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3화 해가 뜨고 지는 당연한 일상
쏴아.
방과 후 보충수업이 끝나니, 서하의 눈앞에 보인 광경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비가 내리는 풍경이었다.
날씨가 풀렸다더니. 이젠 눈 대신 비가 내리는 하늘을 한 번,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은 손을 두 번 바라보다 한숨을 짙게 내쉬었다.
우중충한 잿빛을 머금은 구름이 꼭 제 맘 같아 허망한 시선을 한참이나 허공에 두었다.
그래도 다행인 건, 입고 있는 패딩에 후드가 달려 있다는 것.
눈 딱 감고, 버스 정류장으로 달려가면 될 거야.
어깨에 힘을 빡, 주고 달려가려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떠보았지만 엄두가 나지 않았다.
가끔 이럴 때가 있다. 나 자신이 너무 멍청하고 한심할 때. 속마음이 빗소리를 타고 누군가의 귓가를 울리지 않았을까 하는 걱정이 괜히 들어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후드를 쓰고, 어깨에 멘 가방끈을 질끈, 잡았다.
머리 위를 가려 주던 건물에서 벗어나 빗속으로 뛰어드니, 아까보다 더욱 비 내리는 소리가 귓가에 만연해졌다.
이 비 내리는 하늘이 누군가의 눈동자를 닮아 괜스레 발걸음을 멈칫거렸지만 후드 위를 토독, 토독, 두들기는 거센 빗줄기에 재빨리 걸음을 옮겼다.
교문 앞에 누군가 노란, 보호색이 물든 우산을 쓰고 서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 우산이 좀 부러웠지만.
누군가를 휙, 지나치려는데 그 누군가가 갑자기 서하의 가방을 뒤에서 획 잡았다.
놀란 마음에 고개를 돌려 보니 머리 위로는 노란 우산이, 눈동자엔 성운의 얼굴이 가득 담겼다.
“우산 써.”
“설마, 나 데리러 온 거야……?”
믿기지 않는 광경에 떠름한 표정을 짓자, 성운이 꽉 움켜쥐고 있던 서하의 가방을 놔 주었다.
그가 고개를 살짝 주억거리자, 서하는 끝이 촉촉이 물든 단발머리를 찰랑거리며 몸을 돌렸다.
자신보다 조금 큰 키를 가진 성운을 올곧게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우리 학교는 어떻게 알았어?”
“네가 아침마다 신나게 떠들었어.”
지금 이 애가 날 데리러 왔다는 사실보다, 우리 학교를 알고 있었다는 사실보다 더 놀라운 것.
“근데, 너 나 싫어하는 거 아니었어?”
아침까지만 해도 풍겨대는 냉랭함에 뼛속까지 얼어버릴 뻔했단 말이다.
그런데, 성운의 잇새에서 흘러나온 대답은 서하의 예상과는 크게 달랐다.
“아니, 내가 널 왜 싫어해.”
아니! 싫어하는 게 분명하다. 어쩜 이리도 딱딱한 말투를 구사하며 싫지 않다 말하는지. 말과 표정이 참 모순적인 애였다.
심지어 보충 설명까지 톡톡히 해 주었다.
“싫어했으면, 우산 갖다 주러 왔겠어?”
“…….”
“안 그래?”
톡톡, 우산을 두들기는 선명한 소리 틈새로 성운의 목소리가 서하의 귓가를 점령했다.
눈앞에 있는 선하고 부드러운 인상은 눈동자를 꽉 채웠고, 그대로 굳어 버릴 줄 알았던 성운의 얼굴에 차츰, 미소가 번져갔다.
새벽 내내 고생하고, 고심했던 그 그림을 닮은.
찬란한 웃음이.
“집에 가자, 강서하.”
성운의 잇새에서 서하의 이름이 선명하게 튀어 나와 빗소리에 사무쳤을 때, 서하는 온몸을 전율케 하는 미미한 진동을 느꼈다.
이 미미한 마음의 울림이 무엇인지 그땐 몰랐다.
적어도, 그때는.
* * *
평소와 달리 온기가 넘치는 주방에서 지글거리고, 보글거리는 소리가 넘실거렸다. 그 소리의 주체를 향해 서하가 두 눈을 반짝이며 입을 떡 벌렸다.
“와, 너 요리 진짜 잘한다.”
집에 돌아온 후 어색한 기류를 깨보겠다며 한층 더 과장된 말투로 말했지만, 성운은 별로 개의치 않아 보였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도, 돌아온 후 집에서도 평이한 표정과 말투였다.
