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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아주 지긋지긋하다고 쓴 소리를 뱉는 승아의 얼굴이 어두워서 달래듯 말하는 성후의 목소리도 걱정이 서렸다.

“강 대리한테 아직 말 안 했어?”

“못 했어. 들으면 고민 한번 못 해 보고 덥석 받을 것 같아서.”

“그게 낫지 않나?”

“내 사정 때문에 괜히 닦달하는 것 같으니까 그렇지.”

“닦달해야지. 배 나온 채로 드레스 입을 거야?”

“세상에, 그거 댁이 할 말은 아니지 않아?”

적반하장이 따로 없는 말에 절로 눈에서 서릿발이 날렸다. 상황을 이렇게 만든 원흉인 성후를 노려보자 본인도 찔리는 구석이 있는지 고개를 슥, 돌린다. 그 꼴에 결국 승아만 체념하듯 냉수를 벌컥벌컥 마셨다.

“시간 좀 줘. 강 대리 본인도 스스로 뭐가 문제인지 아니까 안 하겠다고 버티는 거야.”

한동안 침묵하던 승아가 결국 답답함을 못 이기고 먼저 말했다. 부서가 자리를 잡는 동안 많은 사람이 그만두고 이직하느라 난리였는데 그 사이에서 묵묵히 5년이나 일했던 건 다연뿐이었다. 가뜩이나 하는 일이 많은 와중에 틈틈이 공부해서 이것저것 자격증을 딴 것도 다연뿐이고. 무엇보다 비혼주의자라 움직일 일이 없어서 일찌감치 후임으로 찜해 놨더니 저놈의 성격이 발목을 잡는다.

“알면 고쳐야지.”

고민하는 승아의 곁에서 성후가 태평하게 말했다. 남 일이라고 오지게도 쉽게 말한단 생각이 들어 승아의 말투도 저절로 퉁명스럽게 변했다.

“고칠 수 있으면 벌써 고쳤게.”

“문제가 뭐데.”

“일 욕심이 너무 많아. 그래서 정이 없어.”

승아의 목소리에 맥이 탁 풀렸다. 그 소리를 들은 성후의 표정이 더더욱 이해가 안 간다는 쪽으로 변한다.

“일 꼼꼼히 하는 것도 문제가 돼?”

“고객 별점이 10점에 수렴하는 직장 동료는 너무 재수 없잖아.”

5년간 사내 홈페이지에 올라온 후기 중 다연과 동행한 신부들이 올린 게 백 건이 넘는다. 사진까지 첨부해 가면서 공을 들여 후기를 작성해 주는 신부들도 많았다. 결혼 준비 하다가 신랑 신부끼리 싸우는 건 다반사고 웨딩업체와도 손발이 안 맞아 고소가 비일비재한 마당에 이 정도면 미담에 가까운 사례였다. 직업의 목적을 봉사와 희생으로 아는 다연의 삐뚤어진 가치관이 자신에겐 이렇게나 고마울 수가 없었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그녀가 다연의 상사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하여간 내가 마흔 전에 혈압 약 먹으면 다 강 대리 탓이야.”

사람들이 막 바뀌던 초창기엔 없던 갈등이 3, 4년 차들이 생기니까 슬슬 시작됐다. 다연은 상사와 고객한테 예쁨 받고 동기들이랑 못 지내는 유형의 전형이었다. 일 처리 좀 늦어도 되니까 사람 사이를 유연하게 하는 재능이 필요한 마당에 본인에게 들이대는 잣대도 꺾지 못하고 있다. 안 그래도 이직률 많은 직장에서 그런 상사는 재앙이나 다름없었다. 어려서 티가 안 나는 거지, 나중 되면 지금의 딱 두 배만큼 큰 폭탄이 매일매일 터질 게 눈에 훤했다.

“시간이 해결해 주겠지. 어찌 됐건 밀어붙일 생각이잖아.”

성후의 손이 단단하게 뭉친 그녀의 어깨를 주물렀다. 긴 한숨을 쉬며 지끈대는 이마를 짚는 걸 보더니 걱정스런 목소리가 뒤를 따른다.

