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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러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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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1. 충동 — 기약 없는 관계를 시작하다
주말 저녁 10시, 영진은 AMC에서 영화를 보고 가끔씩 들르는 바에 갔다.는 루프탑 라운지 바인데, 윌리스나 존 핸콕 타워에 비하면 어림없지만 야경이 제법 볼 만한 곳이었다.
영진은 바에 앉아 도수가 높지 않은 칵테일을 주문했다. 가볍게 한잔하고 일어날 생각이었다. 일행이 없었고, 몇 번 보지 않은 바텐더와 얘기를 주고받을 만큼 스스럼없는 성격도 아니라 자연스레 휴대폰에 고개를 처박고 있었다.
영진은 포털 사이트 연예란에 유명한 배우와 모 재벌가 3세의 스캔들 기사를 심드렁하게 읽었다. 함께 백화점은 갔지만 사귀는 사이가 아니며, 함께 호텔 수영장에서 단둘이 놀았지만 데이트는 아니란다.
그래, 돈은 받았지만 뇌물은 아니라 이거지.
영진이 픽 웃으며 지갑을 꺼내 자리에서 일어서려는데 전화가 왔다. 징그럽게 낯익은 번호는 징그럽게 오래 만난 전 남자 친구 김세웅. 받기 싫지만 같은 직장이라 어쩔 수 없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어, 김 과장.”
이 작자와 자기야 여보야 온갖 낯간지러운 호칭으로 부르던 게 겨우 1년 전이었다.
― 영진아. 나 어제 결혼했어. 알지?
“미친 새끼.”
입 밖으로 욕이 튀어나왔다. 어제 결혼한 놈이 전화를 하고 앉아 있으니 욕이 나올 수밖에.
“결혼했다고 자랑하냐? 이거 완전 또라이 새끼 아냐. 어제 결혼한 새끼가 왜 전화질이야.”
― 그래, 욕해 줘. 더 심한 욕을 해도 다 들을게.
이보다 더 심한 욕은 이미 1년 전에 다 했다. 숫자, 사람, 생식기, 동물이 들어가는 온갖 욕은 다 퍼부어 줬던 것 같다.
― 네 목소리가 너무 듣고 싶어서 전화했어. 그러니까 욕이든 뭐든 아무 말이나 좀 해 줄래?
이게 마조히스트가 됐나, 별 미친 소리를 다 듣겠다.
“김세웅 과장, 시카고는 지금 토요일 밤 10시야. 업무 얘기는 여기 시간으로 월요일 아침 9시 이후로 하고, 사적인 전화는 앞으로 절대 하지 마. 한 번만 더 이런 전화 하면 녹음해서 네 와이프랑 네 처가에 퀵 발송 해 버릴 테니까. 그리고 그 녹음 파일 대대손손 보관해서 네 자식, 네 자식의 자식, 그 자식의 자식의 자식한테까지 다 돌릴 거야, 내가.”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고 전화기를 던질 기세로 팔을 치켜들었지만, 이내 전원을 끄고 소중하게 트렌치코트 주머니 속에 넣었다. 새로 장만한 휴대폰은 소중하다. 천 불 넘게 주고 산 새 전화기를 박살 낼 수는 없었다.
“내가 얘기 좀 들어 줄까요?”
익숙하게 들리는 우리말에 영진은 고개를 들었다.
“아, 사장님.”
강요한, 서른도 되지 않은 젊은 남자라 유학 온 학생인 줄 알았다. 당연히 파트타이머인 줄 알았는데, 여기 사장이란다. 게다가 이 빌딩 주인이라고 했다. 어느 그룹인지 몰라도, 모 대기업 소유의 빌딩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 말인즉, 강요한은 재벌이었다.
요즘은 재벌이라면 신물이 났다. 김세웅이 준재벌 집 데릴사위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김세웅의 와이프라는 여자가 회사까지 찾아와 내밀던 봉투가 생각날 때면 지금도 분노로 손이 떨렸다. 위자료라고 하는데, 하마터면 봉투를 들어 여자의 뺨을 후려칠 뻔했었다.
