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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 그냥 통보만 하는 거라고요?
“네. 어떤 방식으로든, 고지의 의무가 있지 않을까 해서요.”
이제 마음이 조금 편안해질 것 같았다.
“만일 아이가 무사히 태어난다면 친권 포기에 동의해 주셨으면 해요. 그 외에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는 저의 각서도 공증을 받도록 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어떻게 진행하는 게 좋을까요?”
― ……아니.
수화기 너머 도준의 목소리가 조금 무거워졌다.
― 그런 진행은 곤란할 것 같은데.
“이사님께 폐가 가지 않도록…….”
― 그게 아니라, 소율 씨가 말하는 진행을 못 할 것 같다는 말입니다.
“……네?”
이거야말로 소율의 시나리오에 없던 전개였다.
― 내가 왜 내 아이의 친권을 포기해야 합니까?
너무 황당했던 나머지 소율은 몇 초간 눈을 깜박였다.
“아뇨, 이건 어디까지나 저의 아이니까…….”
― 소율 씨도 방금 말하지 않았습니까. 내가 아이의 친부일 확률은 100%라고. 그럼 소율 씨와 나의 아이인데, 왜 나만 친권을 포기해야 되냐는 말입니다.
이건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기껏해야 아이의 존재에 불쾌함을 표하는 게 최악의 시나리오라 생각했었는데, 설마 그 남도준이 지금 아이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다니.
“아니, 이사님. 제 말은요.”
― 소율 씨의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압니다. 그 아이를 온전히 낳아서 홀로 키우겠다, 이런 말 아닙니까.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나는 그럴 의향이 전혀 없어요.
“그럴 뜻이 없다니요?”
― 엄연히 내 아이기도 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 아이에 대한 권리는 내게도 있다는 뜻인데 왜 내가 포기해야 합니까?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는 걸 눈치챈 소율은 단번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 말씀은, 아이는 제가 낳고 직접 데려가서 키우시겠다는 건가요? 죄송하지만 저도 제 권리를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데요.”
― 똑똑한 소율 씨가 이럴 때는 이상하게 바보처럼 구네요.
어떤 식으로 들어도 그건 칭찬이 아니었다. 그래서 소율은 입술을 앙 깨물며 무어라 한마디 쏘아 주려고 했다. 그런데 그보다 앞서 도준이 먼저 말을 뱉었다.
― 같이 키웁시다. 우리가 같은 집에서 그 아이를 입히고, 먹이고, 재우고, 그러면서 말이죠.
도준의 얘기가 한 번에 이해되지 않았다.
“이사님. 저는 그럴 생각이…….”
― 그럼 이제부터 생각해요.
“아뇨, 이 아이는 제 아이고.”
― 동시에 내 아이죠.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도준의 목소리가 조금 들뜬 것 같았다. 이게 소율의 착각이면 좋으련만.
― 아, 그렇지. 내가 아까 축하해야 하냐고 물었던 건 정정하는 걸로 합시다.
소율은 말을 잃었다. 이건 정말이지…… 생각지도 못했던 전개라서. 문자 그대로 어이가 없었고, 말 그대로 황당할 뿐이다.
― 소율 씨, 축하해요.
그 남자의 목소리는 정말 기쁜 듯이 들려서 소율을 더더욱 혼란에 빠트렸다.
― 우리 아이를 임신한 걸,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우리가 아니라 내…….”
― 확실히 우리 아이라는 것도 100% 아닙니까.
그건 사실이었다. 지금 소율의 안에서 느껴지지도 않는 작은 생명체는 분명 소율 혼자서 만들어 낸 것이 아니니까.
― 소율 씨의 아이인 동시에 내 아이기도 합니다.
도준은 자꾸만 옳은 말을 해서 소율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 그러니 미안하지만 난 내 권리를 주장해야겠어요. 가능하면 얼굴 보고 이야기하고 싶은데.
“만나요, 그럼.”
소율은 문제를 돌파하는 타입이었다. 아마 도준도 그런 타입이리라.
― 아, 그건 당연한 거고…….
하지만 도준의 다음 말에 소율은 생각을 바꿨다.
― 꽃은 뭘 좋아합니까.
“……네?”
― 들었으면서.
이 남자와 나는 확실히 다른 사람이었다.
“이사님, 저는 조금 더 현실적인 문제를 상의하고 싶은데요.”
