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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신부가 직접 고른 건데 그걸 강 대리가 무슨 자격으로 감 놔라 배 놔라야. 능력 되면 당연히 좋은 거 해 줘야 하는 거 아냐? 다른 선택지가 있는데 모르면 속고 하는 결혼이게?’
다연이라고 비싼 거 모르고 유행 몰라서 그 매장을 선택한 게 아니다. 남자 쪽 집안 성향까지 다 생각해서 머리 터지게 찾아 놓은 예물이었다. 그래 봐야 본인이 원했다는 말 한마디면 끼어들 수 없는 게 맞아서 차라리 잊자, 하고 한쪽 구석으로 밀어 놨던 일인데 오늘 보니 아마 좋지 않은 쪽으로 결론이 나 버린 모양이다.
“신랑한테 계약 파기하자고 연락 왔어. 위약금이고 뭐고 다 물어 줄 테니까 없던 일로 하자고. 신부 측은 플래너가 하라는 대로 했다가 결혼 엎어졌다고 책임지라는데 둘이 뭘 어떻게 했길래 초반 예산의 두 배를 잡아먹어?”
승아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고막을 찢을 듯이 울렸다. 다연도 눈을 감고 속으로 욕을 뱉었다. 이 정도면 좋지 않은 수준이 아니라 최악에 가깝다. 아무리 스몰 웨딩이 대세라고 하지만 대부분의 예식은 플래너를 끼고 하는 게 정석이다. 요즘엔 인터넷으로 눈에 불을 켜고 찾은 다음 오는 마당에 고객이 작정하고 물고 늘어지기 시작하면 이미지 망치는 건 한순간이었다.
“강 대리 이번 주에 야근 몇 번이나 했어?”
꿀 먹은 벙어리처럼 버티는 두 여자를 보며 승아가 도끼눈을 치뜨고 물었다.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라서 머뭇거리는 동안 화살이 신 대리에게 향했다.
“신 대리는 이번 달에 야근을 하긴 했어?”
조금만 더 건드리면 울 기세로 서 있는 윤정을 보고 다연이 승아에게 눈짓을 했다. 그러나 화가 머리끝까지 난 김 과장을 말릴 수 있는 사람은 이 회사를 통틀어 단 한 명도 없었다.
“일찍 들어온 게 벼슬이야? 일찍 들어온 만큼 잘해야 한단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그게 벼슬로 보이겠어? 책임으로 보이지?”
기어이 윤정의 눈시울이 붉어진다. 보고 있는 다연도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올해 진짜 아홉수가 맞는 건가. 아닌데도 이런 거면 굿이라도 해야 할 판인데.
“과장님, 우선은 제가 신부를 만나 보고…….”
“신 대리만 욕할 거 없어. 강 대리도 마찬가지야.”
일단은 이 자리를 파하게 해야겠단 생각에 말을 꺼내던 다연이 신경질적인 목소리를 듣고 입을 닫았다.
“직장이 학교도 아니고 잘못된 게 보이면 싫은 소리, 쓴소리도 할 줄 알아야지. 둘이 친목 다지려고 직장 다녀? 싸우기 싫으면 아예 집에 틀어박혀서 살든가, 아니면 사회생활을 제대로 하든가!”
다연의 손끝이 곱았다. 평상시 혼날 일이 별로 없던 터라 이렇게 깨지는 게 낯설었다. 이 일은 혼자 노력해서 되는 게 아니라고 전부터 잔소리를 듣긴 했지만 누가 직접적으로 퍼부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간 참았던 승아의 화가 제대로 폭발한 것 같았다.
“신 대리는 나가 봐. 이거 책임 단단히 물을 거니까 앞으로 정신 똑바로 차리고 일해.”
부들부들 떨리는 다리로 걷는 소리가 사라지자 빈 공간에 둘만 남았다. 고개도 못 드는 다연에게 승아가 차가운 목소리를 쏟아붓는다.
