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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꼭 와, 너만큼은







달칵.

숙제를 해야겠다며 먼저 방으로 들어가는 서하의 뒷모습을 우두커니 서서 바라보았다. 전보다 질문이 많아진 성운이 부담스러웠던 걸까.

성운은 괜히 뒷머리를 쓸어 넘기듯 긁적거렸다.

방문이 닫히고, 텅 빈 거실에 혼자 멀거니 서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단, 하나도 익숙하지 않은 이곳. 그 어떤 것도 편하지 않아야 하는 이 공간이 왠지 모르게 따뜻하다.

손끝을 움찔거리면서도 차마, 온기가 감도는 거실에서 발길을 돌려내긴 쉽지 않았다.

이렇게 따뜻한데도, 혼자가 되어버린 시간은 외로웠다.

마음 한편이 텅, 비어 버려 그 무엇도 차오르지 못해 옷을 헐벗은 것처럼.

달칵. 어두운 그림자가 또다시 발끝에서부터 모습을 드러냈을 때, 서하의 방문이 다시금 열렸다.

짧은 단발머리를 찰랑거리며 성운에게 눈동자를 굴린 서하가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가느다란 목소리를 흘려 냈다.

“저기, 그러니까.”

“…….”

“바쁘지 않으면 나, 숙제하는 것 좀 도와줄래?”

암전이라도 된 것처럼, 깜깜한 어둠 속 같았던 텅 빈 시간에 무언가 밝게 차오른다.

“어려운 건 없어. 그냥, 앉아 있기만 하면 돼.”

작고, 귀여운 입술을 벙긋거리며 말하는 탓에 시선이 그 위에 머물렀다. 무의식적으로 멍해진 시야는 다급하게 서하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눈 이곳저곳에 담았다.

행여, 또 사라질까.

이 밝음이 어둠에 쫓겨나 버리는 건 아닐까.

이 미묘한 감정에 차마, 대답하는 걸 잊고 있었다.

“뭐, 바쁘면 말고.”

진득하게 이어지던 서하의 시선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빠른 속도로 닫히기 시작하는 방문이 시야에 담기자마자, 성운은 딱딱하게 굳어졌던 다리를 그제야 떼어 냈다.

재빨리 다가가 한쪽 손으로 방문을 잡으며, 방안으로 들어섰다.

“뭘 하면 되는데?”

성운의 물음에 서하가 소리 없이 책상 위에 올려져 있던 동그란 안경을 꼈다.

잘 다듬어 놓은 뾰족한 연필을 들어 올리며 성운에게 제 침대 위를 가리켰다.

“저기에 앉아서 내 모델 해 줘.”

“혹시, 벗어야 해?”

“뭐? 미쳤어?”

그 어떠한 어색한 기류도 없이, 울음도, 슬픔도 없이.

적당한 크기의 네모난 공간 안에서 두 사람은 둥그런 웃음을 채워 나갔다.

성운의 마음 한편에 자리했던 짙은 그림자에도 어느새, 밝은 태양이 드리웠다.

“아, 가만히 좀 있어 봐.”

사소하고.

“숨도 못 쉬어?”

“참아 주면 더 좋지.”

“뭐라고?”

평범하고.

“장난이야.”

해가 뜨고 지는 그 당연한 일상과도 같은 시간.

특별하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두 사람이 한층 더 가까워진 뜻 깊은 한때였다.



* * *



서하가 물을 마시러 거실에 나오자마자 보인 건 소파에 앉아 책을 읽는 성운의 모습이었다.

그가 손으로 가린 책 제목은 언뜻 봐도 제 취향은 아니었다.

주말이라, 아직 잠들어 있는 아빠가 방에서 나오길 기다리는 것 같았다.

식탁에는 평소와 같이 밥을 차려 놓고.

손님으로 온 건데, 아무래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스타일인 것 같았다.

성운은 무심하게 눈인사를 하며 다시 책으로 눈동자를 돌렸다.

뭐가 그렇게 재밌길래.

차가운 물이 입안을 타고 흘러 목을 촉촉이 적시기 시작할 때, 서하는 괜스레 냉장고에 붙어있는 자석을 쳐다보며 그를 흘깃 훔쳐보았다.

최대한, 티 나지 않게. 절대, 그 애가 알 수 없게.

그 노력이 무색할 만큼 성운에게서 평이한 어투가 들려왔다.

“너 다음 주 금요일에 뭐해?”

“다음 주?”