― 나도 충분히 현실적인데? 내 살인적인 일정에 갑작스러운 저녁 스케줄이 가당키나 한지, 비서직에 오래 근무했던 한소율 씨라면 잘 아시겠죠.
소율은 잠자코 납득했다.
“제가 이사님 계신 곳으로 가겠습니다. 꽃은 필요 없어요.”
― 그럼 장소는 문자로 보내면 되겠고…… 꽃은 내 아이가 생긴 걸 내가 축하하는 거니까 굳이 한소율 씨에게 허락받을 필요는 없겠고.
한마디도 이길 수가 없었다.
― 그럼 다 된 건가?
끝끝내 소율은 이 현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대충은…… 그런 걸로 하죠.”
임신 테스트기에 떠오른 붉은색의 두 줄만큼이나 확실한 사실 하나는 알겠다. 나는 아무래도 엄청나게 다루기 힘든 남자의 아이를 가진 게 틀림없다.
1
어느새 까뭇까뭇해진 하늘을 보며 소율은 발걸음을 서둘렀다. 도준이 약속 장소로 지정한 현설 호텔은 시내 한복판에 자리하고 있었다. 때문에 호텔 앞거리는 이른 퇴근을 서두르는 사람들과 유흥을 즐기러 나온 사람들로 인산인해였다.
“약속을 잡아도 왜 하필이면…….”
모던한 느낌의 호텔 입구에 서서 소율은 입술을 삐죽거렸다. 한 회사의 중역 자리에 있으면 얼마나 많은 스케줄에 시달리는지 그녀 역시도 알고 있었다. 아마도 그의 행동반경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 이 호텔이었을 거다.
이성은 이해한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여자의 마음으로는 그럴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이 장소는 그 사건이 일어난 장소였다. 도준의 두껍고 단단한 팔 안에 안겨서 세상에서 가장 뜨겁고 짜릿한 밤을 보낸…….
“아니, 아니지. 지금은 이런 걸 떠올릴 때가 아니야.”
괜한 생각을 떨쳐 버리려는 듯 소율은 고개를 붕붕 내저었다. 그리고 습관처럼 안경을 추켜세우더니 금세 야무진 표정을 지었다.
“지금은…….”
소율은 마치 누군가를 의식하듯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협상을 하러 가는 것뿐이야.”
그거야말로 소율의 전공이었다. 그러니 두려울 게 없다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거는 거나 다름없었다. 실제로 어려울 건 없을 것 같았다. 특별한 변수가 없는 한은 그랬다.
호텔 손님들 사이에 섞여 소율은 단숨에 라운지로 향했다. 약속 장소에 당도해 자리를 잡은 그녀는 커피를 주문할까 하다가 관뒀다. 대신에 따뜻한 녹차를 시켰다.
“한소율 씨 되십니까?”
하지만 주문한 음료가 나오기도 전에 콘시어지가 다가와 공손히 물었을 때, 소율은 그 변수의 존재를 느꼈다.
“맞는……데요.”
콘시어지의 환하고 친근한 미소에 소율은 오히려 방어적인 태세를 취했다.
“남도준 이사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남 이사님께서요?”
소율은 일어나지 않은 채 라운지를 한 번 둘러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손목시계를 한 번 본 후에 차분하게 말을 뱉었다.
“제가 알기로는 여기 라운지에서 이 시간에 뵙기로 했는데, 남 이사님 모습이 보이지 않네요.”
안경 너머 소율의 눈동자가 날카롭게 변했지만 콘시어지는 꿈적도 않고 그저 미소로 일관했다.
“그 사항에 관해서는 저도 말씀드릴 수 있는 게 없네요. 남도준 이사님께서는 애초에 예약하신 장소에서 한소율 씨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애초에 예약한 장소…….”
어이가 없었다. 아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소율에게는 라운지에서 보자고 하더니 정작 도준은 다른 곳에 있었다. 그렇지만 이대로 상관도 없는 사람을 더 닦달해 봤자 얻을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소율은 핸드백을 메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괜찮으시다면 제가 안내 도와드려도 될까요?”
“네, 부탁드릴게요.”
어차피 도준을 찾아가기 위해서는 콘시어지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 뒤를 쫓으며 복잡한 마음을 삭였다. 그저 안내받는 대로 걸음을 옮기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다시 내리기를 이어 갔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인가 스위트룸 앞에 서 있게 되었다.
“잠시만요.”