“내가 강 대리 붙잡고 제발 과장 자리 맡아 달라고 했던 걸 얼마나 후회했는지 알아?”
“…….”
“무르다고 다 좋은 거 아니야. 월급 많이 받으면 그만큼 일을 해야지. 그중에 악역을 맡아야 하는 일이 있으면 그것도 해야 하는 거고. 누군 착하게 살기 싫어서 이래?”
묵묵히 듣고만 있는 다연의 모습에 승아가 보이지 않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은 다연이 혼날 일이 아니지만 직책을 맡게 되면 결국 그 책임을 떠안아야 하는 입장이 된다. 그게 사회생활의 불합리한 점이고 여기다 다연 혼자 두고 떠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했다.
“밑에 신입 하나 붙여 줄 테니까 어떻게든 써먹어 봐.”
다연이 고개를 쳐드는 걸 보고도 꼼짝 않고 눈을 맞췄다. 이 난리가 난 걸 처음 듣자마자 바로 세운 계획이었다.
“일 잘한다니까 이제 컨설팅부 일이건, 타 부서 일이건 직접 말 섞지 말고 무조건 걔 통해서 보고하라고 해. 내가 나중에 다 확인할 거야.”
다연의 얼굴이 아연하게 변했다. 컨설팅부만 해도 대리가 넷이나 된다. 승아가 직급을 정리하는 데 집중하면서 얼결에 승진한 사람들이라곤 해도 엄연히 같은 직책이었다. 거기다 그중 둘은 다연보다 나이도 많다. 사내에서 제일 심하게 족보가 꼬인 나머지 회식 때마다 대리끼리 앉은 자리만 불꽃이 튀는데, 이 와중에 승아에게도 붙어 있지 않았던 보조를 자신에게 붙이다니. 이건 완전히 어불성설이다.
“과장님, 이러면 저 진짜 그 자리 못 맡아요.”
안 그래도 일하는 유세 혼자 다 떠냐는 소리를 듣는 마당에 도와주는 사람까지 있으면 눈총이 두 배가 될 것 같다. 진짜 내가 피 말라 죽는 꼴이 보고 싶은 거냐고, 눈으로 고함을 치는데도 김 과장의 태도는 단호했다.
“그 정도도 못 버티면 나야말로 그 자리 못 맡겨. 몇 번이고 말했지. 승진 아니면 퇴사라고.”
“…….”
“선택은 강 대리가 해. 이제 더는 안 말려.”
이 세상에서 김승아를 말릴 수 있는 건 김승아뿐이란 걸 너무 잘 안다. 이미 배수의 진을 치기로 한 걸 깨달은 다연이 멀어지는 승아의 뒷모습을 보며 머리털을 쥐어뜯었다.
* * *
월요일, 승아가 보낸 인턴이 9시에 컨설팅 부서로 오겠다고 메신저를 보냈다. 축 처진 몸과 그보다 더 바닥에 가서 기고 있는 정신머리를 주워 모아 어찌어찌 출근까진 했는데 그다음 일을 떠올리면 당장이라도 도망가고 싶었다. 생전 싸운 적 없다던 커플이 예물 고르다가 파혼 직전까지 갔으니 승아의 분노가 하늘을 찌르는 것도 이해는 한다. 그러나 그 날벼락을 왜 자신이 맞아야 하는지에 대해선 아직도 억한 심정이 올라왔다.
책상에 머리 박고 누워 있던 다연의 어깨를 누군가 톡톡 친다. 돌아보니 얼굴이 보여야 할 곳에 가슴팍이 보였다. 넥타이를 보고 멍해진 시선이 그 위로 어깨와 목을 지나 짧은 머리카락을 향했다.
“강다연 대리님?”
다연은 아직도 가끔, 예전 그날을 꿈속에서 보곤 했다. 벚꽃 잎이 날리던 결혼식장, 도망간 신부. 창백하고 시원한 봄과 바닥에 고여 있던 깊은 우울.
“…….”
