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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



“잘 잤냐?”

“헉!”

깜빡 졸은 모양인지, 잠에서 깬 소희는 책상에서 빠른 속도로 얼굴을 들어 입에 흐른 침을 닦아 냈다.

축축하고 민망한 까닭에 괜히 씩 웃어 보였다.

“강의 끝났어?”

“아니, 쉬는 시간. 넌 어떻게 출석 부르자마자 수면 모드냐.”

“어젯밤에 생각을 좀 많이 해서.”

“핑계는.”

선영은 침 묻은 책상을 볼펜으로 톡톡 치며 핀잔을 주었다.

“무슨 생각을 했기에 교수님이 불러도 못 들을 정도로 자는 거야?”

소희는 소매 끝단을 길게 빼내 책상 위에 문질렀다. 침 자국을 말끔히 지운 그녀는 잠시 고민하더니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선영을 향해 조심스레 물었다.

“야. 나 뭐 하나 물어보자.”

“뭔데?”

무심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하는 선영을 향해 소희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결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예상하지 못한 질문이었는지 선영의 눈이 크게 떠졌다.

“연애도 제대로 해 보지 못한 네 입에서 결혼이란 단어가 나올 줄은 몰랐다. 근데 갑자기 웬 결혼? 너 설마…….”

“설마 뭐.”

“임신했냐?”

“네가 정녕 욕이 듣고 싶구나?”

소희의 입술이 씰룩거렸다. 짜증을 가득 담은 욕지거리가 튀어나오자 선영이 웃으며 대답했다.

“농담이야 농담. 근데 진짜 결혼은 왜 물어보는 거야?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생겼어?”

“그냥 결혼은 아니고, 계약 결혼. 아니지. 정략결혼이라고 봐야 맞는 거 같아.”

“정략결혼이면 부모님이 정해 주신 거라고?”

“응. 그런 결혼이면 넌 어떨 것 같아?”

“잘생겼어?”

“뭐가?”

“남자가 잘생겼냐고.”

곰곰이 생각하던 소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응. 엄청.”

“그럼 결혼해.”

“너무 성의 없는 대답이잖아.”

선영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부모님이 정해 주신 거라며. 그럼 선택권이 없잖아. 눈이라도 호강한다 생각하고 그냥 결혼해 버려.”

“됐다. 말을 말자.”

“근데 너 진짜 결혼하는 거야?”

“됐어! 말 걸지 마.”

소희는 자신을 향해 눈을 빛내는 선영의 이마를 가볍게 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괜히 물어봤어. 마음만 더 심란해지잖아.’

대답을 재촉하는 선영을 애써 무시한 소희는 아직 강의 안 끝났다는 그녀의 외침을 뒤로한 채 강의실을 빠져나왔다.



*



소희는 지금 자신이 겪고 있는 현실이 진짜인지 의심스러웠다. 공부를 소홀히 했다는 죄로 벌을 받고 있는 거라면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교 정문을 나설 때 유난히 새소리가 많이 들린다 싶었다. 뭐, 가끔 있는 일이라서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려 했는데, 하늘은 기다렸다는 듯 그녀에게 시련을 던져 주었다.

톡.

허공에서 누군가 머리카락을 건드리는 오싹한 감촉이 느껴졌다.

‘설마……. 에이, 아닐 거야.’

소희는 슬로비디오처럼 천천히 손을 올렸다. 그와 동시에 물티슈가 필요한 최악의 상황을 예감했다.

손가락 끝에 느껴지는 미끌미끌한 감촉은 절대 자신의 머리카락이 아니었다. 굳이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정수리에 내려앉은 이 오만한 물체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으아! 새똥!”

소희는 황급히 가방을 뒤적거렸다. 증정품으로 받은 티슈가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어디 갔지?”

머리에 새똥을 얹은 채로 돌아다닐 순 없었다. 소희는 최선을 다해 가방을 뒤적였으나, 다 쓴 물티슈 비닐만 나올 뿐이었다.

‘꼭 필요할 때 없어!’

그녀는 다급하게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마침 길 건너에 편의점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하지만 머피의 법칙처럼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편의점에 들러 겨우 새똥을 닦아 낸 소희는 황당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태어나 처음으로 당한 새똥 테러를 친구들에게 메신저로 하소연하는 중이었다.

소희는 손에 휴대폰을 든 채 몸이 기억하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수백 번도 더 오고 간 길이기에 눈 감고도 찾아갈 수 있다고 자신하는 곳이었다.

인도에는 사람 말고도 가끔 오토바이나 자전거가 다닌다. 그것은 마치 한 마리의 야수와 같아서, 휴대폰을 보며 걷는 인간들을 위협하기도 했다.

