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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저쪽은 위험 지대로 이미 낙인찍힌 모양이다. 그러나 이쪽 입장에선 이 남자가 위험 지대라 슬금슬금 옆으로 도망치게 됐다. 간신히 다섯 걸음쯤 떨어졌을 때 긴 다리로 세 번 만에 다가온 얼굴이 작게 속삭였다.

“감사합니다.”

말갛게 짓는 미소를 보고 있자니 등 뒤로 식은땀이 조용히 흘렀다. 이 남자는 나를 절대 알 리가 없는데, 그럼에도 더럽게 눈치가 보인다. 어색하고 불편하고 근데 상대는 내가 왜 이러는지도 모르고.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이렇게 곤혹스러울 수가 있나. 이 정도도 못 버티면 그 자리 못 맡긴다고, 승아는 그렇게 말했지만 아마 이 고비를 넘기고 나면 신 대리 정도는 가볍게 찜 쪄 먹고 사장님과의 면담에서도 여유롭게 승기를 잡을 수 있게 될 거란 것까지 예상하진 못했을 것이다.

“커피 뭐로 사다 드릴까요?”

“……그냥 아메리카노요.”

“비싼 거 드셔도 되는데. 그리고 말도 적당히 놓으셔도 돼요. 저 나이 완전히 허투루 먹은 놈이라.”

계속 거절해서인지, 재민이 민망해하는 게 느껴진다. 그래서 다연도 말을 많이 섞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란 마음의 소리를 무시한 채 대꾸했다.

“서른이면 많지도 않은데요, 뭘.”

아무렴, 그 난리를 겪고도 마음잡고 사는 것 자체가 대견하지, 나이가 뭐가 중요해. 딴에는 속마음을 잘 감춘 대답이었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재민은 다연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가 재미있다는 듯 눈매를 접었다.

“왜 웃어요?”

“그냥. 다른 사람 같으면 예의상 하는 말이라고 할 텐데.”

“…….”

“대리님은 진심이신 것 같아서요. 아까 식당에서도 안 놀라셨고.”

빌어먹을, 역시 촉이란 놈이 그냥 오는 게 아니구나. 생각보다 눈치 빠른 윤재민 씨가 왜 안 놀랐는지 캐묻기라도 할까 봐 재빨리 말을 돌렸다.

“그나저나 앞으로 괜찮으시겠어요? 여자가 많은 부서라.”

“아, 좀 당황하긴 했어요. 다들 질문 엄청 많으시네요.”

뒷머리를 긁적이며 하는 말을 보니 당황하긴 했으나 별문제는 안 된다는 투였다. 위기감을 느낀 다연은 평소에는 서로 간에 그렇게 많은 관심을 두지 않는 부서라는 것. 그리고 이 관심은 본인이 남자인 데다 잘생겼기 때문이라는 것을 함축하여 한마디로 답했다.

“혹시 적응하기 너무 힘들면 말씀하세요.”

승아에게 들들 볶이는 한이 있더라도 다른 팀으로 보내 버릴 테니까. 안 올라가는 입꼬리를 열심히 올리고 있자니 조금 전보다 환하게 미소 지은 재민이 밝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에이, 말 놓으셔도 된다니까요.”

앞의 말은 아예 묵살이었다. ‘저 인간 못 들은 척 넘기는 솜씨가 보통이 아닌데.’라는 불길한 예감이 든 다연이 터벅터벅, 지원이 있는 쪽으로 걸었다. 제발 멀리 좀 가 줬으면 소원이 없겠고만 재민은 다연이 오른쪽으로 가면 오른쪽, 왼쪽으로 가면 왼쪽으로 따라오는 행보를 계속했다. 뒷머리가 비죽 서려고 할 때쯤 등 뒤에서 윤정의 목소리가 들렸다.

“재민 씨 뭐 해요. 커피 사 준다면서. 물주가 여기 있으면 어떡해.”