그 꿈을 꾸고 일어난 날은 평소보다 몸이 무겁고 눈꺼풀이 가물거렸다. 무력하고 슬픈 무중력 속에 하루 종일 같이 고여서 누군가의 바다를 헤엄치며 보냈다.
“……윤, 재민 씨?”
그래서 지금 이 남자의 얼굴이 낯설지가 않다. 반달을 그리며 웃는 눈이, 부드러운 표정에 흰 얼굴이 드라마에 나오는 배우처럼 후광이 비치는 것만 해도 놀랄 판인데 심지어는 그날로부터 조금의 시간도 지나지 않은 것처럼 맑다. 다연은 알고, 상대방은 절대 알 수 없는 얼굴. 그 얼굴을 사색이 된 채 올려다보는 자신의 모습에 재민이 살짝 난감한 표정을 짓는다.
“되게 놀라시네요.”
한순간에 기억이 5년 전 봄날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이 남자가 왜 여기 있지? 스트레스 때문에 헛것을 보나?
“대리님.”
고개를 돌리니 지금 뭐 하고 있냐는 듯한 지원의 얼굴이 보였다. 다연을 빼고는 전부 돌아가는 상황을 알아먹는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그리하여 다시금, 꽤나 멍청한 표정으로 남자의 얼굴을 올려봤다. 반대여야 하는 거 아니야? 나만 빼면 아무도 이 사람을 몰라야 정상 아닌가? 생각을 굴리고 또 굴리며 입만 벌리고 있는 다연을 보다 못했는지, 지원이 옆에 다가왔다.
“대리님, 오늘 인턴 온다고 했잖아요.”
그제야 극단적인 현실 부정을 향해 달려가던 머리가 멈췄다. 정적이 흐르는 걸 본 재민이 먼저 입을 열었다.
“김승아 과장님이 말씀하셨다고 했는데.”
“…….”
“혹시 남자란 건 못 들으셨어요? 그래도 이름 들으면 알 텐데.”
머릿속에 벼락이 치는 것 같았다. 처음 만난 사람이 왜 자신을 보고 귀신 같은 얼굴을 하는 것인지, 영문을 모르는 윤재민이 꽤 당황한 얼굴로 웃는다. 그러나 다연은 거기에 답해 줄 정신이 일 푼도 없었다. 상사한테 쪼이고 집에선 볶이고 회사에선 윤재민을 만났다. 아홉수의 마지막을 장식한 남자를 보니 누가 복부에 어퍼컷이라도 날리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2.
다연이 속한 컨설팅 부서는 기본적으로 남녀의 성비가 13 대 0인 곳이었다. 악명 높은 김 과장 덕분에 다들 꽃이라기보단 독초들로 자라나긴 했다만 그래도 사내에서 여성 비율이 가장 높은 마리아쥬의 꽃밭.
“그럼 이번 달에 입사하신 거예요?”
“그렇죠.”
오늘 그 꽃밭에 꿀벌이 하나 입성했고, 그로 인해 단 한 번도 진행된 적이 없던 단체 점심 식사라는 진풍경이 연출되었다.
“다들 빨리 드세요.”
다정하게 울리는 말을 들은 다연이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바라본 곳에는 오늘의 주인공 윤재민 씨가 식당에 들어온 순간부터 지금까지 한시도 쉬지 않고 떠드는 신 대리에게 붙잡혀 갖은 질문 세례를 받고 있는 게 보였다. 사방에서 시선이 모여드는 와중에도 부지런히 숟가락을 놓고 물을 따르는 손이 참 씩씩했다. 실은 아직도 꿈인가 싶었는데 저걸 보니 이제 현실이라는 게 실감 난다. 인턴이 온 것도, 그 인턴이 윤재민이라는 것도.
울적한 얼굴로 숟가락을 들자니 이번 주부터는 정말 십일조라도 내야 하나, 하는 생각부터 들었다. 정말이지 한 종교의 절대자 정도가 아니면 방패막이도 안 될 것 같은 하루하루였다.
