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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 일러두기
1. 본문 중에 한국어 대화는 “”로 중국어 대화는 []로 표기했습니다.
프롤로그
소율은 작은 판정기를 침착하게 바라보았다. 흐릿한 시야 너머로 보이는 건 명확한 붉은 줄 하나와 희미하게 떠오르기 시작한 또 하나의 분홍빛 줄이었다.
“후우…….”
천천히 화장실 문을 열고 나와서 커피 테이블 위에 올려 둔 안경을 썼다. 그리고 다시 판정기를 바라보자 아까 희미해 보였던 두 번째 줄이 점차 선명해졌다. 이제 결론을 지어도 될 때라는 걸 직감한 소율은 손에 쥐고 있던 테스트기를 거실 탁자 위에 두었다.
「99%의 확실한 결과!」
이미 탁자 위에 놓여 있던 다른 브랜드의 임신 테스트기에 쓰인 문구를 보며 소율은 쓴웃음을 삼켰다. 이것만 해도 벌써 일곱 번째 확인이었다.
그녀는 정확한 판단을 위해 일주일 내내 아침의 첫 소변으로 자신의 임신 사실을 점쳐 봤다. 사실 산부인과에서 혈액 검사를 하는 게 가장 빠른 방법이란 걸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소율에게도 나름 마음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게 딱 일주일이었던 것이다.
“그래.”
소율은 늘어선 테스트기를 보며 차분하게 중얼거렸다.
“이만큼 했으면 된 거잖아.”
처음 이 결과를 알았을 때처럼 의외로 놀랍지는 않았다.
“나 정말로 임신한 거구나.”
하지만 생경하긴 했다. 이 세상에서 소율에게 가장 멀게 느껴지는 단어가 ‘가족’이기 때문이다. 조실부모하고 사고무친한 세상에서 그녀는 늘 혼자였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이 아이는 달랐다. 이미 배 속에서 자라고 있는 아이에게는 자신이 있었다.
“좋은 아내는 아니지만, 좋은 엄마는…….”
‘될 수 있을까?’ 그 하나의 질문이 그녀는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차마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다. 이미 일주일이나 태아를 방치한 거나 다름없는데 더 이상 상처 주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처음부터 갈피를 잡지 못하면 아이에게도 안 좋을 것이 분명했다.
“후우.”
소율은 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마음을 다스렸다. 곧이어 안경을 고쳐 쓴 소율은 언제 그랬냐는 듯 또렷한 눈빛으로 빠릿빠릿하게 움직였다. 평상시 직장에서 한 실장으로 불리던 소율의 모습이었다.
그녀는 지갑을 빼곡히 채운 명함들 사이에서 가장 크리에이티브하게 돋보이는 반투명 플라스틱 명함을 한 장 꺼내 들었다. 거기에는 ‘남도준’이라는 이름 세 글자와 프라이빗 넘버가 적혀 있었다.
“역시…… 해야겠지.”
아무리 똑 부러지는 평소의 소율로 돌아왔대도 이 번호로 전화를 거는 건 쉽지 않았다. 가장 큰 이유를 꼽자면 소율이 세간에서 흔히 말하는 모솔, 즉 모태 솔로이기 때문이었을 거다.
뭐 핑계라면 핑계겠지만 소율의 인생은 33년이라는 세월 동안 순결을 지키는 게 그렇지 않는 쪽보다 쉬웠던 탓도 있었다. 어려서는 학업에, 커서는 일에 치여서…… 어떻게라도 자신이 설 자리를 만드는 사이에 연애는 남의 일이 되어 버렸다. 우스운 건 딱히 혼전순결주의자도 아니었다는 거다.
“아이는 혼자 만들어지는 게 아니니까.”
소율이 번호를 입력한 후 통화 버튼에서 망설이며 되뇌었다. 말 그대로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다. 어쩌다 보니 서른셋까지 순결을 지키게 됐고, 어쩌다 보니 그 순결을 허락하게 됐다. 그리고 그 한순간의 상대가 바로…… 남도준이었다.
“아…… 왜 그랬을까.”
