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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맥주 모자라는 거 같은데.”
스무 살 생일을 하루 앞둔 소희는 친구 집에 다 같이 모여서 생일 파티를 즐기는 중이었다.
까마득하게 느껴지는 스무 살은 지긋지긋한 사회생활을 겪은 불특정 다수에게 향수를 느끼게 했고, 늦게까지 술을 마셔도 지치지 않는 강철 체력을 그리워하게 만드는 나이였다.
“편의점 가서 더 사 올까?”
“내가 다녀올게.”
친구 하나가 일어나 주섬주섬 지갑을 챙겼다.
“나도 같이 가.”
소희는 친구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한쪽 팔을 들어 옆구리를 내보이는 그녀를 향해 자연스레 팔짱을 낀 소희는, 문을 활짝 열어 주는 다른 친구에게 고마움의 윙크를 날려 준 뒤 밖으로 나왔다.
어둠이 짙게 깔린 골목길에는 가로등 말고는 불빛 하나 없었고, 소희와 친구는 휴대폰을 손전등처럼 의지한 채 편의점으로 향했다.
터벅터벅.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길은 한산했다. 그 덕에 두 여자의 발걸음 소리만 요란했다.
“좀 으스스하다.”
소희가 팔짱 낀 손에 힘을 주며 말했다. 그건 친구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인지 소희에게 조금 더 찰싹 달라붙었다.
딸랑.
편의점에 도착한 소희는 남자 친구와 통화를 해야 한다며 먼저 들어가서 사 오라는 친구의 말에 혼자 편의점에 들어서서 냉장고로 향했다.
맥주 몇 캔을 꺼내 계산대 위에 올려 둔 소희는 아르바이트생이 바코드를 찍는 동안 아무 생각 없이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무심코 바라본 그곳에는 어떤 남자가 가만히 서서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쿵쾅쿵쾅.
순간적으로 눈이 마주친 소희는 숨이 헙, 하고 멈춰 버렸다.
마치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듯한 신비로운 남자를 본 탓에 극도의 두근거림으로 인해 몸이 굳어 버려 시선을 돌릴 수가 없었다. 심지어 소름 돋을 정도로 잘생기기까지 했다.
그사이 밖에 서 있던 남자가 소희를 향해 손을 흔들며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가 완전히 사라지고 나자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는 그녀의 귓속을 시끄러울 정도로 울려 댔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소희는 덜덜 떨며 빠르게 맥줏값을 치렀다.
“다 샀어?”
밖으로 나온 그녀를 부르는 친구의 목소리에 소희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말했다.
“야! 방금 여기 있던 남자 봤어?”
“무슨 남자?”
친구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방금 문 옆에 서 있다가 갔잖아.”
“무슨 소리야. 나 아까부터 계속 여기 있었어. 근데 아무도 안 지나갔는데?”
그러자 소희가 어색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장난치지 마. 그 사람이 나한테 손도 흔들어 주고 갔는데.”
“무섭게 왜 그래. 진짜 아무도 없었다니까?”
친구의 표정이 싸해지자, 소희의 표정도 점점 굳어 갔다.
“진짜?”
“진짜.”
순간적으로 흐르는 정적에 둘은 서로의 눈만 쳐다보았다. 둘 다 한 치의 거짓도 없다는 표정이었다.
오싹함을 느낀 그녀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집으로 향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리기 시작했다.
‘뭐야! 뭐냐고!’
격한 숨을 몰아쉬며 집에 도착한 두 사람은 하하 호호 떠들며 대화 중인 나머지 친구들을 향해 방금 있었던 일을 서둘러 이야기해 줬다.
“근데 그 남자 말이야.”
여기저기서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친구들은 어쩐지 겁에 질려 있는 소희의 목소리 때문에 약간의 긴장감을 가지고 이어지는 말에 집중했다.
“장난 아니게 잘생겼었어.”
잔뜩 얼어 있던 공기가 와장창 깨졌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뒷말에 친구들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그 와중에 잘생긴 걸 봤네. 욕구 불만이냐?”
“아니, 심각하게 잘생겼다니까.”
진지한 그녀의 대답에 친구들의 눈이 반짝거렸다.
“그렇게 잘생겼어?”
한 친구의 질문에 소희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연예인이라고 해도 믿겠더라.”
“뭐 어떻게 생겼는데?”
“그래, 말해 봐.”
“밤하늘처럼 까맣고 긴 머리카락에 피부도 하얀 것이 사극에 나오는 곱상하게 생긴 배우들 있잖아. 꼭 촬영하다가 온 것 같은 느낌?”