“재민 씨 피부 진짜 좋다. 화장품 어디 거 써요?”
윤정이 순진한 눈망울로 재민의 얼굴을 빤히 본다. 밥 한 숟갈 넘기기도 부담스러운 눈빛인데 재민은 대견하게도 숟가락을 놓지 않았다.
“그냥 스킨로션 아무거나 바르죠.”
덧붙여 응대까지 열심히 해 준다.
“와, 근데도 피부가 이렇단 말이야? 젊어서 그런가?”
뒷말을 듣기도 전에 다연의 눈이 먼 산을 향했다. 아는 사람에, 남자에, 잘생겼고, 심지어는…….
“저 서른이에요.”
나보다 나이도 많은 신입이라니.
“말도 안 돼, 진짜?”
신 대리를 비롯한 여자들이 입을 가리고 놀라는 동안 다연은 집던 김치를 내려 두고 밥에 물을 말아 버렸다. 저 목소리를 계속 들었더니 내 밥맛이 다 떨어지네.
“진짜 그렇게 안 보이는데? 거짓말하는 거 아니에요?”
여자들이 호들갑을 떠는 걸 보고 재민이 난감하다는 듯 웃는다. 예의상 하는 말도 있고 진짜 못 믿어서 하는 말도 있을 것이다. 그만큼 윤재민의 겉모습이 참 풋풋했다. 예전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5년 전이니까 그때 저 사람 나이가 스물다섯이었을 텐데 변함이 없다는 게 더 무섭다.
다연은 가만히 스물다섯이란 나이를 곱씹어 봤다. 너무 어렸기 때문인지 신부인 한다정의 집에서 심하게 반대하는 결혼이었다고 했다. 그 나이에, 그것도 반대하는 결혼을 왜 그렇게 하려고 했나 봤더니 식장에 가기도 전 신부가 임신 중이었단 얘기를 한 여사가 고모 댁까지 가서 덥석 물어 왔다. 원치도 않게 많은 이야기를 들었던 터라 저기 앉아서 신 대리의 말을 받아 주고 있는 남자가 신기루처럼 느껴졌다. 물론 다연보다도 윤재민이 훨씬 원치 않았던 일이겠지만.
다연은 우울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오이장아찌를 입에 처박았다. 결혼이라면 이제 치가 떨릴 줄 알았더니 어떻게 고르고 골라 여길 입사할 수가 있지? 저 해맑은 남자가 실은 우울의 바다에 혼자 파묻혀서 눈물을 뚝뚝 흘렸을 거라고는 다들 상상도 못 할 거다.
“삼재라니까, 삼재…….”
중얼거리며 습관처럼 남은 음식을 정리하다 문득 느껴지는 시선에 옆을 돌아봤다. 어느새 주제가 운동으로 넘어갔는지 신 대리가 재민의 어깨에 살짝 손을 얹고 있었다. 구조 요청이라도 하는 것처럼 사방을 훑어보는 윤재민의 눈빛에 다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만 일어날까요?”
한창 이야기에 열을 올리던 윤정이 불퉁하게 말한다.
“점심시간 끝나려면 아직 멀었는데?”
“멀긴 뭐가 멀어요. 다 같이 커피나 한잔하고 나면 딱 떨어질 시간인데.”
여성 혐오증에 걸려도 이상하지 않을 일을 겪은 사람한테 지금 뭐 하는 짓이냐고, 말해 봐야 알아먹을 턱이 없으니 대신 업무에 관한 채찍질을 시행했다. 이마에 핏대가 선 걸 본 건지, 아니면 신입 앞에서 실랑이하는 모습을 보이기 싫었는지 신 대리도 평소보단 얌전히 일어섰다. 벗어 놨던 구두를 찾는 여자들을 피해 얼른 다연의 곁으로 온 재민이 말갛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밥 사 주셨으니까 커피는 제가 사겠습니다.”
