 코앞까지 다가왔다.
“너 어디가려고?”
“…….”
“나한테 연극 보러 오라 해 놓고, 인사도 없이 나가버리는 게 어디 있어?”
“…….”
“갈 곳도 없다면서! 근데 그렇게 나가버리면 어떡해……!”
“갈 곳은 있어.”
나 혼자 있는 곳.
“그래서 갈 거야, 이렇게 가 버릴 거냐고!?”
서하의 목소리가 빗소리와 섞여 들었다. 땅을 치고 오르는 물방울 소리가 더욱 거세지는 데도 눈동자에 또렷하게 차오른 그 애의 맑은 목소리는 정확하게 성운의 귓가에 닿았다.
“안 가면 안 돼?”
“…….”
“내가 아빠한테 잘 말해 볼게.”
“…….”
“너, 우리 집에서 지내게 해 달라고…….”
설준의 방 바로 옆에 위치한 서하의 방은 그다지 소음에 강한 편이 아니었다. 새벽녘 방안을 울려 성운의 마음조차 울려 버렸던 그의 목소리가 서하에게도 속절없이 들려왔었다.
통화 내용을 더 자세히 듣고 싶어, 방문을 슬쩍 열고 나가려던 찰나에 성운이 그곳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혼자 버티기 힘든 이 세상에 혼자 남겨진 기분은 대체 어떤 기분일까.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난 엄마는 없지만, 아빠는 있는데.
그 두 사람 모두가 없다는 현실을 알게 된 넌 괜찮을까.
그래서인지, 머리끝이 촉촉이 젖은 이 남자애가 안쓰러웠다.
그냥,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단 생각이 들었다.
벼랑 끝에 선, 이 애가 더욱이 위태로워지는 게 싫었다.
집에 혼자 있으면 공허한 그 기분으로, 내가 너무도 잘 아는 그 외로움의 시간으로 걸어가지 않았으면.
서하의 손끝을 얼음장 같은 바람이 계속해서 에워쌌다. 서서히 굳어져가던 손을 조금씩 움찔거리다가, 다시 한번 용기를 냈다.
이번엔 그에게 닿기를.
“네가 신경 쓰여. 이렇게 떠나지 않았으면 좋겠어.”
“…….”
“네가…… 외롭지 않았으면 좋겠어.”
성운의 귓가에 만연했던 빗소리는 이제 더는 들려 오지 않았다. 눈동자에 가득 담긴 서하의 얼굴만이 이 순간, 모든 것을 흐릿하게 만들었다.
그녀가 다시 한번 건넨 작은 손을 제외한 모든 것이.
일순간, 아지랑이가 일렁이듯 가슴 안쪽이 잠시 간질거렸다. 동그란 얼굴을 가진, 길게 뻗은 눈꼬리가 유난히 매력적인 그 얼굴과 따스한 햇살이 비춘 여름 같은 미소가 온통 머릿속을 점령해 버렸다.
처음으로 느껴 보는 감각이었다. 뭐라 말이라도 하려 입술 끝을 달싹거렸지만 가슴 안쪽에서 점점 진해지는 감정의 색깔이 쉽사리 음성을 뱉어내지 못하게 했다.
짙고 깊은 외로움 위에 떠오른 빛과 같은 손에 시선을 옮겼다.
지금까지의 시간이 많은 걱정을 하지 않고 살아도 되는 나이에 일찍이 찾아온 끝없는 어둠이라면, 앞으로는 끊임없이 파도치는 바다를 홀로 거닐던 내게 환한 빛과 같은 존재가 되길.
성운은 서하의 손이 멀어지기 일보직전에 손을 뻗었다.
다급하게 서하의 손을 움켜쥐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안 갈게.”
홀로 걷던 외길에서 만난 섬화를 행여, 놓칠까. 힘을 주어 꽉 우그렸다.
“나, 가고 싶지 않아.”
손 안에서 퍼져 오는 차가움이 싫지가 않았다. 제 속에서 끝없이 요동치던 두근거림과 간지러움이 무엇인지 선명히 알게 된 건 딱, 지금이었다.
“집에 같이 갈래.”
“…….”
“너랑.”
이 일반적이지 않은 상황에서 일어난 작은 마음의 동요는 설렘이었다.
우중충한 하늘에 떠오른 해와 같은 것. 빛과 같은 것.
그렇게 성운은 그날, 그의 빛을 잡았다.
쏴아아아.
