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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1.
다연이 윤재민이란 남자를 처음 본 건 벚꽃이 사방에 꽃망울을 틔우던 3월 중순이었다. 본인은 전혀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심지어 알지도 못하고 있겠지만 그녀는 사방이 하얗게 보일 정도로 밝은 봄, 그만큼이나 화려한 결혼식장 안에서 윤재민이란 이름을 처음 들었다.
“생각보다 사람이 많네.”
들어가자마자 축의금부터 투척한 한 여사가 주위를 휘휘 둘러보며 말했다. 새 구두를 신느라 이미 뒤꿈치가 까진 다연이 볼멘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게, 난 안 온다니까.”
그때 다연의 나이가 스물넷, 막 대학을 졸업한 해였고 운 좋게 바로 들어간 회사에서 신명 나게 계산기를 두드리느라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르는 때이기도 했다. 그녀의 오른쪽 책상에 앉은 신 대리님께서 어제도 엊그제도 환영식을 빙자한 술자리를 권유하사 사람 속이 이래도 되나 싶을 만큼 엉망인 매일매일. 그 철옹성 같은 직장에서 처음 받은 연차가 얼굴도 모르는 양반 결혼식에 쓰이고 있으니 좋은 표정이 나올 리 만무했다.
“얼굴 안 펴? 고모네 사돈처녀 결혼식인데 당연히 와야지.”
“엄마, 고모네 사돈처녀면 그냥 남이야.”
“사돈처녀네 하객이 기운다잖아.”
“그건 그쪽 사정이고.”
아무리 화장을 해도 가려지지 않는 다크서클을 탐탁지 않은 눈으로 보던 한 여사가 솥뚜껑 같은 손을 들어 그녀의 등을 내리쳤다.
“엄마랑 사람 많은 데 가는 게 싫으면 남자 친구를 데려오라니까? 나도 다 큰 딸 얼굴도장 찍으러 데리고 다니는 거 귀찮아.”
다연의 표정이 우울하게 변했다. 듣다 보면 한숨부터 나오는 주제라 손이 먼저 움직였다.
“알았어. 알았어. 알았으니까 그만.”
귀를 틀어막아 버린 딸을 보고 한 여사가 눈을 흘겼다. 스물셋에 결혼해서 지금껏 험한 일 한 번 안 해 본 다연의 모친께서는 여자 나이 스물다섯이 넘으면 선 자리에서도 한물가는 거라고, 두 딸이 대학에 들어간 순간부터 인이 박이게 말씀해 오셨다. 얼마나 반복해서 들었는지, 이제는 숫제 귀에서 단내가 다 나고 지방으로 도망간 다경이 부러울 지경이었다.
전날 회식이 지나치게 거했던 터라 아직도 입에서 술 냄새가 나는 것 같다. 세상 무상한 얼굴로 껌을 꺼내 씹던 다연이,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고서야 고개를 돌려 한 여사를 쳐다봤다.
“아, 왜 자꾸 때려.”
“좀 잘 봐 둬. 웨딩업체에서 일하면 이런 것도 다 공부지.”
“난 계산만 잘하면 돼.”
“그렇게 나태한 정신머리 가지고 직장 생활 할 수 있겠어?”
“그래서 뭐. 시집가라고?”
“얘는 말을 해도.”
“엄마 말은 끝이 다 그래요.”
심드렁한 목소리로 답을 던진 다연이 주위를 휘휘 둘러봤다. 여기 앉아 있는 내내 잔소리를 들을 것 같아서 주례사만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는데 대관절 이놈의 행사는 언제 끝나려고 이러는지 시작할 기미조차 안 보인다. 신부 측 부모석은 여전히 공석이고 급기야는 잘 앉아 있던 신랑 측 부모까지 밖으로 나가 돌아오지 않는다. 주례도 나타나지 않고 사회를 보는 사람도 어느새 자리를 비운 걸 보니 이건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식 진행이 너무 늦는데.”
마당발이라 어지간한 친척 결혼식은 다 가 본 한 여사 역시 탐탁지 않은 어조로 한마디를 던졌다. 말투를 보아하니 잘하면 이대로 도망갈 수 있겠단 생각이 들어서 고개를 쭉 빼서 사방을 훑어봤다. 누구한테 말하고 튀어야 하나. 좌우로 눈만 굴리는 다연을 보고 한 여사가 옆구리를 찔렀다.
