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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을 쓰는 타이탄 1권(25화)
6장. 마법을 쓰는 타이탄(3)


덜컹. 덜컹.
레스터는 흔들리는 타이탄 안에서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이중 감각은 이미 한 번 경험한 바가 있기 때문에 익숙해지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움직이는 데도 별문제는 없었다. 팔, 다리, 몸, 머리…… 모두 정상이었다. 문제는 아무리 해도 마법을 캐스팅할 수 없다는 데 있었다.
“뭔가 달라…….”
레스터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감각이 달랐다. 타이탄과의 동조에는 문제가 없었다. 타이탄의 손이 자신의 손이 되고, 타이탄의 다리가 자신의 다리가 된다. 현재 레스터는 8미터의 거체가 되어 자신의 감각을 극도로 확장시키고 있었다.
그럼에도 무언가 위화감이 느껴지자 레스터는 점점 더 초조해지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뒷자리에 앉아 있는 피아에게 입을 열었다.
“와, 정말 안 되네? 너, 뭐 좀 해 봐.”
“하긴 뭘 해요? 나도 모른다니까.”
“아무거나 좋으니까 뭐든지 해 봐. 이대로 있다간 둘 다 죽는다고!”
“그러니까 내가 한 게 아니라니까요!”
레스터와 피아가 티격티격대고 있는 동안 타이탄을 바라보고 있던 사람들의 기대 어린 시선이 점점 더 싸늘하게 변해 갔다. 십여 분이 지나자 결국 참지 못한 베르키우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하일 경, 이런 것을 보여 주려고 이 자리를 만드셨소이까?”
베르키우스의 호령에 미하일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제 쪽에서 초대한 기억은 없습니다, 이황자님. 기대하는 것도, 실망하는 것도 모두 각자의 몫이지요. 하지만 약속드리죠. 저 타이탄의 주인은 목숨으로 그 실망의 대가를 치를 겁니다.”
미하일의 말에 병사들이 도열하고는 타이탄을 향해 달려갔다. 그 뒤에서 미하일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노장의 목소리는 무시무시한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레스터 펠리노! 감히 나와 황족을 능멸하다니! 이제 네놈이 갈 곳은 처형장뿐이다! 당장 내려오지 못할까!!”
“싫습니다!”
레스터의 외침이 타이탄을 통해 터져 나왔다. 쇳소리가 섞인 그 대답은 모든 사람의 귀를 멍멍하게 할 정도로 큰 것이었다. 레스터 입장에서는 어차피 내려가면 죽을 신세니, 버티는 데까지 버티는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비록 마법을 쓰진 못하였다 하더라도, 마법사로서 타이탄을 조작한 솜씨는 칭찬받을 만하네! 그 지식을 제국에 도움이 되는 쪽으로 제공한다면 사형만은 면하게 해 주겠네!”
이번에 외친 것은 황태자 테오도르였다. 그의 말에 레스터는 잠시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확실하지 않은 것에는 도박을 할 수 없었다.
“싫습니다.”
두 번에 걸친 레스터의 거절에 미하일이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후우, 결국 이리되는 건가? 도망갈 곳이 없는 쥐가 고양이를 물어 봤자 결국은 죽게 된다는 사실을 왜 모르는 건지. 이제 자네는 편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기회를 잃게 되었다네. 그러니 나를 원망하지 말게나.”
미하일은 말을 마치고는 가볍게 손을 들었다.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듯이 미리 준비한 모양새였다.
쿠웅!
육중한 충격음과 함께 훈련장 여기저기에서 철문이 서서히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완전히 드러난 문 안으로 아직 도색도 되지 않은 회색의 타이탄이 몸을 드러내었다.
“저건 뭐지?”
레스터가 궁금해할 무렵, 미하일이 크게 외쳤다.
“제국이 자랑하는 최신예 타이탄이다! 설령 도망칠 생각이라면 지금 포기하는 게 나을 것이다. 단 한 기로 그 타이탄들을 모두 물리칠 수 있겠느냐? 지금이라도 항복하고 내려오면 목숨만은 살려 주마!”
