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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연아는 1층에 다다라서야 제대로 정신을 차렸다. 처음부터 마음에 들었던 위치와 보안이 아쉬웠다. 그렇다고 돌아갈 생각은 없었다.

“계약 일 년 더 연장해야겠네.”

어차피 이렇게 될 거였나 싶다. 연아는 핸드폰을 들어 [사장님]을 찾았다. 현재 집주인이었다.

“아, 네, 사장님. 607호입니다.”

오늘도 그녀는 연아를 기다리게 하지 않았다. 연아는 대충 발을 구겨 넣었던 운동화를 제대로 신으며 통화했다. 발끝을 통통 바닥에 치니 뒤꿈치가 쏙 들어갔다.

― 그렇지 않아도 전화하려 했는데, 마침 잘했어요. 선생님 다음 주 일요일 방 빼는 거 맞죠? 방금 그 집이 팔렸어. 일요일에 내가 갈 테니 계약서 정리해요. 몇 시가 편해요?

아흐. 연아는 차마 소리는 내지 못하고 머리를 쥐어 잡았다. 집주인에게 이사하겠다고 한 한 달 전 제 입을 틀어막고 싶었다.

“오후 아무 때나 연락 주시고 오세요…….”

― 그래요, 그때 봐요!

집주인은 금세 나간 집에 기분이 상당히 좋아 보였다. 연아는 힘없이 핸드폰을 내렸다. 고개를 드니 빨간 불이 들어오는 CCTV가 보였다.

연아는 일단 여기서 벗어나야지 싶어 터벅터벅 골목으로 나왔다.

“유료 주차장이 천 원이었지? 나온 김에 이쪽 방이나 좀 봐야겠네.”

추운 겨울에 돌아다니는 건 딱 질색이었지만, 목마른 사람은 자신이니 우물을 파는 것도 제 몫이었다. 연아는 눈에 띄는 노란 간판의 부동산 쪽으로 방향을 바꿨다.

연아가 힐끔힐끔 불 켜진 부동산 안을 들여다보았다. 사람도 보이지 않고 문도 열리지 않았다. 화장실에라도 가셨나 싶어 기다려 보려는데, 방금 나온 오피스텔 쪽에서 한 남자가 걸어왔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절대 잊을 수 없는 존재감을 내뿜던 남자다. 그 사람, 아니 그 늑대는 연아가 의심할 여지도 없게 묵직하지만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누가 봐도 부동산 또는 그녀에게 볼 일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인사는 아까 했지만 또 해야겠지……?

“아, 안녕하세요?”

그녀의 목소리에 망설임이 드러났다. 도운은 인사를 듣자마자 뚝 발걸음을 멈췄다. 그저 그곳에서 연아를 바라보았다.

연아는 여전히 그 시선이 부담스러웠지만 포식자 늑대들의 특성이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 집요함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제가 경황이 없어 손님을 무례하게 대했습니다.”

“아…….”

“얘기를 나누고 싶은데, 시간 괜찮으십니까?”

이런, 차연아. 그녀는 무심코 흔들린 자신의 가벼움을 한탄했다.

도운의 목소리는 훈을 대할 때와 연아를 대할 때 확연히 달랐다. 사무적이면서도 예의 차린 음성은 상당히 아니, 무척이나 매력 있었다. 덕분에 그녀는 냉큼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어떤 얘기를 하시려고 그러신지. 보시다시피 제가 이 근처에 집을 구해야 해서요.”

그래도 무서운 건 무서운 거다. 아까처럼 몸이 경직된 연아는 한 손으로 부동산 안을 가리키며 타당한 이유를 댔다.

“사람이 없는 모양인데.”

“그래서 기다리고 있어요.”

“훈이 집에서 기다리시죠. 점심시간이라 아마 식사하러 가셨을 겁니다.”

사양하겠습니다, 사양할게요, 사양하고 싶어요.

연아는 차마 그렇게 말하지 못하고 어색하게 웃으며 눈을 굴렸다. 눈치가 조금이라도 있으면 돌아가 주련만, 애초에 그녀를 찾으려고 나온 이 늑대에게는 그런 게 없었다. 그는 눈치 볼 필요가 없는 위치였다. 이 순간 연아는 태생에 따라 결정되는 먹이사슬이 너무 억울했다.

“훈이 말로는 어른과 얘기하고 싶다 하셨다던데.”

“하하. 네에. 그랬죠.”

“들어가시죠.”