소율은 당황하며 인터폰을 누르려는 콘시어지의 손을 막았다. 기껏해야 호텔 식당이나 사무실일 거라 생각했다. 아마 이곳이 호텔이란 사실을 잠시 잊었는지도 모른다. 설마 도준이 객실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라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금 여기에 남 이사님께서 기다리고 계시다, 이 말인가요?”
“네. 정시에 도착하셔서 지금까지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애초에 예약한 장소도 여기란 말이죠?”
“네, 그렇습니다만…….”
콘시어지가 처음으로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그 정도로 소율의 기색이 냉랭했던 것이다. 하필이면 이 호텔에서, 그것도 객실에서 다시 도준을 만나야 한다고 생각하니 소율은 짜증이 일었다. 만만하지 않은 상대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 예상 못 했던 것이다.
“진짜, 어이가 없어서.”
소율은 기가 차서 인터폰만 노려보았다. 그저 딱 하룻밤으로 끝냈어야 할 인연이었다. 그 밤을 마지막으로 다시는 보지도 말고, 상관없는 채 살아야 옳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이미 자신은 임신을 했고 그 사실을 도준에게 알렸다.
“저…… 한소율 씨?”
협상에서는 먼저 흥분하는 사람이 지는 거다. 캄 다운을 되뇌며 소율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옷매무새를 고치고, 안경을 다시 썼다.
“이제 괜찮으니까 그만 돌아가셔도 돼요.”
“네?”
“저를 잘 안내해 주셨으니 그만 가셔도 괜찮아요.”
“하지만…….”
소율은 괜찮다는 듯, 싱긋 웃어 보였다. 그리고 콘시어지가 보는 앞에서 스위트룸의 인터폰을 눌렀다. 문 너머에서는 누구냐고 묻지도 않았다. 그리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제 정말 가 보셔도 괜찮아요.”
소율은 콘시어지를 향해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제야 콘시어지는 소율을 향해 고개를 살짝 숙이더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잠시 보던 소율이 다시 고개를 돌릴 즈음에는 이미 문이 철컥 소리를 내며 열려 있었다.
“왔어요? 혹시나 길이라도 잃을까 봐 콘시어지에게 부탁했는데, 다행히 만났나 보군요.”
눈앞의 도준은 싱그럽게 미소 지으며 소율을 반겼다. 여전히 넓은 어깨와 탄탄한 가슴을 가진 그는 블랙 슈트와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하지만 그것과는 반대로 소율은 기분이 언짢았다.
“이런 초대는 솔직히 불쾌하네요.”
자신의 머리보다 한참이나 높은 시선을 마주하며 소율은 눈살을 찌푸렸다.
“라운지에서 만날 생각도 없으면서 왜 저를 거기로 불렀죠? 거기까지는 이해한다고 쳐요. 하지만 여기 스위트룸은 대화만 나누기에는 과한 장소가 아닌가 싶네요.”
“한소율 씨 말이 맞아요. 난 대화만 나눌 생각은 없습니다.”
도준의 대답에 소율은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 같았다. 머릿속으로는 온갖 의문들이 떠올랐지만 애써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그저 이 남자 앞에서 소리라도 지르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제가 이곳까지 오는 동안에 쭉 콘시어지와 함께였어요. 그걸 본 사람들도 분명 있을 거고요. 무엇보다 CCTV에 모두 촬영되었겠죠.”
“그렇겠죠. 이 정도 규모의 호텔이니 분명 본 사람들이 있을 겁니다. 그런데 갑자기 왜 그런 얘기를 꺼내죠?”
“혹시나 남도준 이사님께서 저를 상대로 범법 행위를 할 여지가 있을 시 충분한 증인과 증거가 확보되었다는 걸 각인시켜 드리고 싶어서요.”
아주 차분한 어조였지만 소율의 눈빛은 많은 얘기를 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도준을 크게 책망하고 있었다. 그걸 눈치챈 그는 씁쓸하게 웃고서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 직접 들어와서 확인해 보지 그래요. 내가 당신을 상대로 정말 어떤 범죄를 저지르려는 건지.”
“안 그래도 그러려고요.”
도준은 소율이 들어가기 쉽도록 문 앞에서 조금 비켜섰다. 그녀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당당한 걸음으로 스위트룸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제일 처음 반응을 보인 건 코였다. 향수와는 확연하게 달랐다. 달달하면서 싱그러우며 향긋한 향기가 코끝을 간질였다. 그리고 곧 총천연색의 꽃들과 마주하게 되었다. 수를 헤아리기도 힘들 정도로 많은 꽃들이 객실에 장식되어 있었다.