황망한 소율의 시선이 허공에 머문다. 딱히 후회나 죄책감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저, 말 그대로 내가 왜 그랬는지 알 수가 없을 뿐. 뭐, 다시 한번 핑계 아닌 핑계를 대 보자면 그날 밤의 소율이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는 거다.
‘한 실장, 아니 한소율 씨.’
평소 예의라고는 개나 주던 소율의 직속 상사였다. 대기업인 단영 건설의 이사로서는 몰라도 인간적으로는 꽝이었던 그 사람.
‘이제 슬슬 시집이라도 가야지 않겠어?’
여태껏 수많은 여직원들이 그 말을 들어야 했다.
‘권고사직이라는…… 말씀이신가요.’
이사는 말없이 빙긋 웃었다. 소율의 자리에 새로 오게 될 인사가 다름 아닌 이사의 애인이라는 소문이 돈 지 채 일주일도 안 되어서 현실에 적용된 셈이었다.
‘역시 소율 씨는 똑 부러진단 말이지.’
그게 끝이었다. 분노 후엔 무력함이 찾아왔고, 그 후엔 상실감이 소율을 에워쌌다. 대학 시절 이후 처음으로 스스로 술을 사 봤고, 취기라는 것에 기대어 봤다. 여태까지 필사적으로 앞만 보고 달려온 소율에게 이 불공평한 세상의 이치는 그동안 연체됐던 삶의 무게를 한 번에 돌려주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그러고 나서 둘러보니까, 나 정말 주위에 아무도 없는 거 있죠.’
그날 밤에도 술에 취해 있던 소율의 씁쓸한 말에 도준은 어깨를 내어 주었다. 내 어깨라도 괜찮다면, 그렇게 자연스러운 위로를 닮은 말을 하면서.
‘나라도 좋다면, 기대든지.’
평소의 소율이었다면 결단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날 밤 도준의 어깨는 따스했다. 무작정 타인에게 위로받고 싶었던 소율에게는 정말이지 살갗에 스미는 온기가 절실했다. 처음에는 어깨만 빌리자고 했던 게 품을 빌리게 되고, 결국은…….
“아, 아니야.”
다시 현실로 돌아온 소율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하지만…… 아무리 원나잇이라도 지킬 건 지켜야겠지.”
그렇게 중얼거린 소율은 열한 자리의 번호를 재빨리 눌렀다. 곧이어 들리는 신호음에 조금은 지루하다 생각이 될 무렵, 신호가 끊어졌다. 그리고 낮으면서 다정한 음성이 들려왔다.
― 여보세요?
“…….”
도준의 음성에 소율은 한순간 말을 잊고 말았다. 그러면 안 되는 걸 알지만 아주 잠시 마음이 흔들렸다.
― 한소율 씨, 기껏 전화 주고서는 아무 말도 안 할 겁니까?
남자의 음색에서는 웃음이 묻어났다. 그녀를 반가워하는 눈치였다.
“제 번호는…… 어떻게 아셨어요?”
처음이자 마지막 밤을 보낸 후에 도준은 일방적으로 명함을 건넸다. 받을 생각은 없었지만 억지로 손에 쥐여 주는 통에 소율은 지갑에 넣어 두고 잠시 잊고 지냈다. 그러다 임신 사실을 눈치채고서 그를 떠올렸다. 그럴 만한 상대는 도준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 그 정도 알아내는 건 별로 어렵지 않죠.
여전히 웃음기가 묻어나는 음성으로 도준은 이야기를 이어 갔다.
― 단영 건설에서 일 제대로 하는 비서는 소율 씨밖에 없다고 소문이 자자했는데, 몰랐습니까? 곧 퇴사하신다기에 내가 스카우트할까 싶어서 미리 알아 뒀습니다. 물론, 그날 밤 일은 순전히 우연이었으니 오해하지 마시고요.
“스카우트…….”
달콤한 울림이었다. 도준이 이사로 있는 현설 그룹은 단영 건설보다 훨씬 큰 기업이었다. 게다가 직원에 대한 복지도 남다르다고 들었기 때문에 스카우트란 단어에 귀가 솔깃해졌다. 하지만 이래서는 안 됐다. 그렇게 취업을 하고 나면 자신을 밀어낸 이사의 애인과 다를 게 없기 때문이다.