“자세히도 봤다.”
친구 하나가 소희에게 말했다. 그녀의 말에 빙그레 웃은 소희가 계속 말을 이어 갔다.
“살짝 스쳐도 기억에 남을 얼굴이었어. 뭐랄까, 굳이 비유하자면…….”
“하자면?”
곰곰이 생각에 잠겼던 소희가 두 손바닥을 탁 마주치며 말했다.
“신선?”
여기저기서 피식하는 실소가 터져 나왔다. 친구들의 반응에 기분이 나빠진 소희가 언성을 높이며 말했다.
“웃지 마! 나는 진짜 무서웠고 잘생겼고 그랬다고!”
“외롭긴 외로웠나 보다, 우리 소희. 이리 와. 언니가 안아 주마.”
한 친구가 그녀를 향해 팔을 벌렸다. 덕분에 소희는 닭살이 돋으며 손발이 오그라들었다. 견디다 못한 소희가 얼굴을 붉히며 도망가려 하자, 친구들은 미리 의논이라도 한 것처럼 그녀를 안아 주겠다고 달려들었다.
곧 네 명의 친구에게 깔린 소희가 발버둥을 치며 고함을 질렀다.
“아니라고! 진짜라고 이 자식들아!”
깔깔거리며 자신의 말을 무시해 버리는 친구들을 향해 답답함을 토해 내는 소희였다.
*
다음 날, 소희는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터덜터덜 길을 걷고 있었다. 완전히 다 깨지 않은 숙취에 머리가 지끈거리기는 했지만, 역시 젊음이 만병통치약이었다.
‘비틀거리면 엄마한테 혼나겠지?’
이 정도 정신력이면 괜찮을 것이다. 소희는 만족스러운 미소와 함께 인적이 드문 골목길로 들어섰다.
‘어?’
그러다 전봇대 아래에서 익숙한 뭔가를 발견했다. 혹시 잘못 보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눈을 비볐지만, 분명 자신이 알고 있는 그것이었다.
‘만 원이다!’
인자한 세종대왕 님이 초록의 푸름을 뽐내며 그녀를 유혹하고 있었다.
소희는 냉큼 돈을 쥐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취객이 들렀다 가기 딱 좋은 위치라 아마도 새벽녘에 누군가가 흘리고 간 모양이었다.
‘땡잡았다!’
주인 없이 떠도는 만 원권 한 장은 재빠르게 그녀의 주머니 속으로 들어갔다. 덕분에 두통이 씻은 듯 사라졌고, 하늘을 날아갈 것처럼 기분이 좋아졌다.
‘일진이 좋은데?’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정류장으로 걸음을 옮긴 그녀는 자신이 타야 할 버스가 멀리서 오고 있는 것을 확인하곤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버스까지 딱 맞춰 오네. 심지어 자리도 많아!’
기쁜 마음으로 버스에 오른 소희는 즐거운 일이 가득한 하루가 될 것 같은 징조에 해맑은 미소를 띤 채 집으로 향했다.
*
집으로 돌아온 소희는 믿을 수 없는 눈앞의 광경에 들고 있던 가방을 바닥에 툭 하고 떨어트렸다.
“이…… 이게 무슨.”
“소희 왔니?”
식탁에 앉아 누군가와 대화 중이던 수진이 자리에서 일어나 소희를 반겼다.
하지만 그녀의 시선은 식탁에 앉아 있는 누군가에게 박혀 움직이지 않았고, 그곳을 환하게 밝히고 있는 두 남자의 후광에 입을 쫙 벌린 채로 굳어 버렸다.
“우리 딸. 들어와서 여기 앉아 봐.”
식탁에서 빛을 내던 남자 한 명이 소희를 향해 말했다.
우리 딸이라며 소희를 부르는 그는 그녀의 아빠인 무강이었고, 웬만한 연예인을 제쳐 버릴 정도의 미모를 소유한 꽃중년이었다. 딸이 보기에도 아빠의 미모는 눈이 부실 정도였다.
엄마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철없던 어린 시절에 아빠에게 왜 엄마랑 결혼했느냐고 울며불며 난리를 치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가장 가슴 아픈 현실 중 하나는, 그런 빛나는 외모를 가진 아빠의 피를 물려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엄마를 쏙 빼닮았다는 것이다.