지금도 마찬가지로.
“재료만 있으면 다 해.”
담담하게 한마디를 내뱉고는 또 묵묵히 음식을 만들어 냈다. 휘황찬란한 손놀림은 아니었지만 딱딱, 떨어지는 손목 스냅이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었다.
서하가 눈동자에 초롱, 빛을 밝히며 그를 구경하자, 성운은 묻지도 않은 자신의 이야기를 쭉 늘어놓기 시작했다.
이 어색한 침묵이, 아무래도 서하의 것만은 아니었나 보다.
“엄마랑 둘이 살 때, 혼자 많이 해 먹었어.”
“아, 그랬구나…….”
나는 아빠랑 둘이 사는데도, 아무것도 못 하는데.
고기가 볶아지고 있던 프라이팬에서 말하고 있는 성운의 눈으로 서하의 시선이 옮겨졌다.
“요리할 때만큼은 외롭지 않았던 거 같아.”
“…….”
“혼자 있어도.”
눈동자에 투영된 성운의 모습은 길가에 혼자 우두커니 서 있는 사람처럼 외로워 보였다.
요리를 할 때만큼은 외롭지 않았다 했지만, 어쩐지 지금까지 그는 외로웠을 것만 같았다.
엄마가 없는 시간 동안 혼자서.
나 또한 아빠가 없는 시간을 집에서 혼자 보낸 것처럼 외롭지 않다 다독이며 혼자서 주문을 외운 건 아닐까.
내가 그림을 그리며 혼자 시간을 달랜 것처럼.
그도, 뭔가를 하며.
“넌 외롭지 않아?”
“어?”
혼자만의 사색에 빠져, 잠시 색감을 잃은 동공에 성운의 물음이 날아들었다.
그 목소리 덕분에 눈앞에 있는 이 아이에게 다시금 초점을 맞췄다.
흐렸던 렌즈가 선명해지는 것처럼 성운의 얼굴이 또렷하게 들어찼다.
“혼자 있으면 외롭지 않냐고.”
“외롭다는 생각을 해 본 적 없는 것 같아.”
“…….”
“그냥, 그게 너무 당연해서.”
“…….”
“그게…… 외로운 거였구나.”
깨달았다. 그 시간들이 외로운 거였구나.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마음속 깊은 메슥거림이 외로움이었구나.
작은 깨달음과 동시에, 간헐적으로 느껴지던 그 메슥거림이 속 안에서 몸집을 키워 갔다.
바보 같게도, 금세 눈물이 쏟아질 것처럼 두 눈이 붉어졌다.
‘엄마’라는 단어가 입에서 터져 나오기 일보 직전, 성운이 가스레인지 불을 끄며 입을 열었다.
“내가 볼 땐 난 아마 아빠에게 맡겨질 거야.”
“……?”
“지금보다 더 어렸을 때 이혼하셨는데, 한국에 있는 가족이라곤 아빠뿐이거든.”
갑자기 무슨 말을 시작하는 거지.
귓가를 진동하는 묵직한 음성에 터져 나오려던 울음이 멈췄다.
그는 혼잣말하듯 중얼거리며 시작했던 말을 어느새 서하가 제대로 들을 수 있도록 또박또박 내뱉었다.
“언제가 될 진 몰라. 그전까진 이 집에서…….”
“…….”
“그러니까, 잘 지내보자.”
눈동자를 한쪽으로 휘릭, 굴리던 성운은 넌지시 악수를 건넸다.
잘해보자는 의미로 양 눈썹을 들어 올리며 고개를 살짝 끄덕거렸다.
얹혀 지내는 주제에 괜한 오지랖을 부린다고 생각해도 좋았다.
그냥, 눈앞에 서 있는 이 여자애가 우는 게 싫었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서하의 주위를 돌리려는 성운의 계획이 먹혀들었다.
서하는 붉어진 눈을 몇 번이고 깜빡거리다가, 조심스레 손을 들어 올렸다.
맞잡은 부드러운 손은 너무도 따뜻했다.
손끝에서 감겨 오는 온기가, 사선으로 이어지는 그의 시선이, 풍겨 대는 분위기가.
그저, 너무 따뜻해서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가 들어 올렸다.
“그래. 잘, 지내보자. 우리.”
맞잡은 두 손은 약속이라도 한 듯 허공을 가로지르며 위아래로 흔들거렸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시작된 장난스러운 행동은 두 사람의 잇새에서 픽, 웃음이 피어나고서야 끝이 났다.