“나가서 고모 좀 찾아보고 와.”
남의 잔치에서 밉보이지 말라고 구두까지 사다 신기던 위인일지라도 같은 자리에 40분씩 앉아 있는 건 지겨웠던 모양이다. 이번만큼은 시키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라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섰다. 대리석이 깔린 문밖의 바닥은 식장 안보다도 더 수선스러웠다. 높은 구두를 신은 여자 두세 명이 다급하게 오가는 로비에서, 누군가 지나가듯 말했다.
“신부가 도망갔대.”
두 다리가 저절로 멈춰 서는 말. 안쪽에선 사회자가 마이크를 잡았는지 쨍한 소음과 함께 사람들의 웅성대는 소리가 커졌다. 그러나 그때 다연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건, 달아난 신부도 아니고 저 안에서 영문도 모르고 앉아 있을 한 여사도 아니고, 황금 같은 휴일을 이렇게 황당하게 날린 스스로에 대한 것도 아니었다. 고모네 사돈처녀 한다정보다 먼저 본 이름, 윤재민. 오지랖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입 안에서 참 부드럽게 구르던 이름의 주인을 먼저 찾게 됐다.
화장실을 지나고 신랑 대기실도 지나서 신부 대기실 앞에 갔을 때 턱시도를 입고 황망히 서 있는 남자를 발견했다. 그 자리에 망부석처럼 멈춰 있던 사람이, 비틀비틀 걸어 한적한 기둥 뒤로 사라질 때도 조용히 따라갔다.
“다정아.”
양복이 어색하다 싶을 만큼 앳된 얼굴이 곧 주르륵, 벽에 기댄 채 미끄러졌다. 숨죽인 목소리를 들으며, 다연도 그 자리에 멈췄다.
“다정아…….”
대리석 위에 점점이 물방울이 쌓였다. 창밖은 잔인할 정도로 화창하고 이 안에선 누군가의 깊은 바다가 소리도 없이 출렁이는 봄.
그 봄과, 윤재민이란 남자.
하늘이 두 쪽 난다 해도 절대 사라질 리 없는 기억이었다.
* * *
과장실에 있는 시계가 숫자 6을 향해 맹렬히 질주하는 중이었다. 어떤 선이건 한 줄이 되기 직전의 순간을 잘 보지 못하는 성격인 다연이 1분 정도,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그사이 정확히 일자를 그리게 된 시침과 초침을 만족스레 보다가 팔짱을 끼고 자신을 노려보는 승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웬일로 5년이나 지난 일이 꿈에 나온다 싶더니 일이 꼬여도 대판 꼬일 거란 걸 알려 주는 흉몽이었던 모양이다. 다저녁때 저렇게 도끼눈을 치뜨는 김 과장을 만나는 걸 보면.
“눈 감은 거 봐라. 편집증 있다고 확성기에 대고 소리를 지르지, 왜?”
기가 차단 얼굴로 말하는 목소리가 오늘따라 강경했다. 슬슬 불길한 예감이 들어 뒤축만 갉작이는데, 성격답게 빈말이라곤 모르는 상사께서 직구를 던져 주신다.
“이번에도 승진하기 싫단 소리 할 거면 차라리 퇴사해.”
아, 역시. 시작부터 강속구네. 이마가 띵한 기분이 들어 눈부터 피했다. 승아는 다연이 입사 초, 이쪽 부서로 옮기면서부터 옆에 끼고 가르쳤던 사람이라 이 원수 같은 성격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안다. 부장님도 한 수 접고 들어가는 성질머리라 우선은 대답 없이 뭉개 봤으나 그건 고작해야 10초도 못 갔다. 김 과장의 목소리가 슬슬 마녀처럼 변해 갔기 때문이다.
“연차대로 가는 게 제일 맘 편한 거 몰라? 밑에 직급이 올라가면 강 대리도 욕먹고 나도 욕먹는다고.”
팔짱을 낀 승아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다연은 오늘도 슬슬 말을 피하는 것으로 대화를 끝내려는 모양인데 자신은 이 복장 터지는 도돌이표를 오늘 반드시 끝낼 작정이었다. 입사한 순간부터 5년간 휴가 한 번 안 타 먹고 일에 골몰하는 걸 알면서도 불러다 놓고 혼낼 수밖에 없는 상황이 안타깝기 그지없어, 요즘 이쪽도 오지게 속이 시끄럽다. 말이 주 6일 근무이지 실상 주 7회 근무나 다름없는 상황. 업체마다 기근을 겪는 와중에도 대단한 광고 한 번 없이 고객을 불러 모으는 인재인데 저놈의 성격 때문에 앞날이 가시밭길이었다.