“근데 그럼 강 대리 일 양 좀 줄여야 하는 거 아니야? 인수인계하려면 지금보다 더 바쁠 텐데.”

“그 화상이 줄이란다고 줄이겠어?”

“그건 그렇네.”

흠, 하고 숨을 삼킨 성후가 눈썹을 살짝 찡그린 채 승아를 바라봤다.

“두 달 정도 두고 본다고 했던가?”

“응.”

“그동안만이라도 괜찮으면 인턴 하나 붙여 줄까?”

철없는 성후의 말에 승아가 대놓고 인상을 썼다.

“걔 신입까지 받을 정신 없어.”

“말이 인턴이지, 일하다 온 애라 경력직이랑 똑같아. 나이도 많고.”

“몇 살인데?”

“서른.”

“서른?”

“뭘 그렇게 놀라?”

“당연히 놀라지. 그게 무슨 인턴이야?”

“말했잖아. 경력직이랑 똑같다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상전 모시고 살 일 있어?”

일찍 입사해서 늦게까지 남았다는 죄로 나이 많은 여자들의 텃세를 감당하며 사는 다연이다. 써먹으라고 붙여 줘 봤자 자기보다 연상인 걸 알면 불편해할 게 뻔하다.

“걔가 사정이 있어서 오래 쉬느라 그래.”

“걔? 뭐야, 아는 사이네? 낙하산이야?”

“낙하산이든 뭐든 도움 많이 되는 놈이면 됐지.”

“어라, 심지어 남자?”

끝없는 추궁에 곤란해진 성후가 뒷목을 주무르며 살짝 옆을 쳐다봤다. 말을 하면 할수록 수렁이다. 안 그래도 무서운 고양이 눈이 딱 두 배 더 앙칼지게 변해 자신을 노려보자 오금이 다 저렸다.

“진짜 일은 잘한다니까.”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를 들은 승아가 코웃음을 쳤다.

“고맙지만 사양할게. 서른이나 잡수신 경력직 인턴은 너희 부서에서 알아서 처리해.”

결국 축객령을 듣고 나서는 성후의 발걸음이 무거웠다. 요즘 들어 되는 일이 없는 건 이 방에서 앞서 나간 다연이나 자신이나 매한가지인 것 같았다.



* * *



뻐근한 어깨로 자리에 돌아온 다연이 탕비실 쪽에서 웃음소리가 들리는 걸 듣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 안에 몇 명이 있건 그중 하나는 신윤정 대리일 것이라는 데 오른쪽 손모가지를 걸 수 있었다. 하는 꼴을 보아하니 오늘도 정시에 퇴근하려고 각을 잡고 있는 것 같은데 인센티브 포기하고 자기 시간을 갖겠다는 의지는 개인의 자유라지만 저녁 시간만 가능하다는 고객은 절대 안 받겠다고 말하는 건 주변 동료들에게 민폐였다. 엊그제는 9시, 어제는 8시 반, 오늘은 7시가 넘는 시간까지 미팅이 잡혀 있는 다연이 점점 마르다 못해 핼쑥해지는 지금처럼.

시계를 보니 벌써 6시 40분이었다. 한창 차가 막힐 시간이라 짐도 챙기지 못하고 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때맞춰 탕비실에서 나오던 신 대리가 다연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뜬다.

“강 대리 퇴근 안 해?”

“아직 일이 하나 남아서요.”

“적당히 해. 누가 보면 강 대리 혼자 일하는 줄 알겠다.”

다연은 표정이 무너지지 않게 애를 쓰면서 웃었다. 지난주, 백 년 만에 하루 야근한 걸 가지고 이달의 웃는 얼굴이란 포상금까지 타 먹은 인간은 어디의 누구시더라. 하는 짓도 밉상인데 하는 말은 더 밉상이다. 나이 차가 나니까 똑같은 대리 직함을 달았어도 저쪽은 반말, 이쪽은 존댓말 하는 건 이해를 해도 아랫사람 부리듯이 충고에 지적질을 하는 건 참아지질 않는다.

