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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자, 정리를 해 보면 내 조상이 성주신이랑 혼인해서 저주에 걸렸다는 거고, 그래서 나는 성주신인 이 사람이랑 결혼해야 한다는 거죠?”
소희의 손가락이 버릇없이 그를 가리켰다. 고개를 끄덕이는 무강을 향해 그녀는 무언가 깨달은 듯 말했다. 목소리가 살짝 떨리기도 했다.
“잠깐. 그럼…… 아빠도 성주신이에요?”
“그래.”
“헐.”
입을 쩍 벌린 채 놀란 표정을 지어 보이는 소희를 보며 수진이 말했다.
“아무튼 이제 스무 살이 됐으니 너도 어서 혼인을 해야 하지 않을까?”
수진의 말에 소희의 시선이 자연스레 옆자리에 앉은 남자에게 향했다. 그는 무표정한 자세로 가만히 앉아 있기만 했다.
“나 이제 스무 살인데! 유부녀가 말이 돼?”
소희는 남자도 들으라는 듯이 억울함을 토해 내며 외쳤다.
“수상유(水上油, 물과 기름 사이)라 저도 딱히 좋아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남자의 말에 소희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꽉 쥐고 있던 주먹이 파르르 떨리며 황당하다는 표정이 절로 나왔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좋다는 거예요, 싫다는 거예요?”
그러자 남자는 그런 쉬운 말도 못 알아듣느냐는 듯 어깨를 으쓱거리며 코웃음 쳤다. 거만하고 버르장머리 없어 보이는 그의 표정을 보니 소희는 더욱 짜증이 치밀었다.
하늘에서 강림한 신선 뺨칠 정도로 잘생긴 남자가 투덜거리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데, 어려운 말로 은근슬쩍 자신을 깔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자 더는 이 자리에 있고 싶지 않았다.
속내를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가 재수 없어서 그녀는 거칠게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난 당신하고 결혼 못 해. 아니, 안 해!”
소희는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남자를 날카롭게 째려봐 주고는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쾅 하는 소리에 화들짝 놀란 수진이 콩닥거리는 심장을 손으로 쓸어내리자, 무강은 그런 그녀를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어깨를 감싸 안았다.
“자네가 고생이 많겠구나.”
무강이 남자를 향해 말하자 그는 비장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닙니다. 예부터 내려온 업보가 아닙니까.”
무강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앞으로 잘 부탁하네. 우리 아이가 고집이 있어서 쉽지는 않을 걸세.”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어 보이는 수진이었다.
*
등 뒤로 문이 쾅, 하고 닫혔다.
아빠의 입에서 나온 말은 가히 충격적이라 소희의 심장 박동 수는 짜증으로 인하여 미친 듯이 상승하고 있었다.
‘와 내가 어이가 없어서 진짜!’
소희의 두 볼이 붉어졌다. 믿을 수 없는 이 상황이 어이가 없어서 오히려 웃음이 비실비실 새어 나왔다.
‘아빠가 성주신이래. 세상에……. 아니, 아니지. 이거 일부러 나 놀리는 건가? 아니면 돌아다니면서 밥 한 끼 달라는 TV 프로처럼 일반 가정을 상대로 하는 리얼 버라이어티 같은 그런 건가?’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은 소희는 다시 생각해 봐도 어이가 없었다.
만 원을 주운 기쁨에 가라앉았던 두통이 다시 느껴졌다.
이제 막 스무 살 생일이 지난 딸아이에게 남편을 소개해 주는 부모님의 낯선 행동과 도저히 이해 안 되는 조상의 이야기를 들먹이며 ‘나도 성주신이다.’라는 아빠의 황당한 고백에 절로 한숨이 쉬어졌다.
소희는 앉아 있던 자세 그대로 발라당 누웠다.
연한 베이지색의 벽지가 발라진 천장에는 커튼 틈새를 뚫고 들어온 햇살이 쭉 뻗은 길을 만들어 냈고, 불도 켜지 않은 방 안을 환하게 밝혀 주고 있었다.