“방학 언제야?”

왜 자꾸 긴장을 하게 되는 건지.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 그의 시선에 서하 또한 괜찮은 척 대답했다.

“목요일이야. 다음 주 금요일은 쉬어.”

“…….”

“약속 없으면, 아마도…….”

그가 보고 있던 책을 내려놓으며 서하를 응시했다.

입가에 맴도는 말을 바로 꺼내 들기가 힘들었는지, 한참의 정적이 흐르고 나서야 겨우 목소리를 냈다.

망설임이 다분히 묻은 그의 어투는 어딘지 모르게 조심스러웠다.

“아, 쉬면…….”

“응?”

“쉬는 거면 우리 학교 놀러 와.”

“넌 방학 안 해?”

“금요일인데 혹시, 연극 좋아해?”

“연극?”

뜻밖의 질문에, 서하가 완벽히 그에게 몸을 돌리며 말끝을 올렸다. 힐끗 훔쳐 보던 시선이 이젠 당당하게 성운의 얼굴 위에 머물렀다.

“좋아하면 와. 우리 학교 방학식 때마다 연극하거든.”

“너도 나와?”

전혀 안 그래 보여, 전혀. 연극이라는 거 관심도 없어 보여.

서하의 투명한 유리 같은 눈동자에 의아함이 서렸다.

그래, 외모는 준수한 편이라 배우에 적합하다 쳐도 그럴 성격은 못 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성운의 입에서 들려온 대답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내가 주인공인데.”

“어……?”

“왜, 안 그래 보여?”

“그건 아닌데, 그렇게 활발한 타입인 줄 몰랐어.”

게다가, 너 잘 웃지도 않잖아.

물론, 선한 눈에 어울리는 서글서글한 웃음은 곧잘 지어도 그 웃음이 진심을 하다고 있다곤 생각이 들지 않았다.

간혹 가다 보이는 진심이 담긴 웃음이 눈에 띌 만큼 미소가 아름다운 사람이었지만, 아직까지는 슬픔이 내려 앉아있는 것 같은 웃음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니, 놀랄 수밖에.

하지만 그에게 티를 낼 수 없었다. 뭔가 더 상처가 될 말을 건네게 되진 않을지는 둘째치고, 말을 걸기가 어려웠다.

저 애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속이 막 답답한 게…… 아무래도, 나 쟤 싫어하나? 근데, 왜 자꾸 보게 되지.

“그래서 온다고, 안 온다고?”

성운은 어느새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있던 소파에서 일어난 후였다.

서하가 사색에 잠겨 혼자만의 생각에 정적인 몸부림을 치던 사이, 그는 어느새 그녀의 바로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아니지, 꼭 와.”

“…….”

“내가 너 그림 모델도 해 줬잖아. 그러니까, 꼭 와.”

대답을 망설이고 있는 걸 눈치챘는지 성운은 더이상 그녀의 의견을 묻지 않았다.

하얀 얼굴에 말간 피부는 그의 진한 검은 눈동자가 도드라지게 해 주었다.

그와 동시에 그 눈에 시선을 빼앗겨 버렸다.

선한 눈매가 유독 매력적인 그 눈에, 무의식적으로 이끌렸다.

“꼭 와.”

“…….”

“너만큼은.”

시린 슬픔이 서려 있는 눈동자가 한층 가까워졌다.

서하보다 조금 큰 키를 가진 성운이 고개를 숙여 서하에게 더욱 깊게 시선을 마주하는 탓에 숨조차 멈춰 버렸다.

코끝에서 일렁이는 성운의 담백한 음성에, 제 속에선 알 수 없는 자극들이 함께 요동쳤다.

홀린 듯 빼앗긴 시선에, 겨우 고개를 끄덕거리자 그가 꿈처럼 멀어졌다.

바로 눈앞에 머물렀던 따스한 온기와 체취.

그리고 준수한 얼굴이 멀어지자 단 한 가지가 분명하게 떠올랐다.

생기 하나 없던 나의 공간에 새로이 생겨난 화사한 색상.

단 한 번도 물들여 본 적 없는 하얀 도화지에, 처음으로 생기 넘치는 엷은 붉은색이 스며들었다.

그 애가 머리를 긁적이며 방으로 들어가고, 혼자 남겨지게 돼서야 속 시원히 숨을 내쉴 수 있었다.

어설프게 느껴지는 이 감정이 누구나 떠들어 대는 첫사랑일지도 모른단 생각에 공연히 들뜨기 시작했다.

