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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1. 늑대 우리에 입주





눈이 내리던 11월의 어느 일요일, 연아는 유료 주차장의 금액을 확인했다. 한 시간에 천 원이라. 대충 그 시간이면 볼일을 다 끝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그녀는 곧바로 핸드폰을 들어 ‘27번 이훈’에게 전화를 걸었다.

“응, 쌤이 10분 내로 도착할 것 같은데. 버스 정류장 골목으로 들어가면 되는 거지? 그래, 도착하면 또 전화할게.”

짧은 통화였지만 그새 차가워진 손을 얼른 코트 주머니에 밀어 넣었다.

인문계 고등학교 3학년 담임을 맡고 있는 연아에게 지금 이 시기는 중간고사와 기말고사보다 더 중요했다.

이제 막 수능을 마친 아이들은 점심도 먹지 않고 돌아갔지만, 그녀는 반 아이들이 적어 낸 가채점 점수를 들여다보며 한숨과 함께 걱정을 한 아름 떠안고 있었다.

그 와중에 오피스텔 계약까지. 연아에게 또 다른 걱정거리가 덮쳤다.

“뭐라도 사 들고 갈까?”

11월에 생각 없이 했던 입주는 매년 전세 기간이 끝날 때마다 이사 고민을 불러일으켰다.

졸업한 대학교와 가까운 곳에 독립한 것이 문제였다. 대학교와 가까운 집은 다음 해 발령받은 학교까지 거리가 너무도 멀었다.

이사가 귀찮아 통근을 하며 버틴 게 벌써 3년이었다. 연아는 올해야말로 반드시 집을 옮기리라 결심하고 집주인에게 미리 이사를 통보했다.

하지만 수능이 끝나니 할 일이 산더미였다. 도저히 이사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연아가 재계약을 염두에 두던 때였다.

“고등학생 남자애도 이런 거 잘 먹을까요?”

“애들은 아무거나 다 잘 먹어요.”

현답이었다. 그녀는 흐지부지될 계획에 이정표를 세워 준 제자를 위해 디저트 가게에서 당근 케이크와 마카롱 세트를 집어 계산했다.

‘27번 이훈’은 수재였다. 뉴스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성적이 담긴 가채점표를 내밀었을 때 연아가 놀라지 않은 것은 1년 동안 담임으로 있으면서 겪었던 반복 학습 덕이었다. 이 성적이면 가고 싶은 대학 어디든 갈 수 있으니 지금 녀석은 한창 놀 궁리만 하면 됐다.

그런 제자는 본가로 돌아가는 게 가장 큰 소원인 모양이었다. 수능이 끝나자마자 자취하는 집을 내놓고 싶었던 훈은 담임인 연아가 스쳐 지나가듯 종례 시간에 했던 말을 듣고 따라왔다. 그러더니 지금 자기가 지내는 집의 옵션과 최적의 위치에 대해 설명하고는 주말에 보러 오시라고 초대 아닌 초대까지 했다.

“훈아, 쌤 오피스텔 앞이야. 아, 그래, 알겠어.”

연아는 오피스텔 입구에서 1301호를 호출했다. 출입문이 활짝 열렸다. 고개를 위로 들어 보니 빨간색 불이 들어온 CCTV들이 여러 대 보였다.

보안 좋고.

엘리베이터도 빠르고 넓었다. 출근 시간이 단축될 조건이었다.

연아는 금세 13층에 도착했다. 훈은 미리 제 집 현관문을 열어 고정해 둔 상태였다.

“오셨어요?”

열려 있다고 무작정 들어가기도 애매하고, 그렇다고 열린 문이 있는데도 초인종을 누르기도 뭐했다. 연아가 제자를 소심하게 불러 보려는데 녀석이 얼굴을 쏙 내밀었다.

조금 긴 까만 머리가 흔들리며 훈의 이마를 덮었다. 트레이닝 차림인 그는 뒷머리를 긁적이고는 선생님부터 안으로 들였다.

“형님하고 같이 지내는 거 아녔어?”

훈과 그의 형은 띠 동갑 넘게 나이 차이가 났다. 훈의 형은 연아보다 세 살이나 위였다.

“이걸 같이 지낸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형은 일 있어서 나갔어요.”

“그래? 자, 이거 형님하고 먹어.”

“오. 감사합니다. 천천히 보세요. 궁금하신 것 물어보시고요.”

훈은 덥석 케이크와 마카롱을 받아 들고 주방으로 향했다. 오피스텔은 방 두 개와 거실, 화장실에 베란다까지 양쪽으로 있었다.

“남향이라고 했지?”

“네. 쌤은 분홍색 드실래요?”

“하나 주려고?”

