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3화
“대체 이건…….”
혹시 도준이 이곳에 새로운 플라워 숍을 오픈한 건지 착각이 일 정도였다. 꽃을 잘 모르는 소율도 이건 장미고, 저건 튤립인 건 알았다. 그 외에도 노란 메리골드, 색색의 수국, 팬지, 게다가 그녀의 얼굴만 한 해바라기도 눈에 띄었다.
“혹시…… 화훼 사업이라도 시작하시나요?”
소율은 얼떨떨한 기분을 감추지 못한 채 물었다. 그러자 도준은 자랑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그녀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런 쪽까지 손대면 무슨 욕을 얼마나 먹으려고.”
“그럼 이 많은 꽃은 왜 준비하신 거죠?”
“내가 물었잖아요. 무슨 꽃 좋아하냐고. 그런데 대답이 없기에 뭘 좋아할지 몰라서 일단 닥치는 대로 준비했어요. 이렇게 많으면 그중에 하나 정도는 좋아하는 꽃이 있겠지 싶어서.”
미친놈. 그 단어가 입 끝에서 맴돌았지만 소율은 꿀꺽 삼켰다. 이 많은 꽃들이 자기 한 명을 위해 희생되었다고 생각하면 정말 아깝기 그지없었다.
“죄송하지만…….”
거기까지 말한 소율은 다시 생각을 했다. 만약 이대로 이 꽃을 거절한다면 쓰레기통으로 직행할지도 모른다. 그건 너무 큰 낭비였다. 분명히 부담스러웠지만 이런 낭비에 동조하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많은 꽃은 제게 필요 없어요.”
“어…… 그럼 이 많은 걸 어쩌지. 버려야 하나.”
“대신에!”
혹시나가 역시나였다. 그래서 소율은 얼른 다음 얘기를 이어 갔다.
“굳이 제게 꽃을 주고 싶다면 이 꽃들은 보육원이나 양로원에 보내 주세요. 절대 버리시지 말고요. 저는…….”
발을 디딜 틈도 없이 꽃으로 가득한 공간으로 다가가며 소율은 메리골드 한 송이를 뽑아 들었다.
“이 한 송이면 충분해요.”
이런 식으로 도준에게 무언가를 받을 생각은 없었지만 꽃 한 송이 정도는 괜찮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런 소율을 도준은 마음에서 우러나는 흐뭇함을 미소로 표현했다. 아마도 자신이 선택한 여자는 아주 똑 부러지면서도 정이 많은 여자인 거 같았다.
방을 가득 메웠던 꽃들은 호텔 직원들의 손길에 일사천리로 사라져 갔다. 그제야 마음이 한결 놓인 소율은 옅은 한숨을 뱉었다.
“그럼 이제 식사를 해 볼까. 소율 씨는 뭐가 좋죠?”
“식사보다 저희의 현실에 대해 구체적인 이야기를 시작하면 안 될까요?”
“그래요. 그것도 일단은 중요하죠. 하지만 난 지금까지 일하느라 제대로 된 식사도 못 했거든. 될 수 있다면 저녁은 챙겨 먹고 싶은 기분인데.”
그렇게 말한 도준은 인터폰 근처로 다가갔다. 그의 입가에는 여전히 여유로운 미소가 존재했다. 소율에게 그 모습은 무척이나 얄밉게만 보였다.
“그럼 식사는 남도준 이사님만 하시는 걸로 하세요. 저는 식욕이 없어서요.”
“식욕이 없어도 일단 먹어야 하지 않겠어요. 건강한 육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들고, 무엇보다 건강한 아이가 태어나죠. 지금 소율 씨는 너무 마른 거 같아.”
“옷을 이렇게 입어서 그래요. 전 평균 체중이에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요즘 들어 스트레스 때문에 살이 부쩍 빠진 참이었다. 그녀 역시 은근히 신경 쓰고 있던 점을 지적당하자 저도 모르게 욱하고 말았다.
“일단 보기에 말라 보이니까 하는 말입니다. 아무튼, 식욕이 없다면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걸 준비하도록 하죠. 특별히 가리거나 먹으면 안 되는 음식 있어요?”
“딱히 조심해야 할 음식은 없어요. 가리는 것도 없고요. 제가 먹기 싫다고 다시 대답드려도 계속 권하실 생각인가요?”