짧은 순간, 맞이한 정적 뒤로 두 사람의 목소리가 엉켜 들었다.
“아, 배고프다.”
“배고파.”
동시에, 비슷한 말을 내뱉은 게 저 두 사람도 신기했는지, 둘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성운이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며 입술을 뗐다.
“밥, 먹을까?”
“응!”
함께, 식사를 나누는 동안 우린, 거창한 이야기를 나누진 않았다.
그저 서로의 학교에 대해 이야기하며 오늘 식탁 위에 올라온 반찬들에 관한 이야기들이 이 공간을 따뜻한 온기로 물들여 갔다.
식사가 끝난 후, 서하는 직감할 수 있었다.
아직 돌아오지 않은 아빠의 밥상을 차려놓는 성운의 모습에서 알게 된 단 한 가지의 확신.
속을 알 수 없는 이 남자애가 생각보다 괜찮은 애라는 거.
그리고…….
“거기 서서 뭐해?”
“어?”
“이리 와서 좀 도와줘.”
웃는 모습이 참 예쁘다는 거.
설거지를 끝낸 서하가 부랴부랴 성운의 곁으로 다가갔다.
울지 않던 남자애는, 사실 슬퍼할 줄 아는 아이였고.
제대로 웃지 않던 남자애는, 사실 찬란한 웃음을 가진 아이였다.
밥상 위에 보자기를 덮어 놓고 나니, 식탁을 사이에 두고 성운과 두 눈을 마주했다.
여전히 짙게 자리한 검은 눈동자 한편엔 깊은 슬픔이 자리했지만, 딱 바로 지금.
이 순간만큼은 더할 나위 없는 밝은 미소를 품고 있었다.
“안 졸려?”
별로 대단하지도 않은, 평범한 질문인데.
“TV나 볼래?”
평소와 같은 음성의 높낮이와 표정인데.
“야, 강서하.”
오늘따라, 느낌이 이상하다.
“나, 나는 숙제가 있어서 먼저 들어갈게.”
서하는 속 안에서 꿈틀거리기 시작한, 마음을 집어삼키는 이 오묘한 감정 때문에 성운의 시선을 획, 피해 버리며 방으로 도망쳐 버렸다.
* * *
어릴 땐 줄곧 혼자 지내 왔었다. 부모님이 이혼을 하고, 엄마와 단둘이서 살게 된 나는 당연하게도 혼자 지내는 시간이 하루 대부분을 차지했다.
학교에선 느끼지 못했지만, 집에 찾아오면 느껴지는 적막함, 고요함.
그 느낌이 싫어, 식사준비를 줄곧 혼자 해왔다. 엄마가 집에 돌아왔을 때 배를 든든히 채울 수 있는 한 끼도 함께 준비하면서.
그 외로움이 익숙해져, 모든 감정들이 무뎌질 때쯤 엄마가 죽었다.
아직도 불분명한 그날의 기억, 뼛속까지 아리게 만들었던 삶의 순간.
장례식이 끝나고, 엄마 친구라는 한 아저씨의 손에 이끌려 도착한 집엔 나와 같은 눈을 한 여자아이가 있었다.
그래, 잘 보이고 싶었다. 나와 비슷한 처지인 여자아이와 그 아이의 아버지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고 싶었다.
슬픔을 감추고, 웃는다면 날 쉽게 미워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엄마가 죽고 슬픈 와중에도 갈 곳이 없는 내가 쫓겨날까 봐 겁이 났던 걸까.
그리고 바보 같게도, 내 슬픔을 들켜 버렸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마음이 한결 가벼워져 있었다.
나와 같은 눈을 하고, 하루 대부분을 외롭게 혼자 보냈을 그 여자아이는 실은, 나와는 조금 달랐다. 나보다 조금 더 강하고, 밝아 보였다. 재잘재잘, 말도 많고.
내게 왜 울지 않느냐는 말도 안 되는 물음을 건네긴 했지만, 나와 꼭 함께 밥을 먹어 주었고, 등굣길을 함께 했다.
단, 며칠이지만 그 애가 내게 보였던 순수한 관심들에 나는 속절없이 녹아 내렸다.
잘 보여야겠다는 흑심 없이, 모르는 사람에 대한 그 흔한 경계심도 싹 사라진 채로.
나 역시 그 애에게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단 며칠 사이에, 대체 언제부터인지 모를 모호한 시점부터.
