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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된장찌개에 밥까지 야무지게 비벼 먹던 지원이 묻는다. 다연이 고개를 젓자 다시 밥그릇에 집중하는 눈동자. 저렇게 마른 몸 어디에 블랙홀 같은 위장을 숨겨 놓은 건지, 누가 보면 석 달 열흘 굶은 사람처럼 먹어 댄다. 열심히 먹고 열심히 사는 지원이 기특해서 계란찜도 하나 시켜 줬다.
‘요즘 시대에 누가 대학 때 낭만 찾고 청춘 찾아요.’
최종 면접을 보고 나서 첫 회식을 할 때, 이력서에 빼곡하게 적혀 있는 알바 경력이 다 진짜냐고 묻는 승아에게 지원이 저런 말을 했다. 졸업한 지 한 달밖에 안 된 여대생 입에서 나온 말치곤 참 건조하기 짝이 없었다.
‘요즘 애들 무섭다, 강 대리.’
승아는 폭탄주를 만들면서 분위기를 띄우는 지원의 모습을 그렇게 한 줄로 평했다.
“밥 다 먹었으면 일어나자.”
지원의 숟가락질이 멈춘 것을 본 다연이 슬슬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말했다. 밥을 다 먹고 나오니 어느새 11시. 시침이 시계의 끝으로 넘어가는 걸 보고 아주 기함을 했다. 하루하루가 이렇게 미치도록 빨리 갈 수가 있나. 내일은 오후까지 비몽사몽이겠단 생각에 기합을 한번 넣는 동안 지원이 딱 붙어서 따라왔다.
“저 대리님 줄 탈래요.”
시동을 걸던 다연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얼굴로 돌아봤다.
“여기 줄이 어디 있어.”
“있어요. 대리님 줄, 아님 신 대리님 줄.”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밥값이 6만 원이나 나온 데다 커피는 자기가 사겠다는 것도 말렸더니 감동했나 보다.
“그냥 신 대리님 줄 타.”
짧게 답한 뒤, 답답한 마음을 가리려 창문을 내렸다. 들어온 지 1년밖에 안 된 신입이 벌써부터 줄타기를 할 만큼 살얼음판이 된 건가. 김 과장 하나가 부재할 뿐인데 개판 5분 전이 따로 없었다.
“저 신 대리님 싫은데요.”
딴생각을 하다가 지원의 목소리에 뒤를 돌아봤다. 못 본 사이 여기다도 한 방 갈기셨나 싶을 만큼 날이 선 어조였다.
“왜?”
‘어차피 그 산더미 같은 뒤처리를 내가 하지, 네가 하니.’라는 표정으로 말하는 다연을 보고 지원이 왜 모르냐는 투로 답했다.
“길만 걸어도 남자들이 줄줄 따른다고 신부 앞에서 푼수를 떠는데 누가 좋아해요? 얼굴도 다 뜯어고친 것 같아. 화장 떡칠한 것만 벗기면 솔직히 대리님이 훨씬 나아요.”
쌓인 건 이쪽이 더 클 것 같은데 욕은 지원이 한다. 말려도 들을 것 같지가 않아 사람 하나를 옹골차게 씹어 대는 걸 연료 삼아 골목골목을 누볐다. 집 앞에 내릴 때까지 투덜대는 마른 몸을 내일 보잔 말로 들여보냈을 땐, 이쪽도 침대 생각이 간절할 만큼 피곤했다. 그러나 뻑뻑한 눈을 한 번 누르고 다시 출발하려고 할 때 휴대폰이 울렸다.
[언니, 모레 교회 언니 차례다? 까먹지 마.]
메시지를 확인한 다연이 또 한 번 핸들에 머리를 박았다. 상사가 닦달하고 동료가 질투하고 엄마는 결혼하라고 못 잡아먹어 안달인 걸 보면 올해가 아홉수가 맞긴 맞는 모양이었다.