“그냥 하던 일 계속하고 싶어요.”
결국 먼저 백기를 든 다연이 고분고분하게 말대꾸를 한다. 승아는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받아치며 도끼눈을 치떴다.
“언제까지? 뭐 죽을 때까지 하려고? 메이크업 상담하는 자리에 쭈그렁 할망탱이가 앉아 있으면 신부들이 참도 좋아하겠네.”
다연은 물끄러미, 얼굴만 봐선 서른넷이란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김 과장을 쳐다봤다. 처음 이쪽 부서로 옮긴 다연을 보고 당시 대리였던 승아가 제일 처음 한 일은 피부 관리실과 미용실 명함을 건넨 것이었다.
‘강다연 씨 가치관은 내 알 바 아닌데, 여긴 예쁜 걸 파는 사람들이 모인 부서야. 당연히 파는 사람이 예뻐야 물건에 손이 가지.’
드레스나 헤어, 메이크업, 그리고 주얼리까지 유행에 뒤처지면 아무도 관심을 안 갖는다고 일갈한 뒤론 시즌별로 패션 잡지를 열 권도 넘게 가져다주곤 했다. 여동생인 다경이 네일 아티스트라서 기본적인 화장은 배웠는데도 그게 승아의 눈엔 영 차지 않는 모양이었다.
오늘은 그냥 보내 줄 생각이 없는지 본격적으로 자리를 깔고 앉는 승아를 보고 다연이 슬쩍 문 쪽을 쳐다봤다.
“앉아.”
그러나 옆통수에도 눈이 달린 김 과장을 이길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저 7시에 스튜디오 가 봐야 해요.”
“그 전까진 보내 줄 테니까 앉아.”
한숨을 쉬고 소파에 앉자마자 승아가 두꺼운 스크랩북을 두 권이나 내던진다.
“사무실 책장에 가져다 놔. 다들 휴대폰 들여다볼 시간에 저거 한 번씩 보라고 얘기도 하고. 특히 신 대리한테는 꼭 말해.”
다연은 파일의 첫 장만 한 번 넘겨본 뒤 한쪽에 잘 쌓았다. 승아는 회사에 있을 때면 일분일초도 허비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잔소리하려고 부른 와중에도 가서 할 일을 만들어 주는 위인이니까 마리아쥬의 상담 시스템을 이만큼 갈아엎을 수 있었던 거다.
초창기에만 하더라도 중산층만 겨냥하던 영업 방식이 지금은 고급화와 박리다매, 둘 다 챙기는 쪽으로 가기까지 근 9할 이상이 김 과장의 노력이었다. 부서가 확대되니까 힘도 세졌고 직급도 체계화되어 버렸다.
“본인이 적격이라는 건 스스로가 더 잘 알지 않아?”
실은 그래서 저 자리가 더 부담이다. 앞에 서서 가던 사람이 아예 고속도로를 뚫어 놓은 통에 뒷사람은 제 속도와는 상관없이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달려야 하는 쳇바퀴 같은 자리니까.
“연차로 따지면 신 대리님이 저보다 반년이나 빨리 입사했잖아요.”
승아의 눈에 본격적으로 짜증이 서리기 시작했다. 주제를 잘못 택했단 생각에 다연이 아차, 하는 찰나 새빨간 입술이 따발총처럼 움직인다,
“진짜 이럴래? 이게 중간에 일 년이나 쉬다 온 사람한테 떠넘길 일이야? 그리고 그럴 거면 사람 기 좀 작작 죽였어야지. 신 대리가 자기 무서워서 일이나 제대로 하겠어?”
“신 대리님이 저 무서워서 할 일 못 할 성격인가요, 어디.”
다연이 어색하게 웃었다. 빌어먹을 놈의 입방정. 이 대화에 신윤정 대리를 끌고 들어오면 죽도 밥도 안 될 걸 알고 있었으면서 왜 얘길 꺼냈을까. 승아는 최근 신 대리 이름만 들어도 미간을 찌푸리곤 했다. 부서 안에서 브랜드나 유행을 읽는 게 제일 빠삭한데도 그 장점이 다 깎여 나갈 만큼 섬세함이 부족해서였다.