― 그냥 통보만 하는 거라고요?
“네. 어떤 방식으로든, 고지의 의무가 있지 않을까 해서요.”
이제 마음이 조금 편안해질 것 같았다.
“만일 아이가 무사히 태어난다면 친권 포기에 동의해 주셨으면 해요. 그 외에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는 저의 각서도 공증을 받도록 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어떻게 진행하는 게 좋을까요?”
― ……아니.
수화기 너머 도준의 목소리가 조금 무거워졌다.
― 그런 진행은 곤란할 것 같은데.
“이사님께 폐가 가지 않도록…….”
― 그게 아니라, 소율 씨가 말하는 진행을 못 할 것 같다는 말입니다.
“……네?”
이거야말로 소율의 시나리오에 없던 전개였다.
― 내가 왜 내 아이의 친권을 포기해야 합니까?
너무 황당했던 나머지 소율은 몇 초간 눈을 깜박였다.
“아뇨, 이건 어디까지나 저의 아이니까…….”
― 소율 씨도 방금 말하지 않았습니까. 내가 아이의 친부일 확률은 100%라고. 그럼 소율 씨와 나의 아이인데, 왜 나만 친권을 포기해야 되냐는 말입니다.
이건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기껏해야 아이의 존재에 불쾌함을 표하는 게 최악의 시나리오라 생각했었는데, 설마 그 남도준이 지금 아이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다니.
“아니, 이사님. 제 말은요.”
― 소율 씨의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압니다. 그 아이를 온전히 낳아서 홀로 키우겠다, 이런 말 아닙니까.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나는 그럴 의향이 전혀 없어요.
“그럴 뜻이 없다니요?”
― 엄연히 내 아이기도 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 아이에 대한 권리는 내게도 있다는 뜻인데 왜 내가 포기해야 합니까?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는 걸 눈치챈 소율은 단번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 말씀은, 아이는 제가 낳고 직접 데려가서 키우시겠다는 건가요? 죄송하지만 저도 제 권리를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데요.”
― 똑똑한 소율 씨가 이럴 때는 이상하게 바보처럼 구네요.
어떤 식으로 들어도 그건 칭찬이 아니었다. 그래서 소율은 입술을 앙 깨물며 무어라 한마디 쏘아 주려고 했다. 그런데 그보다 앞서 도준이 먼저 말을 뱉었다.
― 같이 키웁시다. 우리가 같은 집에서 그 아이를 입히고, 먹이고, 재우고, 그러면서 말이죠.
도준의 얘기가 한 번에 이해되지 않았다.
“이사님. 저는 그럴 생각이…….”
― 그럼 이제부터 생각해요.
“아뇨, 이 아이는 제 아이고.”
― 동시에 내 아이죠.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도준의 목소리가 조금 들뜬 것 같았다. 이게 소율의 착각이면 좋으련만.
― 아, 그렇지. 내가 아까 축하해야 하냐고 물었던 건 정정하는 걸로 합시다.
소율은 말을 잃었다. 이건 정말이지…… 생각지도 못했던 전개라서. 문자 그대로 어이가 없었고, 말 그대로 황당할 뿐이다.
― 소율 씨, 축하해요.
그 남자의 목소리는 정말 기쁜 듯이 들려서 소율을 더더욱 혼란에 빠트렸다.
― 우리 아이를 임신한 걸,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우리가 아니라 내…….”
― 확실히 우리 아이라는 것도 100% 아닙니까.
그건 사실이었다. 지금 소율의 안에서 느껴지지도 않는 작은 생명체는 분명 소율 혼자서 만들어 낸 것이 아니니까.
― 소율 씨의 아이인 동시에 내 아이기도 합니다.
도준은 자꾸만 옳은 말을 해서 소율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 그러니 미안하지만 난 내 권리를 주장해야겠어요. 가능하면 얼굴 보고 이야기하고 싶은데.
“만나요, 그럼.”
소율은 문제를 돌파하는 타입이었다. 아마 도준도 그런 타입이리라.
― 아, 그건 당연한 거고…….
하지만 도준의 다음 말에 소율은 생각을 바꿨다.
― 꽃은 뭘 좋아합니까.
“……네?”
― 들었으면서.
이 남자와 나는 확실히 다른 사람이었다.
“이사님, 저는 조금 더 현실적인 문제를 상의하고 싶은데요.”