제자는 대답 대신 분홍색 마카롱을 연아에게 건넸다. 웃으며 받아 든 그녀가 마카롱 반을 입에 넣고 오물거리며 질문했다.

“여기 몇 년 됐니?”

“제가 첫 입주니까 2년이요.”

“택배는 어떻게 해?”

“무인 택배함 있어요. 여기 진짜 좋아요. 입주자는 몸만 오면 돼요.”

훈도 연두색 마카롱을 오물거리며 답했다.

연아는 수압체크를 하고 난 뒤 훈과 식탁에 마주 앉아 바퀴벌레의 유무, 관리비, 전기세는 얼마나 나오는지, 난방은 어떤 형식인지, 수도세는 어떻게 체크하는지 등 집과 관련된 여러 가지를 물었다. 훈은 막힘없이 답을 했다.

연아는 고개까지 끄덕이며 집 조건에 아주 만족했다. 이 정도면 원래 살던 오피스텔과 엇비슷한 금액으로 더 만족스러운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내가 당장 여기서 살면 너와 형님은 부모님 계신 곳으로 이사하는 거야?”

“네. 저는 통학하기엔 거리가 멀어서 자취시켜 주신 거라서요. 형은 원래 독립해서 살다가 저 때문에 보호자로 묶인 거라, 아마 거기로 다시 들어가든가 여기 계속 살든가, 알아서 할 거예요.”

“여기 산다고?”

“그게, 여긴 저 혼자 살고 형은 윗집에 살거든요. 그럼 저희 집 계약하시는 거예요?”

“어쩐지 뭔가 허전하더라. 응. 오피스텔 너무 마음에 든다. 게다가 엄청 깔끔하게 썼고.”

“일주일에 두 번 정도 아주머니가 오셔서 그래요.”

가정부 아주머니가 오시든 형제가 쓸데없이 한 오피스텔에 집을 두 채나 쓰든 연아에겐 상관없는 일들이었다.

그녀는 언제 이사하면 좋을지 보기 위해 핸드폰으로 달력을 켰다. 현재 살고 있는 곳의 계약은 일주일이면 끝날 예정이었다.

이사하면 좋은 날 같은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선택지는 다음 주 일요일, 딱 하루뿐이었다.

“다음 주 주말에 들어오고 싶은데 괜찮아?”

“괜찮을 거예요.”

“그래도 이런 건 어른하고 한 번 얘기해 봐야 하니까 형님 연락처 좀 알려 줄래?”

달력이 켜져 있던 화면을 전화 화면으로 넘기고 훈에게 내밀었다. 그러자 지금까지 시원시원하게 답했던 훈이 갑자기 머뭇거렸다. 눈만 굴리며 연락처는 입력하지 않는 모습에 기다리던 연아가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이훈?”

“음, 쌤. 형에겐 제가 말할 테니 저랑 얘기하시면 안 될까요?”

누가 봐도 무언가를 숨기려는 훈의 태도에 그녀의 눈이 가늘게 뜨였다. 1년간 담임으로 연아를 보아 온 훈은 그녀의 이 버릇이 썩 좋은 징조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혹시 어른들께 허락도 받지 않고 일을 벌인 건 아니겠지?”

“그런 건 아니에요. 형도 알았다고 했어요.”

“그래. 네가 그렇게 대책 없는 애는 아니지.”

연아 역시 훈이 무턱대고 집을 넘기기 위해 선생님을 데리고 올 만큼 무모한 성격이 아니란 걸 알고 있었다.

“그럼 무슨 이유라도 있니? 형님이 바쁘셔?”

“네. 그게 저…….”

이유를 말하는 게 아니라, 이유를 만들어 내는 훈이 말을 늘이던 때였다.

둘 사이로 네 자리를 누르는 현관 비밀번호 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등장할 사람은 훈의 가족밖에 없었다.

훈이 놀라 동작을 멈춘 사이, 연아는 인사하기 위해 서둘러 거실로 걸음을 옮겼다.

막 정장 구두를 벗은 도운과 어색한 자세로 쭈뼛거리며 나타난 연아의 눈이 마주쳤다.

“…….”

분명 서로를 보면서도 연아와 도운은 인사조차 나누지 못했다.

연아는 할 말을 잃은 채 도운의 존재감에 그대로 굳었고, 도운은 뒷덜미와 팔뚝에 돋아난 소름을 느끼며 입술을 깨물었다.

검푸른빛이 감도는 도운의 눈동자가 연아를 담았다.

울 것처럼 잠긴 눈동자, 유난히 가는 손가락, 새하얀 피부 등 그녀의 객관적 모습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연아의 존재 자체가 도운의 심장을 누르고 뇌에 충격을 줬다.