“말씀만으로 정말 감사합니다. 하지만 마음만 받을게요. 제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큰 기업인 거 같아요.”
― 그러지 말고 긍정적으로 생각해 주면 안 됩니까? 나는 소율 씨를 다시 보고 싶거든요. 당장에라도.
“…….”
도준의 달콤한 속삭임에 소율은 다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이대로 그의 페이스대로 끌려가면 꺼낼 얘기도 제대로 못 할 거 같았다. 그래서 소율은 안경을 추켜세우며 단호한 표정으로 말을 뱉었다.
“아무튼, 오늘 이렇게 갑자기 전화를 드린 건 중요한 용건이 있어서예요. 얘기가 좀 길어질지도 모르는데 괜찮으신가요?”
― 아, 그렇습니까? 음…… 그럼 잠시만 기다려 주겠어요? 몇 초면 됩니다.
“네, 기다리고 있을게요.”
소율의 대답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바스락거리며 종이 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가 한동안 반복되더니 아주 작게 ‘나가 봐.’라고 말하는 도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말대로 상대가 나간 건지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그의 숨결이 이전처럼 가까워졌다.
― 미안해요, 기다리게 해서. 그래서 소율 씨가 따로 전화를 해 줄 만큼 중요한 얘기가 대체 뭐죠? 난 될 수 있다면 데이트 신청이었으면 좋겠군요.
“데이트 신청보다 훨씬 중요한 얘기예요.”
막상 얘기를 꺼내려니 소율은 갑자기 초조함이 밀려왔다. 그래서 자리에서 일어서 주위를 서성이다가 탁자 위에 일렬로 늘어선 임신 테스트기를 바라보았다. 꼬박 일주일 동안 검사한 일곱 개의 테스트기가 그녀에게 힘내라고 말하고 있는 거 같았다. 그래서 소율은 결심을 내렸다. 그리고 한 박자를 쉰 후에 얘기를 이어 갔다.
“저 임신한 거 같아요.”
― 예?
“아니, 임신했어요.”
― 아, 임신……. 일단 축하……드려야 할까요?
내용과는 걸맞지 않게 퍽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그걸 잘 모르겠어서…… 일단 전화드렸어요.”
그래서 소율도 담담하게 말을 이을 수 있었다.
― 그건, 무슨 뜻인지 물어봐도 될까요?
“딱히 어떤 뜻이라기보단, 현상을 말씀드리는 거예요.”
소율은 숨을 고르고는 똑똑히 말했다.
“지금 제가 임신했을 가능성은 99% 수렴하고, 그 아이가 이사님의 아이라는 건 100%의 확률이라고 봐요.”
― 아…… 그렇군요.
이전의 맹렬한 기세와는 달리 도준은 말을 고르고 있었다. 보지 않아도 그의 태도에서 아이를 버거워한다는 게 느껴졌다.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하며 소율은 자신의 뜻을 이어 갔다.
“이사님께서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만일 제 안에 아이가 생겼다면, 저는 이 아이를 낳을 거예요. 물론, 될 수 있다면 친권도 제가 가지고 싶어요. 따로 돈을 요구할 생각도 없어요. 그냥 이사님께서 유전학적으로 친부가 되는 셈이니 알려 드리고 싶었어요. 이 아이는 저 혼자…….”
― 아니.
소율의 얘기가 끝나기도 전에 도준은 난색을 표했다. 소율은 처음 전화하기 망설여졌던 이유가 다가올까 두려웠다. 대부분의 남자들, 특히나 남도준처럼 사회적 지위를 포함한 모든 것을 가진 남자들은 혹을 싫어할 테니까.
“싫으신가요.”
― 그게 아니라 너무 전개가 빨라서. ……폭탄을 던졌으니 숨 쉴 틈 정도는 줄 수 있는 거 아닙니까?
이건 소율이 지난 일주일 동안 시뮬레이션했던 무수한 상황들 중 단 한 가지와도 맞지 않는 대답이었다.
“네, 아닙니다.”
― ……뭐요?
“이사님은 결정하실 필요 없어요. 결정은 제가 했고 그냥 알려 드리는 것뿐이니까요.”
하지만 결연한 표정으로 이 통화에 임하는 소율은 모든 상황에 대처할 수 있을 만큼 강했다.