― 나도 충분히 현실적인데? 내 살인적인 일정에 갑작스러운 저녁 스케줄이 가당키나 한지, 비서직에 오래 근무했던 한소율 씨라면 잘 아시겠죠.
소율은 잠자코 납득했다.
“제가 이사님 계신 곳으로 가겠습니다. 꽃은 필요 없어요.”
― 그럼 장소는 문자로 보내면 되겠고…… 꽃은 내 아이가 생긴 걸 내가 축하하는 거니까 굳이 한소율 씨에게 허락받을 필요는 없겠고.
한마디도 이길 수가 없었다.
― 그럼 다 된 건가?
끝끝내 소율은 이 현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대충은…… 그런 걸로 하죠.”
임신 테스트기에 떠오른 붉은색의 두 줄만큼이나 확실한 사실 하나는 알겠다. 나는 아무래도 엄청나게 다루기 힘든 남자의 아이를 가진 게 틀림없다.
1
어느새 까뭇까뭇해진 하늘을 보며 소율은 발걸음을 서둘렀다. 도준이 약속 장소로 지정한 현설 호텔은 시내 한복판에 자리하고 있었다. 때문에 호텔 앞거리는 이른 퇴근을 서두르는 사람들과 유흥을 즐기러 나온 사람들로 인산인해였다.
“약속을 잡아도 왜 하필이면…….”
모던한 느낌의 호텔 입구에 서서 소율은 입술을 삐죽거렸다. 한 회사의 중역 자리에 있으면 얼마나 많은 스케줄에 시달리는지 그녀 역시도 알고 있었다. 아마도 그의 행동반경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 이 호텔이었을 거다.
이성은 이해한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여자의 마음으로는 그럴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이 장소는 그 사건이 일어난 장소였다. 도준의 두껍고 단단한 팔 안에 안겨서 세상에서 가장 뜨겁고 짜릿한 밤을 보낸…….
“아니, 아니지. 지금은 이런 걸 떠올릴 때가 아니야.”
괜한 생각을 떨쳐 버리려는 듯 소율은 고개를 붕붕 내저었다. 그리고 습관처럼 안경을 추켜세우더니 금세 야무진 표정을 지었다.
“지금은…….”
소율은 마치 누군가를 의식하듯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협상을 하러 가는 것뿐이야.”
그거야말로 소율의 전공이었다. 그러니 두려울 게 없다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거는 거나 다름없었다. 실제로 어려울 건 없을 것 같았다. 특별한 변수가 없는 한은 그랬다.
호텔 손님들 사이에 섞여 소율은 단숨에 라운지로 향했다. 약속 장소에 당도해 자리를 잡은 그녀는 커피를 주문할까 하다가 관뒀다. 대신에 따뜻한 녹차를 시켰다.
“한소율 씨 되십니까?”
하지만 주문한 음료가 나오기도 전에 콘시어지가 다가와 공손히 물었을 때, 소율은 그 변수의 존재를 느꼈다.
“맞는……데요.”
콘시어지의 환하고 친근한 미소에 소율은 오히려 방어적인 태세를 취했다.
“남도준 이사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남 이사님께서요?”
소율은 일어나지 않은 채 라운지를 한 번 둘러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손목시계를 한 번 본 후에 차분하게 말을 뱉었다.
“제가 알기로는 여기 라운지에서 이 시간에 뵙기로 했는데, 남 이사님 모습이 보이지 않네요.”
안경 너머 소율의 눈동자가 날카롭게 변했지만 콘시어지는 꿈적도 않고 그저 미소로 일관했다.
“그 사항에 관해서는 저도 말씀드릴 수 있는 게 없네요. 남도준 이사님께서는 애초에 예약하신 장소에서 한소율 씨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애초에 예약한 장소…….”
어이가 없었다. 아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소율에게는 라운지에서 보자고 하더니 정작 도준은 다른 곳에 있었다. 그렇지만 이대로 상관도 없는 사람을 더 닦달해 봤자 얻을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소율은 핸드백을 메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괜찮으시다면 제가 안내 도와드려도 될까요?”
“네, 부탁드릴게요.”
어차피 도준을 찾아가기 위해서는 콘시어지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 뒤를 쫓으며 복잡한 마음을 삭였다. 그저 안내받는 대로 걸음을 옮기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다시 내리기를 이어 갔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인가 스위트룸 앞에 서 있게 되었다.
“잠시만요.”