‘신부가 직접 고른 건데 그걸 강 대리가 무슨 자격으로 감 놔라 배 놔라야. 능력 되면 당연히 좋은 거 해 줘야 하는 거 아냐? 다른 선택지가 있는데 모르면 속고 하는 결혼이게?’
다연이라고 비싼 거 모르고 유행 몰라서 그 매장을 선택한 게 아니다. 남자 쪽 집안 성향까지 다 생각해서 머리 터지게 찾아 놓은 예물이었다. 그래 봐야 본인이 원했다는 말 한마디면 끼어들 수 없는 게 맞아서 차라리 잊자, 하고 한쪽 구석으로 밀어 놨던 일인데 오늘 보니 아마 좋지 않은 쪽으로 결론이 나 버린 모양이다.
“신랑한테 계약 파기하자고 연락 왔어. 위약금이고 뭐고 다 물어 줄 테니까 없던 일로 하자고. 신부 측은 플래너가 하라는 대로 했다가 결혼 엎어졌다고 책임지라는데 둘이 뭘 어떻게 했길래 초반 예산의 두 배를 잡아먹어?”
승아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고막을 찢을 듯이 울렸다. 다연도 눈을 감고 속으로 욕을 뱉었다. 이 정도면 좋지 않은 수준이 아니라 최악에 가깝다. 아무리 스몰 웨딩이 대세라고 하지만 대부분의 예식은 플래너를 끼고 하는 게 정석이다. 요즘엔 인터넷으로 눈에 불을 켜고 찾은 다음 오는 마당에 고객이 작정하고 물고 늘어지기 시작하면 이미지 망치는 건 한순간이었다.
“강 대리 이번 주에 야근 몇 번이나 했어?”
꿀 먹은 벙어리처럼 버티는 두 여자를 보며 승아가 도끼눈을 치뜨고 물었다.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라서 머뭇거리는 동안 화살이 신 대리에게 향했다.
“신 대리는 이번 달에 야근을 하긴 했어?”
조금만 더 건드리면 울 기세로 서 있는 윤정을 보고 다연이 승아에게 눈짓을 했다. 그러나 화가 머리끝까지 난 김 과장을 말릴 수 있는 사람은 이 회사를 통틀어 단 한 명도 없었다.
“일찍 들어온 게 벼슬이야? 일찍 들어온 만큼 잘해야 한단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그게 벼슬로 보이겠어? 책임으로 보이지?”
기어이 윤정의 눈시울이 붉어진다. 보고 있는 다연도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올해 진짜 아홉수가 맞는 건가. 아닌데도 이런 거면 굿이라도 해야 할 판인데.
“과장님, 우선은 제가 신부를 만나 보고…….”
“신 대리만 욕할 거 없어. 강 대리도 마찬가지야.”
일단은 이 자리를 파하게 해야겠단 생각에 말을 꺼내던 다연이 신경질적인 목소리를 듣고 입을 닫았다.
“직장이 학교도 아니고 잘못된 게 보이면 싫은 소리, 쓴소리도 할 줄 알아야지. 둘이 친목 다지려고 직장 다녀? 싸우기 싫으면 아예 집에 틀어박혀서 살든가, 아니면 사회생활을 제대로 하든가!”
다연의 손끝이 곱았다. 평상시 혼날 일이 별로 없던 터라 이렇게 깨지는 게 낯설었다. 이 일은 혼자 노력해서 되는 게 아니라고 전부터 잔소리를 듣긴 했지만 누가 직접적으로 퍼부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간 참았던 승아의 화가 제대로 폭발한 것 같았다.
“신 대리는 나가 봐. 이거 책임 단단히 물을 거니까 앞으로 정신 똑바로 차리고 일해.”
부들부들 떨리는 다리로 걷는 소리가 사라지자 빈 공간에 둘만 남았다. 고개도 못 드는 다연에게 승아가 차가운 목소리를 쏟아붓는다.