* * *
“그럼 주기도문으로 예배를 끝마치겠습니다.”
주말 교회의 풍경은 언제나 그렇듯 왁자지껄한 한편, 참 엄숙하기 짝이 없는 분위기로 흘러가는 중이었다. 목사님이 경건한 마무리를 하실 때까지 눈을 뜬 채 졸고 있던 다연이 옆에서 아예 흰자를 보이고 있는 다경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입가에 침 흘린 자국만 없길 바라며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잘 해 봐야 한 달에 두 번밖에 없는 휴일을 고이 삶아 잡수신 한 여사께서 웃으며 담소를 나누는 게 보였다. 맞은편에 서 있는 사람이 이 교회 안에서 무려 다섯 쌍이나 결혼을 시킨 집사님이란 걸 알고 나니 피곤이 무한대로 증식하는 기분이었다. 다연은 옆에서 비슷하게 피곤한 몰골로 서 있는 다경에게 물을 건네며 말했다.
“오늘은 내가 올 차례 맞지 않아?”
주말 교회 출석률에 목숨 거는 모친 덕분에 다연과 다경은 이런 식으로 소집령에 동원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저번에 다경이 한 번 갔으니 오늘은 다연의 차례가 맞는데 웬일로 이번 주는 두 딸을 쌍두마차처럼 끌고 오고 싶으셨던 모양이다. 생수를 벌컥벌컥 들이켠 다경이 제법 심상한 어조로 답했다.
“한 여사 마음을 누가 알아. 나도 문자 보낼 때까진 내가 안 올 줄 알았어.”
그날의 내가 분명히 오늘의 나한테 그런 신호를 보냈었는데 죄다 헛꿈이었네. 씁쓸하게 말을 뱉는 걸 보니 여기 오기 전까지 이 인간도 얼마나 닦달을 당했는지 알 것 같았다.
“살 빼느라고 그냥 양식도 안 먹는 마당에 주말마다 영적인 양식을 챙겨 먹어야 하다니. 무슨 삶이 이렇게 박복하냐.”
다연은 다경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어깨를 두드렸다. 온몸 마디마디 안 쑤시는 곳이 없었다.
“운동 갈래?”
무심코 한 말에 생수병의 남은 한 방울까지 탈탈 털어 먹던 다경이 눈을 치켜뜬다.
“싸우자는 거야?”
운동을 시작했더니 덜 피곤하단 다연의 말만 믿고 딱 세 달 같이 헬스장을 다닌 적이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근육이 녹을 것 같아서 때려치웠다. 다연은 성격상 10시까지 일을 하든 5시까지 일을 하든 하는 운동의 양이 똑같은데 다경의 저질 체력으로 그걸 따라갔으니 몸이 멀쩡할 리가 없었다. 사람이 이 정도로 융통성이 없으면 좀 맞아도 될 것 같다고, 병원에서 링거 맞고 나오는 내내 전화통에 대고 욕에 욕을 퍼부었었다.
다경의 표정을 본 다연이 요즘 들어 실언이 잦다며 자기 입을 찰싹찰싹 때렸다. 둘이 붙어 실없이 떠드는 동안 한 여사가 이쪽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한 여사의 곁에 붙은 권 집사님도 부담스러울 정도로 활짝 웃으며 걸어왔다.
“다연이 오랜만이네?”
“네, 안녕하세요.”
사교를 담당하는 안면 근육을 다 끌어와도 차마 잘 지내시냐는 말까진 나오질 않는다. 그 말을 하는 즉시 그 뒤로 달라붙을 무수한 말의 물꼬를 트는 꼴이기 때문이었다.
“그래, 어떻게 좋은 사람은 있고?”
그러나 이어지는 말을 듣자마자 뭐 하러 그런 도움 안 되는 발버둥을 쳤는지, 어째 허탈한 심정이 터져 나왔다.
“아…….”