“저 지금 사장님하고 말할 기분이 아니에요. 한가하면 보드카나 한 잔 줘요, 스트레이트로.”
눈치가 젬병은 아닌지 강요한은 별말 없이 진열된 보드카를 따서 한 잔 가득 내밀었다.
아무리 홧김이라도 이렇게나 많이 마셔도 되는 술인가 싶지만, 일단 절반을 비웠다. 독한 액체가 식도를 타고 배 속으로 넘어가는 느낌이 끔찍하게 적나라하다. 영진은 입을 틀어막고 진저리를 쳤다.
“더 줘요?”
강요한이 재미있다는 얼굴로 술병을 내밀자 영진은 얼른 잔을 옆으로 치웠다.
“즐거운 주말 저녁인데 구급차에 실려 나가고 싶지 않아요.”
“폭음하고 확 뻗어 버리는 것도 나쁘지 않은데.”
“돌았어요? 내가 그딴 놈 때문에 폭음해서 속 버리고, 두통에 시달리고. 누구 좋으라고 그 짓을 해요.”
강요한과 몇 번 얘기를 나눈 적은 있지만 사적인 얘기는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막장 드라마 같은 과거지사를 들켰고, 엉겁결에 처음 보는 남자 앞에서도 떠벌려 버렸다.
“형은 위스키 언더락?”
분명히 옆이 비어 있던 것 같은데, 온통 검정색으로 차려입은 남자가 말없이 잔을 가져갔다. 강요한과 닮은 얼굴이 형제인 모양이라고 생각했지만, 곧 관심에서 멀어졌다.
보드카를 더 마실 생각이 없어져 지폐를 꺼내 바에 올려 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벼운 걸로 한 잔 더 하고 가요, 영진 씨. 우리 형도 혼자 왔고, 영진 씨도 혼자 왔고.”
이유는 그것뿐? 더 들을 필요가 없다 싶어 영진은 몸을 돌렸다.
“영진 씨도 사람 때문에 괴롭고, 우리 형도 사람 때문에 괴롭고. 그냥 가지 말고, 둘이 같이 한잔해요.”
전혀 상관없는 두 사람을 엮으려 드는 강요한이 피곤해진 영진은 바에서 나가려 했다. 정말 나가려 했는데…….
“거기까지만 해라, 강요한.”
걸음을 멈추게 한 건 순전히 남자의 목소리 때문이었다. 듣기 좋게 낮은 목소리. 충동적으로 영진은 뒤를 돌아보았다. 가장 먼저 남자의 생김이 눈에 들어왔다. 작은 얼굴에 큼지막한 이목구비가 다 들어가 있다. 쌍꺼풀 없이 크게 휘어진 눈매가 매력적이다.
“강 사장님 형님이세요?”
영진은 저에게 관심 없어 보이는 남자를 찬찬히 살펴보다가 강요한에게 물었다.
“사촌 형이에요.”
“그럼 이분도 재벌?”
“같은 재벌이지만 나보다 돈도 많고, 머리도 좋고, 성격도 우리 형 정도면 재벌치고 나쁘지 않고. 지금 부족한 게 딱 하나 있다면…….”
“여자?”
영진이 말을 가로채며 노골적으로 낯선 남자를 훑었다.
남자의 사촌 동생이라는 사람이 둘을 엮어 주려고 저렇게 애를 쓰고 있는데, 계속 무시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다. 영진은 남겨 둔 보드카를 털어 마시고 처음 본 남자에게 제안했다.
“나하고 잘래요?”
김세웅 같은 놈은 재벌하고 결혼도 하는데, 이까짓 하룻밤쯤이야.
“생각 있어요?”
재차 묻자 남자의 잘 정돈된 눈썹이 꿈틀했다. 거절당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남자가 일어섰다.
그리고 강요한이 경박하게 박수를 치며 카드 키를 내밀었다.
“13층으로 가시면 됩니다.”