그는 본능적으로 알아보았다. 저 여자가, 잃어버린 내 각인 상대였다.

그녀 역시 도운의 긴 속눈썹, 높이 솟은 키, 벌어진 어깨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현기증과 더불어 다리의 힘마저 풀릴 뻔했다. 도운의 존재감은 인간의 피가 반이나 섞인 그녀도 알 수 있을 만큼 압도적이었다.

그녀도 본능적으로 느꼈다. 저 남자는, 수인 중에서도 우위의 포식자였다.

서로 말이 없다는 걸 먼저 깨달은 쪽은 연아였다. 둘 사이의 분위기가 평범한 것과는 거리가 너무 멀어서, 이런 상황을 예상했던 훈마저도 같이 굳어 있다가 헛기침을 내뱉었다.

연아의 시선이 도움을 청하듯 제자에게 향했다. 훈은 목을 뻣뻣하게 세운 채 떨고 있는 연아의 손을 발견했다.

“쌤.”

일단 훈이 도운과 그녀의 사이를 가로막았다. 녀석이 미간을 긁적이며 걱정스럽게 연아를 내려다봤다. 떨리는 손을 한 번 쥐었다 핀 연아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늦은 심호흡을 했다.

“이훈, 비켜.”

진정하려는 노력이 무색하게도, 훈을 향한 도운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연아의 몸이 다시 삐걱거렸다.

도운의 음성은 평소보다 훨씬 낮고 위험했다. 훈은 어쩔 줄 모르고 어정쩡하게 자리를 지켰다. 연아가 겨우 말문을 열었다.

“형님……과 인사를 해야 할 것 같은데.”

“쌤, 괜찮으세요?”

“으응.”

스스로도 괜찮은지 확신이 서지 않았지만 이대로 계속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훈이 슬그머니 연아의 시야 밖으로 사라졌다. 그녀를 굳게 만든 존재가 눈에 들어왔다. 연아의 손에 땀이 배어 나왔다.

“안녕하세요, 훈이 형님 되시죠? 훈이 담임 차연아라고 합니다.”

목소리 끝이 살짝 떨렸지만 그런대로 웃으며 잘 넘겼다. 억지로 끌어 올린 입꼬리가 경련하진 않는지 연아의 촉각이 곤두섰다. 도운은 서 있는 자체만으로 그녀를 압도했다.

두려움도 두려움이었지만, 거기에 연아를 향한 그의 시선이 숨 막히게 만들었다. 뭐라 형용할 수 없는 눈빛이 연아에게 달라붙어 떼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도운은 그녀 인사에 대답도 하지 않았다.

“훈이가 늑대 수인인 건 알고 있었는데, 막상 다른 늑대 수인을 보니 몸에 힘이 들어갔네요. 긴장했나 봐요. 하하하…….”

결국 계속 말을 이은 쪽은 어느새 약자가 된 연아였다. 하지만 어색한 웃음을 흘려도 따라 웃기는커녕 집요한 시선만 이어졌다. 연아의 입이 바싹바싹 말라 갔다.

연아는 방금까지 입주하려던 계획을 바로 바꿨다. 이런 이웃이 윗집에 산다니. 알면서 굳이 이웃이 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한 해가 다 끝나 가는데 이제야 뵙네요. 어쨌든 저는 여기 담임이 아니라 입주자로 왔는데, 이만 가 봐야 할 듯해요.”

아무 말도 들리지 않는 것처럼 연아만 바라보던 도운이 ‘입주’라는 단어가 들리자 낯빛을 바꿨다.

그건 훈도 마찬가지였다. 선생님이 주저리주저리 혼자 떠드는 것을 보다 못해 재차 끼어들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방금까지만 해도 적극적으로 집에 관심을 보이던 연아가 빠르게 자리를 피하려 했다.

“쌤. 찾으시던 어, 어른 여기 있는데 얘기라도 더 해 보시지…….”

“어, 아냐. 집은 충분히 봤으니까 오늘은 이만하고, 내일 학교에서 얘기하자.”

이제 다음 주 일요일 이사를 얘기하던 연아는 없었다. 오로지 여기서 도망가고 싶은 먹이사슬 하위 층이 있을 뿐이었다.

훈이 도운에게 열심히 눈치를 줬지만, 형에게 동생은 안중에 없었다. 그사이 연아가 고개까지 꾸벅 숙이고 도운을 빗겨 갔다.

“쌤!”

“내일 봐, 훈아. 안녕히 계세요!”

연아가 급히 운동화에 발을 구겨 넣었다. 그 어느 때보다 현관문이 큰 소리로 열리고 닫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