평소엔 원수 같다고 생각한 음성이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밝아진 다연의 얼굴이야 안중에도 없는 신 대리가 딱 붙어 있는 둘을 보고 눈을 흘긴다.

“뭐야, 강 대리 따라온 거야?”

벌써부터 불쾌한 기색이 서렸다. 처음 보는 신입 앞에서 기 싸움 하는 걸 계속 보일 필요는 없단 판단 아래 이쪽도 적당히 웃음기를 섞어 대답했다.

“따라오긴 뭘 따라와요. 그냥 걷다 보니까 같이 있는 거지.”

곁눈질로 신 대리를 따라가라고 신호를 보냈는데 싱긋, 미소를 머금은 재민이 그 얼굴 그대로 윤정에게 폭탄을 집어 던졌다.

“따라온 거 맞아요. 김승아 과장님이 강 대리님 따라다니면서 도와주라고 하셨거든요. 일이 제일 많다고.”

말 끝나기가 무섭게 윤정의 표정이 김장철 시어머니처럼 변했다. 졸지에 고부 갈등을 겪는 며느리 심정이 된 다연이 재민의 등을 꾹꾹 밀었다.

“그런 거 아니에요. 윤재민 씨, 가서 계산하셔야죠?”

말할 때는 여유 있는 척 웃어 보였으나, 그건 바로 뒤에 택할 행보가 줄행랑인 것을 알기에 나온 허세였다. 흙먼지를 날리며 달아나는 다연의 뒤에서 재민이 뺨을 살짝 만지는 게 보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도 제 살길을 찾아야 하지 않겠냐는 변명 아래 제일 앞에서 걷던 지원의 곁으로 경보하듯 다가갔다. 볼이 빨개져서 헉헉대는 자신의 모습에 지원이 뒤를 돌아봤다.

“반가워요, 대리님.”

“그래, 나도 반가워.”

“참, 아까 들으셨어요?”

“뭘?”

“엄뭐, 재민 쒸 피부 쥐인짜 조타. 화장품 어디 꺼 써어어어?”

입술을 쭉 내밀고 신 대리의 말을 따라 하는 걸 보고 화들짝 놀라 옆구리를 찔렀다. 그래 봐야 지원은 여전히 무심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저 정도면 그냥 관종 아니에요? 솔직히 결혼할 사람 있단 말도 못 믿겠어요. 만나는 남자마다 저러고 다니는데 받아 주는 애인이 있다는 건 사기를 쳤거나 아님 사기를 당한 거지.”

“…….”

“앞으로 시끄러울 것 같네요. 신 대리님 하는 짓 보니까.”

굳이 집어 주지 않아도 충분히 절망스러우니까 그만하련? 그늘진 눈을 감추려고 하늘을 한 번 쳐다본 다연이 짧게 숨을 뱉었다.

사람이 나이를 먹을수록 철이 드는 이유는 진짜로 철이 들어서가 아니라 네 나이면 이 정도는 할 수 있을 거라는 전제 아래 이런저런 책임이 몰려오기 때문이다. 지독한 방향치라 평생 운전대를 안 잡을 줄 알았더니 일 때문에 잡고 있고, 무뚝뚝한 성격이라 영업 관련된 업무는 못할 줄 알았더니 누구보다 많은 사람을 만나는 일을 5년째 하고 있는 지금처럼. 다 그렇다. 본인이 원해서 되는 것도 그걸 할 능력이 있어서 일을 맡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까 결국엔 내가 원치 않는 만남이라도 잘 이끌어 가는 게 스물아홉의 강다연이 해야 할 일이란 거겠지.

다연은 주위에서 깔깔 웃는 여직원들을 상대하느라 고군분투하는 재민의 듬직한 어깨를 돌아봤다. 그래, 어차피 나만 입 다물면 누가 알겠어. 저 인간이 미쳐서 파혼 경력도 경력이랍시고 이력서에 쓴 게 아닌 이상.