천장을 올려다보며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겼던 그녀는 밀려오는 피곤함에 베개를 향해 엉금엉금 기어가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일단 자고 나서 생각하자.’
소희는 가슴 한쪽에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불안감을 애써 모른 척하며 스르륵 잠에 빠져들었다.
*
똑똑.
노크 소리에 소희의 신경이 움찔거렸다. 아마도 베개에 머리를 대자마자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들어간다.”
소희는 방문 밖에서 들리는 수진의 목소리에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썼다.
잠에 취하기도 했고,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은 심정이 한데 어우러져서 지금은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냥 모든 게 귀찮게 느껴졌다.
하지만 방문을 여는 소리가 들리고, 침대 모퉁이가 푹 꺼지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던 잠에 대한 욕구가 저 멀리 달아나 버렸다.
“자니?”
“…….”
소희는 아무런 대답도 해 주지 않았다.
“많이 놀랐지? 갑작스러운 상황이라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거 엄마도 알고 있단다.”
소희는 일부러 꼭 감고 있던 눈을 조심스레 떴다. 이불을 끝까지 덮어쓴 상태라 수진은 그녀가 잠에서 완전히 깼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계속 말을 이었다.
“미안하구나. 너에게 큰 짐을 준 것 같아. 하고 싶은 일도 많을 테고, 해야 할 일도 많은 나이인데……. 엄마가 너무 미안해.”
그녀는 소희가 뒤집어쓴 이불을 조심스레 쓸어내렸다. 과거에 자신이 겪었던 고민과 걱정, 혼인을 빙자한 조상의 업보를 사랑하는 딸이 이어 가야 한다는 사실이 괴로웠다.
“엄마도 딱 스무 살이었어. 네 아빠를 만났을 때 말이야.”
잠시 망설이는 듯 수진의 숨소리만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생일날 아침에 미역국 먹고 마루에 앉아 마늘을 까고 있는데, 네 할아버지가 대뜸 결혼할 남자라며 집으로 데리고 오셨어. 이른 아침 시간에 말이야.”
그녀의 말에 소희의 귀가 쫑긋하고 섰다.
“할아버지는 엄마가 왜 네 아빠와 결혼해야 하는지, 안 하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하나도 해 주지 않으셨어. 엄마는 거의 반강제로 묶이다시피 신혼집으로 끌려갔었거든.”
소희는 흥미진진한 이야기에 머리에서 이불을 거칠게 끌어 내리며 말했다.
“진짜요? 할아버지가?”
수진은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무슨 조선 시대도 아니고.”
“믿기 힘들겠지만 진짜야. 그래서 너만큼은 엄마가 당시에 느꼈던 답답함과 두려움을 겪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에서 자리를 마련했던 거였어.”
소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 자신의 상황도 충분히 억지스럽고 황당한데, 엄마는 영문도 모른 채 신혼집에 던져졌다고 하니 마냥 투정 부릴 수만은 없었다.
“엄마는 피할 수가 없었어. 한번은 어떻게 도망에 성공하긴 했는데…….”
“했는데?”
“결혼을 하지 않으면 내가 잃어야 하는 것들이 너무 많았어.”
“잃어야 하는 거요? 그게 뭐였는데요?”
수진은 잠시 말을 멈췄다.
소희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녀의 대답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건…….”
방 안에는 긴장감이 맴돌았다.
소희가 침을 꿀꺽 삼키자 때맞춰 수진이 입을 열었다.
“나중에 알려 줄게.”
“엄마!”
소희의 표정이 순식간에 구겨졌다. 수진은 그녀의 머리를 손으로 헝클어뜨리며 말했다.
“배고프지? 나가서 밥 먹자.”
수진이 말을 돌리자 소희의 두 주먹에 불끈하고 힘이 들어갔다. 일부러 궁금하게 만들어 지금의 상황에 대해 인지하게 하려는 엄마의 속셈인 걸까.