“그러게요. 대리님은 일 벌써 끝나셨나 봐요.”

벌써, 라는 말에 강약을 실은 것을 느꼈는지 신 대리의 표정이 샐쭉하게 변한다. 더는 실랑이하고 있을 시간도 없어서 옆을 지나치는 사이 속삭이듯 중얼대는 소리가 귓바퀴를 잡았다.

“퇴근 시간을 다 같이 지켜 줘야지 혼자서 저러면 어쩌라는 거야. 일 많이 한다고 유세하나.”

이마 옆에 핏대가 서려는 걸 참으며 소리 내어 걸어 나간 다연이 차에 올라타자마자 핸들에 머리를 박았다. 아, 진짜. 저 밉상을 어떻게 조져야 하지. 김 과장이 자리 비우는 일이 많아져서 대신 일 처리를 하다 보니까 단점이 더 많이 보인다. 나이 먹으니까 남 욕하는 것도 피곤한 일이라 되도록 입을 닫고 살았는데 반년간 신 대리가 저지른 사고를 수습하느라 스스로도 감정이 많이 상했던 모양이다.

“내가 진짜 두 살만 위였어도…….”

기어를 바꾸며 부드럽게 차를 출발하면서도 입 안으로 질겅질겅, 나오지 못한 말을 껌처럼 씹었다. 여기도 오래된 업체라 은근히 꼰대 기질이 남았다. 일을 잘하는 것보다 회사에서 오래 굴러먹은 사람이 신의가 있다고 생각해서 기본급을 그쪽으로 몰아주다 보니 도통 젊은 애들 의욕이 안 생긴다. 다 같이 앉은 회식 자리에서 은근히 연차 강조하면서 상석에 앉는 것도 너무 꼴불견이고.

결국 5분 지각이란 오점을 남기고 그 자리에서 기다리던 예비 신부의 비위까지 살살 맞춰 촬영을 끝냈을 땐 10시를 훌쩍 넘긴 시간이었다. 뱃가죽이 등에 붙은 수준이라 편의점으로 차를 몰던 다연의 눈앞에, 버스 정류장에 앉은 지원이 보였다.

“지금 집에 가?”

창문을 내리자 아직 앳된 기가 남은 얼굴이 이쪽을 본다. 귀에 무심하게 꽂고 있는 이어폰도 그렇고, 대강 입은 트레이닝복도 그렇고, 겉만 봐선 고시 준비하는 학생 같은 몰골이었다. 저 꼴을 승아가 봤다면 불호령이 떨어져도 백 번은 떨어졌을 거다.

“태워다 주실 거예요?”

뒤에서 버스가 오는 걸 가리키며 불퉁하게 묻는다. 다연이 차 문을 열었다. 옆 좌석에 냉큼 올라탄 지원의 손에 큼지막한 비닐봉지가 들려 있었다. 살짝 벌어진 안을 보니 삼각김밥과 탄산음료만 한가득이다.

“그게 저녁이야?”

“네.”

“오늘 휴무일인데 잘 챙겨 먹지.”

“혼자서는 입맛도 없어요.”

“너 그러다 스물일곱 지나면 훅 간다.”

“그럼 대리님이 저녁 사 주실래요? 같이 먹어 드릴게요.”

다연이 피식 웃었다. 하여간 무뚝뚝한 얼굴로 밥 타 먹는 솜씨가 선수 저리 가라다. 팍팍한 사회생활 중에 이런 후배 하나 있는 것도 복이란 생각에 지갑이 저절로 열렸다.

“뭐 먹고 싶은데.”

지원은 대학교 4학년 때부터 웨딩 플래너 자격시험을 준비해서 졸업하자마자 회사에 들어온 후배였다. 무신경한 데가 있어서 고객들 비위는 잘 못 맞춰도 웨딩박람회나 이벤트 같은 굵직한 일들을 처리하는 게 능수능란했다. 대학 때 경리 알바를 오래 했다더니 돈 쪽으로 머리 굴리는 게 비상해서 승아가 눈여겨보는 인재였다.