쏴아.
방과 후 보충수업이 끝나니, 서하의 눈앞에 보인 광경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비가 내리는 풍경이었다.
날씨가 풀렸다더니. 이젠 눈 대신 비가 내리는 하늘을 한 번,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은 손을 두 번 바라보다 한숨을 짙게 내쉬었다.
우중충한 잿빛을 머금은 구름이 꼭 제 맘 같아 허망한 시선을 한참이나 허공에 두었다.
그래도 다행인 건, 입고 있는 패딩에 후드가 달려 있다는 것.
눈 딱 감고, 버스 정류장으로 달려가면 될 거야.
어깨에 힘을 빡, 주고 달려가려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떠보았지만 엄두가 나지 않았다.
가끔 이럴 때가 있다. 나 자신이 너무 멍청하고 한심할 때. 속마음이 빗소리를 타고 누군가의 귓가를 울리지 않았을까 하는 걱정이 괜히 들어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후드를 쓰고, 어깨에 멘 가방끈을 질끈, 잡았다.
머리 위를 가려 주던 건물에서 벗어나 빗속으로 뛰어드니, 아까보다 더욱 비 내리는 소리가 귓가에 만연해졌다.
이 비 내리는 하늘이 누군가의 눈동자를 닮아 괜스레 발걸음을 멈칫거렸지만 후드 위를 토독, 토독, 두들기는 거센 빗줄기에 재빨리 걸음을 옮겼다.
교문 앞에 누군가 노란, 보호색이 물든 우산을 쓰고 서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 우산이 좀 부러웠지만.
누군가를 휙, 지나치려는데 그 누군가가 갑자기 서하의 가방을 뒤에서 획 잡았다.
놀란 마음에 고개를 돌려 보니 머리 위로는 노란 우산이, 눈동자엔 성운의 얼굴이 가득 담겼다.
“우산 써.”
“설마, 나 데리러 온 거야……?”
믿기지 않는 광경에 떠름한 표정을 짓자, 성운이 꽉 움켜쥐고 있던 서하의 가방을 놔 주었다.
그가 고개를 살짝 주억거리자, 서하는 끝이 촉촉이 물든 단발머리를 찰랑거리며 몸을 돌렸다.
자신보다 조금 큰 키를 가진 성운을 올곧게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우리 학교는 어떻게 알았어?”
“네가 아침마다 신나게 떠들었어.”
지금 이 애가 날 데리러 왔다는 사실보다, 우리 학교를 알고 있었다는 사실보다 더 놀라운 것.
“근데, 너 나 싫어하는 거 아니었어?”
아침까지만 해도 풍겨대는 냉랭함에 뼛속까지 얼어버릴 뻔했단 말이다.
그런데, 성운의 잇새에서 흘러나온 대답은 서하의 예상과는 크게 달랐다.
“아니, 내가 널 왜 싫어해.”
아니! 싫어하는 게 분명하다. 어쩜 이리도 딱딱한 말투를 구사하며 싫지 않다 말하는지. 말과 표정이 참 모순적인 애였다.
심지어 보충 설명까지 톡톡히 해 주었다.
“싫어했으면, 우산 갖다 주러 왔겠어?”
“…….”
“안 그래?”
톡톡, 우산을 두들기는 선명한 소리 틈새로 성운의 목소리가 서하의 귓가를 점령했다.
눈앞에 있는 선하고 부드러운 인상은 눈동자를 꽉 채웠고, 그대로 굳어 버릴 줄 알았던 성운의 얼굴에 차츰, 미소가 번져갔다.
새벽 내내 고생하고, 고심했던 그 그림을 닮은.
찬란한 웃음이.
“집에 가자, 강서하.”
성운의 잇새에서 서하의 이름이 선명하게 튀어 나와 빗소리에 사무쳤을 때, 서하는 온몸을 전율케 하는 미미한 진동을 느꼈다.
이 미미한 마음의 울림이 무엇인지 그땐 몰랐다.
적어도, 그때는.
* * *
평소와 달리 온기가 넘치는 주방에서 지글거리고, 보글거리는 소리가 넘실거렸다. 그 소리의 주체를 향해 서하가 두 눈을 반짝이며 입을 떡 벌렸다.
“와, 너 요리 진짜 잘한다.”
집에 돌아온 후 어색한 기류를 깨보겠다며 한층 더 과장된 말투로 말했지만, 성운은 별로 개의치 않아 보였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도, 돌아온 후 집에서도 평이한 표정과 말투였다.