“그거야, 물론. 아니면 종류별로 하나씩 시켜 두는 방법도 있죠. 그중에 하나는 먹고 싶을 수도 있잖아.”
결국은 도준의 뜻대로 일이 흘러간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소율은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요, 알겠어요. 그럼 저는 클럽샌드위치로 할게요.”
인터폰을 든 도준은 자신이 먹을 갈비찜 정식과 클럽샌드위치를 주문하고서 전화를 끊었다.
“자, 그럼. 식사가 올 동안에 우리 이야기를 시작해 볼까요.”
그렇게 말한 도준은 가벼운 걸음으로 소파를 향해 다가갔다. 금세 자리를 잡고 앉은 그는 우아한 몸짓으로 다리를 꼬았다. 하지만 소율은 그런 그를 지켜보며 얘기를 꺼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릴게요.”
“좋습니다. 나도 변화구보다는 직구가 좋거든요. 어렵게 에둘러 표현할 필요 없이 단도직입적인 대화를 해 보죠. 일단 앉아요. 올려다보려니 고개가 아프네.”
앉아야 할 필요성은 느끼지 못했지만 굳이 거절한 이유도 없기에 소율은 도준의 맞은편에 앉았다. 등을 꼿꼿하게 세운 소율은 안경을 고쳐 썼다.
“일단 말씀드릴게요. 저는 방금 전 그 화훼 농장이랄지…… 꽃밭 같은 이벤트는 필요 없어요. 그런 식으로 관계를 포장하려는 것도 좋아하지도 않고요. 그러니 삼가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음, 의외네요. 일반적으로 여자들은…….”
“그 섣부른 일반론에 저를 끼워 넣지 않았으면 해서 드리는 말씀이에요.”
속사포처럼 내뱉는 소율의 말들에 도준은 조금도 휩쓸리지 않았다. 그는 어깨만 한 번 으쓱이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소율 씨는 특별한 여자란 걸 잠시 잊고 있었군요. 알겠어요. 앞으로는 주의하도록 하죠. 당신이 싫다면 정말 싫은 거고, 좋다면 좋은 걸로.”
도준이 납득하는 부분이 어쩐지 그녀가 원하는 바와 핀트가 맞지 않는 것 같았지만 일단은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그래서 소율은 다시 얘기를 이어 갔다.
“아무튼, 지금 저희의 문제는 다른 게 아니라 이 아이예요.”
“잠시, 잠시만요.”
소율의 얘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도준이 손을 들어 올리더니 그녀의 말을 막았다. 그리고 몇 번 고개를 갸웃하더니 더없이 해맑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무리 그래도 문제는 아니죠.”
느닷없는 지적에 소율은 그제야 자신의 말을 곱씹어 보았다. 그러곤 잠시 후 아차 싶은 표정을 지었다. 그런 그녀를 보며 도준은 괜찮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씨익 웃어 보였다.
“이해합니다.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었겠죠. 하지만 앞으로 우리 둘 다 주의해서 말하도록 합시다. 난 이 아이가 뜻밖이긴 해도 문제라고 생각하진 않으니까.”
지금까지 지켜본 도준의 태도와 행동은 생각도 못 한 것들이었다. 그라면 당연히 이 상황을 ‘사고’나 ‘문제’ 정도로 인식할 거라 짐작했기 때문이다. 그녀 스스로도 무의식중에 그렇게 말하고 말 정도니까.
“아…….”
느닷없이 드러난 도준의 의외의 모습에 소율은 가슴이 술렁이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하지만 짧게 내뱉은 한숨과 함께 그런 생각들은 곧 날아가 버렸다.
“제 단어 선택이 적절하지 못했네요. 앞으로 아이를 위해서라도 조심하도록 하겠습니다.”
“한소율 씨는 볼수록 참…….”
거기까지 말한 도준은 잠시 생각에 빠졌다. 소율을 표현하기에 알맞은 단어가 생각날 듯 말 듯 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남들이 보기에도 충분히 미인이고 능력도 탁월했다. 조금 톡 쏘는 느낌이 있긴 하지만 때때로 그런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순수하네요.”
“지금 저한테 말씀하시는 건가요? 순수하다고?”