“다연이 낼모레 서른이라며. 빨리 좋은 사람 찾아 가야지.”
“그게…….”
“그래야 어머니도 걱정이 없으신 거야. 너 가야 다경이도 가는 거지.”
“저도…….”
“주말에 시간 되니? 요새 애들은 주말도 없이 일해서 약속 잡기 힘들더라.”
못 본 사이 남을 배려하는 데 한층 무뎌진 권 집사님을 보며 다연이 쓰디쓴 미소를 지었다. 왜 어른들은 대답을 들을 생각도 없으면서 질문을 퍼붓는 걸까.
“요새 계속 바빠서 시간이 안 나네요. 다음에 말씀드릴게요.”
말을 원천 봉쇄하고 옆으로 고개를 돌리니 그새 입을 내민 한 여사의 얼굴이 거기 있었다.
“왜 또.”
“너도 이제 매주 와.”
물만 먹은 속이 다 뒤집히는 말이었다. 안 그래도 주말 없이 사는 인생, 이제 하나 남은 휴식 시간까지 뺏기나 싶어서 식어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 여기 온다고 나 결혼하는 거 아니야.”
“권 집사님 딸 십일조 2년 내고 의사 남편 얻은 거 몰라?”
“그런 세속적인 목적을 가지고 다니는데 이뤄 주실 리가…….”
말이 끝나기도 전에 찰진 손이 등짝을 내리쳤다. 눈물이 찔끔 난 다연을 두고 한 여사가 식당으로 걸어 들어간다. 몸이고 정신이고 몽땅 벌집이 된 다연이 등 뒤에 숨어 있던 얄미운 머리를 잡아당겼다.
“아파.”
휴대폰에서 시선도 떼지 않고 대답하는 다경의 모습에 한숨이 나왔다. 딸 둘이 있는데 하나는 웨딩업체에 근무하는 주제에 결혼 생각이 전혀 없고, 다른 하나는 만나는 남자마다 원나잇이라 한 여사 속이 타들어 간 것도 이해는 한다. 오죽했으면 사람으로도 모자라 신앙의 힘에 기대려고 할까. 보다 보니 마음이 아플 지경이지만 그보다 더 절망적인 사실은 십일조를 골백번을 내 봐야 둘 다 바뀔 여지가 전혀 없다는 점이었다.
“이럴 때 좀 도와주면 안 돼?”
“다 언니 업보야. 누가 가짜 남친 만들래?”
“일 년도 지난 일을 가지고.”
“엄마는 언니 결혼할 때까지 우려먹을걸. 사골마냥 계절별로 힘 딸릴 때 한 번씩.”
“이제 먹을 것도 없어. 직장에서 골수까지 다 빨려서.”
핼쑥한 얼굴로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고 다경이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스물다섯부터 결혼하란 소리에 들들 볶이던 다연이 대학 동기에게 남친 대행을 부탁했다가 제대로 걸린 게 올 봄이었다. 없는 사람을 일 년씩이나 유지한다는 게 엄청 쉬운 얘기 같겠지만 그건 진짜 사기꾼들이나 할 수 있는 짓이었고, 그래서 한 여사가 받은 배신감도 다른 때와는 비교도 안 되게 컸다.
‘너 이제 엄마가 부르면 무조건 나와. 알았어?’
한 열흘간 말도 안 하던 한 여사가 저 말을 뱉으며 분연히 자리를 털고 일어난 직후, 다연은 교회며 모임이며 시간 날 때마다 자신을 불러서 얼굴도장을 찍게 하는 모친의 횡포를 고스란히 감내해야 했다. 평소라면 조용히 뒤로 내뺐을 다연이라도 불같은 기세의 한 여사는 어쩔 수 없는지 매번 목줄 매인 개의 심정으로 뒤를 따라다니는 게 훤히 보였다.
