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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2. 관계 미상 — 너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
미래에 대한 약속은 없어도 정식으로 연인 사이가 된 이후, 강여준은 영진의 허름한 사택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고급 아파트를 계약했다.
어딘지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그의 회사는 뉴욕에 있다고 했다. 모 기업의 현지 법인인 듯했는데, 강여준에게 나이조차 묻지 않겠다고 당차게 선언했으므로 그에 대해 아무것도 궁금해하지 않았으며, 영진 역시 의식적으로 자신에 대한 얘기는 하지 않았다.
다만 영진은 가끔씩 상사에 대한 험담을 했는데, 강여준은 묵묵히 들어 주다가, 힘들면 다른 직장을 연결해 주겠다는 제안을 했다. 선비인 척 선생인 척 가르치려 들던 전 남자 친구도 부담스럽고 짜증 났지만, 사소한 뒷담화에 새 직장을 알아봐 준다는 새 남자 친구도 부담스럽고 짜증스럽긴 매한가지였다.
직장을 옮길 마음이 있다면 영진의 능력으로도 충분했다. 와 주십사 굽실거리는 곳은 없어도, 영진이 가고자 마음먹는다면 환영하는 곳은 꽤 된다는 뜻이다.
오늘도 영진은 강여준과 중식당에서 저녁을 먹으면서 독일계 미국인인 상사가 얼마나 깐깐한지 주절주절 주워섬겼다. 대식가인 영진을 위해 여준은 알아서 이것저것 여러 가지를 주문했고, 영진은 완탕면에 딤섬, 춘권의 부스러기까지 주워 먹는 동안 내내 독일인들의 철두철미한 국민성이 사람을 얼마나 피곤하게 하는지 한바탕 성토를 했다.
그 상사가 미국에서 태어나 미국 사람과 다를 바가 없다는 건 영진에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저 일주일 동안 쌓인 스트레스를 받아 줄 사람이 있다는 게 반가울 뿐이었다.
“미안해, 여준 씨. 나 지금 30분 넘게 리암 슈미트 얘기만 했지?”
한참을 상사 욕에 열을 올리던 영진이 부끄러운 듯 웃으며 사과하자 여준은 괜찮다, 계속 얘기하라며 끝까지 경청했다. 겨우 두 달 만난 사이지만, 여준은 남의 얘기를 들어 주는 데에 탁월한 재주가 있었다.
영진은 디저트를 먹을 때까지 부사장에 대한 뒷담화를 멈추지 않았는데, 종국에는 독재자까지 갖다 붙이며 슈미트 부사장을 욕했다. 험담을 넘어서 인격 모독의 수준까지 이르자 여준이 난감한 표정을 했다. 히틀러까지는 너무했나.
“우리 직원들도 날 이렇게 욕하려나.”
“내용 면으로 아주 완벽한 보고서에 알파벳 하나 틀린 것 가지고 30분 동안 훈계해? 그리고 그 꼬투리 잡아서 독설하는 걸 아주 대단한 능력이라 착각하고 있고?”
영진의 구체적인 물음에 여준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 정도는 아니지만, 아마 편한 사람은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같기도 하고? 애매하게 말하는 거 보니까 여준 씨도 좋은 상사는 아니네.”
영진이 단정 지어 말하고는 좀 더 유연한 직장 상사가 되어 보라며 여준을 진지하게 나무랐지만, 여준은 가볍게 웃어넘기고 말았다.
“웃음이 나, 지금? 좋은 직장 상사까지는 아니더라도 나쁜 놈 소리는 듣지 말자, 여준 씨.”
영진은 정말 여느 때보다 진지했다.
“벌써 나쁜 놈 소리는 듣고 있는 것 같으니까 이미 틀렸고, 그냥 영진 씨한테만 좋은 사람 될게. 이제 자리 옮기자.”
다감한 강여준의 말에 흐뭇한 웃음이 비집고 나왔다. 여준은 뭐든 돌려서 말하는 법이 없어 좋았다. 기분이 좋아진 영진은 코트를 챙기는 여준의 엉덩이를 장난스럽게 토닥였다.
“와인은 집에서 마실까?”
“아니, 오늘 어마어마한 재즈팀이 공연하는 날이라 꼭 가야 돼.”