“내가 강 대리 붙잡고 제발 과장 자리 맡아 달라고 했던 걸 얼마나 후회했는지 알아?”
“…….”
“무르다고 다 좋은 거 아니야. 월급 많이 받으면 그만큼 일을 해야지. 그중에 악역을 맡아야 하는 일이 있으면 그것도 해야 하는 거고. 누군 착하게 살기 싫어서 이래?”
묵묵히 듣고만 있는 다연의 모습에 승아가 보이지 않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은 다연이 혼날 일이 아니지만 직책을 맡게 되면 결국 그 책임을 떠안아야 하는 입장이 된다. 그게 사회생활의 불합리한 점이고 여기다 다연 혼자 두고 떠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했다.
“밑에 신입 하나 붙여 줄 테니까 어떻게든 써먹어 봐.”
다연이 고개를 쳐드는 걸 보고도 꼼짝 않고 눈을 맞췄다. 이 난리가 난 걸 처음 듣자마자 바로 세운 계획이었다.
“일 잘한다니까 이제 컨설팅부 일이건, 타 부서 일이건 직접 말 섞지 말고 무조건 걔 통해서 보고하라고 해. 내가 나중에 다 확인할 거야.”
다연의 얼굴이 아연하게 변했다. 컨설팅부만 해도 대리가 넷이나 된다. 승아가 직급을 정리하는 데 집중하면서 얼결에 승진한 사람들이라곤 해도 엄연히 같은 직책이었다. 거기다 그중 둘은 다연보다 나이도 많다. 사내에서 제일 심하게 족보가 꼬인 나머지 회식 때마다 대리끼리 앉은 자리만 불꽃이 튀는데, 이 와중에 승아에게도 붙어 있지 않았던 보조를 자신에게 붙이다니. 이건 완전히 어불성설이다.
“과장님, 이러면 저 진짜 그 자리 못 맡아요.”
안 그래도 일하는 유세 혼자 다 떠냐는 소리를 듣는 마당에 도와주는 사람까지 있으면 눈총이 두 배가 될 것 같다. 진짜 내가 피 말라 죽는 꼴이 보고 싶은 거냐고, 눈으로 고함을 치는데도 김 과장의 태도는 단호했다.
“그 정도도 못 버티면 나야말로 그 자리 못 맡겨. 몇 번이고 말했지. 승진 아니면 퇴사라고.”
“…….”
“선택은 강 대리가 해. 이제 더는 안 말려.”
이 세상에서 김승아를 말릴 수 있는 건 김승아뿐이란 걸 너무 잘 안다. 이미 배수의 진을 치기로 한 걸 깨달은 다연이 멀어지는 승아의 뒷모습을 보며 머리털을 쥐어뜯었다.
* * *
월요일, 승아가 보낸 인턴이 9시에 컨설팅 부서로 오겠다고 메신저를 보냈다. 축 처진 몸과 그보다 더 바닥에 가서 기고 있는 정신머리를 주워 모아 어찌어찌 출근까진 했는데 그다음 일을 떠올리면 당장이라도 도망가고 싶었다. 생전 싸운 적 없다던 커플이 예물 고르다가 파혼 직전까지 갔으니 승아의 분노가 하늘을 찌르는 것도 이해는 한다. 그러나 그 날벼락을 왜 자신이 맞아야 하는지에 대해선 아직도 억한 심정이 올라왔다.
책상에 머리 박고 누워 있던 다연의 어깨를 누군가 톡톡 친다. 돌아보니 얼굴이 보여야 할 곳에 가슴팍이 보였다. 넥타이를 보고 멍해진 시선이 그 위로 어깨와 목을 지나 짧은 머리카락을 향했다.
“강다연 대리님?”
다연은 아직도 가끔, 예전 그날을 꿈속에서 보곤 했다. 벚꽃 잎이 날리던 결혼식장, 도망간 신부. 창백하고 시원한 봄과 바닥에 고여 있던 깊은 우울.