지금도 마찬가지로.
“재료만 있으면 다 해.”
담담하게 한마디를 내뱉고는 또 묵묵히 음식을 만들어 냈다. 휘황찬란한 손놀림은 아니었지만 딱딱, 떨어지는 손목 스냅이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었다.
서하가 눈동자에 초롱, 빛을 밝히며 그를 구경하자, 성운은 묻지도 않은 자신의 이야기를 쭉 늘어놓기 시작했다.
이 어색한 침묵이, 아무래도 서하의 것만은 아니었나 보다.
“엄마랑 둘이 살 때, 혼자 많이 해 먹었어.”
“아, 그랬구나…….”
나는 아빠랑 둘이 사는데도, 아무것도 못 하는데.
고기가 볶아지고 있던 프라이팬에서 말하고 있는 성운의 눈으로 서하의 시선이 옮겨졌다.
“요리할 때만큼은 외롭지 않았던 거 같아.”
“…….”
“혼자 있어도.”
눈동자에 투영된 성운의 모습은 길가에 혼자 우두커니 서 있는 사람처럼 외로워 보였다.
요리를 할 때만큼은 외롭지 않았다 했지만, 어쩐지 지금까지 그는 외로웠을 것만 같았다.
엄마가 없는 시간 동안 혼자서.
나 또한 아빠가 없는 시간을 집에서 혼자 보낸 것처럼 외롭지 않다 다독이며 혼자서 주문을 외운 건 아닐까.
내가 그림을 그리며 혼자 시간을 달랜 것처럼.
그도, 뭔가를 하며.
“넌 외롭지 않아?”
“어?”
혼자만의 사색에 빠져, 잠시 색감을 잃은 동공에 성운의 물음이 날아들었다.
그 목소리 덕분에 눈앞에 있는 이 아이에게 다시금 초점을 맞췄다.
흐렸던 렌즈가 선명해지는 것처럼 성운의 얼굴이 또렷하게 들어찼다.
“혼자 있으면 외롭지 않냐고.”
“외롭다는 생각을 해 본 적 없는 것 같아.”
“…….”
“그냥, 그게 너무 당연해서.”
“…….”
“그게…… 외로운 거였구나.”
깨달았다. 그 시간들이 외로운 거였구나.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마음속 깊은 메슥거림이 외로움이었구나.
작은 깨달음과 동시에, 간헐적으로 느껴지던 그 메슥거림이 속 안에서 몸집을 키워 갔다.
바보 같게도, 금세 눈물이 쏟아질 것처럼 두 눈이 붉어졌다.
‘엄마’라는 단어가 입에서 터져 나오기 일보 직전, 성운이 가스레인지 불을 끄며 입을 열었다.
“내가 볼 땐 난 아마 아빠에게 맡겨질 거야.”
“……?”
“지금보다 더 어렸을 때 이혼하셨는데, 한국에 있는 가족이라곤 아빠뿐이거든.”
갑자기 무슨 말을 시작하는 거지.
귓가를 진동하는 묵직한 음성에 터져 나오려던 울음이 멈췄다.
그는 혼잣말하듯 중얼거리며 시작했던 말을 어느새 서하가 제대로 들을 수 있도록 또박또박 내뱉었다.
“언제가 될 진 몰라. 그전까진 이 집에서…….”
“…….”
“그러니까, 잘 지내보자.”
눈동자를 한쪽으로 휘릭, 굴리던 성운은 넌지시 악수를 건넸다.
잘해보자는 의미로 양 눈썹을 들어 올리며 고개를 살짝 끄덕거렸다.
얹혀 지내는 주제에 괜한 오지랖을 부린다고 생각해도 좋았다.
그냥, 눈앞에 서 있는 이 여자애가 우는 게 싫었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서하의 주위를 돌리려는 성운의 계획이 먹혀들었다.
서하는 붉어진 눈을 몇 번이고 깜빡거리다가, 조심스레 손을 들어 올렸다.
맞잡은 부드러운 손은 너무도 따뜻했다.
손끝에서 감겨 오는 온기가, 사선으로 이어지는 그의 시선이, 풍겨 대는 분위기가.
그저, 너무 따뜻해서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가 들어 올렸다.
“그래. 잘, 지내보자. 우리.”
맞잡은 두 손은 약속이라도 한 듯 허공을 가로지르며 위아래로 흔들거렸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시작된 장난스러운 행동은 두 사람의 잇새에서 픽, 웃음이 피어나고서야 끝이 났다.