“그래요. 내가 느끼는 한소율 씨는 순수한 거 같아. 좋게 말하면 원석이지만 나쁘게 말하면 바위? 자신이 가진 본질을 숨기지 못하는 거지. 아, 본질이라는 건 단어 그대로의 뜻이니까 곡해해서 듣지 말아요.”
“본질…….”
스스로도 깨닫지 못하는 것을, 남이나 다름없는 도준이 알아챈다는 것에 소율은 얼떨떨한 기분이 들었다.
“저를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소율은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리고 곧 고개를 들어 도준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사님께서도 저를 높게 평가해 주시니 드리는 말씀이지만. 아이에 대한 양육권은 제게 일임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저는 결혼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에요. 가정에 대해서 아는 것도 없고 느껴 본 적도 없어요. 그러니 좋은 아내가 되지 못할 거예요. 하지만 아이는 포기할 생각이 없어요. 제가 가지지 못했던 것들을 아이를 위해 해 주고 싶어요. 물론, 지금 당장 일자리를 잃기는 했지만…….”
그때였다. 마치 타이밍을 노린 듯 객실의 인터폰이 울렸다. 소율의 얘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도준은 자리에서 일어서 문을 열었다. 호텔의 직원으로 보이는 남자가 트레이를 밀며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테이블 위에 음식을 세팅하더니 고개를 살짝 숙이고서 다시 방을 나섰다.
“일단 식사부터 하죠.”
그렇게 말한 도준은 먼저 의자에 앉았다. 소율은 마지못해 소파에서 일어서 테이블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좀 전과 마찬가지로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잠시 얘기가 끊어졌네요. 다시 말씀드릴게요. 저는…….”
“소율 씨도 식사 전일 것 같은데 먹으면서 얘기해요. 나 어디 도망 안 가니까.”
도준은 클럽샌드위치가 놓인 그릇을 그녀의 앞으로 밀어 주었다. 딱히 입맛이 당기지는 않았기에 소율은 그저 한숨만 쉬었다. 왠지 이 상황에 그녀만 안달하고 있는 것 같아서 마음이 불편했다.
“……지금까지 제가 벌어들인 돈은 대부분 저축했어요. 저는 과소비할 곳도 딱히 없었고요. 그러니 아이를 키울 수 있는 자금은 충분히 있어요. 그 점은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러니까 애초에 말씀드린 대로 아이는 제가 키우는 방향으로 결정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저는 이미 이 아이에게 최선을 다할 마음을 먹었어요.”
“한소율 씨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충분히 알았어요. 그러니 일단 식사부터 들어요. 입맛이 없다고는 했지만 잘 먹어야 아이도 건강하게 크죠.”
도준은 포크와 나이프로 클럽샌드위치를 들어 올렸다. 그것을 접시 위에 두고서 한입 크기로 먹기 좋게 잘랐다. 그리고 곁들여 나온 감자튀김도 몇 개 올려서 그 접시를 소율의 앞에 놓았다.
“먹어요. 그러면 나도 얘기를 시작할 테니까.”
도준은 진심으로 소율이 식사하기를 원하는 거 같았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포크를 들어 감자튀김 하나를 찍었다. 그리고 입으로 가져갔다. 짭짤하면서 고소한 맛이 여느 감자튀김과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이어서 소율은 한입 크기로 잘린 샌드위치를 입으로 가져갔다.
테이블 위에 턱을 괸 상태로 그 모습을 바라보던 도준은 이내 입가에 흐뭇한 미소를 띠었다.
“먹는 모습이 보기 좋네요. 흔히 복스럽게 먹는다고 말하잖아요. 소율 씨가 그런 것 같군요. 난 그런 사람이 좋더라. 가끔 보면 정말 맛없게 먹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모습 보면 나도 입맛이 가시거든.”
“그런 소리는 처음 듣네요.”
소율은 덤덤한 표정으로 다시 샌드위치를 들어 한입 베어 물었다. 도준은 여전히 그런 소율은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소율 씨는 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죠?”
느닷없는 질문에 소율은 놀랐다. 덕분에 채 삼키지 못한 샌드위치가 목에 걸려서 저도 모르게 캑 소리를 내고 말았다. 그러자 도준이 금세 물 잔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소율은 허겁지겁 물을 마시며 샌드위치를 억지로 밀어 넣었다. 그러고서 어이없다는 시선으로 도준을 보았다.