소율은 당황하며 인터폰을 누르려는 콘시어지의 손을 막았다. 기껏해야 호텔 식당이나 사무실일 거라 생각했다. 아마 이곳이 호텔이란 사실을 잠시 잊었는지도 모른다. 설마 도준이 객실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라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금 여기에 남 이사님께서 기다리고 계시다, 이 말인가요?”
“네. 정시에 도착하셔서 지금까지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애초에 예약한 장소도 여기란 말이죠?”
“네, 그렇습니다만…….”
콘시어지가 처음으로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그 정도로 소율의 기색이 냉랭했던 것이다. 하필이면 이 호텔에서, 그것도 객실에서 다시 도준을 만나야 한다고 생각하니 소율은 짜증이 일었다. 만만하지 않은 상대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 예상 못 했던 것이다.
“진짜, 어이가 없어서.”
소율은 기가 차서 인터폰만 노려보았다. 그저 딱 하룻밤으로 끝냈어야 할 인연이었다. 그 밤을 마지막으로 다시는 보지도 말고, 상관없는 채 살아야 옳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이미 자신은 임신을 했고 그 사실을 도준에게 알렸다.
“저…… 한소율 씨?”
협상에서는 먼저 흥분하는 사람이 지는 거다. 캄 다운을 되뇌며 소율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옷매무새를 고치고, 안경을 다시 썼다.
“이제 괜찮으니까 그만 돌아가셔도 돼요.”
“네?”
“저를 잘 안내해 주셨으니 그만 가셔도 괜찮아요.”
“하지만…….”
소율은 괜찮다는 듯, 싱긋 웃어 보였다. 그리고 콘시어지가 보는 앞에서 스위트룸의 인터폰을 눌렀다. 문 너머에서는 누구냐고 묻지도 않았다. 그리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제 정말 가 보셔도 괜찮아요.”
소율은 콘시어지를 향해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제야 콘시어지는 소율을 향해 고개를 살짝 숙이더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잠시 보던 소율이 다시 고개를 돌릴 즈음에는 이미 문이 철컥 소리를 내며 열려 있었다.
“왔어요? 혹시나 길이라도 잃을까 봐 콘시어지에게 부탁했는데, 다행히 만났나 보군요.”
눈앞의 도준은 싱그럽게 미소 지으며 소율을 반겼다. 여전히 넓은 어깨와 탄탄한 가슴을 가진 그는 블랙 슈트와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하지만 그것과는 반대로 소율은 기분이 언짢았다.
“이런 초대는 솔직히 불쾌하네요.”
자신의 머리보다 한참이나 높은 시선을 마주하며 소율은 눈살을 찌푸렸다.
“라운지에서 만날 생각도 없으면서 왜 저를 거기로 불렀죠? 거기까지는 이해한다고 쳐요. 하지만 여기 스위트룸은 대화만 나누기에는 과한 장소가 아닌가 싶네요.”
“한소율 씨 말이 맞아요. 난 대화만 나눌 생각은 없습니다.”
도준의 대답에 소율은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 같았다. 머릿속으로는 온갖 의문들이 떠올랐지만 애써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그저 이 남자 앞에서 소리라도 지르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제가 이곳까지 오는 동안에 쭉 콘시어지와 함께였어요. 그걸 본 사람들도 분명 있을 거고요. 무엇보다 CCTV에 모두 촬영되었겠죠.”
“그렇겠죠. 이 정도 규모의 호텔이니 분명 본 사람들이 있을 겁니다. 그런데 갑자기 왜 그런 얘기를 꺼내죠?”
“혹시나 남도준 이사님께서 저를 상대로 범법 행위를 할 여지가 있을 시 충분한 증인과 증거가 확보되었다는 걸 각인시켜 드리고 싶어서요.”
아주 차분한 어조였지만 소율의 눈빛은 많은 얘기를 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도준을 크게 책망하고 있었다. 그걸 눈치챈 그는 씁쓸하게 웃고서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 직접 들어와서 확인해 보지 그래요. 내가 당신을 상대로 정말 어떤 범죄를 저지르려는 건지.”
“안 그래도 그러려고요.”
도준은 소율이 들어가기 쉽도록 문 앞에서 조금 비켜섰다. 그녀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당당한 걸음으로 스위트룸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제일 처음 반응을 보인 건 코였다. 향수와는 확연하게 달랐다. 달달하면서 싱그러우며 향긋한 향기가 코끝을 간질였다. 그리고 곧 총천연색의 꽃들과 마주하게 되었다. 수를 헤아리기도 힘들 정도로 많은 꽃들이 객실에 장식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