* * *
영진은 한참을 씻고 몸에 뜨거운 기운을 모락모락 풍기며 나왔다. 술기운이 올라와 몸이 구름 위를 떠다니는 기분이었다. 흰색 배스로브를 걸친 영진은 널찍한 방을 가로질러 남자에게 다가갔다.
소파에 앉아 물을 마시던 남자가 몸을 일으켰다.
“강여준입니다. 그쪽은 이름이 뭡니까?”
방으로 오는 내내 한마디도 없던 남자의 목소리가 낮게 울리자 가슴이 두근거렸다.
“최영진입니다.”
영진은 물색없이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남자가 눈썹을 치켜뜨며 내밀어진 손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곧 벗은 몸을 마주하게 될 상대에게 할 만한 인사가 아니라는 건 안다.
“수영으로 치면 준비 운동 같은 거죠, 이게.”
흥미로운 기색이 남자의 얼굴에 스쳤다.
“같이 자기 전에 어떤 느낌인지 정도는 알고 싶어서요.”
“준비 운동이라면 이게 더 적당할 것 같은데.”
느른하게 입꼬리를 당겨 웃은 남자가 천천히 몸을 낮추더니 윗입술을 가볍게 물었다. 짧은 입맞춤이었지만 뺨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악수하려고 내밀었던 손은 어느새 남자의 단단한 가슴을 짚고 있었다.
“잠깐만요.”
영진은 몽롱한 눈으로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남자의 까만 눈동자를 쳐다보다가 저도 모르게 먼저 가운을 벗어 내릴 뻔했다.
“궁금한 게 있어요.”
고개를 끄덕인 남자가 말해요, 라며 대답을 채근했다.
“에이즈나 성병 그런 거 없죠? 최근에 콘돔 없이 여자랑 관계한 적은? 아니면 남자와 관계한 적은?”
멍청한 질문인 건 알지만 꼭 물어봐야 했다. 영진은 상대의 거짓말을 꿰뚫는 데 굉장한 소질이 있었다. 그리고 거짓말하는 상대를 추궁하는 데에도 특출했다. 덕분에 김세웅이 말도 안 되게 주워섬겼던 거짓말과, 그 거짓말에 꼬리를 무는 거짓말도 죄다 자백받았다.
“여기까지 와서 그런 질문 하기에는 너무 늦은 거 아닙니까?”
“늦은 건 늦은 거고, 대답은요? 속일 생각 말아요, 내 별명이 걸어 다니는 거짓말 탐지기니까.”
“남자는 절대 취향 아니고, 에이즈도 성병도 없고, 최근에 성매매 한 적 없어요. 지금까지 콘돔 없이 관계한 적도 없고.”
황당해하고 있지만, 남자의 눈은 솔직했다.
“나 믿어요? 거짓말 탐지기가 안 먹히는 사람도 있잖습니까.”
“아뇨, 콘돔을 믿어요.”
영진은 뻔뻔하게 대답했다. 남자가 눈썹을 찌푸리며 영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굳이 묻지 않아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다.
이 여자 대체 뭐지?
“거짓말 탐지기라더니.”
“그건 맞아요. 그런데 남녀 관계에서 콘돔만큼 안전하고 믿을 만한 게 없거든요.”
영진은 나른하게 웃으며 대충 여며진 남자의 배스로브 끈을 풀어냈다. 바닥에 옷이 탁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강여준의 꽉 짜인 상체가 드러났다. 차마 아래까지 볼 용기는 내지 못하고 남자의 단단한 팔을 붙잡았다. 그리고 발끝을 들어 과감하게 키스했다.
영진이 하는 양을 지켜보던 여준이 천천히 움직였다.
충동적으로 제안하고 수락한 하룻밤 같지 않았다. 정신을 잃고 사납게 서로를 탐하지도 않았다. 성급하지 않은 키스, 그래서 아주 부드럽고 달콤했다.
남자가 키스를 멈추고 더운 숨을 뱉어 냈다. 그리고 킹사이즈 침대에 영진을 눕혔다. 영진이 입고 있던 배스로브는 어느새 풀어 헤쳐져 바닥에 아무렇게나 흐트러져 있었다.