네에. 그렇게 권하시니, 저는 따라 가는 수밖에요.

하아. 연아는 벌써 두 번째 한숨을 삼켰다.

도운은 가는 내내 연아와 대화를 나누던 거리만큼 떨어져서 걸었다. 그녀가 겁을 먹었다는 걸 상기해 내고 나름대로 배려한 것이다. 안전거리였다. 그는 훈의 집에 데려가지 않는 선택지는 고려하지 않았다.

도운은 연아와 떨어져 걷는 동안 동생과 했던 대화를 떠올렸다. 훈이 3월에 말했던 담임이 자신이 찾던 각인 상대였을 줄이야.



‘미쳤어. 인간 피가 섞인 수인한테 대놓고 아우라를 풍기면 어떡해? 쌤 갔잖아! 아 몰라, 형이 책임지고 내 집 팔아 줘.’

‘……인간 피가 섞였다고?’

‘뭐야? 정신없는 것 같더니 진짜 그랬던 거야? 냄새 못 맡았어?’



엘리베이터에 들어서니, 잠시 제 기능을 하지 못했던 도운의 후각이 그제야 연아의 향을 맡았다. 확실히 반(半)수인일 때 맡아지는 향이었다. 그 냄새를 맡자 도운의 피가 빠르게 돌았다. 각인 상대에게 느껴지는 조건 반사였다.

그는 엘리베이터가 열리자마자 동생의 집을 제 집처럼 들어갔다. 그 뒤를 어기적어기적 따라간 연아가 다시 방문한 제자 집에 멋쩍게 발을 들여놓았다.

“쌤. 역시 우리 집이 좋겠죠?”

“아하하…….”

훈은 기다렸다는 듯 연아를 반겨 주었다. 같은 늑대여도 이렇게 다를 수 있나 생각하던 그녀는 뒤늦게 도운의 위압감이 사라진 걸 알아차렸다.

연아가 힐끔 도운을 올려 봤다. 그대로 눈이 마주쳤다. 잔뜩 당황한 연아는 고개를 돌려 버렸다. 여유롭게 행동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형이 반수인은 처음이라 그래요. 이제 괜찮으실 거예요.”

“아, 그러시구나.”

훈이 먼저 나서서 형을 변호했다. 사실 도운은 자신의 힘을 과시하려 해 본 적이 없었다. 오히려 숨기는 게 일상이었다. 수인이 힘을 숨기지 않고 지내면 그들이야 편하겠지만, 인간은 스스로 이유도 모른 채 수인들을 꺼렸다. 보이지 않는 힘의 작용이었다.

그런데 도운은 연아를 본 순간 무의식적으로 힘을 내보였다. 마치 자신의 강한 힘으로 환심을 사려는 짐승처럼 행동한 것이다. 이제까지 없던 일이었다.

“그런데 쌤은 수인하고 인간하고 구분 못 하시면서 형은 딱 알아보네요.”

훈이 신기하다는 듯 말했다. 보통 모든 수인은 상대방이 인간인지, 수인인지 단번에 알아볼 수 있지만 부친이 평범한 인간인 연아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사항이었다. 훈이 늑대 수인이란 걸 알게 된 것도 반년이나 지나서였다.

“일단 네가 늑대인 것도 알고 있었고, 워낙 형님이…….”

“실례했습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연아가 손을 내저었다. 그래도 무서웠던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존재감은 여전했지만 그녀를 두렵게 만들던 힘이 사라지자 손도 떨리지 않았고 침이 마르지도 않았다. 둘을 번갈아 보던 훈도 한시름 놓았다.

“그럼 다음 주 이사 오시는 거죠?”

“으응?”

“아니에요?”

훈의 눈썹이 축 내려갔다. 연아는 풀 죽은 제자의 모습에 동정심이 일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훈의 옆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늑대가 시야에 들어찼다. 역시나 그 부동산에 가 보는 게 좋을 듯싶었다.

연아의 그런 생각을 읽은 건지 상대적으로 조용했던 도운이 입을 열었다.

“저 때문에 불편하신 거라면 조심하겠습니다.”

“네? 아뇨, 그게 아니라.”

“그럼 집이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연아가 다시 어색하게 시선을 피했다. 훈의 형님은 자신보다 3살이 많다고 기억하는데, 말투는 30년이나 더 산 것 같은데다 불편함은 300년 이상 산 선조를 만난 것 같았다.