그리고 다경은 그 모든 난리통을 보며, 실은 언니가 비혼주의자라는 걸 미리 알고 있었다는 것과 그래서 남자가 허구의 인물이란 말에도 별반 놀라지 않았다는 것을 현명하게 삼켰다. 공범이란 걸 알면 새 되는 건 한순간이니까.
“엄마 언제까지 저러실까.”
눈가를 꾹꾹 누르며 한숨을 쉬는 다연의 모습에, 다경이 다시 휴대폰으로 시선을 던진 채 짤막하게 답했다.
“언니가 결혼할 때까지.”
한 여사는 여자가 시집 안 가고 혼자 살면 하늘 무너지는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다연은 바늘 하나 들어갈 틈도 안 남긴 비혼주의자. 이건 타협점을 찾으려야 찾을 수가 없는 문제였다.
“결혼 안 한다니까.”
“그럼 남자라도 만나.”
“네가 만나. 나 혼전순결주의자야.”
“난 프리섹스주의자인데.”
“여기 교회……!”
황급히 주위를 둘러본 다연의 이마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래도 장녀라고 책임감은 남은 다연과 달리 다경은 아무런 생각이 없어 보인다. 딱 자기 일과 지금 만나는 남자 말고는 관심도 없다. 옆이 텅 빈 걸 보고 가슴을 쓸어내리던 다연이 휴대폰 진동을 느끼고 그 자리에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강 대리, 지금 잠깐 회사로 올 수 있어?
번호를 확인해 보니 승아다. 전에 없이 목소리가 딱딱해서 바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일요일에 부르는 경우도 가끔 있긴 했지만 오늘은 어째 더 불길한 예감이 든다. 점심 못 먹고 간다는 말을 들은 한 여사가 미간 사이를 찌푸렸다.
“너희 회사는 일요일도 없다니? 이러니까 네가 시집을…….”
“안 간다잖아.”
시기적절하게 끼어든 다경이 말을 끊어 줬다. 이내 불똥이 그쪽으로 튄다.
“너 가만 못 있어?”
둘이 투닥거리는 걸 보던 다연이 슬쩍 주차장 쪽으로 나왔다. 차에 타서 시동을 켜자마자 바로 문자가 왔다.
[도와줬으니까 3만 원.]
친동생 인증을 이따위로 하는 게 기특한 나머지 열불이 터졌다. 그러나 회사에 도착해서 굳은 얼굴의 승아와 그 앞에서 대역죄인 같은 표정으로 앉아 있는 신 대리를 본 순간 그 기특함이 한순간에 바닥으로 쑥 내려갔다. 곁에 다가서자 승아가 팔짱을 낀 그대로 꽤 날카롭게 물었다.
“이유경 신부 강 대리가 맡았던 거 맞아?”
혼란한 와중에도 머릿속으로 고객 명단을 차분히 넘겨 봤다.
“10월에 결혼하시는 분들이요?”
“어. 신랑 이름이 강중우.”
신랑 이름을 듣는 순간 절로 윤정에게 시선이 갔다. 누군지 생각이 안 날 수가 없다.
“제가 처음 맡았던 건 맞는데 그분들이 신 대리님 쪽을 선호하시길래 중간에 담당자를 바꿨습니다.”
이유경, 강중우. 올 4월에 개최한 웨딩박람회 때 다연에게 상담을 신청했던 예비 부부였다. 초반 한 달은 잘 따라왔는데 예물을 고르러 가던 날 옆에서 다른 커플을 담당하던 윤정이 다가와 끼어드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넘겼던 케이스다. 안 그래도 남자 쪽 가풍이 검소해서 예비 신부가 예물에 불만이 많았다. 그걸 좋게 달래서 끌고 가던 중에 옆에서 부채질 몇 번 하니까 신뢰가 그야말로 폭풍처럼 무너졌다. 결국 쓰디쓴 속으로 일을 넘긴 후 한 소리 했지만 언제건 윤정이 다연의 말을 들어 처먹을 리가 없었다.