영진은 자신의 장난을 은밀한 뜻으로 해석한 여준에게 여지를 남기지 않고 가차 없이 그를 재즈바로 안내했다.
조용한 재즈바에 유명한 재즈곡이 연주되고 있었다. 잔뜩 분위기에 취해 있는데, 회사에서 문자 메시지가 도착했다. 짜증이 확 치밀어 올랐다.
[월요일에 부사장한테 보고서 올려야 하는데, 최 과장이 교정 좀 봐 줄래?]
“미친놈 아냐, 이거.”
박도훈 이사는 오너 일가의 사돈의 팔촌쯤 되는 낙하산인데, 최근 들어 영진에게 자신의 남성성을 어필하고 있었다. 마흔다섯의 남자가 이제 겨우 서른두 살인 영진에게 직진남 행세를 하다니 어이가 없을 따름이다.
게다가 박도훈 이사는 한국에 열두 살이나 어린 아내와 두 살 된 딸까지 두고 있었다. 사내 성추행으로 고발해 버리고 싶지만, 앞으로 서너 달만 더 보면 되는 사람이라 겨우 참고 두고 보는 중이었다.
“누군데?”
여준이 호기심을 드러냈다. 영진은 하 참, 이라고 연신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며 휴대폰을 내밀었다.
“그냥 무시해.”
“안 그래도 그러려고. 저가 올릴 보고서인데 내가 왜 교정을 봐 줘? 누군 시간이 남아도는 줄 아나.”
로맨틱한 장소에서 분위기 좀 잡아 보려고 했는데, 도저히 박도훈 이사를 욕하지 않고는 성이 풀릴 것 같지 않았다.
“이 자식이 얼마나 이상한 놈인지 들어 봐. 스타벅스에서 라떼 주문하고 있는데 갑자기 옆에서 카페모카를 같이 주문하는 거야, 이 미친놈이. 돈 줄 거라는 기대는 당연히 안 했어. 그런데 이게 또 뭐라는 줄 알아? 텀블러가 너무 예쁘다고 선물로 자기한테 하나 사 달래.”
“그래서 사 줬어?”
화를 풀어 주려는 듯 부드럽게 물어 오는 여준의 목소리가 듣기 좋아 영진은 저도 모르게 배시시 웃다가 다시 정색하며 말을 이었다.
“절대 안 사 주지. 3불짜리 커피 정도는 살 수 있지만, 23불짜리 텀블러는 절대 못 사 줘. 그리고 지가 거지야? 툭하면 직원들한테 뭘 그렇게 사 달래. 대기업 주재원에, 이사에, 나보다 돈도 많으면서.”
영진은 브리치즈를 듬뿍 바른 크래커를 신경질적으로 씹어 넘겼다.
“회사에 피곤한 상사가 많다. 원하면 다른 직장 알아봐 줄게.”
크래커를 오물오물 씹어 삼키던 영진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또 새 직장 타령이다. 지금까지 여준에게 험담한 상사는 딱 두 사람이다. 부사장과 이사. 회사 사람들을 죄다 싸잡아 욕한 게 아니라 직원들을 피곤하게 하는 딱 두 사람을 욕했을 뿐인데, 또 다른 직장을 알아봐 주겠다며 자존심을 건드렸다.
“여준 씨네 회사 넣어 줄 수 있어?”
영진이 자못 진지하게 묻자 여준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우리 회사 빼고 다 돼. 어디든 말만 해.”
“자기 회사 빼고 다 된다니, 인맥이 정말 대단한가 보다.”
기분 나쁜 티를 내며 이죽거리자 여준 역시 인상을 썼다.
“여준 씨네 회사 넣어 줄 거 아니면, 앞으로 새 직장이니 이직이니 한마디도 하지 마. 내 직장은 내가 알아서 할게. 내가 직장 상사를 욕할 때는 그냥 들어 주기만 하면 돼, 알았지?”
부탁하듯 정중하게 말하며 영진은 다시는 직장 상사 얘기를 꺼내지 않기로 했다.
“이제 회사 얘기 그만할래. 그냥 음악 들으면서 와인이나 마시자.”
굳이 이런 짜증스러운 주제가 아니더라도 강여준과 할 얘기는 많았다.