레스터는 암담함을 느꼈다. 주위를 아무리 둘러보아도 빠져나갈 구석은 없었다. 게다가 이곳은 수도 내에 있는 훈련장. 외부와 차단하기 위해 벽조차도 높고 두껍게 지어져 있었다. 독 안에 든 쥐나 마찬가지가 된 것이다.
“빌어먹을, 독 안에 든 쥐가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도 문다는 진리를 보여 주마.”

그 순간, 타이탄 훈련장 바깥으로 빠져나오는 두 인영이 있었다. 멀리서 보기엔 팔짱을 끼고 걸어가는 연인처럼 보였지만, 자세히 보니 한 남자가 여성의 팔을 억지로 잡아끌고 있었다.
“놔요!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저 이럴 시간 없어요! 오라버니를 구해야 한다구요!”
율리아는 크게 소리치며 남자의 팔을 뿌리쳤다. 사내, 콰이로는 그녀의 팔을 다시 잡아채며 입을 열었다.
“그 자리에 있다가는 죽음을 면치 못할 겁니다. 못 보셨습니까? 지금 오라버님은 황족이 보고 있는 앞에서 반역을 일으킨 겁니다. 그 죄는 본인뿐만 아니라 혈족에게까지 이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거 몰라! 놔! 놓으라니까?!”
“안 됩니다! 펠리노 양도 죽을 수 있어요! 그나마 황태자 전하께서 펠리노 양의 실력을 아끼시어 목숨만은 구해 드리는 겁니다!”
“지금 나 혼자 살아남으라는 건가요!”
“오라버님도 그걸 바라실 겁니다”
“닥쳐!”
율리아는 다시 한 번 콰이로의 팔을 뿌리치고는 훈련장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 순간, 콰이로가 율리아의 목을 강하게 내려쳤다. 순간적으로 정신을 잃은 율리아는 다리에 힘이 풀리며 자리에 풀썩 쓰러졌다. 콰이로는 조심스레 그녀를 안아 들고는 몸을 일으켰다. 아니, 일으키려고 했다.
“……날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야?”
“읏?”
콰이로는 깜짝 놀라며 그녀를 잡은 손을 놓았다. 그러나 이미 늦은 뒤였다. 율리아의 몸이 콰이로의 목을 팔로 감은 채 허공을 한 바퀴 돌았다. 바닥을 제대로 딛지도 못한 상태에서 오로지 탄력만으로 콰이로를 집어 던진 것이다.
“으아앗?”
콰당탕!
그대로 십여 미터를 날아간 콰이로는 바닥을 구르며 정신을 잃었다. 정신을 잃기 직전, 흑발을 휘날리며 훈련장을 향해 급히 뛰어가는 율리아의 뒷모습이 보였다.

한편, 레스터는 세 대의 타이탄에 둘러싸여 있었다. 외관의 프레임은 세피로스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단지 등 뒤의 마나 레스퍼레이터가 좀 더 돌출되어 있어 그것이 묘한 차이를 주고 있을 뿐이었다. 일견 보기에는 하얗게 도색되어 있는 세피로스와 그렇지 않은 회색 타이탄 세 기의 싸움이었다.
“똑같아 보이는데…… 느껴지는 마력은 상당하군. 세피로스보다도 한 수 위야. 저 영감이 말한 최신예 타이탄이라는 게 이건가?”
레스터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일반적인 타이탄과 대결해도 1:1 싸움이면 무조건 진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이상 되는 타이탄과 3:1이라니, 차 한 잔 마실 시간도 지나지 않아 온몸이 조각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이 순간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적들은 말이 없었다.
누가 뭐랄 것도 없이 세 기가 동시에 레스터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으앗!”
후웅!