된장찌개에 밥까지 야무지게 비벼 먹던 지원이 묻는다. 다연이 고개를 젓자 다시 밥그릇에 집중하는 눈동자. 저렇게 마른 몸 어디에 블랙홀 같은 위장을 숨겨 놓은 건지, 누가 보면 석 달 열흘 굶은 사람처럼 먹어 댄다. 열심히 먹고 열심히 사는 지원이 기특해서 계란찜도 하나 시켜 줬다.
‘요즘 시대에 누가 대학 때 낭만 찾고 청춘 찾아요.’
최종 면접을 보고 나서 첫 회식을 할 때, 이력서에 빼곡하게 적혀 있는 알바 경력이 다 진짜냐고 묻는 승아에게 지원이 저런 말을 했다. 졸업한 지 한 달밖에 안 된 여대생 입에서 나온 말치곤 참 건조하기 짝이 없었다.
‘요즘 애들 무섭다, 강 대리.’
승아는 폭탄주를 만들면서 분위기를 띄우는 지원의 모습을 그렇게 한 줄로 평했다.
“밥 다 먹었으면 일어나자.”
지원의 숟가락질이 멈춘 것을 본 다연이 슬슬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말했다. 밥을 다 먹고 나오니 어느새 11시. 시침이 시계의 끝으로 넘어가는 걸 보고 아주 기함을 했다. 하루하루가 이렇게 미치도록 빨리 갈 수가 있나. 내일은 오후까지 비몽사몽이겠단 생각에 기합을 한번 넣는 동안 지원이 딱 붙어서 따라왔다.
“저 대리님 줄 탈래요.”
시동을 걸던 다연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얼굴로 돌아봤다.
“여기 줄이 어디 있어.”
“있어요. 대리님 줄, 아님 신 대리님 줄.”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밥값이 6만 원이나 나온 데다 커피는 자기가 사겠다는 것도 말렸더니 감동했나 보다.
“그냥 신 대리님 줄 타.”
짧게 답한 뒤, 답답한 마음을 가리려 창문을 내렸다. 들어온 지 1년밖에 안 된 신입이 벌써부터 줄타기를 할 만큼 살얼음판이 된 건가. 김 과장 하나가 부재할 뿐인데 개판 5분 전이 따로 없었다.
“저 신 대리님 싫은데요.”
딴생각을 하다가 지원의 목소리에 뒤를 돌아봤다. 못 본 사이 여기다도 한 방 갈기셨나 싶을 만큼 날이 선 어조였다.
“왜?”
‘어차피 그 산더미 같은 뒤처리를 내가 하지, 네가 하니.’라는 표정으로 말하는 다연을 보고 지원이 왜 모르냐는 투로 답했다.
“길만 걸어도 남자들이 줄줄 따른다고 신부 앞에서 푼수를 떠는데 누가 좋아해요? 얼굴도 다 뜯어고친 것 같아. 화장 떡칠한 것만 벗기면 솔직히 대리님이 훨씬 나아요.”
쌓인 건 이쪽이 더 클 것 같은데 욕은 지원이 한다. 말려도 들을 것 같지가 않아 사람 하나를 옹골차게 씹어 대는 걸 연료 삼아 골목골목을 누볐다. 집 앞에 내릴 때까지 투덜대는 마른 몸을 내일 보잔 말로 들여보냈을 땐, 이쪽도 침대 생각이 간절할 만큼 피곤했다. 그러나 뻑뻑한 눈을 한 번 누르고 다시 출발하려고 할 때 휴대폰이 울렸다.
[언니, 모레 교회 언니 차례다? 까먹지 마.]
메시지를 확인한 다연이 또 한 번 핸들에 머리를 박았다. 상사가 닦달하고 동료가 질투하고 엄마는 결혼하라고 못 잡아먹어 안달인 걸 보면 올해가 아홉수가 맞긴 맞는 모양이었다.