이유조차 모르는, 시점조차 모호한 이 감정에 서하의 얼굴에 설렘이 가득한 미소가 피어났다.

연극, 꼭 보러 가야지.



그날 밤.

일찍 잠이 들었던 탓에 새벽이 되자 눈이 번쩍 떠졌다.

성운은 침대 위에서 뭉그적거리다, 목 안쪽에서 일어난 갈증에 몸을 일으켰다.

목을 긁적거리며 눈을 몇 번 깜빡거렸다. 냉큼 방에서 나와 최대한 조심스럽게 정수기로 걸어가는데 건너편 방에서 조도가 낮은 불빛이 새어 나왔다.

설준의 방이었다. 주말이면 항상 부족했던 잠을 몰아서 청한다던 그의 방에서 새어 나오는 불이 선명하게 눈에 담겼다.

혹시, 잠이 들었는데 불을 끄지 않은 건 아닐까.

성운은 물을 마셔야겠다는 생각을 잊어버린 채 이끌리듯 그 방으로 향했다. 가까이 다가가니, 설준의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누군가와 통화를 하는 것 같았다.

“……제가 언제까지고 아이를 맡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성운의 눈이 찢어질 듯 늘어났다. 숨을 죽인 채 그의 통화 내용을 엿들었다.

상대방의 음성은 일절 들려오지 않았지만, 지레짐작할 수 있었다.

“새로운 가정을 꾸리셨다는 건 압니다. 하지만, 혜선이가 죽었고 아이는 혼자 남았어요.”

자신의 친아빠라는 걸.

“갈 곳 없는 아이를 거둬줄 수 없을 만큼 매정한 부모셨습니까?”

참담하게 쏟아지는 설준의 음성에 성운의 시야가 암담해졌다.

언제고, 이 집에 있을 수 없을 거란 건 알고 있었다.

그런데, 해외에 있는 친척들도 모자라, 그의 친부모에게까지 돌아갈 수 없다는 현실에 이 세상에 대한 이질감이 곧 온몸을 휘감았다.

“입양이요? 전 혜선이의 친구일 뿐이고, 죽은 친구에 대한 의리를 지키고 있을 뿐입니다.”

밀랍처럼 굳어졌던 감정의 동요들이 성운의 속에서 서서히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당신 같은 부모한테 성운이를 데려가라 말하고 싶지 않군요.”

설준의 잇새에서 쏟아진 자신의 이름에, 사랑스런 눈으로 저를 부르던 엄마의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느릿하게 열기를 더해가던 두 눈가는 참을 수 없는 슬픔을 이겨내지 못했다.

결국, 소리 한 번 내지 못하고 동그란 눈물방울이 눈가를 타고 흘렀다.

“제 딸아이랑 상의해서, 성운이 제가 데리고 살겠습니다.”

그 말이 마지막 음성이었다. 설준은 전화를 툭, 끊어버리며 책상 위로 휴대폰을 던지듯이 내려놓았다.

미간을 잔뜩 모은 채, 진한 숨을 내쉬는 모양새에 성운은 곧바로 등을 돌렸다. 행여, 그에게 들키게 되진 않을까.

조마조마한 마음을 부여잡으면서도 흐르는 눈물을 쉴 새 없이 닦아내며 방으로 향했다.

달칵.

방문을 조심스럽게 닫고 힘없이 등을 기댔다. 축 처진 어깨 위로 푹 숙여진 고개에선 더는 어떤 소리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끊임없이 흐르던 눈물조차 멈췄을 때, 성운의 다리가 힘을 잃고 풀려버렸다. 문에 등을 기댄 채, 바닥에 허망하게 앉아있던 그는 창밖으로 쏟아지는 하얀 달빛에 눈동자를 굴렸다.

“난…… 어디로 가야 할까.”

엄마가 죽고, 돌아갈 집이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 집엔 죽어도 혼자서 들어가기가 싫었다. 그 외로움에 사무치는 시간에, 아무도 돌아오지 않는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일직선으로 비춰 오는 얇은 달빛에, 그의 눈빛은 금방이라도 스러질 듯 맥을 잃었다.

그리고 하염없이 한 단어가 입가에 맴돌았다.

“엄마…….”

애써 숨겨 왔던 단 하나의 감정.

부정하고 싶었던 현실이 낫지 못해 뭉그러진 상처 위로 떠올랐다.

“보고 싶다, 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