영진의 위로 올라온 여준이 팔꿈치로 자신의 몸무게를 지탱한 채 영진의 목덜미를 물었다.
저도 모르게 가느다란 신음이 나왔다.
“그쪽한테 박하 향이 나요. 담배 안 피우나 봐요.”
영진은 나른함에 취해 아무 말이나 늘어놓았다.
“구강 청정제.”
“아, 맞네. 나도 했어요.”
“그러니까요, 그쪽한테서도 박하 향이 나요.”
영진은 술과 강여준에 취해 정신없는 스스로가 우스워 저도 모르게 소리 내 웃었다. 그러다 거칠게 숨을 들이마시며 입술을 깨물었다. 목덜미와 어깨를 지나 가슴, 옆구리, 허벅지를 가볍게 쓸어내리던 남자의 손이 다리 사이를 침범해 들어오고 있었다.
영진은 반사적으로 다리를 오므렸다. 꽉 다물린 허벅지 사이에서도 남자의 손은 멈추지 않았다.
엄지손가락이 영진의 솟아오른 성감대를 자극했다. 옆으로 부드럽게 어루만졌다가, 동그랗게 굴리다가 그 아래를 문질렀다가, 제법 공을 들인 후에야 영진이 젖어 들자 여준은 서서히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손가락은 깊이 들어오지 않았다. 얕은 입구를 안달 나게 드나들며 애태우다가 영진이 스스로 무릎을 벌리게 만들었다. 서서히 파고드는 남자의 손가락에 맞춰 영진이 엉덩이를 움직였다.
“눈 떠 봐요.”
눈을 뜨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질끈 감고 있었나 보다. 아마도 손가락이 가슴을 스칠 때부터였던 것 같다. 영진은 수줍게 눈을 들어 여준의 까만 눈동자를 마주했다.
솔직하게 감정을 드러내는 눈이 뭔가를 부탁하는 것처럼 영진을 쳐다봤다. 거짓말을 캐내는 재주는 있어도, 저런 애타는 눈은 본 적이 없어서 도대체 무얼 말하는지 모르겠다.
본문 중에 외국어 대화는 「」로 표기했습니다.
1화
1. 충동 — 기약 없는 관계를 시작하다
주말 저녁 10시, 영진은 AMC에서 영화를 보고 가끔씩 들르는 바에 갔다.
영진은 바에 앉아 도수가 높지 않은 칵테일을 주문했다. 가볍게 한잔하고 일어날 생각이었다. 일행이 없었고, 몇 번 보지 않은 바텐더와 얘기를 주고받을 만큼 스스럼없는 성격도 아니라 자연스레 휴대폰에 고개를 처박고 있었다.
영진은 포털 사이트 연예란에 유명한 배우와 모 재벌가 3세의 스캔들 기사를 심드렁하게 읽었다. 함께 백화점은 갔지만 사귀는 사이가 아니며, 함께 호텔 수영장에서 단둘이 놀았지만 데이트는 아니란다.
그래, 돈은 받았지만 뇌물은 아니라 이거지.
영진이 픽 웃으며 지갑을 꺼내 자리에서 일어서려는데 전화가 왔다. 징그럽게 낯익은 번호는 징그럽게 오래 만난 전 남자 친구 김세웅. 받기 싫지만 같은 직장이라 어쩔 수 없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어, 김 과장.”
이 작자와 자기야 여보야 온갖 낯간지러운 호칭으로 부르던 게 겨우 1년 전이었다.
― 영진아. 나 어제 결혼했어. 알지?
“미친 새끼.”
입 밖으로 욕이 튀어나왔다. 어제 결혼한 놈이 전화를 하고 앉아 있으니 욕이 나올 수밖에.
“결혼했다고 자랑하냐? 이거 완전 또라이 새끼 아냐. 어제 결혼한 새끼가 왜 전화질이야.”
― 그래, 욕해 줘. 더 심한 욕을 해도 다 들을게.
이보다 더 심한 욕은 이미 1년 전에 다 했다. 숫자, 사람, 생식기, 동물이 들어가는 온갖 욕은 다 퍼부어 줬던 것 같다.