* * *
“그럼 주기도문으로 예배를 끝마치겠습니다.”
주말 교회의 풍경은 언제나 그렇듯 왁자지껄한 한편, 참 엄숙하기 짝이 없는 분위기로 흘러가는 중이었다. 목사님이 경건한 마무리를 하실 때까지 눈을 뜬 채 졸고 있던 다연이 옆에서 아예 흰자를 보이고 있는 다경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입가에 침 흘린 자국만 없길 바라며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잘 해 봐야 한 달에 두 번밖에 없는 휴일을 고이 삶아 잡수신 한 여사께서 웃으며 담소를 나누는 게 보였다. 맞은편에 서 있는 사람이 이 교회 안에서 무려 다섯 쌍이나 결혼을 시킨 집사님이란 걸 알고 나니 피곤이 무한대로 증식하는 기분이었다. 다연은 옆에서 비슷하게 피곤한 몰골로 서 있는 다경에게 물을 건네며 말했다.
“오늘은 내가 올 차례 맞지 않아?”
주말 교회 출석률에 목숨 거는 모친 덕분에 다연과 다경은 이런 식으로 소집령에 동원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저번에 다경이 한 번 갔으니 오늘은 다연의 차례가 맞는데 웬일로 이번 주는 두 딸을 쌍두마차처럼 끌고 오고 싶으셨던 모양이다. 생수를 벌컥벌컥 들이켠 다경이 제법 심상한 어조로 답했다.
“한 여사 마음을 누가 알아. 나도 문자 보낼 때까진 내가 안 올 줄 알았어.”
그날의 내가 분명히 오늘의 나한테 그런 신호를 보냈었는데 죄다 헛꿈이었네. 씁쓸하게 말을 뱉는 걸 보니 여기 오기 전까지 이 인간도 얼마나 닦달을 당했는지 알 것 같았다.
“살 빼느라고 그냥 양식도 안 먹는 마당에 주말마다 영적인 양식을 챙겨 먹어야 하다니. 무슨 삶이 이렇게 박복하냐.”
다연은 다경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어깨를 두드렸다. 온몸 마디마디 안 쑤시는 곳이 없었다.
“운동 갈래?”
무심코 한 말에 생수병의 남은 한 방울까지 탈탈 털어 먹던 다경이 눈을 치켜뜬다.
“싸우자는 거야?”
운동을 시작했더니 덜 피곤하단 다연의 말만 믿고 딱 세 달 같이 헬스장을 다닌 적이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근육이 녹을 것 같아서 때려치웠다. 다연은 성격상 10시까지 일을 하든 5시까지 일을 하든 하는 운동의 양이 똑같은데 다경의 저질 체력으로 그걸 따라갔으니 몸이 멀쩡할 리가 없었다. 사람이 이 정도로 융통성이 없으면 좀 맞아도 될 것 같다고, 병원에서 링거 맞고 나오는 내내 전화통에 대고 욕에 욕을 퍼부었었다.
다경의 표정을 본 다연이 요즘 들어 실언이 잦다며 자기 입을 찰싹찰싹 때렸다. 둘이 붙어 실없이 떠드는 동안 한 여사가 이쪽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한 여사의 곁에 붙은 권 집사님도 부담스러울 정도로 활짝 웃으며 걸어왔다.
“다연이 오랜만이네?”
“네, 안녕하세요.”
사교를 담당하는 안면 근육을 다 끌어와도 차마 잘 지내시냐는 말까진 나오질 않는다. 그 말을 하는 즉시 그 뒤로 달라붙을 무수한 말의 물꼬를 트는 꼴이기 때문이었다.
“그래, 어떻게 좋은 사람은 있고?”
그러나 이어지는 말을 듣자마자 뭐 하러 그런 도움 안 되는 발버둥을 쳤는지, 어째 허탈한 심정이 터져 나왔다.
“아…….”