영진은 야구광이었는데, 강여준도 야구를 상당히 좋아했다. 바에 들어온 지 30분도 지나지 않아 와인을 네 잔째 비운 영진은 좋아하는 야구 선수를 찬양하며 눈을 빛냈다. 강여준도 함께 좋아하는 선수라 내년 재계약에 성공할지 아니면 다른 팀으로 이적하게 될지 난상토론까지 갔다.
여준은 그 선수가 높은 몸값을 요구해 구단에서 받아들이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고 했고, 영진은 작년 팀에 대한 기여도와 그 정도의 기량이라면 얼마를 불러도 구단에서 재계약을 할 것이라 주장했다.
“아, 맞다!”
한창 프로 야구 얘기에 열을 올리던 영진은 다음 주말 스케줄이 떠올랐다.
“다음 주에는 우리 못 만나겠다.”
“왜?”
겨우 한 음절, 왜, 라고 물었을 뿐인데 여준의 말투가 매우 고압적으로 느껴진다. 지난 두 달간 영진에게 큰 불만을 내색하거나 화를 낸 적도 없었고, 대부분의 경우 강여준은 영진에게 친절했다.
“여준 씨 좀 이상하다. 지금 우리 무슨 문제 있어?”
대놓고 싫은 내색을 하는 여준은 처음이라 기분이 묘했다.
“뭐 하려고?”
“회사 친구랑 하와이에 가기로 했어.”
“하와이?”
“우리 팀 하와이로 전지훈련 오잖아.”
“주말은 서로에게 주기로 한 거 아니었어?”
그랬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관계 중에 그런 얘기를 했던 것 같기도 하고. 영진은 기억을 헤집다, 한참 만에 생각해 냈다.
만난 지 한 달 되어 갈 무렵, 여준이 회사 일로 시간을 내지 못한 적이 딱 한 번 있었다. 저가 시간을 내지 못해 놓고, 되레 영진에게 미국에 있을 동안 주말은 온전히 서로에게 집중하자며 다짐을 받아 냈다. 그런데 그 집중이라는 게, 아예 주말에 사생활을 갖지 말자는 뜻이었나 보다.
“아니, 여준 씨한테 집중한다고 했지, 언제 내 주말을 고스란히 자기한테 반납한다고 했어?”
“나만 다르게 해석했나, 그럼?”
“그래, 그게 그 뜻이라고 쳐. 그러면 내 사생활은? 애초에 내 사생활은 염두에 두지도 않고 말한 거였어?”
영진은 침착하게 물었다. 다른 건 다 양보해도 이건 양보할 수 없다. 가뜩이나 1년 넘게 좋아하는 프로 야구를 직관하지 못해 애가 타 죽겠는 마당에, 전지훈련 온 선수들까지 보지 못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한 주 못 본다고 어떻게 되는 거 아니잖아.”
“한 주가 아니야. 나 잠깐 한국에 나갔다 들어와야 돼. 어쩌면 아예 못 들어올 수도 있고.”
다음 주만이 아니라 아주 못 볼 수도 있다는 말에 더는 할 말이 없었다. 야구와 이 남자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오늘은 이 남자였다. 야구는 내년이면 볼 수 있지만, 강여준과는 기약이 없으니까.
영진은 짜증이 잔뜩 배어나는 한숨을 뱉어 내며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내가 여준 씨를 위해서 얼마나 큰 희생을 치렀는지 꼭 기억해. 우리가 헤어진 다음에도 꼭 기억해. 다른 건 잊어버려도 이건 반드시 기억해.”
속상한 얼굴로 고개를 드는데, 여준이 기분 좋게 웃고 있었다. 새삼 강여준이 잘생긴 남자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 남자와 헤어지면 오랫동안 다른 남자를 못 만날 거란 예감이 들었다. 한번 높아진 눈높이를 낮추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꼭 기억하라고. 알겠어?”
“알았어, 약속해.”
영진은 쓸데없는 다짐을 재차 받아 낸 후에야 기분을 풀었다.
* * *
주말 데이트의 마지막 코스는 어김없이 강여준의 아파트였다. 영진이 지내는 사택에는 보는 눈들이 많아 한 번도 여준을 데려간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가 강조한 대로 서로에 대한 건 철저히 묻지 않기로 했으므로, 자신에 대한 정보가 넘쳐 나는 사택에까지 그를 끌어들이기 싫었다.