― 네 목소리가 너무 듣고 싶어서 전화했어. 그러니까 욕이든 뭐든 아무 말이나 좀 해 줄래?
이게 마조히스트가 됐나, 별 미친 소리를 다 듣겠다.
“김세웅 과장, 시카고는 지금 토요일 밤 10시야. 업무 얘기는 여기 시간으로 월요일 아침 9시 이후로 하고, 사적인 전화는 앞으로 절대 하지 마. 한 번만 더 이런 전화 하면 녹음해서 네 와이프랑 네 처가에 퀵 발송 해 버릴 테니까. 그리고 그 녹음 파일 대대손손 보관해서 네 자식, 네 자식의 자식, 그 자식의 자식의 자식한테까지 다 돌릴 거야, 내가.”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고 전화기를 던질 기세로 팔을 치켜들었지만, 이내 전원을 끄고 소중하게 트렌치코트 주머니 속에 넣었다. 새로 장만한 휴대폰은 소중하다. 천 불 넘게 주고 산 새 전화기를 박살 낼 수는 없었다.
“내가 얘기 좀 들어 줄까요?”
익숙하게 들리는 우리말에 영진은 고개를 들었다.
“아, 사장님.”
강요한, 서른도 되지 않은 젊은 남자라 유학 온 학생인 줄 알았다. 당연히 파트타이머인 줄 알았는데, 여기 사장이란다. 게다가 이 빌딩 주인이라고 했다. 어느 그룹인지 몰라도, 모 대기업 소유의 빌딩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 말인즉, 강요한은 재벌이었다.
요즘은 재벌이라면 신물이 났다. 김세웅이 준재벌 집 데릴사위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김세웅의 와이프라는 여자가 회사까지 찾아와 내밀던 봉투가 생각날 때면 지금도 분노로 손이 떨렸다. 위자료라고 하는데, 하마터면 봉투를 들어 여자의 뺨을 후려칠 뻔했었다.
“저 지금 사장님하고 말할 기분이 아니에요. 한가하면 보드카나 한 잔 줘요, 스트레이트로.”
눈치가 젬병은 아닌지 강요한은 별말 없이 진열된 보드카를 따서 한 잔 가득 내밀었다.
아무리 홧김이라도 이렇게나 많이 마셔도 되는 술인가 싶지만, 일단 절반을 비웠다. 독한 액체가 식도를 타고 배 속으로 넘어가는 느낌이 끔찍하게 적나라하다. 영진은 입을 틀어막고 진저리를 쳤다.
“더 줘요?”
강요한이 재미있다는 얼굴로 술병을 내밀자 영진은 얼른 잔을 옆으로 치웠다.
“즐거운 주말 저녁인데 구급차에 실려 나가고 싶지 않아요.”
“폭음하고 확 뻗어 버리는 것도 나쁘지 않은데.”
“돌았어요? 내가 그딴 놈 때문에 폭음해서 속 버리고, 두통에 시달리고. 누구 좋으라고 그 짓을 해요.”
강요한과 몇 번 얘기를 나눈 적은 있지만 사적인 얘기는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막장 드라마 같은 과거지사를 들켰고, 엉겁결에 처음 보는 남자 앞에서도 떠벌려 버렸다.
“형은 위스키 언더락?”
분명히 옆이 비어 있던 것 같은데, 온통 검정색으로 차려입은 남자가 말없이 잔을 가져갔다. 강요한과 닮은 얼굴이 형제인 모양이라고 생각했지만, 곧 관심에서 멀어졌다.
보드카를 더 마실 생각이 없어져 지폐를 꺼내 바에 올려 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벼운 걸로 한 잔 더 하고 가요, 영진 씨. 우리 형도 혼자 왔고, 영진 씨도 혼자 왔고.”
이유는 그것뿐? 더 들을 필요가 없다 싶어 영진은 몸을 돌렸다.
“영진 씨도 사람 때문에 괴롭고, 우리 형도 사람 때문에 괴롭고. 그냥 가지 말고, 둘이 같이 한잔해요.”