“…….”
그 꿈을 꾸고 일어난 날은 평소보다 몸이 무겁고 눈꺼풀이 가물거렸다. 무력하고 슬픈 무중력 속에 하루 종일 같이 고여서 누군가의 바다를 헤엄치며 보냈다.
“……윤, 재민 씨?”
그래서 지금 이 남자의 얼굴이 낯설지가 않다. 반달을 그리며 웃는 눈이, 부드러운 표정에 흰 얼굴이 드라마에 나오는 배우처럼 후광이 비치는 것만 해도 놀랄 판인데 심지어는 그날로부터 조금의 시간도 지나지 않은 것처럼 맑다. 다연은 알고, 상대방은 절대 알 수 없는 얼굴. 그 얼굴을 사색이 된 채 올려다보는 자신의 모습에 재민이 살짝 난감한 표정을 짓는다.
“되게 놀라시네요.”
한순간에 기억이 5년 전 봄날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이 남자가 왜 여기 있지? 스트레스 때문에 헛것을 보나?
“대리님.”
고개를 돌리니 지금 뭐 하고 있냐는 듯한 지원의 얼굴이 보였다. 다연을 빼고는 전부 돌아가는 상황을 알아먹는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그리하여 다시금, 꽤나 멍청한 표정으로 남자의 얼굴을 올려봤다. 반대여야 하는 거 아니야? 나만 빼면 아무도 이 사람을 몰라야 정상 아닌가? 생각을 굴리고 또 굴리며 입만 벌리고 있는 다연을 보다 못했는지, 지원이 옆에 다가왔다.
“대리님, 오늘 인턴 온다고 했잖아요.”
그제야 극단적인 현실 부정을 향해 달려가던 머리가 멈췄다. 정적이 흐르는 걸 본 재민이 먼저 입을 열었다.
“김승아 과장님이 말씀하셨다고 했는데.”
“…….”
“혹시 남자란 건 못 들으셨어요? 그래도 이름 들으면 알 텐데.”
머릿속에 벼락이 치는 것 같았다. 처음 만난 사람이 왜 자신을 보고 귀신 같은 얼굴을 하는 것인지, 영문을 모르는 윤재민이 꽤 당황한 얼굴로 웃는다. 그러나 다연은 거기에 답해 줄 정신이 일 푼도 없었다. 상사한테 쪼이고 집에선 볶이고 회사에선 윤재민을 만났다. 아홉수의 마지막을 장식한 남자를 보니 누가 복부에 어퍼컷이라도 날리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2.
다연이 속한 컨설팅 부서는 기본적으로 남녀의 성비가 13 대 0인 곳이었다. 악명 높은 김 과장 덕분에 다들 꽃이라기보단 독초들로 자라나긴 했다만 그래도 사내에서 여성 비율이 가장 높은 마리아쥬의 꽃밭.
“그럼 이번 달에 입사하신 거예요?”
“그렇죠.”
오늘 그 꽃밭에 꿀벌이 하나 입성했고, 그로 인해 단 한 번도 진행된 적이 없던 단체 점심 식사라는 진풍경이 연출되었다.
“다들 빨리 드세요.”
다정하게 울리는 말을 들은 다연이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바라본 곳에는 오늘의 주인공 윤재민 씨가 식당에 들어온 순간부터 지금까지 한시도 쉬지 않고 떠드는 신 대리에게 붙잡혀 갖은 질문 세례를 받고 있는 게 보였다. 사방에서 시선이 모여드는 와중에도 부지런히 숟가락을 놓고 물을 따르는 손이 참 씩씩했다. 실은 아직도 꿈인가 싶었는데 저걸 보니 이제 현실이라는 게 실감 난다. 인턴이 온 것도, 그 인턴이 윤재민이라는 것도.
울적한 얼굴로 숟가락을 들자니 이번 주부터는 정말 십일조라도 내야 하나, 하는 생각부터 들었다. 정말이지 한 종교의 절대자 정도가 아니면 방패막이도 안 될 것 같은 하루하루였다.