“고기 사 주시면 안 돼요?”

슬쩍 운을 띄우는 걸 보고 피식 웃은 다연이 늦게까지 하는 삼겹살집으로 차를 몰았다. 쉬는 날이면 헬스장에서 사는 다연과 달리 지원은 늘 책상 앞에만 앉아 있는 인종답게 손목이 아기 것처럼 가늘다. 없던 살림도 쥐어짜서 거둬 먹이고 싶게 생겼으므로 가자마자 3인분을 시키는 것에도 별 거부감이 안 들었다.

“잘 먹겠습니다아.”

지원이 볼이 터지도록 쌈을 싸 먹는 동안 다연은 그 앞으로 된장국이며 자잘한 반찬을 밀어 줬다. 입을 꾹 닫고 오물거리는 얼굴이 아직도 풋풋하다. 얘는 대체 언제 클까.

“많이 먹고 빨리 커서 내 일 좀 나눠 가.”

제법 피곤이 묻은 말에 지원의 짙은 눈썹이 살짝 올라간다.

“지금까지 일하신 거예요?”

“응.”

“대리님 월요일에도 밤까지 일하셨잖아요.”

“그러게.”

그렇게 몸 바쳐 일해 봐야 야근 수당도 안 챙겨 주는 회사라고 혀를 차는 동안 지원이 인상을 썼다.

“그러지 말고 대리님도 신 대리님처럼 하세요.”

“어떻게?”

“적당히 하시라고요. 적당히 휴일도 챙기고, 인센티브도 잘 챙겨 먹고, 주위 사람한테 일 미루기도 하고.”

“스읍, 까분다.”

이마를 툭 밀면서 말을 돌리긴 했어도 까마득한 후배한테 저런 충고를 받을 정도로 호구처럼 살았나 싶어 고민이 된다. 다연은 사이다를 콸콸 부은 맥주잔을 든 채, 전투적으로 밥을 먹는 지원의 모습을 안주 삼아 지난 반년을 돌이켜 봤다.

직장 생활 시작할 때만 해도 업무가 제일 힘든 것일 줄 알았는데 사회생활이 어지간한 업무 왼뺨, 오른뺨을 다 친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여자끼리 있으면 참 묘한 게, 아무리 직장이어도 기가 센 사람 밑으로 다시 모임이 만들어진다. 꼭 고등학교 때 사람 모아서 친목질 하는 것처럼. 불행히도 다연이 속한 팀에선 신 대리가 그런 걸 참 잘하는 사람이었다. 집에 돈이 꽤 많아서 일 안 해도 된다는 말을 달고 사니까 빈정 상하는 한편 또 그런 걸 동경하는 여자들이 꼬이기도 했다.

지원이 1인분을 더 시키는 것을 보고 다연도 사이다 한 병을 더 시켰다. 신 대리는 입사 후 2년간 일을 하다가 1년을 나가 있었고 그 후에 경력직으로 다시 입사했다. 남자는 결혼하고 싶어 했는데 신 대리가 아직 일을 더 하고 싶다고 설득하고는 다시 들어왔다고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일손이 딸려서 고맙다고 생각했던 게 제발 좀 결혼해서 나가 달라는 바람으로 바뀌기까지 딱 반년 걸렸다. 신 대리만 없어도 나머지는 기가 약한 인종이라 잡을 자신이 있는데 그 미꾸라지가 물을 다 흐리고 다닌다. 다연이 일에 미친 사람처럼 보이고, 또 그래서 다연이 과장이 되면 컨설팅부 일대가 폭정과 탄압으로 인한 쑥대밭으로 변할 것처럼 보이는 것도 다 그 주둥아리의 솜씨였다.

이제는 이쪽도 오기가 생겨서 진짜 과장 자리에 오르면, 다른 사람은 몰라도 신 대리한테는 공포 정치가 뭔지 제대로 보여 주려고 이를 갈고 있다. 그걸 생각하니 승진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지만, 승진을 하는 순간 자신이 이 일을 택한 이유가 아예 사라져 버릴까 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중이다.

“대리님 안 드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