여하튼 찝찝한 의문만 남긴 채 먼저 방을 나가 버린 수진의 뒤로, 홀로 남은 소희의 한숨 소리만 들려왔다.
*
그 일이 있고 난 며칠 후, 충격적인 소식을 접한 이후로 소희는 무강과 제법 서먹서먹했다.
소희가 소파에 앉아서 신문을 펼친 채 자신을 힐끔힐끔 쳐다보는 무강을 향해 말했다.
“눈치 보지 말고 말해요, 아빠.”
“밥 다 먹으면 이야기하마.”
“다 먹었어요.”
“그럼 이리 와서 앉아 봐.”
소희는 물을 한 모금 마신 후 자리에서 일어나 소파로 향했다.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던 수진도 그 모습을 보곤 앞치마를 풀며 둘에게로 다가왔다.
소희가 자리에 앉자 무강은 보고 있던 신문을 착착 접어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다. 그의 행동을 유심히 바라보던 소희는 무강이 내미는 카드 키를 보며 물었다.
“이게 뭐예요?”
“카드 키.”
“그건 알고요. 이걸 왜 주시는 거예요?”
“새로 이사 갈 집의 카드 키야.”
“이사요?”
갑자기 이사라니.
소희는 왠지 모르게 느껴지는 불길한 예감에 머리카락이 쭈뼛거렸다.
“주소는 문자로 보내 줄 테니까 학교 수업 끝나는 대로 찾아와.”
“……진짜 이사 가는 거예요?”
“그래.”
이상하게 반항하고 싶다. 그동안 쥐도 새도 모르게 두 분이서 이사 준비를 해 온 걸까? 의심스러운 부분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리고 카드 키를 들고 가게 되면 꼭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아서 소희는 선뜻 받기가 망설여졌다.
“일단 학교 끝나면 전화를 할게요! 강의에 늦을 것 같아요.”
소희는 빠른 속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선 자신의 가방을 허겁지겁 챙겨 현관 문손잡이를 돌리는데 소파에서 일어난 무강이 당황한 목소리로 외쳤다.
“이거 가져가야지!”
“다녀오겠습니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타박을 한 귀로 흘려보내며 대답한 소희는 놀란 표정으로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무강을 무시한 채 빠른 속도로 집을 빠져나왔다.
*
휴대폰 진동 소리에 소희는 주머니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딸. 학교 끝나고 여기로 바로 와. 주소는…….]
수진에게서 온 문자 메시지 속에는 무강이 아침에 말한 집 주소가 적혀 있었다.
미심쩍은 느낌에 괜히 눈을 흘긴 소희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다시 집어넣고 버스 정류장을 향해 걸음을 서둘렀다.
‘엄마는 피할 수가 없었어. 한번은 어떻게 도망에 성공하긴 했는데…….’
‘결혼을 하지 않으면 내가 잃어야 하는 것들이 너무 많았어.’
소희는 어제 엄마가 자신에게 해 준 말들이 생각났다.
‘답답하잖아. 갑자기 결혼이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닌 것 같아.’
대체 뭘 잃는다는 것인지, 엄마는 왜 성주신인 아빠와의 결혼을 피하지 못했는지에 대한 질문들이 머릿속을 마구 헤집었다.
‘아 몰라. 결혼 안 해.’
어느새 정류장에 도착한 소희는 멀리서 버스가 오고 있는 것을 확인하곤 복잡한 생각을 떨쳐 버리기 위해 도리질을 쳤다. 철이 아직 들지 않은 스무 살의 아가씨답게 난 아무것도 모른다고 단정해 버렸다. 그리고 그녀가 처한 상황을 억지로 회피했다.
버스에 오른 소희는 오늘따라 유난히 화창한 바깥 날씨에 창밖을 보며 활짝 웃었다.