가뜩이나 부유한 집에서 태어나 일에 대한 목적의식을 심어 주기가 힘들고 거기다가 자존심도 세서 남이 하는 말, 특히나 본인보다 밑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하는 말은 귓등으로 흘려버리고 마는 타입이다.
그런 사람이 상사가 된다고 생각하면 벌써부터 숨이 턱턱 막히는 것 같지만 그렇다고 대신 책임질 자신도 없었다. 승아가 천년만년 과장 해 먹을 줄 알고 이 부서에 뼈를 묻기로 한 건데 왜 갑자기 공석이 되는 건지, 사실은 다연이 제일 울고 싶은 기분이다.
“긴말 필요 없고, 난 두 달 안으로 인수인계 끝낼 거야.”
“…….”
“승진 아니면 사표야. 어차피 신 대리가 과장 되면 자기 발로 나갈 거 아냐.”
속을 빤히 읽어 내는 걸 듣고 우울하게 화분만 쳐다봤다. 저 말 그대로, 윤정이 과장이 되면 아마 회사 생활을 계속하는 데 어마어마한 애로 사항이 꽃필 듯했다. 과장 대리 직함을 달기도 전인데 어디서 무슨 냄새를 맡았는지 벌써부터 못 잡아먹어 안달인 게 보였다. 1년 먼저 들어왔다는 이유로 갖은 꼰대질을 다 하는 사람과 앞으로 두 달씩이나 기 싸움을 할 걸 생각하니까 피로가 몰려왔다.
“이제 나가 봐. 7시까지 스튜디오 가야 한다며.”
자리에서 일어난 다연이 꾸벅, 인사를 하고 밖으로 향했다. 그 뒷모습과 스치듯 들어온 성후가 안경테를 밀어 올렸다.
“방금 나간 거 강 대리 맞지?”
“어.”
“어깨가 왜 저렇게 축 처졌어? 혼냈어?”
“혼날 일도 아닌데 혼나는 게 쟤 특기잖아.”
1.
다연이 윤재민이란 남자를 처음 본 건 벚꽃이 사방에 꽃망울을 틔우던 3월 중순이었다. 본인은 전혀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심지어 알지도 못하고 있겠지만 그녀는 사방이 하얗게 보일 정도로 밝은 봄, 그만큼이나 화려한 결혼식장 안에서 윤재민이란 이름을 처음 들었다.
“생각보다 사람이 많네.”
들어가자마자 축의금부터 투척한 한 여사가 주위를 휘휘 둘러보며 말했다. 새 구두를 신느라 이미 뒤꿈치가 까진 다연이 볼멘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게, 난 안 온다니까.”
그때 다연의 나이가 스물넷, 막 대학을 졸업한 해였고 운 좋게 바로 들어간 회사에서 신명 나게 계산기를 두드리느라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르는 때이기도 했다. 그녀의 오른쪽 책상에 앉은 신 대리님께서 어제도 엊그제도 환영식을 빙자한 술자리를 권유하사 사람 속이 이래도 되나 싶을 만큼 엉망인 매일매일. 그 철옹성 같은 직장에서 처음 받은 연차가 얼굴도 모르는 양반 결혼식에 쓰이고 있으니 좋은 표정이 나올 리 만무했다.
“얼굴 안 펴? 고모네 사돈처녀 결혼식인데 당연히 와야지.”
“엄마, 고모네 사돈처녀면 그냥 남이야.”
“사돈처녀네 하객이 기운다잖아.”
“그건 그쪽 사정이고.”
아무리 화장을 해도 가려지지 않는 다크서클을 탐탁지 않은 눈으로 보던 한 여사가 솥뚜껑 같은 손을 들어 그녀의 등을 내리쳤다.
“엄마랑 사람 많은 데 가는 게 싫으면 남자 친구를 데려오라니까? 나도 다 큰 딸 얼굴도장 찍으러 데리고 다니는 거 귀찮아.”
다연의 표정이 우울하게 변했다. 듣다 보면 한숨부터 나오는 주제라 손이 먼저 움직였다.
“알았어. 알았어. 알았으니까 그만.”