귓가를 경쾌하게 울려대는 빗소리에, 서하의 속눈썹이 꿈틀거렸다.
일요일 아침부터 듣는 소음에 가까운 빗소리는 자연히 미간을 찡그리게 만들었다.
“아, 아직 졸린데…….”
깨어 버린 정신을 어떻게든 잠재우려 두 눈을 질끈 감았지만 곧, 눈동자에 선명히 제 방이 담겼다.
두 눈을 끔뻑, 끔뻑거리다가 흐드러지게 하품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꼬리가 긴 눈가를 비비적거리며 방문을 여니, 사색이 된 아빠의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다.
“아빠…….”
시선을 한쪽으로 기울이며 설준을 부르자, 거실을 우왕좌왕 배회하던 그가 서하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아, 서하야. 깼니?”
“응. 왜 그래요, 아빠?”
“혹시 말이야, 성운이가 오늘 어디 간다고 따로 말했었니?”
“네? 아뇨.”
설준의 낯빛에서 좀처럼 조급함이 지워지지 않았다. 난감하다는 듯 머리를 한껏 흐트러트렸다. 토요일엔 늦잠을 자고, 일요일이면 아침부터 집안일을 시작하던 아빠의 평소 모습과는 확연히 달랐다.
자꾸만 성운의 방을 들락날락하며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리는 게 서하의 눈엔 이상하게만 보였다.
“아빠……?”
다시 한번 서하의 목소리가 공간을 울리자, 설준이 다급했던 발걸음을 멈추며 시선을 마주했다.
“아무래도, 성운이가 집을 나간 거 같아.”
“네……?”
그 애가 왜? 갑자기?
“휴대폰도 잃어버린 상태라, 연락할 수 있는 방법이…… 아무것도 없네.”
“집을 나갔다니요? 자, 잠깐 어디 간 거일 수도 있잖아요!”
이렇게 갑자기 집을 나가버린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잖아.
서하가 차분히 숨을 고르며 말했지만, 알 수 없는 불안감은 해소되지 않았다.
그리고 곧, 들려온 설준의 목소리에 서하의 불안감이 더욱이 몸집을 키웠다.
“방에 쪽지를 남겨 놨어, 그동안 감사했다고.”
“…….”
“내일 학교로 데리러 가면 되긴 하는데……. 서하야.”
“응?”
“우리 딸이 짐작 가는 곳은 없을까? 성운이가 갈만한 곳…….”
아빠는 항상 이랬다. 평소에도 다정한 사람이긴 하지만, 걱정이라는 걸 안게 되면 안절부절못했다.
지금도 급하게 말을 쏟아 내며 시선을 좀처럼 한곳에 두지 못하는 걸 보면 알 수 있었다.
오늘 온종일 걱정하겠구나.
아빠의 말마따나, 그 앤 지금 돈도, 휴대폰도 없는 상태일 텐데 대체, 어디를 간 걸까.
아까부터 귓가를 울려 대던 세찬 빗소리가 어째, 더 크게 들려 오는 것만 같았다.
세찬 빗방울은 거실 창가를 톡톡 두들겼고, 성운이 없는 텅 빈 공간이 눈에 담기자, 서하의 손끝이 살짝 움찔거렸다.
“아빠, 내가 찾아볼게요.”
“짐작 가는 데가 있어?”
“아니, 근데 일단 나가 볼래.”
서하는 대번에 방으로 향해 베이지색 패딩을 챙겼다.
“어디를 가겠다는 거야, 아빠가 나가볼 테니까. 집에 있어.”
“내가 갈래요!”
걱정 어린 설준의 말에도 서하의 어조는 단호했다.
순식간에 현관으로 향한 그녀는 뒤편에서 들리는 설준의 나가지 말란 목소리도 무시해 버렸다.
노란 우산을 챙기며, 운동화 끈을 질끈 동여 맸다.
나한텐, 인사도 없이 나갔다 그거지?
연극 보러 오라고 할 땐 언제고, 집을 나갔어?
서운함은 원동력이 되어 서하의 두 발에 속도를 더했다.
투둑, 투둑, 비 내리는 소리가 얇은 우산 위를 뭉툭하게 울려 댔다. 계획 없이 나온 탓에 전혀, 예상이 되지 않았지만 서하는 일단 아파트를 빠져 나갔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학교로 가는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느낌이 오묘하다. 단 한 번도 직감이란 게 맞아본 적 없었더랬다. 시험에서 찍기를 감행하면 다 틀려 대고, 길을 찾다가 갈림길을 마주해서 선택한 길은 미아가 되는 지름길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다르다. 이 오묘한 기운이 그곳이 맞다고 말해 주고 있었다.