무강을 본 적 있는 친구들은 하나같이 동정의 눈빛으로 소희를 향해 안타까움을 숨기지 않았고, 그럴 때마다 그녀는 ‘우리 엄마가 어때서!’라는 얼굴로 째려봐 줬다.
아무튼 그런 무강에게 절대 뒤지지 않을 정도의 후광을 뿜어내는 사람이 지금 자신의 집 식탁에 앉아 있었다. 심지어 부모님과 제법 가까운 사이인 듯, 한 치의 어색함도 없었다.
충격받은 표정으로 식탁에 앉은 소희는 바로 옆자리에 앉아 있는 남자에게 온 신경을 집중했다.
분명 본 적이 있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어젯밤 편의점 유리 너머로 본 남자와 굉장히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헤어스타일이 짧아졌다는 것만 빼면 그냥 같은 사람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소희야. 오늘 아빠가 너에게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해 주실 거야.”
앉아 있는 무강의 어깨에 두 손을 올린 채 서 있는 수진의 표정은 한없이 다정했다.
황당함에 입을 뻐끔거리며 말도 못 하고 있는 소희에게 무강은 의자를 바짝 끌어당겨 앉으며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옆에 있는 그 사람이 네 남편 될 사람이란다.”
청천벽력 같은 무강의 말에 소희의 얼굴이 급격하게 굳어 갔다. 이제 스무 살밖에 안 된 딸아이에게 남편을 소개해 주는 아빠라니, 충격적이었다.
“아빠, 농담이 심하시네요.”
“농담 아니야.”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째깍째깍하는 시계 소리가 조용한 부엌을 가득 채웠고, 배달 오토바이 지나가는 소리만 부앙 하고 들려왔다.
“소희야.”
“네, 엄마.”
소희는 무강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대답했다.
“네가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라는 거 알아. 그런데 너의 외할머니, 외증조할머니, 그 할머니의 할머니까지 다 겪었던 일이고, 가장 가까운 나도 겪었던 일이란다. 이제 그 순서가 너에게 온 것이고, 미래의 네 딸도 겪어야 하는 일이야. 그러니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진지하게 들어 줬으면 좋겠어.”
자신을 향한 부모님의 표정 또한 진지했다.
‘좋은 일이 생기기는 개뿔!’
소희는 주먹을 살짝 쥐었다. 어쩐지 오늘 운수가 좋더라.
“지금 부터 들려 줄 이야기는 아주 먼 옛날에 있었던 일에 대한 이야기란다.”
농담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소희는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이며 식탁 위로 손을 올렸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던 무강은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집을 지키는 가택신 중에는 성주신이 있다.”
학교 다닐 때 가신 신앙에 대해 겉핥듯이 배운 기억이 있다. 소희는 가물가물한 기억을 억지로 떠올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예부터 내려오는 미신쯤으로 여기지. 하지만 성주신은 실제로 존재하며 눈에 보이지 않게 깃들어 있단다.”
무강은 뭔가 종교적이면서도 난해한 이야기를 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이리 긴 서두를 늘어놓는 것일까.
“먼 옛날, 우리의 조상은 집을 지키던 성주신과 영원을 약속하는 금기를 깨고 말았다. 그들은 행복했으나, 천리를 깨 버린 업보는 자손에게 저주로 돌아왔지.”
전래 동화 같은 뜬금없는 이야기였다.
“인간과 신이 혼인한 죄. 신의 힘으로 죄 없는 사람들을 학살한 죄. 그리고 성주신의 존재를 드러낸 죄. 이 모든 죄에 대한 형벌은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이다.”
이게 무슨 비현실적인 말인가. 소희는 무엇 하나 이해하지 못한 얼굴로 눈만 깜빡거렸고, 무강은 계속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제 네가 저주받은 운명을 받아들일 차례가 됐구나.”
맞장구치듯 고개를 끄덕이는 수진을 보며 소희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이게 무슨 소설 같은 일이란 말인가.
“저주라는 것이 정확하게 뭔데요?”
그녀의 눈이 옆자리에 앉은 남자를 살폈다. 무강이 말한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이라는 것이 엄청나게 신경 쓰였다.
“성주신과의 혼인.”
소희는 머리를 방망이로 맞은 듯 멍해졌다.
“그럼 방금 소개해 준 이 사람이…….”
“맞아. 신.”
“대박.”
소희는 황당하다는 듯 웃었다.
“지금 그 이야기를 나보고 믿으라고요?”
조상의 업보로 인한 저주와 강제적 혼인. 심지어 사람이 아닌 성주신과의 혼인이라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맥주 모자라는 거 같은데.”