귀를 틀어막아 버린 딸을 보고 한 여사가 눈을 흘겼다. 스물셋에 결혼해서 지금껏 험한 일 한 번 안 해 본 다연의 모친께서는 여자 나이 스물다섯이 넘으면 선 자리에서도 한물가는 거라고, 두 딸이 대학에 들어간 순간부터 인이 박이게 말씀해 오셨다. 얼마나 반복해서 들었는지, 이제는 숫제 귀에서 단내가 다 나고 지방으로 도망간 다경이 부러울 지경이었다.
전날 회식이 지나치게 거했던 터라 아직도 입에서 술 냄새가 나는 것 같다. 세상 무상한 얼굴로 껌을 꺼내 씹던 다연이,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고서야 고개를 돌려 한 여사를 쳐다봤다.
“아, 왜 자꾸 때려.”
“좀 잘 봐 둬. 웨딩업체에서 일하면 이런 것도 다 공부지.”
“난 계산만 잘하면 돼.”
“그렇게 나태한 정신머리 가지고 직장 생활 할 수 있겠어?”
“그래서 뭐. 시집가라고?”
“얘는 말을 해도.”
“엄마 말은 끝이 다 그래요.”
심드렁한 목소리로 답을 던진 다연이 주위를 휘휘 둘러봤다. 여기 앉아 있는 내내 잔소리를 들을 것 같아서 주례사만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는데 대관절 이놈의 행사는 언제 끝나려고 이러는지 시작할 기미조차 안 보인다. 신부 측 부모석은 여전히 공석이고 급기야는 잘 앉아 있던 신랑 측 부모까지 밖으로 나가 돌아오지 않는다. 주례도 나타나지 않고 사회를 보는 사람도 어느새 자리를 비운 걸 보니 이건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식 진행이 너무 늦는데.”
마당발이라 어지간한 친척 결혼식은 다 가 본 한 여사 역시 탐탁지 않은 어조로 한마디를 던졌다. 말투를 보아하니 잘하면 이대로 도망갈 수 있겠단 생각이 들어서 고개를 쭉 빼서 사방을 훑어봤다. 누구한테 말하고 튀어야 하나. 좌우로 눈만 굴리는 다연을 보고 한 여사가 옆구리를 찔렀다.
“나가서 고모 좀 찾아보고 와.”
남의 잔치에서 밉보이지 말라고 구두까지 사다 신기던 위인일지라도 같은 자리에 40분씩 앉아 있는 건 지겨웠던 모양이다. 이번만큼은 시키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라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섰다. 대리석이 깔린 문밖의 바닥은 식장 안보다도 더 수선스러웠다. 높은 구두를 신은 여자 두세 명이 다급하게 오가는 로비에서, 누군가 지나가듯 말했다.
“신부가 도망갔대.”
두 다리가 저절로 멈춰 서는 말. 안쪽에선 사회자가 마이크를 잡았는지 쨍한 소음과 함께 사람들의 웅성대는 소리가 커졌다. 그러나 그때 다연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건, 달아난 신부도 아니고 저 안에서 영문도 모르고 앉아 있을 한 여사도 아니고, 황금 같은 휴일을 이렇게 황당하게 날린 스스로에 대한 것도 아니었다. 고모네 사돈처녀 한다정보다 먼저 본 이름, 윤재민. 오지랖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입 안에서 참 부드럽게 구르던 이름의 주인을 먼저 찾게 됐다.
화장실을 지나고 신랑 대기실도 지나서 신부 대기실 앞에 갔을 때 턱시도를 입고 황망히 서 있는 남자를 발견했다. 그 자리에 망부석처럼 멈춰 있던 사람이, 비틀비틀 걸어 한적한 기둥 뒤로 사라질 때도 조용히 따라갔다.
“다정아.”
양복이 어색하다 싶을 만큼 앳된 얼굴이 곧 주르륵, 벽에 기댄 채 미끄러졌다. 숨죽인 목소리를 들으며, 다연도 그 자리에 멈췄다.
“다정아…….”
대리석 위에 점점이 물방울이 쌓였다. 창밖은 잔인할 정도로 화창하고 이 안에선 누군가의 깊은 바다가 소리도 없이 출렁이는 봄.
그 봄과, 윤재민이란 남자.
하늘이 두 쪽 난다 해도 절대 사라질 리 없는 기억이었다.