“사심 담은 질문 아닙니다. 그저 궁금해서 그래요. 소율 씨는 남자로서, 아이의 아빠로서, 한 사람으로서의 나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이사님께서는…….”
쉬운 듯하면서 어려운 질문이었다. 이제껏 들어 온 풍문에 의하면 도준은 일에 있어서 완벽한 사람이었다. 똑같은 재벌 3세이고 이사였던 단영 건설의 상사를 생각하면 충분히 양반이다. 게다가 흔한 스캔들 한 번 낸 적 없으니 사생활도 깨끗할 것이다. 갑작스러운 임신 소식에도 그는 호의를 표하지 않았던가.
“지금 소율 씨 표정을 보면 내가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닌가 보네요.”
그녀의 표정이 어떤지는 알 길이 없지만 그 말이 사실이었다.
“소율 씨의 성격으로 짐작해 보자면 나를 최악의 인간으로 생각하거나 증오했다면 애초에 임신 사실을 알리지 않았겠죠. 그래서 나는 우리에게 가능성이 열려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저는 우리를 생각한 게 아니에요. 아이를 생각한 거죠. 그리고 고지의 의무가 있다고 생각해서…….”
“맞아요. 고지의 의무. 그걸 왜 생각했죠? 당신은 그냥 조용히 아이를 낳아서 충분히 혼자서 기를 능력이 있었어요.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죠.”
“그래요. 이사님 말이 맞아요. 그럴 수도 있었죠. 제가 이사님을 높게 평가한 면도 없지 않을 거예요. 그래서 아이의 아버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자 생각했는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것과 결혼은 별개의 일이에요. 다시 말씀드리자면 전 좋은 엄마가 될 각오는 했어도 한 사람의 부인으로서는 부적합해요.”
그녀가 어려서는 학업에 쫓겨서, 어른이 돼서는 직장에 쫓겨서 지금껏 제대로 된 사랑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제대로 된 부모를 겪은 적도 없고, 부부의 삶을 지켜본 적도 없었다. 그래서 결혼은 미지의 영역이자 금단의 구역이었다. 그러고도 굳이 독신을 고집하는 이유를 들자면 나라가 만든 법적 제도에 남녀의 역할을 구분당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결혼이 곧 행복이라는 생각도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이건…….”
혹시 도준이 이곳에 새로운 플라워 숍을 오픈한 건지 착각이 일 정도였다. 꽃을 잘 모르는 소율도 이건 장미고, 저건 튤립인 건 알았다. 그 외에도 노란 메리골드, 색색의 수국, 팬지, 게다가 그녀의 얼굴만 한 해바라기도 눈에 띄었다.
“혹시…… 화훼 사업이라도 시작하시나요?”
소율은 얼떨떨한 기분을 감추지 못한 채 물었다. 그러자 도준은 자랑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그녀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런 쪽까지 손대면 무슨 욕을 얼마나 먹으려고.”
“그럼 이 많은 꽃은 왜 준비하신 거죠?”
“내가 물었잖아요. 무슨 꽃 좋아하냐고. 그런데 대답이 없기에 뭘 좋아할지 몰라서 일단 닥치는 대로 준비했어요. 이렇게 많으면 그중에 하나 정도는 좋아하는 꽃이 있겠지 싶어서.”
미친놈. 그 단어가 입 끝에서 맴돌았지만 소율은 꿀꺽 삼켰다. 이 많은 꽃들이 자기 한 명을 위해 희생되었다고 생각하면 정말 아깝기 그지없었다.
“죄송하지만…….”
거기까지 말한 소율은 다시 생각을 했다. 만약 이대로 이 꽃을 거절한다면 쓰레기통으로 직행할지도 모른다. 그건 너무 큰 낭비였다. 분명히 부담스러웠지만 이런 낭비에 동조하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많은 꽃은 제게 필요 없어요.”
“어…… 그럼 이 많은 걸 어쩌지. 버려야 하나.”
“대신에!”
혹시나가 역시나였다. 그래서 소율은 얼른 다음 얘기를 이어 갔다.
“굳이 제게 꽃을 주고 싶다면 이 꽃들은 보육원이나 양로원에 보내 주세요. 절대 버리시지 말고요. 저는…….”
발을 디딜 틈도 없이 꽃으로 가득한 공간으로 다가가며 소율은 메리골드 한 송이를 뽑아 들었다.
“이 한 송이면 충분해요.”