하지만 곧 자신에게 다가올 어두운 미래는 전혀 화창하지 않다는 걸 소희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자, 정리를 해 보면 내 조상이 성주신이랑 혼인해서 저주에 걸렸다는 거고, 그래서 나는 성주신인 이 사람이랑 결혼해야 한다는 거죠?”
소희의 손가락이 버릇없이 그를 가리켰다. 고개를 끄덕이는 무강을 향해 그녀는 무언가 깨달은 듯 말했다. 목소리가 살짝 떨리기도 했다.
“잠깐. 그럼…… 아빠도 성주신이에요?”
“그래.”
“헐.”
입을 쩍 벌린 채 놀란 표정을 지어 보이는 소희를 보며 수진이 말했다.
“아무튼 이제 스무 살이 됐으니 너도 어서 혼인을 해야 하지 않을까?”
수진의 말에 소희의 시선이 자연스레 옆자리에 앉은 남자에게 향했다. 그는 무표정한 자세로 가만히 앉아 있기만 했다.
“나 이제 스무 살인데! 유부녀가 말이 돼?”
소희는 남자도 들으라는 듯이 억울함을 토해 내며 외쳤다.
“수상유(水上油, 물과 기름 사이)라 저도 딱히 좋아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남자의 말에 소희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꽉 쥐고 있던 주먹이 파르르 떨리며 황당하다는 표정이 절로 나왔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좋다는 거예요, 싫다는 거예요?”
그러자 남자는 그런 쉬운 말도 못 알아듣느냐는 듯 어깨를 으쓱거리며 코웃음 쳤다. 거만하고 버르장머리 없어 보이는 그의 표정을 보니 소희는 더욱 짜증이 치밀었다.
하늘에서 강림한 신선 뺨칠 정도로 잘생긴 남자가 투덜거리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데, 어려운 말로 은근슬쩍 자신을 깔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자 더는 이 자리에 있고 싶지 않았다.
속내를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가 재수 없어서 그녀는 거칠게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난 당신하고 결혼 못 해. 아니, 안 해!”
소희는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남자를 날카롭게 째려봐 주고는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쾅 하는 소리에 화들짝 놀란 수진이 콩닥거리는 심장을 손으로 쓸어내리자, 무강은 그런 그녀를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어깨를 감싸 안았다.
“자네가 고생이 많겠구나.”
무강이 남자를 향해 말하자 그는 비장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닙니다. 예부터 내려온 업보가 아닙니까.”
무강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앞으로 잘 부탁하네. 우리 아이가 고집이 있어서 쉽지는 않을 걸세.”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어 보이는 수진이었다.
*
등 뒤로 문이 쾅, 하고 닫혔다.
아빠의 입에서 나온 말은 가히 충격적이라 소희의 심장 박동 수는 짜증으로 인하여 미친 듯이 상승하고 있었다.
‘와 내가 어이가 없어서 진짜!’
소희의 두 볼이 붉어졌다. 믿을 수 없는 이 상황이 어이가 없어서 오히려 웃음이 비실비실 새어 나왔다.
‘아빠가 성주신이래. 세상에……. 아니, 아니지. 이거 일부러 나 놀리는 건가? 아니면 돌아다니면서 밥 한 끼 달라는 TV 프로처럼 일반 가정을 상대로 하는 리얼 버라이어티 같은 그런 건가?’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은 소희는 다시 생각해 봐도 어이가 없었다.
만 원을 주운 기쁨에 가라앉았던 두통이 다시 느껴졌다.
이제 막 스무 살 생일이 지난 딸아이에게 남편을 소개해 주는 부모님의 낯선 행동과 도저히 이해 안 되는 조상의 이야기를 들먹이며 ‘나도 성주신이다.’라는 아빠의 황당한 고백에 절로 한숨이 쉬어졌다.
소희는 앉아 있던 자세 그대로 발라당 누웠다.
연한 베이지색의 벽지가 발라진 천장에는 커튼 틈새를 뚫고 들어온 햇살이 쭉 뻗은 길을 만들어 냈고, 불도 켜지 않은 방 안을 환하게 밝혀 주고 있었다.
