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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형, 나 이사 토요일에 하기로 했어.”

“그래.”

도운의 반응은 무심하기만 했다. 형을 몰래 흘긴 훈이 도로 연아의 앞에 앉았다. 훈이 등장하자 눈에 띄게 안도하는 연아의 모습이 딱 늑대 앞에 가져다 놓은 토끼였다.

“쌤, 집주인하고는 제가 연락할게요. 입주하시는 날 약속 잡으시는 게 낫겠죠?”

“그러자. 늦은 오후쯤이 편할 것 같아.”

“네! 귀찮으실 일 없게 마무리까지 해 놓을게요.”

“응. 훈이야 뭐, 워낙 똑똑하니까.”

연아가 씩 웃으며 제자의 머리칼을 흩트려 놨다. 결 좋은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에 얽혔다. 훈은 익숙한 듯 연아의 손길을 받아 내고는 머리를 대충 정리했다.

“희한해요.”

“뭐가?”

“여태까지 못 물어봤는데, 쌤은 여우인데 왜 거부감이 안 들까요?”

“나 너한테 여우라고 한 적 없는데?”

연아의 장난기 어린 대답에 훈의 눈이 크게 뜨였다.

“하지만 늑대랑 여우가 수인 중에 제일 많은데 쌤한테 동족 냄새는 안 나고, 결정적으로 여우 냄새가 났었는데요?”

연아는 어깨만 으쓱해 보였다. 수인냄새를 맡지 못하는 연아는 제 냄새도, 제자의 늑대 냄새도 알 수 없었다. 그 덕에 처음부터 거부감도 들지 않았다.

“지금도 나?”

“그건 아닌데……. 그럼 여우가 아니라고요? 전 여태까지 여우라고 생각했어요!”

“아니라고 한 적도 없어, 훈아.”

훈의 미간이 잔뜩 모였다. 그게 무척 불만스러워 보였다. 훈의 입장에선 연아가 말장난하는 걸로밖에 보이지 않을 테지만 그렇다고 거짓도 아니었다. 그녀는 녀석의 반응을 일일이 신경 쓰지 않았다.

연아는 눈을 옆으로 굴려 가만히 있는 학부형을 살폈다. 훈과 스스럼없이 지내는 모습을 보인 게 괜히 민망했다. 그녀가 벽시계를 한 번 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만 가 보겠습니다.”

“가시게요?”

“응. 주차장 요금이 계속 오르고 있어. 너 주려고 마카롱 사 오느라 도로 너머에 주차했거든.”

“아아. 아무튼 여우 맞죠, 그러면?”

궁금한 걸 못 참는 제자의 성격에 연아는 재차 녀석의 머리를 헝클어트리고 벗어 놓은 코트를 챙겨 들었다.

“또 대답 안 하셔.”

“다음에 뵙겠습니다. 오늘 감사했습니다.”

이번엔 제대로 운동화를 신으며 인사했다. 훈은 다 들리게 툴툴대면서도 벌떡 일어나 현관까지 배웅을 했고, 연아는 훈의 옆에 서 있는 도운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는 연아가 현관문 잠금장치를 누를 때까지도 묵묵히 서 있기만 했다.

그녀는 이제 정말 이 우리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을 뗐다. 그제야 도운이 입을 열었다.

“데려다드리겠습니다.”

단 한 마디를 했을 뿐이지만 연아는 격하게 거절을 하고 잽싸게 모습을 감췄다.

현관문이 큰 소리를 내며 닫혔다. 그 앞에서 멍하니 있던 도운이 아무 신발이나 신으려 했다. 훈이 뒤에서 도운의 어깨를 잡아 돌렸다.

무시할 수 없는 힘에 도운의 몸이 반 바퀴쯤 돌자, 그곳에는 누구보다 놀란 동생이 보였다. 훈이 경악하며 물었다.

“설마 따라가려고?”

형이? 이도운이? 여자를 데려다주려고? 우리 담임을 따라가겠다고?

훈의 목소리가 갈라질 정도로 올라가 버렸다. 도운이 자신의 발을 내려다봤다. 슬리퍼를 신고 현관문을 열기 직전이었다.

“내가 왜 나가려고 하지?”

“형이 그걸 모르면 어떻게 해? 대체 주차장에 데려다주겠다는 말은 왜 한 거야?”