그만 생각하자고 머리를 한 번 흔드는 사이 눈앞에 커피가 배달됐다. 단체 주문이라 카페 직원들이 바깥까지 테이크아웃 트레이를 들고 나와 줬다. 멈춰 있던 부서 사람들이 하나씩 자기 음료를 찾는 동안 무념무상, 나뭇잎이 떨어지는 걸 보며 쉬던 다연이, 뒤통수에 따라붙는 시선을 느낀 것도 바로 그때였다.

“…….”

누군가 했더니 이번에도 윤재민이다. 아까보다 두 배쯤 더 미안하단 얼굴로 웃고 있다. 이젠 웃는 것만 봐도 경기가 날 지경이었다. 왜 또 저렇게 웃어? 불길한 예감이 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이쪽으로 다가온 직원을 보고, 지원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강 대리님 뜨거운 커피 시키셨어요? 이 날씨에?”

황당한 소리에 다연도 아래를 내려다봤다. 난감한 얼굴의 직원과 작열하는 태양을 배경 삼아 펄펄 끓고 있는 커피가 보였다. 주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말 한마디 못하고 있는 타이밍에 재민이 끼어들었다.

“아, 잘못 시켰나 보네요. 뜨거운지 차가운지 말씀을 안 해 주셔서.”

“…….”

“다시 가서 사 올게요. 대리님도 같이 가실 거죠? 카페 주문은 복잡해서 잘 못 하겠어요.”

묵묵히, 너스레를 떠는 윤재민의 얼굴을 한번 봤다가 멀리 서 있는 신 대리의 손을 쳐다봤다. 생크림은 빼고 원두까지 고르고 당도를 낮게 해 달라고 말했을 아이스커피.

“강 대리님.”

저걸 시켰으면서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 사 달란 주문이 어렵다고 한 건가, 지금.

“빨리 안 가면 점심시간 다 끝나요.”

다연은 사무실로 떠나는 인파를 간절한 눈으로 쳐다봤다. 당장이라도 그 뒤를 졸졸 따라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었다. 그러나 눈앞에서 거절은 생각도 안 한다는 얼굴로 서 있는 윤재민을 이길 길이 만무했다. 힘없이 카페 쪽으로 걸음을 옮기고, 도착한 곳에 이미 차가운 커피가 준비되어 있는 걸 본 다연이 쓴웃음을 지었다.

“죄송합니다. 이렇게 안 하면 따로 말도 못 붙이게 할 것 같아서.”

커피 잔을 들고 앞서 걷는 다연의 곁에서 재민이 말했다. 한숨이 나오는 한편 미안한 일이었다. 따지고 보면 재민은 오늘 처음으로 이 부서에 출근한 거고 다연을 만난 것도 이게 처음이다. 그런데 상사랍시고 나타난 사람의 태도가 첫판부터 이러면 당하는 쪽에선 걱정될 법도 했다.

“제가 많이 불편하세요?”

예의 난감한 표정으로 이쪽을 보는 얼굴에 양심이 사정없이 찔려 왔다. 결국 먼저 이성의 끝을 붙잡은 다연이 ‘사실은 불편해 미치겠어요.’라는 마음의 소리를 꾹꾹 누르며 답했다.

“그게 아니라, 과장님이 말을 제대로 안 해 주셔서 그래요. 인턴 온다는 소리도 주말에 처음 들었고.”

“…….”

“시간 지나면 괜찮을 거예요.”

윤재민이 입을 다문다. 다연의 표정이 어지간히 복잡해 보였는지 한동안 답도 없었다. 둘이 사거리 코너를 돌 때쯤이 돼서야 점심시간 내내 안테나에 예민하게 걸리던 낮은 음색이 들려왔다.

“김 과장님이 좀 막무가내인 면이 있으시긴 하더라고요.”

그 성격이 마녀라는 걸 나만 느끼는 게 아니었구나. 공감해 주는 사람이 나타나니 한결 마음이 편하다. 이참에 분위기도 살살 풀려 가는 것 같았는데, 그건 다 뒤의 말을 듣기 전까지의 얘기였다.