“다연이 낼모레 서른이라며. 빨리 좋은 사람 찾아 가야지.”
“그게…….”
“그래야 어머니도 걱정이 없으신 거야. 너 가야 다경이도 가는 거지.”
“저도…….”
“주말에 시간 되니? 요새 애들은 주말도 없이 일해서 약속 잡기 힘들더라.”
못 본 사이 남을 배려하는 데 한층 무뎌진 권 집사님을 보며 다연이 쓰디쓴 미소를 지었다. 왜 어른들은 대답을 들을 생각도 없으면서 질문을 퍼붓는 걸까.
“요새 계속 바빠서 시간이 안 나네요. 다음에 말씀드릴게요.”
말을 원천 봉쇄하고 옆으로 고개를 돌리니 그새 입을 내민 한 여사의 얼굴이 거기 있었다.
“왜 또.”
“너도 이제 매주 와.”
물만 먹은 속이 다 뒤집히는 말이었다. 안 그래도 주말 없이 사는 인생, 이제 하나 남은 휴식 시간까지 뺏기나 싶어서 식어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 여기 온다고 나 결혼하는 거 아니야.”
“권 집사님 딸 십일조 2년 내고 의사 남편 얻은 거 몰라?”
“그런 세속적인 목적을 가지고 다니는데 이뤄 주실 리가…….”
말이 끝나기도 전에 찰진 손이 등짝을 내리쳤다. 눈물이 찔끔 난 다연을 두고 한 여사가 식당으로 걸어 들어간다. 몸이고 정신이고 몽땅 벌집이 된 다연이 등 뒤에 숨어 있던 얄미운 머리를 잡아당겼다.
“아파.”
휴대폰에서 시선도 떼지 않고 대답하는 다경의 모습에 한숨이 나왔다. 딸 둘이 있는데 하나는 웨딩업체에 근무하는 주제에 결혼 생각이 전혀 없고, 다른 하나는 만나는 남자마다 원나잇이라 한 여사 속이 타들어 간 것도 이해는 한다. 오죽했으면 사람으로도 모자라 신앙의 힘에 기대려고 할까. 보다 보니 마음이 아플 지경이지만 그보다 더 절망적인 사실은 십일조를 골백번을 내 봐야 둘 다 바뀔 여지가 전혀 없다는 점이었다.
“이럴 때 좀 도와주면 안 돼?”
“다 언니 업보야. 누가 가짜 남친 만들래?”
“일 년도 지난 일을 가지고.”
“엄마는 언니 결혼할 때까지 우려먹을걸. 사골마냥 계절별로 힘 딸릴 때 한 번씩.”
“이제 먹을 것도 없어. 직장에서 골수까지 다 빨려서.”
핼쑥한 얼굴로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고 다경이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스물다섯부터 결혼하란 소리에 들들 볶이던 다연이 대학 동기에게 남친 대행을 부탁했다가 제대로 걸린 게 올 봄이었다. 없는 사람을 일 년씩이나 유지한다는 게 엄청 쉬운 얘기 같겠지만 그건 진짜 사기꾼들이나 할 수 있는 짓이었고, 그래서 한 여사가 받은 배신감도 다른 때와는 비교도 안 되게 컸다.
‘너 이제 엄마가 부르면 무조건 나와. 알았어?’
한 열흘간 말도 안 하던 한 여사가 저 말을 뱉으며 분연히 자리를 털고 일어난 직후, 다연은 교회며 모임이며 시간 날 때마다 자신을 불러서 얼굴도장을 찍게 하는 모친의 횡포를 고스란히 감내해야 했다. 평소라면 조용히 뒤로 내뺐을 다연이라도 불같은 기세의 한 여사는 어쩔 수 없는지 매번 목줄 매인 개의 심정으로 뒤를 따라다니는 게 훤히 보였다.