전혀 상관없는 두 사람을 엮으려 드는 강요한이 피곤해진 영진은 바에서 나가려 했다. 정말 나가려 했는데…….
“거기까지만 해라, 강요한.”
걸음을 멈추게 한 건 순전히 남자의 목소리 때문이었다. 듣기 좋게 낮은 목소리. 충동적으로 영진은 뒤를 돌아보았다. 가장 먼저 남자의 생김이 눈에 들어왔다. 작은 얼굴에 큼지막한 이목구비가 다 들어가 있다. 쌍꺼풀 없이 크게 휘어진 눈매가 매력적이다.
“강 사장님 형님이세요?”
영진은 저에게 관심 없어 보이는 남자를 찬찬히 살펴보다가 강요한에게 물었다.
“사촌 형이에요.”
“그럼 이분도 재벌?”
“같은 재벌이지만 나보다 돈도 많고, 머리도 좋고, 성격도 우리 형 정도면 재벌치고 나쁘지 않고. 지금 부족한 게 딱 하나 있다면…….”
“여자?”
영진이 말을 가로채며 노골적으로 낯선 남자를 훑었다.
남자의 사촌 동생이라는 사람이 둘을 엮어 주려고 저렇게 애를 쓰고 있는데, 계속 무시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다. 영진은 남겨 둔 보드카를 털어 마시고 처음 본 남자에게 제안했다.
“나하고 잘래요?”
김세웅 같은 놈은 재벌하고 결혼도 하는데, 이까짓 하룻밤쯤이야.
“생각 있어요?”
재차 묻자 남자의 잘 정돈된 눈썹이 꿈틀했다. 거절당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남자가 일어섰다.
그리고 강요한이 경박하게 박수를 치며 카드 키를 내밀었다.
“13층으로 가시면 됩니다.”
* * *
영진은 한참을 씻고 몸에 뜨거운 기운을 모락모락 풍기며 나왔다. 술기운이 올라와 몸이 구름 위를 떠다니는 기분이었다. 흰색 배스로브를 걸친 영진은 널찍한 방을 가로질러 남자에게 다가갔다.
소파에 앉아 물을 마시던 남자가 몸을 일으켰다.
“강여준입니다. 그쪽은 이름이 뭡니까?”
방으로 오는 내내 한마디도 없던 남자의 목소리가 낮게 울리자 가슴이 두근거렸다.
“최영진입니다.”
영진은 물색없이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남자가 눈썹을 치켜뜨며 내밀어진 손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곧 벗은 몸을 마주하게 될 상대에게 할 만한 인사가 아니라는 건 안다.
“수영으로 치면 준비 운동 같은 거죠, 이게.”
흥미로운 기색이 남자의 얼굴에 스쳤다.
“같이 자기 전에 어떤 느낌인지 정도는 알고 싶어서요.”
“준비 운동이라면 이게 더 적당할 것 같은데.”
느른하게 입꼬리를 당겨 웃은 남자가 천천히 몸을 낮추더니 윗입술을 가볍게 물었다. 짧은 입맞춤이었지만 뺨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악수하려고 내밀었던 손은 어느새 남자의 단단한 가슴을 짚고 있었다.
“잠깐만요.”
영진은 몽롱한 눈으로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남자의 까만 눈동자를 쳐다보다가 저도 모르게 먼저 가운을 벗어 내릴 뻔했다.
“궁금한 게 있어요.”
고개를 끄덕인 남자가 말해요, 라며 대답을 채근했다.
“에이즈나 성병 그런 거 없죠? 최근에 콘돔 없이 여자랑 관계한 적은? 아니면 남자와 관계한 적은?”
멍청한 질문인 건 알지만 꼭 물어봐야 했다. 영진은 상대의 거짓말을 꿰뚫는 데 굉장한 소질이 있었다. 그리고 거짓말하는 상대를 추궁하는 데에도 특출했다. 덕분에 김세웅이 말도 안 되게 주워섬겼던 거짓말과, 그 거짓말에 꼬리를 무는 거짓말도 죄다 자백받았다.