· 일러두기
1. 본문 중에 한국어 대화는 “”로 중국어 대화는 []로 표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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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율은 작은 판정기를 침착하게 바라보았다. 흐릿한 시야 너머로 보이는 건 명확한 붉은 줄 하나와 희미하게 떠오르기 시작한 또 하나의 분홍빛 줄이었다.
“후우…….”
천천히 화장실 문을 열고 나와서 커피 테이블 위에 올려 둔 안경을 썼다. 그리고 다시 판정기를 바라보자 아까 희미해 보였던 두 번째 줄이 점차 선명해졌다. 이제 결론을 지어도 될 때라는 걸 직감한 소율은 손에 쥐고 있던 테스트기를 거실 탁자 위에 두었다.
「99%의 확실한 결과!」
이미 탁자 위에 놓여 있던 다른 브랜드의 임신 테스트기에 쓰인 문구를 보며 소율은 쓴웃음을 삼켰다. 이것만 해도 벌써 일곱 번째 확인이었다.
그녀는 정확한 판단을 위해 일주일 내내 아침의 첫 소변으로 자신의 임신 사실을 점쳐 봤다. 사실 산부인과에서 혈액 검사를 하는 게 가장 빠른 방법이란 걸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소율에게도 나름 마음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게 딱 일주일이었던 것이다.
“그래.”
소율은 늘어선 테스트기를 보며 차분하게 중얼거렸다.
“이만큼 했으면 된 거잖아.”
처음 이 결과를 알았을 때처럼 의외로 놀랍지는 않았다.
“나 정말로 임신한 거구나.”
하지만 생경하긴 했다. 이 세상에서 소율에게 가장 멀게 느껴지는 단어가 ‘가족’이기 때문이다. 조실부모하고 사고무친한 세상에서 그녀는 늘 혼자였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이 아이는 달랐다. 이미 배 속에서 자라고 있는 아이에게는 자신이 있었다.
“좋은 아내는 아니지만, 좋은 엄마는…….”
‘될 수 있을까?’ 그 하나의 질문이 그녀는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차마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다. 이미 일주일이나 태아를 방치한 거나 다름없는데 더 이상 상처 주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처음부터 갈피를 잡지 못하면 아이에게도 안 좋을 것이 분명했다.
“후우.”
소율은 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마음을 다스렸다. 곧이어 안경을 고쳐 쓴 소율은 언제 그랬냐는 듯 또렷한 눈빛으로 빠릿빠릿하게 움직였다. 평상시 직장에서 한 실장으로 불리던 소율의 모습이었다.
그녀는 지갑을 빼곡히 채운 명함들 사이에서 가장 크리에이티브하게 돋보이는 반투명 플라스틱 명함을 한 장 꺼내 들었다. 거기에는 ‘남도준’이라는 이름 세 글자와 프라이빗 넘버가 적혀 있었다.
“역시…… 해야겠지.”
아무리 똑 부러지는 평소의 소율로 돌아왔대도 이 번호로 전화를 거는 건 쉽지 않았다. 가장 큰 이유를 꼽자면 소율이 세간에서 흔히 말하는 모솔, 즉 모태 솔로이기 때문이었을 거다.
뭐 핑계라면 핑계겠지만 소율의 인생은 33년이라는 세월 동안 순결을 지키는 게 그렇지 않는 쪽보다 쉬웠던 탓도 있었다. 어려서는 학업에, 커서는 일에 치여서…… 어떻게라도 자신이 설 자리를 만드는 사이에 연애는 남의 일이 되어 버렸다. 우스운 건 딱히 혼전순결주의자도 아니었다는 거다.
“아이는 혼자 만들어지는 게 아니니까.”
소율이 번호를 입력한 후 통화 버튼에서 망설이며 되뇌었다. 말 그대로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다. 어쩌다 보니 서른셋까지 순결을 지키게 됐고, 어쩌다 보니 그 순결을 허락하게 됐다. 그리고 그 한순간의 상대가 바로…… 남도준이었다.
“아…… 왜 그랬을까.”
황망한 소율의 시선이 허공에 머문다. 딱히 후회나 죄책감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저, 말 그대로 내가 왜 그랬는지 알 수가 없을 뿐. 뭐, 다시 한번 핑계 아닌 핑계를 대 보자면 그날 밤의 소율이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는 거다.