스무 살 생일을 하루 앞둔 소희는 친구 집에 다 같이 모여서 생일 파티를 즐기는 중이었다.
까마득하게 느껴지는 스무 살은 지긋지긋한 사회생활을 겪은 불특정 다수에게 향수를 느끼게 했고, 늦게까지 술을 마셔도 지치지 않는 강철 체력을 그리워하게 만드는 나이였다.
“편의점 가서 더 사 올까?”
“내가 다녀올게.”
친구 하나가 일어나 주섬주섬 지갑을 챙겼다.
“나도 같이 가.”
소희는 친구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한쪽 팔을 들어 옆구리를 내보이는 그녀를 향해 자연스레 팔짱을 낀 소희는, 문을 활짝 열어 주는 다른 친구에게 고마움의 윙크를 날려 준 뒤 밖으로 나왔다.
어둠이 짙게 깔린 골목길에는 가로등 말고는 불빛 하나 없었고, 소희와 친구는 휴대폰을 손전등처럼 의지한 채 편의점으로 향했다.
터벅터벅.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길은 한산했다. 그 덕에 두 여자의 발걸음 소리만 요란했다.
“좀 으스스하다.”
소희가 팔짱 낀 손에 힘을 주며 말했다. 그건 친구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인지 소희에게 조금 더 찰싹 달라붙었다.
딸랑.
편의점에 도착한 소희는 남자 친구와 통화를 해야 한다며 먼저 들어가서 사 오라는 친구의 말에 혼자 편의점에 들어서서 냉장고로 향했다.
맥주 몇 캔을 꺼내 계산대 위에 올려 둔 소희는 아르바이트생이 바코드를 찍는 동안 아무 생각 없이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무심코 바라본 그곳에는 어떤 남자가 가만히 서서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쿵쾅쿵쾅.
순간적으로 눈이 마주친 소희는 숨이 헙, 하고 멈춰 버렸다.
마치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듯한 신비로운 남자를 본 탓에 극도의 두근거림으로 인해 몸이 굳어 버려 시선을 돌릴 수가 없었다. 심지어 소름 돋을 정도로 잘생기기까지 했다.
그사이 밖에 서 있던 남자가 소희를 향해 손을 흔들며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가 완전히 사라지고 나자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는 그녀의 귓속을 시끄러울 정도로 울려 댔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소희는 덜덜 떨며 빠르게 맥줏값을 치렀다.
“다 샀어?”
밖으로 나온 그녀를 부르는 친구의 목소리에 소희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말했다.
“야! 방금 여기 있던 남자 봤어?”
“무슨 남자?”
친구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방금 문 옆에 서 있다가 갔잖아.”
“무슨 소리야. 나 아까부터 계속 여기 있었어. 근데 아무도 안 지나갔는데?”
그러자 소희가 어색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장난치지 마. 그 사람이 나한테 손도 흔들어 주고 갔는데.”
“무섭게 왜 그래. 진짜 아무도 없었다니까?”
친구의 표정이 싸해지자, 소희의 표정도 점점 굳어 갔다.
“진짜?”
“진짜.”
순간적으로 흐르는 정적에 둘은 서로의 눈만 쳐다보았다. 둘 다 한 치의 거짓도 없다는 표정이었다.
오싹함을 느낀 그녀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집으로 향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리기 시작했다.
‘뭐야! 뭐냐고!’
격한 숨을 몰아쉬며 집에 도착한 두 사람은 하하 호호 떠들며 대화 중인 나머지 친구들을 향해 방금 있었던 일을 서둘러 이야기해 줬다.
“근데 그 남자 말이야.”
여기저기서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친구들은 어쩐지 겁에 질려 있는 소희의 목소리 때문에 약간의 긴장감을 가지고 이어지는 말에 집중했다.
“장난 아니게 잘생겼었어.”
잔뜩 얼어 있던 공기가 와장창 깨졌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뒷말에 친구들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그 와중에 잘생긴 걸 봤네. 욕구 불만이냐?”
“아니, 심각하게 잘생겼다니까.”
진지한 그녀의 대답에 친구들의 눈이 반짝거렸다.
“그렇게 잘생겼어?”
한 친구의 질문에 소희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연예인이라고 해도 믿겠더라.”
“뭐 어떻게 생겼는데?”
“그래, 말해 봐.”
“밤하늘처럼 까맣고 긴 머리카락에 피부도 하얀 것이 사극에 나오는 곱상하게 생긴 배우들 있잖아. 꼭 촬영하다가 온 것 같은 느낌?”