그래. 그렇지 않아도 뱉어 놓고 바로 후회한 말이었다. 연아가 사라지는 순간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에 저도 모르게 그녀를 따라가려 했다.

확실히 지금 도운의 모습은 이질감이 들 만큼 낯설었다.

“미쳤군.”

“응. 오늘 형 좀 이상해.”

“……네 졸업식까지 얼마나 남았지?”

“갑자기 무슨 소리…… 설마?”

도운은 말없이 부엌으로 가 얼음을 와그작와그작 씹어 댔다. 처참하게 부서지는 얼음 조각이 입 안을 얼게 했다.

“이상하다. 형은 이미 각인이 발현됐는데…….”

도운은 여덟 살 이후로 지독한 공허함에 시달려 왔다. 때때로 미치기 직전까지 가기도 했다. 얼굴도 모르는 각인 상대 때문이었다. 성인이 되기 전엔 통제가 되지 않는 감정에 더욱 힘들었다. 지금처럼 멀쩡한 겉모습은 끝없는 인내로 인한 결과였다.

그런데 예고도 없이 마주쳐 버린 연아가 도운의 피를 빠르게 돌게 했다. 도운은 간절하게 느껴지는 갈증에 목이 탔다.

“아니지? 막 우리 쌤을 보고 첫눈에 반했다거나, 뭐 그런 말도 안 되는 그런 거?”

차연아는 24년이 넘는 이도운의 노력을 허무히 무너트렸다.

“형?”

“그 여자, 백여우야.”

도운은 그 한마디로 자신에게 일어난 낯선 변화를 설명했다. 훈이 입을 떡하니 벌렸다. 녀석은 제 머리를 쥐어박았다.



* * *



일주일이 지났다.

3년이나 머무른 집에선 1인 가구 주제에 짐이 한가득 나왔다. 이삿짐센터에서 그 짐을 옮기는 사이 그녀는 두 개의 계약을 깔끔히 마무리 지었다.

― 쌤, 잘 들어가셨어요?

“응. 안 그래도 연락하려고 했는데.”

― 네에. 저, 집 괜찮죠? 어디 불편한 건 없으세요?

“아직. 너는 집에 가니까 좋아?”

― …….

연아는 식용유를 꺼내곤 혹시나 새지는 않았는지 확인했다. 스피커폰으로 둔 핸드폰이 잠시 침묵했다.

― 네. 집 가니까 좋아요. 지금은 형네 놀러왔어요.

그녀는 찬장에 그 식용유를 올리다 고개를 젖혀 위를 바라봤다. 천장에 달린 조명에 눈이 부셨다.

“아, 그래?”

소금은 여기, 후추도 여기. 새로운 부엌 찬장이 하나하나 꽉 차고 있었다.

“그럼 형이랑 잘 놀고. 내일 보자.”

― 아……. 네. 쉬세요.

“오냐.”

간단한 통화 후 연아가 전화를 끊었다. 핸드폰으로 노래를 들으며 정리를 하려는데 다른 전화가 왔다.

발신인을 본 그녀의 미간이 한껏 모였다. 국제전화가 아닌걸 보니 한국인가 보다. 받을까 말까, 연아는 짧게 고민하고는 결국 전화를 받았다.

“응.”

― 어디야.

귀에 갖다 댄 핸드폰 너머로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다정한 목소리도 아니건만 다정하게 들리게 하는 재주가 있는 상대방은 오늘도 연아의 심장을 덜컹하게 만들었다.

― 차연아.

다시금 연아를 부르는 목소리는 그새 더 낮아졌다. 그의 한숨이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한국 왔네?”

술렁거리는 심정에 비해 나온 대답은 누가 들어도 태연자약했다. 다행이었다.

― 일정이 늦어졌어. 집은 왜 비어 있는 거야?

“이사 간다고 했잖아.”

― ……얼굴 좀 보자.

“나중에. 오늘 짐 정리해야 해서 바빠.”

― 그게 나보다 중요해?

“응. 이제 너보다 이런 게 중요해.”

이사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마구 들었다. 어차피 알려질 곳이지만 그래도 당분간은 피할 수 있으니 시간을 번 셈이었다.

연아가 냉정하게 말한 덕분인지 정적이 흘렀다. 그 틈에 쐐기를 박듯 그녀가 이어 말했다.