여준의 아파트는 넓고 호화스러웠지만, 오로지 쉬고 잠만 자는 공간이었다. 강여준에 대한 건 한 톨도 알아낼 수 없는, 그저 넓은 침대와 쓰지 않는 가구들, 간단히 요리를 해 먹을 수 있는 조리 도구들이 전부였다. 이 집에서 쓰이는 건 오로지 침실과 욕실뿐이었다.
오늘은 영진이 먼저 씻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것도 입지 않은 채로 욕실에서 나왔던 터라 역시 맨몸인 강여준과 몸을 나누는 데 거칠 것이 하나도 없었다.
여준은 군살 없이 매끈한 영진의 나신을 눈부신 듯 내려다보며 입술을 겹쳐 왔다.
그는 언제나 느긋했고, 서두름이 없었다. 여준의 혀가 영진을 부드럽게 잡아채고 끌어당겼다.
여준은 보통 한참의 전희를 즐기다 애가 달아 미칠 지경이 되어서야 삽입을 했다. 그 점이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하지만, 대개의 경우 정신이 나가 버릴 만큼 좋았다. 전희로 한차례 오르가슴을 느낀 후의 삽입은 정신을 앗아 갈 정도의 쾌감으로 이어졌다.
영진은 넓게 펼친 손가락으로 뜨겁게 달아오른 여준의 몸을 마구 헤집었다. 그리고 민감하게 반응하는 옆구리와 허벅지 사이를 쓰다듬었다. 그의 몸이 어느새 단단해져 영진의 배를 쿡쿡 찌르고 있었다. 여준이 허리를 잘게 움직여 자신의 몸을 영진의 아랫배에 연신 문질렀다. 그와 맞닿은 곳에 미끈한 체액이 묻어났다.
영진도 마찬가지로 이미 아랫도리를 축축하게 적시고 있었다. 영진은 손을 내려 발기한 몸을 세게 움켜잡아 훑어 올렸다. 여준의 몸이 크게 요동치더니, 곧 그는 영진의 작은 손 안에서 엉덩이를 움직였다. 대신 수음을 해 주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2. 관계 미상 — 너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
미래에 대한 약속은 없어도 정식으로 연인 사이가 된 이후, 강여준은 영진의 허름한 사택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고급 아파트를 계약했다.
어딘지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그의 회사는 뉴욕에 있다고 했다. 모 기업의 현지 법인인 듯했는데, 강여준에게 나이조차 묻지 않겠다고 당차게 선언했으므로 그에 대해 아무것도 궁금해하지 않았으며, 영진 역시 의식적으로 자신에 대한 얘기는 하지 않았다.
다만 영진은 가끔씩 상사에 대한 험담을 했는데, 강여준은 묵묵히 들어 주다가, 힘들면 다른 직장을 연결해 주겠다는 제안을 했다. 선비인 척 선생인 척 가르치려 들던 전 남자 친구도 부담스럽고 짜증 났지만, 사소한 뒷담화에 새 직장을 알아봐 준다는 새 남자 친구도 부담스럽고 짜증스럽긴 매한가지였다.
직장을 옮길 마음이 있다면 영진의 능력으로도 충분했다. 와 주십사 굽실거리는 곳은 없어도, 영진이 가고자 마음먹는다면 환영하는 곳은 꽤 된다는 뜻이다.
오늘도 영진은 강여준과 중식당에서 저녁을 먹으면서 독일계 미국인인 상사가 얼마나 깐깐한지 주절주절 주워섬겼다. 대식가인 영진을 위해 여준은 알아서 이것저것 여러 가지를 주문했고, 영진은 완탕면에 딤섬, 춘권의 부스러기까지 주워 먹는 동안 내내 독일인들의 철두철미한 국민성이 사람을 얼마나 피곤하게 하는지 한바탕 성토를 했다.
그 상사가 미국에서 태어나 미국 사람과 다를 바가 없다는 건 영진에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저 일주일 동안 쌓인 스트레스를 받아 줄 사람이 있다는 게 반가울 뿐이었다.
“미안해, 여준 씨. 나 지금 30분 넘게 리암 슈미트 얘기만 했지?”