이런 식으로 도준에게 무언가를 받을 생각은 없었지만 꽃 한 송이 정도는 괜찮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런 소율을 도준은 마음에서 우러나는 흐뭇함을 미소로 표현했다. 아마도 자신이 선택한 여자는 아주 똑 부러지면서도 정이 많은 여자인 거 같았다.
방을 가득 메웠던 꽃들은 호텔 직원들의 손길에 일사천리로 사라져 갔다. 그제야 마음이 한결 놓인 소율은 옅은 한숨을 뱉었다.
“그럼 이제 식사를 해 볼까. 소율 씨는 뭐가 좋죠?”
“식사보다 저희의 현실에 대해 구체적인 이야기를 시작하면 안 될까요?”
“그래요. 그것도 일단은 중요하죠. 하지만 난 지금까지 일하느라 제대로 된 식사도 못 했거든. 될 수 있다면 저녁은 챙겨 먹고 싶은 기분인데.”
그렇게 말한 도준은 인터폰 근처로 다가갔다. 그의 입가에는 여전히 여유로운 미소가 존재했다. 소율에게 그 모습은 무척이나 얄밉게만 보였다.
“그럼 식사는 남도준 이사님만 하시는 걸로 하세요. 저는 식욕이 없어서요.”
“식욕이 없어도 일단 먹어야 하지 않겠어요. 건강한 육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들고, 무엇보다 건강한 아이가 태어나죠. 지금 소율 씨는 너무 마른 거 같아.”
“옷을 이렇게 입어서 그래요. 전 평균 체중이에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요즘 들어 스트레스 때문에 살이 부쩍 빠진 참이었다. 그녀 역시 은근히 신경 쓰고 있던 점을 지적당하자 저도 모르게 욱하고 말았다.
“일단 보기에 말라 보이니까 하는 말입니다. 아무튼, 식욕이 없다면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걸 준비하도록 하죠. 특별히 가리거나 먹으면 안 되는 음식 있어요?”
“딱히 조심해야 할 음식은 없어요. 가리는 것도 없고요. 제가 먹기 싫다고 다시 대답드려도 계속 권하실 생각인가요?”
“그거야, 물론. 아니면 종류별로 하나씩 시켜 두는 방법도 있죠. 그중에 하나는 먹고 싶을 수도 있잖아.”
결국은 도준의 뜻대로 일이 흘러간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소율은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요, 알겠어요. 그럼 저는 클럽샌드위치로 할게요.”
인터폰을 든 도준은 자신이 먹을 갈비찜 정식과 클럽샌드위치를 주문하고서 전화를 끊었다.
“자, 그럼. 식사가 올 동안에 우리 이야기를 시작해 볼까요.”
그렇게 말한 도준은 가벼운 걸음으로 소파를 향해 다가갔다. 금세 자리를 잡고 앉은 그는 우아한 몸짓으로 다리를 꼬았다. 하지만 소율은 그런 그를 지켜보며 얘기를 꺼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릴게요.”
“좋습니다. 나도 변화구보다는 직구가 좋거든요. 어렵게 에둘러 표현할 필요 없이 단도직입적인 대화를 해 보죠. 일단 앉아요. 올려다보려니 고개가 아프네.”
앉아야 할 필요성은 느끼지 못했지만 굳이 거절한 이유도 없기에 소율은 도준의 맞은편에 앉았다. 등을 꼿꼿하게 세운 소율은 안경을 고쳐 썼다.
“일단 말씀드릴게요. 저는 방금 전 그 화훼 농장이랄지…… 꽃밭 같은 이벤트는 필요 없어요. 그런 식으로 관계를 포장하려는 것도 좋아하지도 않고요. 그러니 삼가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음, 의외네요. 일반적으로 여자들은…….”
“그 섣부른 일반론에 저를 끼워 넣지 않았으면 해서 드리는 말씀이에요.”
속사포처럼 내뱉는 소율의 말들에 도준은 조금도 휩쓸리지 않았다. 그는 어깨만 한 번 으쓱이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소율 씨는 특별한 여자란 걸 잠시 잊고 있었군요. 알겠어요. 앞으로는 주의하도록 하죠. 당신이 싫다면 정말 싫은 거고, 좋다면 좋은 걸로.”