* * *
과장실에 있는 시계가 숫자 6을 향해 맹렬히 질주하는 중이었다. 어떤 선이건 한 줄이 되기 직전의 순간을 잘 보지 못하는 성격인 다연이 1분 정도,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그사이 정확히 일자를 그리게 된 시침과 초침을 만족스레 보다가 팔짱을 끼고 자신을 노려보는 승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웬일로 5년이나 지난 일이 꿈에 나온다 싶더니 일이 꼬여도 대판 꼬일 거란 걸 알려 주는 흉몽이었던 모양이다. 다저녁때 저렇게 도끼눈을 치뜨는 김 과장을 만나는 걸 보면.
“눈 감은 거 봐라. 편집증 있다고 확성기에 대고 소리를 지르지, 왜?”
기가 차단 얼굴로 말하는 목소리가 오늘따라 강경했다. 슬슬 불길한 예감이 들어 뒤축만 갉작이는데, 성격답게 빈말이라곤 모르는 상사께서 직구를 던져 주신다.
“이번에도 승진하기 싫단 소리 할 거면 차라리 퇴사해.”
아, 역시. 시작부터 강속구네. 이마가 띵한 기분이 들어 눈부터 피했다. 승아는 다연이 입사 초, 이쪽 부서로 옮기면서부터 옆에 끼고 가르쳤던 사람이라 이 원수 같은 성격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안다. 부장님도 한 수 접고 들어가는 성질머리라 우선은 대답 없이 뭉개 봤으나 그건 고작해야 10초도 못 갔다. 김 과장의 목소리가 슬슬 마녀처럼 변해 갔기 때문이다.
“연차대로 가는 게 제일 맘 편한 거 몰라? 밑에 직급이 올라가면 강 대리도 욕먹고 나도 욕먹는다고.”
팔짱을 낀 승아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다연은 오늘도 슬슬 말을 피하는 것으로 대화를 끝내려는 모양인데 자신은 이 복장 터지는 도돌이표를 오늘 반드시 끝낼 작정이었다. 입사한 순간부터 5년간 휴가 한 번 안 타 먹고 일에 골몰하는 걸 알면서도 불러다 놓고 혼낼 수밖에 없는 상황이 안타깝기 그지없어, 요즘 이쪽도 오지게 속이 시끄럽다. 말이 주 6일 근무이지 실상 주 7회 근무나 다름없는 상황. 업체마다 기근을 겪는 와중에도 대단한 광고 한 번 없이 고객을 불러 모으는 인재인데 저놈의 성격 때문에 앞날이 가시밭길이었다.
“그냥 하던 일 계속하고 싶어요.”
결국 먼저 백기를 든 다연이 고분고분하게 말대꾸를 한다. 승아는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받아치며 도끼눈을 치떴다.
“언제까지? 뭐 죽을 때까지 하려고? 메이크업 상담하는 자리에 쭈그렁 할망탱이가 앉아 있으면 신부들이 참도 좋아하겠네.”
다연은 물끄러미, 얼굴만 봐선 서른넷이란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김 과장을 쳐다봤다. 처음 이쪽 부서로 옮긴 다연을 보고 당시 대리였던 승아가 제일 처음 한 일은 피부 관리실과 미용실 명함을 건넨 것이었다.
‘강다연 씨 가치관은 내 알 바 아닌데, 여긴 예쁜 걸 파는 사람들이 모인 부서야. 당연히 파는 사람이 예뻐야 물건에 손이 가지.’
드레스나 헤어, 메이크업, 그리고 주얼리까지 유행에 뒤처지면 아무도 관심을 안 갖는다고 일갈한 뒤론 시즌별로 패션 잡지를 열 권도 넘게 가져다주곤 했다. 여동생인 다경이 네일 아티스트라서 기본적인 화장은 배웠는데도 그게 승아의 눈엔 영 차지 않는 모양이었다.
오늘은 그냥 보내 줄 생각이 없는지 본격적으로 자리를 깔고 앉는 승아를 보고 다연이 슬쩍 문 쪽을 쳐다봤다.
“앉아.”
그러나 옆통수에도 눈이 달린 김 과장을 이길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저 7시에 스튜디오 가 봐야 해요.”
“그 전까진 보내 줄 테니까 앉아.”
한숨을 쉬고 소파에 앉자마자 승아가 두꺼운 스크랩북을 두 권이나 내던진다.