한참을 상사 욕에 열을 올리던 영진이 부끄러운 듯 웃으며 사과하자 여준은 괜찮다, 계속 얘기하라며 끝까지 경청했다. 겨우 두 달 만난 사이지만, 여준은 남의 얘기를 들어 주는 데에 탁월한 재주가 있었다.
영진은 디저트를 먹을 때까지 부사장에 대한 뒷담화를 멈추지 않았는데, 종국에는 독재자까지 갖다 붙이며 슈미트 부사장을 욕했다. 험담을 넘어서 인격 모독의 수준까지 이르자 여준이 난감한 표정을 했다. 히틀러까지는 너무했나.
“우리 직원들도 날 이렇게 욕하려나.”
“내용 면으로 아주 완벽한 보고서에 알파벳 하나 틀린 것 가지고 30분 동안 훈계해? 그리고 그 꼬투리 잡아서 독설하는 걸 아주 대단한 능력이라 착각하고 있고?”
영진의 구체적인 물음에 여준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 정도는 아니지만, 아마 편한 사람은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같기도 하고? 애매하게 말하는 거 보니까 여준 씨도 좋은 상사는 아니네.”
영진이 단정 지어 말하고는 좀 더 유연한 직장 상사가 되어 보라며 여준을 진지하게 나무랐지만, 여준은 가볍게 웃어넘기고 말았다.
“웃음이 나, 지금? 좋은 직장 상사까지는 아니더라도 나쁜 놈 소리는 듣지 말자, 여준 씨.”
영진은 정말 여느 때보다 진지했다.
“벌써 나쁜 놈 소리는 듣고 있는 것 같으니까 이미 틀렸고, 그냥 영진 씨한테만 좋은 사람 될게. 이제 자리 옮기자.”
다감한 강여준의 말에 흐뭇한 웃음이 비집고 나왔다. 여준은 뭐든 돌려서 말하는 법이 없어 좋았다. 기분이 좋아진 영진은 코트를 챙기는 여준의 엉덩이를 장난스럽게 토닥였다.
“와인은 집에서 마실까?”
“아니, 오늘 어마어마한 재즈팀이 공연하는 날이라 꼭 가야 돼.”
영진은 자신의 장난을 은밀한 뜻으로 해석한 여준에게 여지를 남기지 않고 가차 없이 그를 재즈바로 안내했다.
조용한 재즈바에 유명한 재즈곡이 연주되고 있었다. 잔뜩 분위기에 취해 있는데, 회사에서 문자 메시지가 도착했다. 짜증이 확 치밀어 올랐다.
[월요일에 부사장한테 보고서 올려야 하는데, 최 과장이 교정 좀 봐 줄래?]
“미친놈 아냐, 이거.”
박도훈 이사는 오너 일가의 사돈의 팔촌쯤 되는 낙하산인데, 최근 들어 영진에게 자신의 남성성을 어필하고 있었다. 마흔다섯의 남자가 이제 겨우 서른두 살인 영진에게 직진남 행세를 하다니 어이가 없을 따름이다.
게다가 박도훈 이사는 한국에 열두 살이나 어린 아내와 두 살 된 딸까지 두고 있었다. 사내 성추행으로 고발해 버리고 싶지만, 앞으로 서너 달만 더 보면 되는 사람이라 겨우 참고 두고 보는 중이었다.
“누군데?”
여준이 호기심을 드러냈다. 영진은 하 참, 이라고 연신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며 휴대폰을 내밀었다.
“그냥 무시해.”
“안 그래도 그러려고. 저가 올릴 보고서인데 내가 왜 교정을 봐 줘? 누군 시간이 남아도는 줄 아나.”
로맨틱한 장소에서 분위기 좀 잡아 보려고 했는데, 도저히 박도훈 이사를 욕하지 않고는 성이 풀릴 것 같지 않았다.
“이 자식이 얼마나 이상한 놈인지 들어 봐. 스타벅스에서 라떼 주문하고 있는데 갑자기 옆에서 카페모카를 같이 주문하는 거야, 이 미친놈이. 돈 줄 거라는 기대는 당연히 안 했어. 그런데 이게 또 뭐라는 줄 알아? 텀블러가 너무 예쁘다고 선물로 자기한테 하나 사 달래.”
“그래서 사 줬어?”