철퍽, 철퍽.
운동화가 비에 젖은 땅에 맞닿는 마찰음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신고 있던 흰 양말에 검은 얼룩이 피어올랐을 때쯤, 서하는 서서히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드디어 칸막이가 설치된 투명한 버스 정류장 의자에서 익숙한 뒷모습을 발견했다.
처음으로 직감이라는 게 들어맞았다. 인사도 없이 떠나려 했던 서운함을 꾹꾹, 눌러 담아 소리쳤다. 빗소리에 묻히지 않게, 꼭 그 애가 들을 수 있게.
“야, 공성운!”
하루도 채 되지 않았는데, 고개를 돌린 그의 얼굴은 꽤 반갑게 느껴졌다.
“너, 어디가!”
* * *
누군가에겐 일반적인 게 남에겐 일반적이지 않은 것.
내가 엄마와 둘이 사는 게 남들에겐 일반적이지 않았다. 친한 친구들 모두, 정상적인 가정환경에서 지냈고 그 미묘한 외로움은 그 누구도 알아차려 주지 못했었다.
그런데 세상에 정말로 혼자가 되고 나서야 외로움을 알아주는 사람이 생겨났다.
“학원도 안 다니고, 학교랑 집만 왔다갔다했으면…… 너, 정말 외로웠겠다.”
함께 버스를 기다렸던 어느 날, 그 애가 대뜸 내게 했던 말이었다.
곱게 뻗은 눈썹을 측은하게 내리는 그 애의 얼굴이 파란하늘 아래서 선명하게 비쳤다.
“나는 그래도 학원도 다니고 그랬는데.”
거창하지 않은 말이었다. 어떻게 보면 누구에게나 들을 수 있는 보잘것없는 공감일 뿐이었다.
그런데, 이 여자아이. 강서하라는 이 여자애가 조금씩 내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네가 혼자 지냈다는 말을 들은 후로, 그 말이 꽤 오래 떠다녔어.”
“…….”
“내 머릿속에서…….”
“…….”
“지금의 넌, 그때의 너와 같은 상황이겠구나.”
그 애가 슬쩍, 눈을 피했다. 발음은 또박또박 내뱉으면서도 부끄러운지 입술을 작게 오므리는 모습에 무의식적으로 집중했다.
“네가, 많이 외롭겠구나.”
“…….”
“예전의 나처럼…….”
작고 동그란 얼굴에 저도 모르게 시선을 빼앗겼다. 그때의 난 외롭지만 외로움을 말할 상대가 없었다.
그리고 말해도 진심으로 공감해 주는 사람도 없었다.
내 앞으로의 외로움 또한 알아주는 사람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생각지도 못한 상대가 내게 위로를 건넨다.
“그때의 너와 지금의 너는 좀 외로울지라도…….”
“…….”
“앞으로의 너는 좀, 덜 외로웠으면 해서…….”
작고 여린 손이 성운의 몸 앞에 다가왔다. 잘 부탁한다는 의미로 건넨 악수 위에 떠오른 환한 미소는 손끝조차 움찔거리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 공간이 멈춰 버린 것처럼, 숨조차 멎어버린 것처럼 부드럽게 부서지는 음성을 듣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우리가 앞으로도 좋은 친구로 지내면 좋지 않을까?”
가슴 안쪽이 간질거렸다.
차디찬 겨울바람이 살결을 스치며 지나도, 그 바람에 눈이 시려도 차마 이 순간을 떨쳐 내기가 싫었다.
누군가와 함께하게 된 지금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서하가 멋쩍은 듯 웃으며 내밀었던 손을 그러쥐었다.
빨갛게 달아오른 손끝을 손바닥에 비벼보며, 괜스레 오지 않는 버스를 원망했다.
“아, 추운데 왜 이렇게 안 와.”
그게 어떤 감정인지 알 수 없어 성운은 끝까지 입 한번 벙긋거리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
갈 곳 없는 내가 무작정 집을 나온 지금.
미친 듯이 쏟아지기 시작하는 비마저 피할 곳이 없어 버스 정류장에 가만히 앉아있는 게 다였던 지금, 그 애의 음성이 귓가를 또렷하게 울렸다.
“야, 공성운!”