도준이 납득하는 부분이 어쩐지 그녀가 원하는 바와 핀트가 맞지 않는 것 같았지만 일단은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그래서 소율은 다시 얘기를 이어 갔다.
“아무튼, 지금 저희의 문제는 다른 게 아니라 이 아이예요.”
“잠시, 잠시만요.”
소율의 얘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도준이 손을 들어 올리더니 그녀의 말을 막았다. 그리고 몇 번 고개를 갸웃하더니 더없이 해맑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무리 그래도 문제는 아니죠.”
느닷없는 지적에 소율은 그제야 자신의 말을 곱씹어 보았다. 그러곤 잠시 후 아차 싶은 표정을 지었다. 그런 그녀를 보며 도준은 괜찮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씨익 웃어 보였다.
“이해합니다.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었겠죠. 하지만 앞으로 우리 둘 다 주의해서 말하도록 합시다. 난 이 아이가 뜻밖이긴 해도 문제라고 생각하진 않으니까.”
지금까지 지켜본 도준의 태도와 행동은 생각도 못 한 것들이었다. 그라면 당연히 이 상황을 ‘사고’나 ‘문제’ 정도로 인식할 거라 짐작했기 때문이다. 그녀 스스로도 무의식중에 그렇게 말하고 말 정도니까.
“아…….”
느닷없이 드러난 도준의 의외의 모습에 소율은 가슴이 술렁이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하지만 짧게 내뱉은 한숨과 함께 그런 생각들은 곧 날아가 버렸다.
“제 단어 선택이 적절하지 못했네요. 앞으로 아이를 위해서라도 조심하도록 하겠습니다.”
“한소율 씨는 볼수록 참…….”
거기까지 말한 도준은 잠시 생각에 빠졌다. 소율을 표현하기에 알맞은 단어가 생각날 듯 말 듯 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남들이 보기에도 충분히 미인이고 능력도 탁월했다. 조금 톡 쏘는 느낌이 있긴 하지만 때때로 그런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순수하네요.”
“지금 저한테 말씀하시는 건가요? 순수하다고?”
“그래요. 내가 느끼는 한소율 씨는 순수한 거 같아. 좋게 말하면 원석이지만 나쁘게 말하면 바위? 자신이 가진 본질을 숨기지 못하는 거지. 아, 본질이라는 건 단어 그대로의 뜻이니까 곡해해서 듣지 말아요.”
“본질…….”
스스로도 깨닫지 못하는 것을, 남이나 다름없는 도준이 알아챈다는 것에 소율은 얼떨떨한 기분이 들었다.
“저를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소율은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리고 곧 고개를 들어 도준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사님께서도 저를 높게 평가해 주시니 드리는 말씀이지만. 아이에 대한 양육권은 제게 일임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저는 결혼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에요. 가정에 대해서 아는 것도 없고 느껴 본 적도 없어요. 그러니 좋은 아내가 되지 못할 거예요. 하지만 아이는 포기할 생각이 없어요. 제가 가지지 못했던 것들을 아이를 위해 해 주고 싶어요. 물론, 지금 당장 일자리를 잃기는 했지만…….”
그때였다. 마치 타이밍을 노린 듯 객실의 인터폰이 울렸다. 소율의 얘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도준은 자리에서 일어서 문을 열었다. 호텔의 직원으로 보이는 남자가 트레이를 밀며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테이블 위에 음식을 세팅하더니 고개를 살짝 숙이고서 다시 방을 나섰다.
“일단 식사부터 하죠.”
그렇게 말한 도준은 먼저 의자에 앉았다. 소율은 마지못해 소파에서 일어서 테이블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좀 전과 마찬가지로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잠시 얘기가 끊어졌네요. 다시 말씀드릴게요. 저는…….”
“소율 씨도 식사 전일 것 같은데 먹으면서 얘기해요. 나 어디 도망 안 가니까.”
도준은 클럽샌드위치가 놓인 그릇을 그녀의 앞으로 밀어 주었다. 딱히 입맛이 당기지는 않았기에 소율은 그저 한숨만 쉬었다. 왠지 이 상황에 그녀만 안달하고 있는 것 같아서 마음이 불편했다.
“……지금까지 제가 벌어들인 돈은 대부분 저축했어요. 저는 과소비할 곳도 딱히 없었고요. 그러니 아이를 키울 수 있는 자금은 충분히 있어요. 그 점은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러니까 애초에 말씀드린 대로 아이는 제가 키우는 방향으로 결정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저는 이미 이 아이에게 최선을 다할 마음을 먹었어요.”