“자세히도 봤다.”
친구 하나가 소희에게 말했다. 그녀의 말에 빙그레 웃은 소희가 계속 말을 이어 갔다.
“살짝 스쳐도 기억에 남을 얼굴이었어. 뭐랄까, 굳이 비유하자면…….”
“하자면?”
곰곰이 생각에 잠겼던 소희가 두 손바닥을 탁 마주치며 말했다.
“신선?”
여기저기서 피식하는 실소가 터져 나왔다. 친구들의 반응에 기분이 나빠진 소희가 언성을 높이며 말했다.
“웃지 마! 나는 진짜 무서웠고 잘생겼고 그랬다고!”
“외롭긴 외로웠나 보다, 우리 소희. 이리 와. 언니가 안아 주마.”
한 친구가 그녀를 향해 팔을 벌렸다. 덕분에 소희는 닭살이 돋으며 손발이 오그라들었다. 견디다 못한 소희가 얼굴을 붉히며 도망가려 하자, 친구들은 미리 의논이라도 한 것처럼 그녀를 안아 주겠다고 달려들었다.
곧 네 명의 친구에게 깔린 소희가 발버둥을 치며 고함을 질렀다.
“아니라고! 진짜라고 이 자식들아!”
깔깔거리며 자신의 말을 무시해 버리는 친구들을 향해 답답함을 토해 내는 소희였다.
*
다음 날, 소희는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터덜터덜 길을 걷고 있었다. 완전히 다 깨지 않은 숙취에 머리가 지끈거리기는 했지만, 역시 젊음이 만병통치약이었다.
‘비틀거리면 엄마한테 혼나겠지?’
이 정도 정신력이면 괜찮을 것이다. 소희는 만족스러운 미소와 함께 인적이 드문 골목길로 들어섰다.
‘어?’
그러다 전봇대 아래에서 익숙한 뭔가를 발견했다. 혹시 잘못 보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눈을 비볐지만, 분명 자신이 알고 있는 그것이었다.
‘만 원이다!’
인자한 세종대왕 님이 초록의 푸름을 뽐내며 그녀를 유혹하고 있었다.
소희는 냉큼 돈을 쥐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취객이 들렀다 가기 딱 좋은 위치라 아마도 새벽녘에 누군가가 흘리고 간 모양이었다.
‘땡잡았다!’
주인 없이 떠도는 만 원권 한 장은 재빠르게 그녀의 주머니 속으로 들어갔다. 덕분에 두통이 씻은 듯 사라졌고, 하늘을 날아갈 것처럼 기분이 좋아졌다.
‘일진이 좋은데?’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정류장으로 걸음을 옮긴 그녀는 자신이 타야 할 버스가 멀리서 오고 있는 것을 확인하곤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버스까지 딱 맞춰 오네. 심지어 자리도 많아!’
기쁜 마음으로 버스에 오른 소희는 즐거운 일이 가득한 하루가 될 것 같은 징조에 해맑은 미소를 띤 채 집으로 향했다.
*
집으로 돌아온 소희는 믿을 수 없는 눈앞의 광경에 들고 있던 가방을 바닥에 툭 하고 떨어트렸다.
“이…… 이게 무슨.”
“소희 왔니?”
식탁에 앉아 누군가와 대화 중이던 수진이 자리에서 일어나 소희를 반겼다.
하지만 그녀의 시선은 식탁에 앉아 있는 누군가에게 박혀 움직이지 않았고, 그곳을 환하게 밝히고 있는 두 남자의 후광에 입을 쫙 벌린 채로 굳어 버렸다.
“우리 딸. 들어와서 여기 앉아 봐.”
식탁에서 빛을 내던 남자 한 명이 소희를 향해 말했다.
우리 딸이라며 소희를 부르는 그는 그녀의 아빠인 무강이었고, 웬만한 연예인을 제쳐 버릴 정도의 미모를 소유한 꽃중년이었다. 딸이 보기에도 아빠의 미모는 눈이 부실 정도였다.
엄마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철없던 어린 시절에 아빠에게 왜 엄마랑 결혼했느냐고 울며불며 난리를 치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가장 가슴 아픈 현실 중 하나는, 그런 빛나는 외모를 가진 아빠의 피를 물려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엄마를 쏙 빼닮았다는 것이다.