내 이름을 부르며, 그 애가 한달음에 코앞까지 다가왔다.
“너 어디가려고?”
“…….”
“나한테 연극 보러 오라 해 놓고, 인사도 없이 나가버리는 게 어디 있어?”
“…….”
“갈 곳도 없다면서! 근데 그렇게 나가버리면 어떡해……!”
“갈 곳은 있어.”
나 혼자 있는 곳.
“그래서 갈 거야, 이렇게 가 버릴 거냐고!?”
서하의 목소리가 빗소리와 섞여 들었다. 땅을 치고 오르는 물방울 소리가 더욱 거세지는 데도 눈동자에 또렷하게 차오른 그 애의 맑은 목소리는 정확하게 성운의 귓가에 닿았다.
“안 가면 안 돼?”
“…….”
“내가 아빠한테 잘 말해 볼게.”
“…….”
“너, 우리 집에서 지내게 해 달라고…….”
설준의 방 바로 옆에 위치한 서하의 방은 그다지 소음에 강한 편이 아니었다. 새벽녘 방안을 울려 성운의 마음조차 울려 버렸던 그의 목소리가 서하에게도 속절없이 들려왔었다.
통화 내용을 더 자세히 듣고 싶어, 방문을 슬쩍 열고 나가려던 찰나에 성운이 그곳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혼자 버티기 힘든 이 세상에 혼자 남겨진 기분은 대체 어떤 기분일까.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난 엄마는 없지만, 아빠는 있는데.
그 두 사람 모두가 없다는 현실을 알게 된 넌 괜찮을까.
그래서인지, 머리끝이 촉촉이 젖은 이 남자애가 안쓰러웠다.
그냥,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단 생각이 들었다.
벼랑 끝에 선, 이 애가 더욱이 위태로워지는 게 싫었다.
집에 혼자 있으면 공허한 그 기분으로, 내가 너무도 잘 아는 그 외로움의 시간으로 걸어가지 않았으면.
서하의 손끝을 얼음장 같은 바람이 계속해서 에워쌌다. 서서히 굳어져가던 손을 조금씩 움찔거리다가, 다시 한번 용기를 냈다.
이번엔 그에게 닿기를.
“네가 신경 쓰여. 이렇게 떠나지 않았으면 좋겠어.”
“…….”
“네가…… 외롭지 않았으면 좋겠어.”
성운의 귓가에 만연했던 빗소리는 이제 더는 들려 오지 않았다. 눈동자에 가득 담긴 서하의 얼굴만이 이 순간, 모든 것을 흐릿하게 만들었다.
그녀가 다시 한번 건넨 작은 손을 제외한 모든 것이.
일순간, 아지랑이가 일렁이듯 가슴 안쪽이 잠시 간질거렸다. 동그란 얼굴을 가진, 길게 뻗은 눈꼬리가 유난히 매력적인 그 얼굴과 따스한 햇살이 비춘 여름 같은 미소가 온통 머릿속을 점령해 버렸다.
처음으로 느껴 보는 감각이었다. 뭐라 말이라도 하려 입술 끝을 달싹거렸지만 가슴 안쪽에서 점점 진해지는 감정의 색깔이 쉽사리 음성을 뱉어내지 못하게 했다.
짙고 깊은 외로움 위에 떠오른 빛과 같은 손에 시선을 옮겼다.
지금까지의 시간이 많은 걱정을 하지 않고 살아도 되는 나이에 일찍이 찾아온 끝없는 어둠이라면, 앞으로는 끊임없이 파도치는 바다를 홀로 거닐던 내게 환한 빛과 같은 존재가 되길.
성운은 서하의 손이 멀어지기 일보직전에 손을 뻗었다.
다급하게 서하의 손을 움켜쥐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안 갈게.”
홀로 걷던 외길에서 만난 섬화를 행여, 놓칠까. 힘을 주어 꽉 우그렸다.
“나, 가고 싶지 않아.”
손 안에서 퍼져 오는 차가움이 싫지가 않았다. 제 속에서 끝없이 요동치던 두근거림과 간지러움이 무엇인지 선명히 알게 된 건 딱, 지금이었다.
“집에 같이 갈래.”
“…….”
“너랑.”
이 일반적이지 않은 상황에서 일어난 작은 마음의 동요는 설렘이었다.
우중충한 하늘에 떠오른 해와 같은 것. 빛과 같은 것.
그렇게 성운은 그날, 그의 빛을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