그리고 다경은 그 모든 난리통을 보며, 실은 언니가 비혼주의자라는 걸 미리 알고 있었다는 것과 그래서 남자가 허구의 인물이란 말에도 별반 놀라지 않았다는 것을 현명하게 삼켰다. 공범이란 걸 알면 새 되는 건 한순간이니까.
“엄마 언제까지 저러실까.”
눈가를 꾹꾹 누르며 한숨을 쉬는 다연의 모습에, 다경이 다시 휴대폰으로 시선을 던진 채 짤막하게 답했다.
“언니가 결혼할 때까지.”
한 여사는 여자가 시집 안 가고 혼자 살면 하늘 무너지는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다연은 바늘 하나 들어갈 틈도 안 남긴 비혼주의자. 이건 타협점을 찾으려야 찾을 수가 없는 문제였다.
“결혼 안 한다니까.”
“그럼 남자라도 만나.”
“네가 만나. 나 혼전순결주의자야.”
“난 프리섹스주의자인데.”
“여기 교회……!”
황급히 주위를 둘러본 다연의 이마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래도 장녀라고 책임감은 남은 다연과 달리 다경은 아무런 생각이 없어 보인다. 딱 자기 일과 지금 만나는 남자 말고는 관심도 없다. 옆이 텅 빈 걸 보고 가슴을 쓸어내리던 다연이 휴대폰 진동을 느끼고 그 자리에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강 대리, 지금 잠깐 회사로 올 수 있어?
번호를 확인해 보니 승아다. 전에 없이 목소리가 딱딱해서 바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일요일에 부르는 경우도 가끔 있긴 했지만 오늘은 어째 더 불길한 예감이 든다. 점심 못 먹고 간다는 말을 들은 한 여사가 미간 사이를 찌푸렸다.
“너희 회사는 일요일도 없다니? 이러니까 네가 시집을…….”
“안 간다잖아.”
시기적절하게 끼어든 다경이 말을 끊어 줬다. 이내 불똥이 그쪽으로 튄다.
“너 가만 못 있어?”
둘이 투닥거리는 걸 보던 다연이 슬쩍 주차장 쪽으로 나왔다. 차에 타서 시동을 켜자마자 바로 문자가 왔다.
[도와줬으니까 3만 원.]
친동생 인증을 이따위로 하는 게 기특한 나머지 열불이 터졌다. 그러나 회사에 도착해서 굳은 얼굴의 승아와 그 앞에서 대역죄인 같은 표정으로 앉아 있는 신 대리를 본 순간 그 기특함이 한순간에 바닥으로 쑥 내려갔다. 곁에 다가서자 승아가 팔짱을 낀 그대로 꽤 날카롭게 물었다.
“이유경 신부 강 대리가 맡았던 거 맞아?”
혼란한 와중에도 머릿속으로 고객 명단을 차분히 넘겨 봤다.
“10월에 결혼하시는 분들이요?”
“어. 신랑 이름이 강중우.”
신랑 이름을 듣는 순간 절로 윤정에게 시선이 갔다. 누군지 생각이 안 날 수가 없다.
“제가 처음 맡았던 건 맞는데 그분들이 신 대리님 쪽을 선호하시길래 중간에 담당자를 바꿨습니다.”
이유경, 강중우. 올 4월에 개최한 웨딩박람회 때 다연에게 상담을 신청했던 예비 부부였다. 초반 한 달은 잘 따라왔는데 예물을 고르러 가던 날 옆에서 다른 커플을 담당하던 윤정이 다가와 끼어드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넘겼던 케이스다. 안 그래도 남자 쪽 가풍이 검소해서 예비 신부가 예물에 불만이 많았다. 그걸 좋게 달래서 끌고 가던 중에 옆에서 부채질 몇 번 하니까 신뢰가 그야말로 폭풍처럼 무너졌다. 결국 쓰디쓴 속으로 일을 넘긴 후 한 소리 했지만 언제건 윤정이 다연의 말을 들어 처먹을 리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