화를 풀어 주려는 듯 부드럽게 물어 오는 여준의 목소리가 듣기 좋아 영진은 저도 모르게 배시시 웃다가 다시 정색하며 말을 이었다.
“절대 안 사 주지. 3불짜리 커피 정도는 살 수 있지만, 23불짜리 텀블러는 절대 못 사 줘. 그리고 지가 거지야? 툭하면 직원들한테 뭘 그렇게 사 달래. 대기업 주재원에, 이사에, 나보다 돈도 많으면서.”
영진은 브리치즈를 듬뿍 바른 크래커를 신경질적으로 씹어 넘겼다.
“회사에 피곤한 상사가 많다. 원하면 다른 직장 알아봐 줄게.”
크래커를 오물오물 씹어 삼키던 영진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또 새 직장 타령이다. 지금까지 여준에게 험담한 상사는 딱 두 사람이다. 부사장과 이사. 회사 사람들을 죄다 싸잡아 욕한 게 아니라 직원들을 피곤하게 하는 딱 두 사람을 욕했을 뿐인데, 또 다른 직장을 알아봐 주겠다며 자존심을 건드렸다.
“여준 씨네 회사 넣어 줄 수 있어?”
영진이 자못 진지하게 묻자 여준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우리 회사 빼고 다 돼. 어디든 말만 해.”
“자기 회사 빼고 다 된다니, 인맥이 정말 대단한가 보다.”
기분 나쁜 티를 내며 이죽거리자 여준 역시 인상을 썼다.
“여준 씨네 회사 넣어 줄 거 아니면, 앞으로 새 직장이니 이직이니 한마디도 하지 마. 내 직장은 내가 알아서 할게. 내가 직장 상사를 욕할 때는 그냥 들어 주기만 하면 돼, 알았지?”
부탁하듯 정중하게 말하며 영진은 다시는 직장 상사 얘기를 꺼내지 않기로 했다.
“이제 회사 얘기 그만할래. 그냥 음악 들으면서 와인이나 마시자.”
굳이 이런 짜증스러운 주제가 아니더라도 강여준과 할 얘기는 많았다.
영진은 야구광이었는데, 강여준도 야구를 상당히 좋아했다. 바에 들어온 지 30분도 지나지 않아 와인을 네 잔째 비운 영진은 좋아하는 야구 선수를 찬양하며 눈을 빛냈다. 강여준도 함께 좋아하는 선수라 내년 재계약에 성공할지 아니면 다른 팀으로 이적하게 될지 난상토론까지 갔다.
여준은 그 선수가 높은 몸값을 요구해 구단에서 받아들이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고 했고, 영진은 작년 팀에 대한 기여도와 그 정도의 기량이라면 얼마를 불러도 구단에서 재계약을 할 것이라 주장했다.
“아, 맞다!”
한창 프로 야구 얘기에 열을 올리던 영진은 다음 주말 스케줄이 떠올랐다.
“다음 주에는 우리 못 만나겠다.”
“왜?”
겨우 한 음절, 왜, 라고 물었을 뿐인데 여준의 말투가 매우 고압적으로 느껴진다. 지난 두 달간 영진에게 큰 불만을 내색하거나 화를 낸 적도 없었고, 대부분의 경우 강여준은 영진에게 친절했다.
“여준 씨 좀 이상하다. 지금 우리 무슨 문제 있어?”
대놓고 싫은 내색을 하는 여준은 처음이라 기분이 묘했다.
“뭐 하려고?”
“회사 친구랑 하와이에 가기로 했어.”
“하와이?”
“우리 팀 하와이로 전지훈련 오잖아.”
“주말은 서로에게 주기로 한 거 아니었어?”
그랬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관계 중에 그런 얘기를 했던 것 같기도 하고. 영진은 기억을 헤집다, 한참 만에 생각해 냈다.
만난 지 한 달 되어 갈 무렵, 여준이 회사 일로 시간을 내지 못한 적이 딱 한 번 있었다. 저가 시간을 내지 못해 놓고, 되레 영진에게 미국에 있을 동안 주말은 온전히 서로에게 집중하자며 다짐을 받아 냈다. 그런데 그 집중이라는 게, 아예 주말에 사생활을 갖지 말자는 뜻이었나 보다.
“아니, 여준 씨한테 집중한다고 했지, 언제 내 주말을 고스란히 자기한테 반납한다고 했어?”