“여기까지 와서 그런 질문 하기에는 너무 늦은 거 아닙니까?”
“늦은 건 늦은 거고, 대답은요? 속일 생각 말아요, 내 별명이 걸어 다니는 거짓말 탐지기니까.”
“남자는 절대 취향 아니고, 에이즈도 성병도 없고, 최근에 성매매 한 적 없어요. 지금까지 콘돔 없이 관계한 적도 없고.”
황당해하고 있지만, 남자의 눈은 솔직했다.
“나 믿어요? 거짓말 탐지기가 안 먹히는 사람도 있잖습니까.”
“아뇨, 콘돔을 믿어요.”
영진은 뻔뻔하게 대답했다. 남자가 눈썹을 찌푸리며 영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굳이 묻지 않아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다.
이 여자 대체 뭐지?
“거짓말 탐지기라더니.”
“그건 맞아요. 그런데 남녀 관계에서 콘돔만큼 안전하고 믿을 만한 게 없거든요.”
영진은 나른하게 웃으며 대충 여며진 남자의 배스로브 끈을 풀어냈다. 바닥에 옷이 탁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강여준의 꽉 짜인 상체가 드러났다. 차마 아래까지 볼 용기는 내지 못하고 남자의 단단한 팔을 붙잡았다. 그리고 발끝을 들어 과감하게 키스했다.
영진이 하는 양을 지켜보던 여준이 천천히 움직였다.
충동적으로 제안하고 수락한 하룻밤 같지 않았다. 정신을 잃고 사납게 서로를 탐하지도 않았다. 성급하지 않은 키스, 그래서 아주 부드럽고 달콤했다.
남자가 키스를 멈추고 더운 숨을 뱉어 냈다. 그리고 킹사이즈 침대에 영진을 눕혔다. 영진이 입고 있던 배스로브는 어느새 풀어 헤쳐져 바닥에 아무렇게나 흐트러져 있었다.
영진의 위로 올라온 여준이 팔꿈치로 자신의 몸무게를 지탱한 채 영진의 목덜미를 물었다.
저도 모르게 가느다란 신음이 나왔다.
“그쪽한테 박하 향이 나요. 담배 안 피우나 봐요.”
영진은 나른함에 취해 아무 말이나 늘어놓았다.
“구강 청정제.”
“아, 맞네. 나도 했어요.”
“그러니까요, 그쪽한테서도 박하 향이 나요.”
영진은 술과 강여준에 취해 정신없는 스스로가 우스워 저도 모르게 소리 내 웃었다. 그러다 거칠게 숨을 들이마시며 입술을 깨물었다. 목덜미와 어깨를 지나 가슴, 옆구리, 허벅지를 가볍게 쓸어내리던 남자의 손이 다리 사이를 침범해 들어오고 있었다.
영진은 반사적으로 다리를 오므렸다. 꽉 다물린 허벅지 사이에서도 남자의 손은 멈추지 않았다.
엄지손가락이 영진의 솟아오른 성감대를 자극했다. 옆으로 부드럽게 어루만졌다가, 동그랗게 굴리다가 그 아래를 문질렀다가, 제법 공을 들인 후에야 영진이 젖어 들자 여준은 서서히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손가락은 깊이 들어오지 않았다. 얕은 입구를 안달 나게 드나들며 애태우다가 영진이 스스로 무릎을 벌리게 만들었다. 서서히 파고드는 남자의 손가락에 맞춰 영진이 엉덩이를 움직였다.
“눈 떠 봐요.”
눈을 뜨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질끈 감고 있었나 보다. 아마도 손가락이 가슴을 스칠 때부터였던 것 같다. 영진은 수줍게 눈을 들어 여준의 까만 눈동자를 마주했다.
솔직하게 감정을 드러내는 눈이 뭔가를 부탁하는 것처럼 영진을 쳐다봤다. 거짓말을 캐내는 재주는 있어도, 저런 애타는 눈은 본 적이 없어서 도대체 무얼 말하는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