“어차피 앞집도 아니고 위아래라 마주칠 일도 없어요. 저도 형이 이렇게 찾아오는 경우가 아니면 못 만나요.”

“나는 형님 때문이 아니라.”

“다행입니다.”

미치겠네.

연아는 집의 하자를 찾으려 했지만 마주 앉은 두 사내외엔 발견할 만한 게 없었다.

“동생이 수능만 끝나면 바로 본가로 가고 싶어 했습니다. 혹시 마음에 걸리는 다른 거라도 있으신지.”

“……아니요.”

연아는 눈앞에 있는 당신이 걸린다곤 차마 말할 수 없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마음에 들어 당장 다음 주 일요일에 입주하고 싶었던 집이었다. 형제가 이렇게 설득하는데, 이 정도면 넘어가지 않는 것도 재주였다.

그래, 살면서 앞집도 아니고 윗집을 얼마나 자주 만나랴.

결국 연아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고갯짓에 환하게 웃는 제자를 보니 그래도 좋은 게 좋은 건가 싶다.

“쌤, 감사해요. 엄마한테 얼른 알려야겠다.”

“어?”

“저 잠시 통화 좀 하고 올게요!”

훈이 핸드폰을 들고 방으로 쪼르르 사라졌다. 남은 두 수인 사이에 두려움 대신 어색함이 내려앉았다. 연아는 무슨 말을 먼저 꺼내야하나 고민하다 그냥 본분에 맞게 입주자다운 질문이나 했다.

“원래 계약은 언제까지인가요?”

“내년 2월까지입니다.”

“아, 그러면 집주인에게 연락해서 옮겨야겠네요.”

“네.”

궁금증이 풀리자 다시 어색해졌다. 연아 입술이 저절로 말려 들어갔다.

반면 도운은 어색함을 느낄 새도 없이 앞에 있는 여자를 들여다보느라 바빴다. 그는 그녀가 어쩔 줄 몰라하는 것과 자신 때문에 계약을 망설이는 것도 다 눈치채고 있었다.

물론 도운은 모르는 척 무시했다. 지금도 연아는 무슨 말을 할까 여러 주제를 떠올렸고, 도운은 표정만으로 그녀의 고민을 읽었다.

“훈이는 왜 집에 들어가고 싶어 해요? 보통 이 나이 애들은 독립을 원하던데.”

꽤 자연스러웠다. 뿌듯함에 올라간 연아의 입꼬리가 도운의 눈에 잡혔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따라서 입꼬리를 올렸다. 연아가 그의 미소를 발견했다.

“토토랑 차차때문입니다.”

“……토토? 차차?”

연아의 대답이 조금 늦어졌다. 저 얼굴이 웃기까지 하니 심장에 너무 무리였다.

“알래스칸 맬러뮤트 두 마리 이름입니다.”

개 때문에 저렇게 집에 가고 싶어 했구나.

연아는 가끔씩 저보다 큰 남학생들에게서 이런 귀여운 면을 발견할 때가 좋았다. 그 나이로 보이는 모습이 얼마나 마음에 드는지.

“이름은 훈이가 지었나요?”

“아버지께서 지으셨습니다.”

토토랑 차차라. 훈의 아버지라면 같은 늑대일 텐데. 연아는 뵙지도 못한 학부모님 이미지가 상상이 갔다.

“저도 선생님께 질문 드려도 되겠습니까?”

“네? 네.”

대화를 나눌 거리가 있다면 환영이었다. 연아는 의식적으로 웃으며 대답했다.

“수인을 못 알아본다고 하셨죠?”

“네. 저도 그렇고 반수인은 다 그렇다더라고요.”

“저한테도 아무 느낌도 받지 못하셨습니까?”

“아니요. 형님 분은 워낙, 음, 그러셔서…….”

연아는 대답을 확실하게 매듭짓지 못했지만 그 어떤 말보다 뜻을 잘 전달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상대방이 원한 대답은 이 방향이 아니었나 보다.

“두려움 말고는 없다?”

그의 되묻는 물음에서 묘하게 불만이 느껴졌다.

당황한 연아는 정해져 있는 답이라도 있나 싶어 도운을 바라봤지만 짚이는 구석이 없었다. 게다가 그녀는 두려움 말고는 그의 첫인상이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다른 뭘 느꼈어야 했나?

“……아마도?”

마침 훈이 방에서 나왔다. 도운의 시선은 여전히 연아에게만 못 박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