‘한 실장, 아니 한소율 씨.’
평소 예의라고는 개나 주던 소율의 직속 상사였다. 대기업인 단영 건설의 이사로서는 몰라도 인간적으로는 꽝이었던 그 사람.
‘이제 슬슬 시집이라도 가야지 않겠어?’
여태껏 수많은 여직원들이 그 말을 들어야 했다.
‘권고사직이라는…… 말씀이신가요.’
이사는 말없이 빙긋 웃었다. 소율의 자리에 새로 오게 될 인사가 다름 아닌 이사의 애인이라는 소문이 돈 지 채 일주일도 안 되어서 현실에 적용된 셈이었다.
‘역시 소율 씨는 똑 부러진단 말이지.’
그게 끝이었다. 분노 후엔 무력함이 찾아왔고, 그 후엔 상실감이 소율을 에워쌌다. 대학 시절 이후 처음으로 스스로 술을 사 봤고, 취기라는 것에 기대어 봤다. 여태까지 필사적으로 앞만 보고 달려온 소율에게 이 불공평한 세상의 이치는 그동안 연체됐던 삶의 무게를 한 번에 돌려주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그러고 나서 둘러보니까, 나 정말 주위에 아무도 없는 거 있죠.’
그날 밤에도 술에 취해 있던 소율의 씁쓸한 말에 도준은 어깨를 내어 주었다. 내 어깨라도 괜찮다면, 그렇게 자연스러운 위로를 닮은 말을 하면서.
‘나라도 좋다면, 기대든지.’
평소의 소율이었다면 결단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날 밤 도준의 어깨는 따스했다. 무작정 타인에게 위로받고 싶었던 소율에게는 정말이지 살갗에 스미는 온기가 절실했다. 처음에는 어깨만 빌리자고 했던 게 품을 빌리게 되고, 결국은…….
“아, 아니야.”
다시 현실로 돌아온 소율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하지만…… 아무리 원나잇이라도 지킬 건 지켜야겠지.”
그렇게 중얼거린 소율은 열한 자리의 번호를 재빨리 눌렀다. 곧이어 들리는 신호음에 조금은 지루하다 생각이 될 무렵, 신호가 끊어졌다. 그리고 낮으면서 다정한 음성이 들려왔다.
― 여보세요?
“…….”
도준의 음성에 소율은 한순간 말을 잊고 말았다. 그러면 안 되는 걸 알지만 아주 잠시 마음이 흔들렸다.
― 한소율 씨, 기껏 전화 주고서는 아무 말도 안 할 겁니까?
남자의 음색에서는 웃음이 묻어났다. 그녀를 반가워하는 눈치였다.
“제 번호는…… 어떻게 아셨어요?”
처음이자 마지막 밤을 보낸 후에 도준은 일방적으로 명함을 건넸다. 받을 생각은 없었지만 억지로 손에 쥐여 주는 통에 소율은 지갑에 넣어 두고 잠시 잊고 지냈다. 그러다 임신 사실을 눈치채고서 그를 떠올렸다. 그럴 만한 상대는 도준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 그 정도 알아내는 건 별로 어렵지 않죠.
여전히 웃음기가 묻어나는 음성으로 도준은 이야기를 이어 갔다.
― 단영 건설에서 일 제대로 하는 비서는 소율 씨밖에 없다고 소문이 자자했는데, 몰랐습니까? 곧 퇴사하신다기에 내가 스카우트할까 싶어서 미리 알아 뒀습니다. 물론, 그날 밤 일은 순전히 우연이었으니 오해하지 마시고요.
“스카우트…….”
달콤한 울림이었다. 도준이 이사로 있는 현설 그룹은 단영 건설보다 훨씬 큰 기업이었다. 게다가 직원에 대한 복지도 남다르다고 들었기 때문에 스카우트란 단어에 귀가 솔깃해졌다. 하지만 이래서는 안 됐다. 그렇게 취업을 하고 나면 자신을 밀어낸 이사의 애인과 다를 게 없기 때문이다.