짧은 순간, 맞이한 정적 뒤로 두 사람의 목소리가 엉켜 들었다.
“아, 배고프다.”
“배고파.”
동시에, 비슷한 말을 내뱉은 게 저 두 사람도 신기했는지, 둘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성운이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며 입술을 뗐다.
“밥, 먹을까?”
“응!”
함께, 식사를 나누는 동안 우린, 거창한 이야기를 나누진 않았다.
그저 서로의 학교에 대해 이야기하며 오늘 식탁 위에 올라온 반찬들에 관한 이야기들이 이 공간을 따뜻한 온기로 물들여 갔다.
식사가 끝난 후, 서하는 직감할 수 있었다.
아직 돌아오지 않은 아빠의 밥상을 차려놓는 성운의 모습에서 알게 된 단 한 가지의 확신.
속을 알 수 없는 이 남자애가 생각보다 괜찮은 애라는 거.
그리고…….
“거기 서서 뭐해?”
“어?”
“이리 와서 좀 도와줘.”
웃는 모습이 참 예쁘다는 거.
설거지를 끝낸 서하가 부랴부랴 성운의 곁으로 다가갔다.
울지 않던 남자애는, 사실 슬퍼할 줄 아는 아이였고.
제대로 웃지 않던 남자애는, 사실 찬란한 웃음을 가진 아이였다.
밥상 위에 보자기를 덮어 놓고 나니, 식탁을 사이에 두고 성운과 두 눈을 마주했다.
여전히 짙게 자리한 검은 눈동자 한편엔 깊은 슬픔이 자리했지만, 딱 바로 지금.
이 순간만큼은 더할 나위 없는 밝은 미소를 품고 있었다.
“안 졸려?”
별로 대단하지도 않은, 평범한 질문인데.
“TV나 볼래?”
평소와 같은 음성의 높낮이와 표정인데.
“야, 강서하.”
오늘따라, 느낌이 이상하다.
“나, 나는 숙제가 있어서 먼저 들어갈게.”
서하는 속 안에서 꿈틀거리기 시작한, 마음을 집어삼키는 이 오묘한 감정 때문에 성운의 시선을 획, 피해 버리며 방으로 도망쳐 버렸다.
* * *
어릴 땐 줄곧 혼자 지내 왔었다. 부모님이 이혼을 하고, 엄마와 단둘이서 살게 된 나는 당연하게도 혼자 지내는 시간이 하루 대부분을 차지했다.
학교에선 느끼지 못했지만, 집에 찾아오면 느껴지는 적막함, 고요함.
그 느낌이 싫어, 식사준비를 줄곧 혼자 해왔다. 엄마가 집에 돌아왔을 때 배를 든든히 채울 수 있는 한 끼도 함께 준비하면서.
그 외로움이 익숙해져, 모든 감정들이 무뎌질 때쯤 엄마가 죽었다.
아직도 불분명한 그날의 기억, 뼛속까지 아리게 만들었던 삶의 순간.
장례식이 끝나고, 엄마 친구라는 한 아저씨의 손에 이끌려 도착한 집엔 나와 같은 눈을 한 여자아이가 있었다.
그래, 잘 보이고 싶었다. 나와 비슷한 처지인 여자아이와 그 아이의 아버지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고 싶었다.
슬픔을 감추고, 웃는다면 날 쉽게 미워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엄마가 죽고 슬픈 와중에도 갈 곳이 없는 내가 쫓겨날까 봐 겁이 났던 걸까.
그리고 바보 같게도, 내 슬픔을 들켜 버렸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마음이 한결 가벼워져 있었다.
나와 같은 눈을 하고, 하루 대부분을 외롭게 혼자 보냈을 그 여자아이는 실은, 나와는 조금 달랐다. 나보다 조금 더 강하고, 밝아 보였다. 재잘재잘, 말도 많고.
내게 왜 울지 않느냐는 말도 안 되는 물음을 건네긴 했지만, 나와 꼭 함께 밥을 먹어 주었고, 등굣길을 함께 했다.
단, 며칠이지만 그 애가 내게 보였던 순수한 관심들에 나는 속절없이 녹아 내렸다.
잘 보여야겠다는 흑심 없이, 모르는 사람에 대한 그 흔한 경계심도 싹 사라진 채로.
나 역시 그 애에게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단 며칠 사이에, 대체 언제부터인지 모를 모호한 시점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