“나만 다르게 해석했나, 그럼?”
“그래, 그게 그 뜻이라고 쳐. 그러면 내 사생활은? 애초에 내 사생활은 염두에 두지도 않고 말한 거였어?”
영진은 침착하게 물었다. 다른 건 다 양보해도 이건 양보할 수 없다. 가뜩이나 1년 넘게 좋아하는 프로 야구를 직관하지 못해 애가 타 죽겠는 마당에, 전지훈련 온 선수들까지 보지 못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한 주 못 본다고 어떻게 되는 거 아니잖아.”
“한 주가 아니야. 나 잠깐 한국에 나갔다 들어와야 돼. 어쩌면 아예 못 들어올 수도 있고.”
다음 주만이 아니라 아주 못 볼 수도 있다는 말에 더는 할 말이 없었다. 야구와 이 남자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오늘은 이 남자였다. 야구는 내년이면 볼 수 있지만, 강여준과는 기약이 없으니까.
영진은 짜증이 잔뜩 배어나는 한숨을 뱉어 내며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내가 여준 씨를 위해서 얼마나 큰 희생을 치렀는지 꼭 기억해. 우리가 헤어진 다음에도 꼭 기억해. 다른 건 잊어버려도 이건 반드시 기억해.”
속상한 얼굴로 고개를 드는데, 여준이 기분 좋게 웃고 있었다. 새삼 강여준이 잘생긴 남자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 남자와 헤어지면 오랫동안 다른 남자를 못 만날 거란 예감이 들었다. 한번 높아진 눈높이를 낮추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꼭 기억하라고. 알겠어?”
“알았어, 약속해.”
영진은 쓸데없는 다짐을 재차 받아 낸 후에야 기분을 풀었다.
* * *
주말 데이트의 마지막 코스는 어김없이 강여준의 아파트였다. 영진이 지내는 사택에는 보는 눈들이 많아 한 번도 여준을 데려간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가 강조한 대로 서로에 대한 건 철저히 묻지 않기로 했으므로, 자신에 대한 정보가 넘쳐 나는 사택에까지 그를 끌어들이기 싫었다.
여준의 아파트는 넓고 호화스러웠지만, 오로지 쉬고 잠만 자는 공간이었다. 강여준에 대한 건 한 톨도 알아낼 수 없는, 그저 넓은 침대와 쓰지 않는 가구들, 간단히 요리를 해 먹을 수 있는 조리 도구들이 전부였다. 이 집에서 쓰이는 건 오로지 침실과 욕실뿐이었다.
오늘은 영진이 먼저 씻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것도 입지 않은 채로 욕실에서 나왔던 터라 역시 맨몸인 강여준과 몸을 나누는 데 거칠 것이 하나도 없었다.
여준은 군살 없이 매끈한 영진의 나신을 눈부신 듯 내려다보며 입술을 겹쳐 왔다.
그는 언제나 느긋했고, 서두름이 없었다. 여준의 혀가 영진을 부드럽게 잡아채고 끌어당겼다.
여준은 보통 한참의 전희를 즐기다 애가 달아 미칠 지경이 되어서야 삽입을 했다. 그 점이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하지만, 대개의 경우 정신이 나가 버릴 만큼 좋았다. 전희로 한차례 오르가슴을 느낀 후의 삽입은 정신을 앗아 갈 정도의 쾌감으로 이어졌다.
영진은 넓게 펼친 손가락으로 뜨겁게 달아오른 여준의 몸을 마구 헤집었다. 그리고 민감하게 반응하는 옆구리와 허벅지 사이를 쓰다듬었다. 그의 몸이 어느새 단단해져 영진의 배를 쿡쿡 찌르고 있었다. 여준이 허리를 잘게 움직여 자신의 몸을 영진의 아랫배에 연신 문질렀다. 그와 맞닿은 곳에 미끈한 체액이 묻어났다.
영진도 마찬가지로 이미 아랫도리를 축축하게 적시고 있었다. 영진은 손을 내려 발기한 몸을 세게 움켜잡아 훑어 올렸다. 여준의 몸이 크게 요동치더니, 곧 그는 영진의 작은 손 안에서 엉덩이를 움직였다. 대신 수음을 해 주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