“재민 씨 피부 진짜 좋다. 화장품 어디 거 써요?”
윤정이 순진한 눈망울로 재민의 얼굴을 빤히 본다. 밥 한 숟갈 넘기기도 부담스러운 눈빛인데 재민은 대견하게도 숟가락을 놓지 않았다.
“그냥 스킨로션 아무거나 바르죠.”
덧붙여 응대까지 열심히 해 준다.
“와, 근데도 피부가 이렇단 말이야? 젊어서 그런가?”
뒷말을 듣기도 전에 다연의 눈이 먼 산을 향했다. 아는 사람에, 남자에, 잘생겼고, 심지어는…….
“저 서른이에요.”
나보다 나이도 많은 신입이라니.
“말도 안 돼, 진짜?”
신 대리를 비롯한 여자들이 입을 가리고 놀라는 동안 다연은 집던 김치를 내려 두고 밥에 물을 말아 버렸다. 저 목소리를 계속 들었더니 내 밥맛이 다 떨어지네.
“진짜 그렇게 안 보이는데? 거짓말하는 거 아니에요?”
여자들이 호들갑을 떠는 걸 보고 재민이 난감하다는 듯 웃는다. 예의상 하는 말도 있고 진짜 못 믿어서 하는 말도 있을 것이다. 그만큼 윤재민의 겉모습이 참 풋풋했다. 예전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5년 전이니까 그때 저 사람 나이가 스물다섯이었을 텐데 변함이 없다는 게 더 무섭다.
다연은 가만히 스물다섯이란 나이를 곱씹어 봤다. 너무 어렸기 때문인지 신부인 한다정의 집에서 심하게 반대하는 결혼이었다고 했다. 그 나이에, 그것도 반대하는 결혼을 왜 그렇게 하려고 했나 봤더니 식장에 가기도 전 신부가 임신 중이었단 얘기를 한 여사가 고모 댁까지 가서 덥석 물어 왔다. 원치도 않게 많은 이야기를 들었던 터라 저기 앉아서 신 대리의 말을 받아 주고 있는 남자가 신기루처럼 느껴졌다. 물론 다연보다도 윤재민이 훨씬 원치 않았던 일이겠지만.
다연은 우울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오이장아찌를 입에 처박았다. 결혼이라면 이제 치가 떨릴 줄 알았더니 어떻게 고르고 골라 여길 입사할 수가 있지? 저 해맑은 남자가 실은 우울의 바다에 혼자 파묻혀서 눈물을 뚝뚝 흘렸을 거라고는 다들 상상도 못 할 거다.
“삼재라니까, 삼재…….”
중얼거리며 습관처럼 남은 음식을 정리하다 문득 느껴지는 시선에 옆을 돌아봤다. 어느새 주제가 운동으로 넘어갔는지 신 대리가 재민의 어깨에 살짝 손을 얹고 있었다. 구조 요청이라도 하는 것처럼 사방을 훑어보는 윤재민의 눈빛에 다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만 일어날까요?”
한창 이야기에 열을 올리던 윤정이 불퉁하게 말한다.
“점심시간 끝나려면 아직 멀었는데?”
“멀긴 뭐가 멀어요. 다 같이 커피나 한잔하고 나면 딱 떨어질 시간인데.”
여성 혐오증에 걸려도 이상하지 않을 일을 겪은 사람한테 지금 뭐 하는 짓이냐고, 말해 봐야 알아먹을 턱이 없으니 대신 업무에 관한 채찍질을 시행했다. 이마에 핏대가 선 걸 본 건지, 아니면 신입 앞에서 실랑이하는 모습을 보이기 싫었는지 신 대리도 평소보단 얌전히 일어섰다. 벗어 놨던 구두를 찾는 여자들을 피해 얼른 다연의 곁으로 온 재민이 말갛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밥 사 주셨으니까 커피는 제가 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