“저한테도, 강 대리님이 이렇게 불편해하든 말든 꼭 붙어 다니라고 협박하고 가셨거든요.”

어느새 바닥을 보인 재민의 잔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얼음을 깨무는 소리가 꼭 머릿속에 대고 하는 것처럼 선명해서, 다연 역시 메어 오는 목소리를 억지로 가다듬어 가며 간절히 물었다.

“아까 그거 농담인 줄 알았는데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재민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소리 내서 웃는다.

“농담으로 해 드리고 싶어도 제가 낙하산이라 선택의 여지가 없네요.”

“…….”

“오후 일정 빡빡하던데 빨리 들어가야죠.”

앞장서는 발걸음이 가볍다 못해 경쾌하다. 그 뒤로 구두를 질질 끌고 가는 다연의 깊은 구덩이는 아랑곳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

그 뒤통수를 빤히 쳐다보던 다연이 울적한 마음을 감추려 커피를 쭉 들이켰다. 머리가 찡할 정도로 시원한 커피도 가라앉혀 줄 수 없을 만큼 속에서 잿더미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 * *



그날 오후 내내, 재민은 식당에서 보인 모습이 얼마나 새 발의 피였는지를 보여 주겠다는 듯, 매시간 파격 그 자체의 행보를 보여 다연을 기함하게 만들었다.

“확실히 여자분들이랑 일하니까 분위기가 좋네요.”

“아, 재민 씨 그만하라니까.”

“진짜예요. 사무실 공기부터 다른데요.”

박 터지는 웃음소리가 벽 전체에 울렸다. 다 알고 하는 립서비스라도 미남이 하면 다른 건지, 다들 재민이 10분 동안 똑같은 말을 하든 30분 동안 똑같은 말을 하든 전혀 개의치 않은 채 한결같은 태도로 좋아했다. 다연은 턱을 괸 채 누가 보면 이 사무실에서 10년은 구른 줄 알 정도로 유들유들하게 돌아다니는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저기 죄송한데, 아까 분명히 질문 많아서 힘들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그러나 그새 분위기 파악이 끝났는지 매시간마다 적응력 만렙을 찍는 윤재민의 목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윤정을 비롯한 청새치 떼가 하는 말을 하나하나 귀담아 듣고 활어처럼 생생한 리액션을 선보이고 있는 통에 다들 단체 최면이라도 걸린 것 같았다.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본 다연의 감상은 ‘김 과장이 저걸 미리 봤다면 내가 아니라 저 인간을 과장 자리에 밀어 넣었을 텐데.’로 아주 짤막하게 귀결되었다.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사무실 구조를 파악하던 재민이 다연이 있는 쪽을 쳐다본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저도 모르게 슥, 고개를 돌려 버렸다. 와, 후광이 진짜 장난 아니네. 무슨 형광등 켰나. 칙칙하기 짝이 없는 이쪽과 너무 대비되는 미소라 본능적인 거부감이 들었다.

다연이 하는 짓을 본 재민이 서류로 입을 가리며 반대편으로 걸어간다. 저 종이 밑에는 구김살이라곤 하나 없는 미소가 물려 있겠지. 푼수 떠는 신 대리만큼은 아니더라도 다연 역시 무너지는 법이 없는 말간 웃음에는 감탄을 금치 못하는 중이었다.

“…….”

그리하여 생각을 하면 할수록 아무래도 기억에 오류가 있는 것 같단 확신이 몰려왔다. 윤재민은 그날 그렇게까지 슬펐던 게 아니고, 그 일은 트라우마로 남지 않았으며, 한두 달쯤 지나자마자 웃으면서 ‘맞다, 나 파혼했었지.’ 하고 넘길 수 있는 정도의 사건이었던 게 분명하다. 그게 아닌데 저렇게 마냥 밝다는 건 트럭에 치여 기억 상실증이라도 걸리지 않는 한 불가능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