“걱정 마. 여우들이 원하는 대로 결혼은 너와 할 거야. 물론 넌 내가 아니라 다른 여우와 하고 싶겠지만.”

― 그게 무슨 소리야? 얼굴 보고 얘기해.

“그래. 근데 내가 보고 싶을 때, 그때 얘기해.”

― 누나.

“누나라고 부르지 마, 한재우.”

연아가 저도 모르게 나온 지친 말투에 스스로 놀랄 때였다. 그녀의 인간보다 예민한 청각이 핸드폰 속 그의 작은 목소리를 잡아냈다. 상대방, 재우의 주변이 부산스러워졌다. 연아가 힘없이 말했다.

“나 좀 그냥 둬.”

― 들었어? 그럼 그냥 기다려. 나보다 중요한 짐 정리나 하면서.

재우가 자신의 수족들에게 연아의 주소를 당장 찾으라고 명령했다. 그의 입술 사이로 비뚤어진 대답이 흘러나왔다.

“……야.”

― 얘네 고생시키는 거 싫으면 누나가 직접 주소 찍어 줘. 나도 누나도 그게 낫잖아?

“누굴 굴리던 알아서 해. 이만 끊는다.”

연아는 그대로 통화를 종료했다. 지금 재우의 기분은 알 바가 아니었다. 그녀에게 급한 건 이 늘어진 짐들을 정리하는 거였고, 그가 찾아오든 말든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기로 했다.

어차피 연아와 평생 마주칠 놈이었다. 이렇게 찾아올 줄도 알고 있었다. 다만 이사 당일일 줄은 몰랐을 뿐이다.

연아의 윗집엔 늑대가 살고 있다. 그녀는 재차 천장을 올려다보며 그 사실을 상기해 냈다. 거기에 한재우까지 생각하니 문득 섬뜩함이 들어 팔뚝을 문질렀다. 왠지 느낌이 영 좋지 않았다.

연아는 잡생각을 떨치기 위해 부산스레 정리했다. 그러다보니 시간은 어느새 7시를 지나가고 있었다. 부엌, 화장실은 대충 마무리됐지만 가장 문제인 옷들이 남아 있었다. 분명 매일매일 입을 옷이 없다고 한탄했었는데 이게 몇 박스인지. 연아는 일단 내일 입을 옷만 걸어 놓고 거실에 몸을 누였다. 온몸이 쑤셨다.

‘아. 저녁은 어쩌지?’

한번 누우니 이대로 잠이 들고 싶었다. 밥 먹는 것도 귀찮았다. 대충 과자로나 때울까 생각하던 중이었다. 현관 호출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연아는 상체를 벌떡 일으켜 인터폰 화면을 바라봤다. 웬 헬멧이 보였다. 한재우는 아니었다. 그 녀석이 헬멧을 쓰고 나타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웠다.

“누구세요?”

― 만리장성입니다.

“네?”

― 만리장성이요. 거기 1301호 아닌가요?

“맞아요. 그런데 만리장성이 어디인지?”

연아의 물음에 헬멧을 쓴 남자는 허둥지둥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만리장성이 뭐지?

때마침 연아의 핸드폰이 울렸다. 훈이었다. 그녀는 아직 꺼지지 않은 인터폰 화면으로 만리장성 헬멧을 지켜보며 전화를 받았다.

“어, 훈아.”

― 쌤! 문 열어 주세요! 만리장성!

“으응? 아, 훈이 네 손님이구나.”

― 중국집이에요. 제가 깜빡하고 1301호라고 얘기해 버렸어요.

“아, 그래. 알겠어.”

― 네에. 죄송해요.

“아냐. 맛있게 먹어.”

연아가 바로 1층 출입문을 열어 주었다. 헬멧을 쓴 남자가 화면 속에서 사라졌다. 그녀도 고개를 돌리려는 순간이었다. 남자를 뒤따라 들어오는 낯익은 형체가 눈에 띄었다.

“이런.”

설마설마하던 한재우였다. 연아는 방금 전 만리장성만큼 당황하다 거실 불부터 소등했다. 그러곤 핸드폰까지 무음으로 돌려 버린 뒤 바닥에 다시 드러누웠다. 더는 피곤하기 싫었다.

연아가 눈을 감았다. 이 와중에도 그가 제게 다가오는 소리가 너무나 익숙했다.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현관 앞에 발걸음이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