“말씀만으로 정말 감사합니다. 하지만 마음만 받을게요. 제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큰 기업인 거 같아요.”
― 그러지 말고 긍정적으로 생각해 주면 안 됩니까? 나는 소율 씨를 다시 보고 싶거든요. 당장에라도.
“…….”
도준의 달콤한 속삭임에 소율은 다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이대로 그의 페이스대로 끌려가면 꺼낼 얘기도 제대로 못 할 거 같았다. 그래서 소율은 안경을 추켜세우며 단호한 표정으로 말을 뱉었다.
“아무튼, 오늘 이렇게 갑자기 전화를 드린 건 중요한 용건이 있어서예요. 얘기가 좀 길어질지도 모르는데 괜찮으신가요?”
― 아, 그렇습니까? 음…… 그럼 잠시만 기다려 주겠어요? 몇 초면 됩니다.
“네, 기다리고 있을게요.”
소율의 대답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바스락거리며 종이 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가 한동안 반복되더니 아주 작게 ‘나가 봐.’라고 말하는 도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말대로 상대가 나간 건지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그의 숨결이 이전처럼 가까워졌다.
― 미안해요, 기다리게 해서. 그래서 소율 씨가 따로 전화를 해 줄 만큼 중요한 얘기가 대체 뭐죠? 난 될 수 있다면 데이트 신청이었으면 좋겠군요.
“데이트 신청보다 훨씬 중요한 얘기예요.”
막상 얘기를 꺼내려니 소율은 갑자기 초조함이 밀려왔다. 그래서 자리에서 일어서 주위를 서성이다가 탁자 위에 일렬로 늘어선 임신 테스트기를 바라보았다. 꼬박 일주일 동안 검사한 일곱 개의 테스트기가 그녀에게 힘내라고 말하고 있는 거 같았다. 그래서 소율은 결심을 내렸다. 그리고 한 박자를 쉰 후에 얘기를 이어 갔다.
“저 임신한 거 같아요.”
― 예?
“아니, 임신했어요.”
― 아, 임신……. 일단 축하……드려야 할까요?
내용과는 걸맞지 않게 퍽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그걸 잘 모르겠어서…… 일단 전화드렸어요.”
그래서 소율도 담담하게 말을 이을 수 있었다.
― 그건, 무슨 뜻인지 물어봐도 될까요?
“딱히 어떤 뜻이라기보단, 현상을 말씀드리는 거예요.”
소율은 숨을 고르고는 똑똑히 말했다.
“지금 제가 임신했을 가능성은 99% 수렴하고, 그 아이가 이사님의 아이라는 건 100%의 확률이라고 봐요.”
― 아…… 그렇군요.
이전의 맹렬한 기세와는 달리 도준은 말을 고르고 있었다. 보지 않아도 그의 태도에서 아이를 버거워한다는 게 느껴졌다.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하며 소율은 자신의 뜻을 이어 갔다.
“이사님께서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만일 제 안에 아이가 생겼다면, 저는 이 아이를 낳을 거예요. 물론, 될 수 있다면 친권도 제가 가지고 싶어요. 따로 돈을 요구할 생각도 없어요. 그냥 이사님께서 유전학적으로 친부가 되는 셈이니 알려 드리고 싶었어요. 이 아이는 저 혼자…….”
― 아니.
소율의 얘기가 끝나기도 전에 도준은 난색을 표했다. 소율은 처음 전화하기 망설여졌던 이유가 다가올까 두려웠다. 대부분의 남자들, 특히나 남도준처럼 사회적 지위를 포함한 모든 것을 가진 남자들은 혹을 싫어할 테니까.
“싫으신가요.”
― 그게 아니라 너무 전개가 빨라서. ……폭탄을 던졌으니 숨 쉴 틈 정도는 줄 수 있는 거 아닙니까?
이건 소율이 지난 일주일 동안 시뮬레이션했던 무수한 상황들 중 단 한 가지와도 맞지 않는 대답이었다.
“네, 아닙니다.”
― ……뭐요?
“이사님은 결정하실 필요 없어요. 결정은 제가 했고 그냥 알려 드리는 것뿐이니까요.”
하지만 결연한 표정으로 이 통화에 임하는 소율은 모든 상황에 대처할 수 있을 만큼 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