천장을 올려다보며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겼던 그녀는 밀려오는 피곤함에 베개를 향해 엉금엉금 기어가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일단 자고 나서 생각하자.’
소희는 가슴 한쪽에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불안감을 애써 모른 척하며 스르륵 잠에 빠져들었다.
*
똑똑.
노크 소리에 소희의 신경이 움찔거렸다. 아마도 베개에 머리를 대자마자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들어간다.”
소희는 방문 밖에서 들리는 수진의 목소리에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썼다.
잠에 취하기도 했고,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은 심정이 한데 어우러져서 지금은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냥 모든 게 귀찮게 느껴졌다.
하지만 방문을 여는 소리가 들리고, 침대 모퉁이가 푹 꺼지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던 잠에 대한 욕구가 저 멀리 달아나 버렸다.
“자니?”
“…….”
소희는 아무런 대답도 해 주지 않았다.
“많이 놀랐지? 갑작스러운 상황이라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거 엄마도 알고 있단다.”
소희는 일부러 꼭 감고 있던 눈을 조심스레 떴다. 이불을 끝까지 덮어쓴 상태라 수진은 그녀가 잠에서 완전히 깼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계속 말을 이었다.
“미안하구나. 너에게 큰 짐을 준 것 같아. 하고 싶은 일도 많을 테고, 해야 할 일도 많은 나이인데……. 엄마가 너무 미안해.”
그녀는 소희가 뒤집어쓴 이불을 조심스레 쓸어내렸다. 과거에 자신이 겪었던 고민과 걱정, 혼인을 빙자한 조상의 업보를 사랑하는 딸이 이어 가야 한다는 사실이 괴로웠다.
“엄마도 딱 스무 살이었어. 네 아빠를 만났을 때 말이야.”
잠시 망설이는 듯 수진의 숨소리만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생일날 아침에 미역국 먹고 마루에 앉아 마늘을 까고 있는데, 네 할아버지가 대뜸 결혼할 남자라며 집으로 데리고 오셨어. 이른 아침 시간에 말이야.”
그녀의 말에 소희의 귀가 쫑긋하고 섰다.
“할아버지는 엄마가 왜 네 아빠와 결혼해야 하는지, 안 하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하나도 해 주지 않으셨어. 엄마는 거의 반강제로 묶이다시피 신혼집으로 끌려갔었거든.”
소희는 흥미진진한 이야기에 머리에서 이불을 거칠게 끌어 내리며 말했다.
“진짜요? 할아버지가?”
수진은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무슨 조선 시대도 아니고.”
“믿기 힘들겠지만 진짜야. 그래서 너만큼은 엄마가 당시에 느꼈던 답답함과 두려움을 겪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에서 자리를 마련했던 거였어.”
소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 자신의 상황도 충분히 억지스럽고 황당한데, 엄마는 영문도 모른 채 신혼집에 던져졌다고 하니 마냥 투정 부릴 수만은 없었다.
“엄마는 피할 수가 없었어. 한번은 어떻게 도망에 성공하긴 했는데…….”
“했는데?”
“결혼을 하지 않으면 내가 잃어야 하는 것들이 너무 많았어.”
“잃어야 하는 거요? 그게 뭐였는데요?”
수진은 잠시 말을 멈췄다.
소희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녀의 대답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건…….”
방 안에는 긴장감이 맴돌았다.
소희가 침을 꿀꺽 삼키자 때맞춰 수진이 입을 열었다.
“나중에 알려 줄게.”
“엄마!”
소희의 표정이 순식간에 구겨졌다. 수진은 그녀의 머리를 손으로 헝클어뜨리며 말했다.
“배고프지? 나가서 밥 먹자.”
수진이 말을 돌리자 소희의 두 주먹에 불끈하고 힘이 들어갔다. 일부러 궁금하게 만들어 지금의 상황에 대해 인지하게 하려는 엄마의 속셈인 걸까.