“사무실 책장에 가져다 놔. 다들 휴대폰 들여다볼 시간에 저거 한 번씩 보라고 얘기도 하고. 특히 신 대리한테는 꼭 말해.”
다연은 파일의 첫 장만 한 번 넘겨본 뒤 한쪽에 잘 쌓았다. 승아는 회사에 있을 때면 일분일초도 허비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잔소리하려고 부른 와중에도 가서 할 일을 만들어 주는 위인이니까 마리아쥬의 상담 시스템을 이만큼 갈아엎을 수 있었던 거다.
초창기에만 하더라도 중산층만 겨냥하던 영업 방식이 지금은 고급화와 박리다매, 둘 다 챙기는 쪽으로 가기까지 근 9할 이상이 김 과장의 노력이었다. 부서가 확대되니까 힘도 세졌고 직급도 체계화되어 버렸다.
“본인이 적격이라는 건 스스로가 더 잘 알지 않아?”
실은 그래서 저 자리가 더 부담이다. 앞에 서서 가던 사람이 아예 고속도로를 뚫어 놓은 통에 뒷사람은 제 속도와는 상관없이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달려야 하는 쳇바퀴 같은 자리니까.
“연차로 따지면 신 대리님이 저보다 반년이나 빨리 입사했잖아요.”
승아의 눈에 본격적으로 짜증이 서리기 시작했다. 주제를 잘못 택했단 생각에 다연이 아차, 하는 찰나 새빨간 입술이 따발총처럼 움직인다,
“진짜 이럴래? 이게 중간에 일 년이나 쉬다 온 사람한테 떠넘길 일이야? 그리고 그럴 거면 사람 기 좀 작작 죽였어야지. 신 대리가 자기 무서워서 일이나 제대로 하겠어?”
“신 대리님이 저 무서워서 할 일 못 할 성격인가요, 어디.”
다연이 어색하게 웃었다. 빌어먹을 놈의 입방정. 이 대화에 신윤정 대리를 끌고 들어오면 죽도 밥도 안 될 걸 알고 있었으면서 왜 얘길 꺼냈을까. 승아는 최근 신 대리 이름만 들어도 미간을 찌푸리곤 했다. 부서 안에서 브랜드나 유행을 읽는 게 제일 빠삭한데도 그 장점이 다 깎여 나갈 만큼 섬세함이 부족해서였다.
가뜩이나 부유한 집에서 태어나 일에 대한 목적의식을 심어 주기가 힘들고 거기다가 자존심도 세서 남이 하는 말, 특히나 본인보다 밑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하는 말은 귓등으로 흘려버리고 마는 타입이다.
그런 사람이 상사가 된다고 생각하면 벌써부터 숨이 턱턱 막히는 것 같지만 그렇다고 대신 책임질 자신도 없었다. 승아가 천년만년 과장 해 먹을 줄 알고 이 부서에 뼈를 묻기로 한 건데 왜 갑자기 공석이 되는 건지, 사실은 다연이 제일 울고 싶은 기분이다.
“긴말 필요 없고, 난 두 달 안으로 인수인계 끝낼 거야.”
“…….”
“승진 아니면 사표야. 어차피 신 대리가 과장 되면 자기 발로 나갈 거 아냐.”
속을 빤히 읽어 내는 걸 듣고 우울하게 화분만 쳐다봤다. 저 말 그대로, 윤정이 과장이 되면 아마 회사 생활을 계속하는 데 어마어마한 애로 사항이 꽃필 듯했다. 과장 대리 직함을 달기도 전인데 어디서 무슨 냄새를 맡았는지 벌써부터 못 잡아먹어 안달인 게 보였다. 1년 먼저 들어왔다는 이유로 갖은 꼰대질을 다 하는 사람과 앞으로 두 달씩이나 기 싸움을 할 걸 생각하니까 피로가 몰려왔다.
“이제 나가 봐. 7시까지 스튜디오 가야 한다며.”
자리에서 일어난 다연이 꾸벅, 인사를 하고 밖으로 향했다. 그 뒷모습과 스치듯 들어온 성후가 안경테를 밀어 올렸다.
“방금 나간 거 강 대리 맞지?”
“어.”
“어깨가 왜 저렇게 축 처졌어? 혼냈어?”
“혼날 일도 아닌데 혼나는 게 쟤 특기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