무강을 본 적 있는 친구들은 하나같이 동정의 눈빛으로 소희를 향해 안타까움을 숨기지 않았고, 그럴 때마다 그녀는 ‘우리 엄마가 어때서!’라는 얼굴로 째려봐 줬다.
아무튼 그런 무강에게 절대 뒤지지 않을 정도의 후광을 뿜어내는 사람이 지금 자신의 집 식탁에 앉아 있었다. 심지어 부모님과 제법 가까운 사이인 듯, 한 치의 어색함도 없었다.
충격받은 표정으로 식탁에 앉은 소희는 바로 옆자리에 앉아 있는 남자에게 온 신경을 집중했다.
분명 본 적이 있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어젯밤 편의점 유리 너머로 본 남자와 굉장히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헤어스타일이 짧아졌다는 것만 빼면 그냥 같은 사람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소희야. 오늘 아빠가 너에게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해 주실 거야.”
앉아 있는 무강의 어깨에 두 손을 올린 채 서 있는 수진의 표정은 한없이 다정했다.
황당함에 입을 뻐끔거리며 말도 못 하고 있는 소희에게 무강은 의자를 바짝 끌어당겨 앉으며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옆에 있는 그 사람이 네 남편 될 사람이란다.”
청천벽력 같은 무강의 말에 소희의 얼굴이 급격하게 굳어 갔다. 이제 스무 살밖에 안 된 딸아이에게 남편을 소개해 주는 아빠라니, 충격적이었다.
“아빠, 농담이 심하시네요.”
“농담 아니야.”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째깍째깍하는 시계 소리가 조용한 부엌을 가득 채웠고, 배달 오토바이 지나가는 소리만 부앙 하고 들려왔다.
“소희야.”
“네, 엄마.”
소희는 무강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대답했다.
“네가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라는 거 알아. 그런데 너의 외할머니, 외증조할머니, 그 할머니의 할머니까지 다 겪었던 일이고, 가장 가까운 나도 겪었던 일이란다. 이제 그 순서가 너에게 온 것이고, 미래의 네 딸도 겪어야 하는 일이야. 그러니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진지하게 들어 줬으면 좋겠어.”
자신을 향한 부모님의 표정 또한 진지했다.
‘좋은 일이 생기기는 개뿔!’
소희는 주먹을 살짝 쥐었다. 어쩐지 오늘 운수가 좋더라.
“지금 부터 들려 줄 이야기는 아주 먼 옛날에 있었던 일에 대한 이야기란다.”
농담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소희는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이며 식탁 위로 손을 올렸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던 무강은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집을 지키는 가택신 중에는 성주신이 있다.”
학교 다닐 때 가신 신앙에 대해 겉핥듯이 배운 기억이 있다. 소희는 가물가물한 기억을 억지로 떠올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예부터 내려오는 미신쯤으로 여기지. 하지만 성주신은 실제로 존재하며 눈에 보이지 않게 깃들어 있단다.”
무강은 뭔가 종교적이면서도 난해한 이야기를 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이리 긴 서두를 늘어놓는 것일까.
“먼 옛날, 우리의 조상은 집을 지키던 성주신과 영원을 약속하는 금기를 깨고 말았다. 그들은 행복했으나, 천리를 깨 버린 업보는 자손에게 저주로 돌아왔지.”
전래 동화 같은 뜬금없는 이야기였다.
“인간과 신이 혼인한 죄. 신의 힘으로 죄 없는 사람들을 학살한 죄. 그리고 성주신의 존재를 드러낸 죄. 이 모든 죄에 대한 형벌은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이다.”
이게 무슨 비현실적인 말인가. 소희는 무엇 하나 이해하지 못한 얼굴로 눈만 깜빡거렸고, 무강은 계속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제 네가 저주받은 운명을 받아들일 차례가 됐구나.”
맞장구치듯 고개를 끄덕이는 수진을 보며 소희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이게 무슨 소설 같은 일이란 말인가.
“저주라는 것이 정확하게 뭔데요?”
그녀의 눈이 옆자리에 앉은 남자를 살폈다. 무강이 말한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이라는 것이 엄청나게 신경 쓰였다.
“성주신과의 혼인.”
소희는 머리를 방망이로 맞은 듯 멍해졌다.
“그럼 방금 소개해 준 이 사람이…….”
“맞아. 신.”
“대박.”
소희는 황당하다는 듯 웃었다.
“지금 그 이야기를 나보고 믿으라고요?”
조상의 업보로 인한 저주와 강제적 혼인. 심지어 사람이 아닌 성주신과의 혼인이라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