여하튼 찝찝한 의문만 남긴 채 먼저 방을 나가 버린 수진의 뒤로, 홀로 남은 소희의 한숨 소리만 들려왔다.
*
그 일이 있고 난 며칠 후, 충격적인 소식을 접한 이후로 소희는 무강과 제법 서먹서먹했다.
소희가 소파에 앉아서 신문을 펼친 채 자신을 힐끔힐끔 쳐다보는 무강을 향해 말했다.
“눈치 보지 말고 말해요, 아빠.”
“밥 다 먹으면 이야기하마.”
“다 먹었어요.”
“그럼 이리 와서 앉아 봐.”
소희는 물을 한 모금 마신 후 자리에서 일어나 소파로 향했다.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던 수진도 그 모습을 보곤 앞치마를 풀며 둘에게로 다가왔다.
소희가 자리에 앉자 무강은 보고 있던 신문을 착착 접어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다. 그의 행동을 유심히 바라보던 소희는 무강이 내미는 카드 키를 보며 물었다.
“이게 뭐예요?”
“카드 키.”
“그건 알고요. 이걸 왜 주시는 거예요?”
“새로 이사 갈 집의 카드 키야.”
“이사요?”
갑자기 이사라니.
소희는 왠지 모르게 느껴지는 불길한 예감에 머리카락이 쭈뼛거렸다.
“주소는 문자로 보내 줄 테니까 학교 수업 끝나는 대로 찾아와.”
“……진짜 이사 가는 거예요?”
“그래.”
이상하게 반항하고 싶다. 그동안 쥐도 새도 모르게 두 분이서 이사 준비를 해 온 걸까? 의심스러운 부분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리고 카드 키를 들고 가게 되면 꼭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아서 소희는 선뜻 받기가 망설여졌다.
“일단 학교 끝나면 전화를 할게요! 강의에 늦을 것 같아요.”
소희는 빠른 속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선 자신의 가방을 허겁지겁 챙겨 현관 문손잡이를 돌리는데 소파에서 일어난 무강이 당황한 목소리로 외쳤다.
“이거 가져가야지!”
“다녀오겠습니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타박을 한 귀로 흘려보내며 대답한 소희는 놀란 표정으로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무강을 무시한 채 빠른 속도로 집을 빠져나왔다.
*
휴대폰 진동 소리에 소희는 주머니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딸. 학교 끝나고 여기로 바로 와. 주소는…….]
수진에게서 온 문자 메시지 속에는 무강이 아침에 말한 집 주소가 적혀 있었다.
미심쩍은 느낌에 괜히 눈을 흘긴 소희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다시 집어넣고 버스 정류장을 향해 걸음을 서둘렀다.
‘엄마는 피할 수가 없었어. 한번은 어떻게 도망에 성공하긴 했는데…….’
‘결혼을 하지 않으면 내가 잃어야 하는 것들이 너무 많았어.’
소희는 어제 엄마가 자신에게 해 준 말들이 생각났다.
‘답답하잖아. 갑자기 결혼이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닌 것 같아.’
대체 뭘 잃는다는 것인지, 엄마는 왜 성주신인 아빠와의 결혼을 피하지 못했는지에 대한 질문들이 머릿속을 마구 헤집었다.
‘아 몰라. 결혼 안 해.’
어느새 정류장에 도착한 소희는 멀리서 버스가 오고 있는 것을 확인하곤 복잡한 생각을 떨쳐 버리기 위해 도리질을 쳤다. 철이 아직 들지 않은 스무 살의 아가씨답게 난 아무것도 모른다고 단정해 버렸다. 그리고 그녀가 처한 상황을 억지로 회피했다.
버스에 오른 소희는 오늘따라 유난히 화창한 바깥 날씨에 창밖을 보며 활짝 웃었다.
하지만 곧 자신에게 다가올 어두운 미래는 전혀 화창하지 않다는 걸 소희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