그리고 오늘의 위협 대상은 소희였다.

그녀는 터덜터덜 길을 걸으며 친구들과의 대화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오토바이 한 대가 고개를 숙인 채 걸어오고 있는 그녀를 뒤늦게 발견하곤 클랙슨을 울렸다.

그 소리에 깜짝 놀라 옆으로 비켜선 소희는, 바람을 가르며 지나가는 오토바이를 째려보았다.

‘오늘 일진이 별로야.’

휴대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은 그녀는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러자 주변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역시 여긴 나무 덕분에 그늘이 좋아. 저렇게 쉴 곳도 있고.’

웃으며 벤치를 바라본 소희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그녀의 기억 속 벤치는 분명 나무색이었는데, 지금은 흰색으로 변해 있었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앞에 주의 사항이라는 팻말이 너무도 당당하게 꽂혀 있다는 사실이다.

“페……인트 주의.”

글자 양옆에 박힌 별표가 포인트였다.

그녀는 설마, 하는 마음으로 다리를 들었다. 가로로 선명하게 찍힌 흰 줄. 반대쪽 허벅지와 종아리 사이에도 같은 줄이 있었다. 아까 오토바이를 피할 때 벤치에 다리가 살짝 닿았었는데, 그때 묻은 모양이었다.

‘오늘 일진 진짜 별로야.’

치솟는 짜증에 손을 파르르 떠는 소희였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집에 도착한 소희는 이것이 꿈이 아닐까 생각했다.

집으로 돌아오니, 가구 하나 없이 텅텅 비어 버린 집 안이 그녀를 반겼다.

‘이…… 이게 무슨?’

저번부터 황당한 일의 연속이었다.

하룻밤 사이에 배우자가 등장하고, 학교에 갔다 왔더니 집이 비어 있는 상황. 드라마 속 그 어떤 배신도 이런 종류의 것은 없었다.

소희는 떨리는 손을 천천히 움직여 휴대폰을 들었다.

― 여보세요?

“엄마. 어디예요?”

― 엄마는 집이지.

순간 소희의 머릿속에 아침에 무강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혹시 벌써 이사한 거예요?”

― 응. 이사했어. 엄마가 주소 보내 준 거 가지고 있지? 거기로 오면 돼.

“……알았어요.”

통화를 끝낸 소희는 엄마가 보낸 메시지를 눈으로 다시 확인했다. 지금 위치에서 크게 멀지 않은 곳이었지만, 걸어서 가기에는 무리였다.

‘일단 버스 정류장으로.’

뒤돌아서 버스 정류장으로 걸음을 옮기는 소희는 아까부터 자꾸만 끼쳐 오는 오싹함에 몸을 가볍게 떨었다. 새로운 집으로 향하는 그녀의 발걸음이 한없이 무겁게 느껴졌다.



*



딩동.

“생각보다 빨리 왔네?”

문을 활짝 열어 주며 소희를 향해 말하는 수진의 표정이 해맑다.

소희의 눈빛은 의심을 거두지 않은 채 그녀에게 향했고, 반쯤 열린 문틈으로 부지런히 거실을 오가며 짐 정리를 하는 무강의 모습이 보였다.

“우리 딸 왔니?”

그는 들고 있던 상자를 바닥에 내려놓으며 소희를 향해 인사했다.

수건을 목에 두른 모습이 시선을 강렬하게 붙잡았다. 이마에 맺혀 있던 땀방울이 또르르 흘러내렸고, 그것을 훔치는 무강의 손길은 딸이라도 숨이 턱 막힐 정도로 훈훈했다.

“다녀왔습니다.”

쭈뼛거리며 집 안으로 들어온 소희는 지저분한 거실 바닥을 보며 신발을 벗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다. 그러자 등 뒤로 문을 닫고 들어온 수진이 말했다.

“신발 신고 들어와. 아직 정리가 안 끝났어. 이따가 청소하고 벗자.”

그녀의 말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소희는 천천히 집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갑자기 이사한 것치곤 꽤 좋은 집인데?’

소희는 바로 어제까지 생활했던 집을 떠올렸다.

밥상 하나를 펴 놓고 세 가족이 모여 앉아 치킨을 뜯으며 야구를 볼 수 있는 거실과 4인용 식탁이 간신히 들어가는 협소한 부엌, 그리고 하나뿐인 화장실은 언제나 무강과 소희의 다툼을 불러일으켰었다.