“한소율 씨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충분히 알았어요. 그러니 일단 식사부터 들어요. 입맛이 없다고는 했지만 잘 먹어야 아이도 건강하게 크죠.”
도준은 포크와 나이프로 클럽샌드위치를 들어 올렸다. 그것을 접시 위에 두고서 한입 크기로 먹기 좋게 잘랐다. 그리고 곁들여 나온 감자튀김도 몇 개 올려서 그 접시를 소율의 앞에 놓았다.
“먹어요. 그러면 나도 얘기를 시작할 테니까.”
도준은 진심으로 소율이 식사하기를 원하는 거 같았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포크를 들어 감자튀김 하나를 찍었다. 그리고 입으로 가져갔다. 짭짤하면서 고소한 맛이 여느 감자튀김과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이어서 소율은 한입 크기로 잘린 샌드위치를 입으로 가져갔다.
테이블 위에 턱을 괸 상태로 그 모습을 바라보던 도준은 이내 입가에 흐뭇한 미소를 띠었다.
“먹는 모습이 보기 좋네요. 흔히 복스럽게 먹는다고 말하잖아요. 소율 씨가 그런 것 같군요. 난 그런 사람이 좋더라. 가끔 보면 정말 맛없게 먹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모습 보면 나도 입맛이 가시거든.”
“그런 소리는 처음 듣네요.”
소율은 덤덤한 표정으로 다시 샌드위치를 들어 한입 베어 물었다. 도준은 여전히 그런 소율은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소율 씨는 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죠?”
느닷없는 질문에 소율은 놀랐다. 덕분에 채 삼키지 못한 샌드위치가 목에 걸려서 저도 모르게 캑 소리를 내고 말았다. 그러자 도준이 금세 물 잔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소율은 허겁지겁 물을 마시며 샌드위치를 억지로 밀어 넣었다. 그러고서 어이없다는 시선으로 도준을 보았다.
“사심 담은 질문 아닙니다. 그저 궁금해서 그래요. 소율 씨는 남자로서, 아이의 아빠로서, 한 사람으로서의 나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이사님께서는…….”
쉬운 듯하면서 어려운 질문이었다. 이제껏 들어 온 풍문에 의하면 도준은 일에 있어서 완벽한 사람이었다. 똑같은 재벌 3세이고 이사였던 단영 건설의 상사를 생각하면 충분히 양반이다. 게다가 흔한 스캔들 한 번 낸 적 없으니 사생활도 깨끗할 것이다. 갑작스러운 임신 소식에도 그는 호의를 표하지 않았던가.
“지금 소율 씨 표정을 보면 내가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닌가 보네요.”
그녀의 표정이 어떤지는 알 길이 없지만 그 말이 사실이었다.
“소율 씨의 성격으로 짐작해 보자면 나를 최악의 인간으로 생각하거나 증오했다면 애초에 임신 사실을 알리지 않았겠죠. 그래서 나는 우리에게 가능성이 열려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저는 우리를 생각한 게 아니에요. 아이를 생각한 거죠. 그리고 고지의 의무가 있다고 생각해서…….”
“맞아요. 고지의 의무. 그걸 왜 생각했죠? 당신은 그냥 조용히 아이를 낳아서 충분히 혼자서 기를 능력이 있었어요.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죠.”
“그래요. 이사님 말이 맞아요. 그럴 수도 있었죠. 제가 이사님을 높게 평가한 면도 없지 않을 거예요. 그래서 아이의 아버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자 생각했는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것과 결혼은 별개의 일이에요. 다시 말씀드리자면 전 좋은 엄마가 될 각오는 했어도 한 사람의 부인으로서는 부적합해요.”
그녀가 어려서는 학업에 쫓겨서, 어른이 돼서는 직장에 쫓겨서 지금껏 제대로 된 사랑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제대로 된 부모를 겪은 적도 없고, 부부의 삶을 지켜본 적도 없었다. 그래서 결혼은 미지의 영역이자 금단의 구역이었다. 그러고도 굳이 독신을 고집하는 이유를 들자면 나라가 만든 법적 제도에 남녀의 역할을 구분당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결혼이 곧 행복이라는 생각도 이해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