하지만 지금 소희가 서 있는 이 집은 출장 뷔페를 불러도 충분할 것 같은 크기의 거실과 탁 트인 주방, 그리고 여기서 화룡점정을 찍는 두 개의 화장실까지. 황홀함 그 자체였다.

“이런 집을 언제 구했대요?”

소희는 자신의 방으로 보이는 곳의 문을 열며 말했다. 약간의 감탄이 섞인 그녀의 목소리에 수진이 대답했다.

“마음에 들어? 이 집 구하느라 힘들었어.”

“진짜 마음에 들어요! 인테리어도 다 했네요!”

나뭇결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블랙의 문, 흰색 포인트 손잡이와 집 전체를 감싸는 하얀 몰딩이 대조를 이루며 감각적인 느낌을 연출했다.

소희는 이전 집에서 그대로 복사해 옮겨 놓은 듯한 자신의 방을 보며, 여기 오기 전까지 느꼈던 의심의 끈을 완전히 놓아 버렸다. 자신의 방이 이전 집보다 더 커지고 예뻐져서 그런 건 절대 아니라며 스스로에게 변명하기도 했다.



똑똑.

“들어오세요.”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소희가 대답하자 열린 문 사이로 무강이 고개를 내밀며 말했다.

“이사 날은 역시 중국요리지. 소희는 뭐 먹을래?”

책상 위에 정신없이 섞여 있던 물건들을 차곡차곡 정리하다 보니 어느덧 저녁 시간이 다 된 모양이었다.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한 소희는 창밖으로 보이는 노을에 시선을 두며 대답했다.

“나는 자장면 먹을래요.”

“여보. 소희는 자장면!”

거실에서 정리 중인 수진에게 메뉴를 외친 그는 방 안으로 들어서며 멀뚱히 서 있는 소희를 향해 말했다.

“정리할 거 많이 남았니?”

무강의 물음에 창밖의 노을에서 시선을 거둔 소희가 대답했다.

“아니요. 거의 다 했어요.”

“그럼 나와서 아빠 좀 도와줄래?”

“네. 대충 마무리하고 나갈게요.”

무강의 말에 그러겠다고 대답한 소희는, 붉게 타오르는 노을에 취해 잠시 멈춰 있었던 손을 부지런히 움직였다.



*



“삼만 칠천 원입니다.”

배달부는 주문한 음식을 문 앞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수진은 철가방의 문이 닫히길 기다렸다가 지갑에서 현금을 꺼내 계산했고, 무강과 소희는 눈을 반짝거리며 식탁으로 음식들을 나르기 시작했다.

“잘 먹겠습니다.”

소희는 나무젓가락을 뜯어 손으로 비볐다.

그사이 수진은 네모반듯한 그릇의 랩을 벗기다가 손가락에 묻은 소스를 맛보고 있었고, 무강은 그런 그녀가 사랑스럽다는 듯 느끼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어우 닭살.’

소희는 부모님의 애정 행각을 보며 가볍게 몸을 떨었다. 아무리 봐도 적응이 되지 않아 소희의 독립 욕구를 강하게 자극했고, 한편으론 알콩달콩하게 사랑을 나누는 모습이 부럽기도 했다.

계속 쳐다보고 있기 민망해진 소희는 시선을 돌려 자장면 그릇을 내려다봤다. 윤기가 흐르는 자장 위로 가늘게 채 썬 오이가 다소곳하게 올라가 있었다.

욕구를 자극하는 강렬한 자태가 그녀의 눈에 담기자, 맛을 떠올린 뇌의 무자비한 공격으로 인해 소희의 입속은 침으로 범벅이 되어 갔다.

강하게 밀려오는 식욕을 해소하기 위해 경건한 마음으로 랩을 벗기고 있는데, 순간 시야에 인원수보다 하나 더 많은 자장면 그릇이 들어왔다.

“근데 왜 자장면이 네 그릇이에요?”

“아. 누가 오기로 했거든. 신경 쓰지 말고 어서 먹어.”

소희의 질문에 무강이 대답했다.

신경 쓰지 말라는 부친의 행동이 의심스러워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데 초인종 누르는 소리가 집 안을 울렸다.

소희는 온몸의 신경을 곤두세웠다. 최근에 이상한 일을 하도 많이 겪어서 이젠 더 놀랄 기운도 없었지만, 곧이어 들려오는 익숙한 소리에 기겁했다.

띠띠띠띡.

“어…… 어? 누가 비밀번호를 눌러요!”

소희는 불안감에 열심히 움직이던 손을 멈췄다. 그리고 현관문을 열고 마치 자기 집인 것처럼 익숙하게 들어오는 남자를 보며 어이없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