레스터는 급히 고개를 숙였다.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가는 장검과 옆구리를 베어 오는 검, 그리고 등을 찌르는 검 모두를 피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고개를 숙인 그대로 레스터는 몸을 앞으로 굴려 버렸다.
우탕탕탕! 콰앙! 쿵!
그 상식을 벗어난 움직임에 놀란 것은 오히려 세 기의 타이탄이었다. 회색 타이탄에 탑승한 기사들과 오퍼레이터들이 놀림당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타이탄을 타고 앞구르기라니…… 타이탄은 기사의 자존심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것을 저토록 험하게 굴리는 것은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이 녀석! 그것 고장나면 자네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하겠네!”
‘지금 그런 게 중요하냐!’
레스터는 황망한 정신으로 다시 몸을 굴렸다. 관절이 삐그덕 대는 소리와 함께 어마어마한 소음이 타이탄 내부에 울려 퍼졌다.
“으악, 아저씨. 원래 여기 이런 거예요?”
“몰라! 수리하다 어디 잘못했나 보지.”
레스터는 입으로는 불만을 외치면서도 세 기의 타이탄으로부터 요리조리 잘도 도망치고 있었다. 물론 아주 잠시의 기쁨이었지만, 죽일 듯한 기세로 칼을 휘두르는 타이탄으로부터 도망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매우 고무적이었다.
슈캉!
“읏!”
어깨의 견갑이 잘려 나가며 동체가 크게 흔들렸다. 그 와중에 잠시 주춤하며 몸을 굴리는 것이 늦었다. 그리고 뒤따르는 철퇴! 시야 한가득 검은 철퇴가 가득 들어찼다.
“젠장.”
레스터는 상체를 거의 바닥에 닿을 정도로 숙였다. 뒤통수가 간질거리며 아슬아슬하게 그 위를 철퇴가 스쳐 지나갔다. 이후 레스터는 그 자세 그대로 땅을 기어 앞으로 빠져나갔다. 꼴사납고 보기 흉한 모습이었지만, 도망치기에는 매우 효율적이었다. 인간의 완력보다 훨씬 강한 타이탄의 팔로 땅을 짚고 움직이니 생각보다 도망치기 좋았던 것이다.
그러나 도망치는 것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레스터는 어느새 자신의 눈앞에 거대한 벽이 가로막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도망치다 보니 훈련장의 막다른 곳까지 도망친 것이다. 세 기의 타이탄이 전면에서 압박해 오는 와중이라 더 이상 도망칠 곳도 없었다.
“아, 이거 좀 곤란한걸.”
레스터의 기분이 급격히 냉각되었다. 평소에는 다혈질에 화도 잘 내는 편이지만 위기 상황을 맞으면 누구보다도 침착해지는 성격인 그였다. 즉, 지금 상황이 그 어느 때보다도 절체절명의 위기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차가워진 머리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해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답답함이 초조함으로, 초조함이 공포로 바뀌려 하고 있었다.
“피아! 뭐라도 좀 해 봐!”
“제가 무슨 신이라도 돼요? 으악!”
휘잉! 하고 머리를 스쳐 지나가는 철퇴. 레스터는 고개를 틀어 가까스로 그것을 피했다. 그러나 그 순간 다른 한쪽에서 장검이 날아들고, 몸을 웅크리며 그것을 피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등으로 다른 타이탄의 검이 떨어졌다.
콰직!
“으악!”
“크헉!”
세피로스 안에서 두 명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정타를 허용한 세피로스는 붉은 신호를 쏟아 내며 레스터에게 위험 경고를 계속해서 보내고 있었다.
“젠장, 그나마 코어는 상하지 않았군.”
레스터는 감각적으로 타이탄의 손실 상태를 확인하며 재빨리 몸을 움직였다. 조금이라도 지체한다면 그것으로 끝이다. 레스터는 황급히 세피로스의 몸을 일으켜 세 타이탄 사이를 몸으로 밀고 지나치려 했다.
콱!
그러나 그게 뜻대로 될 리 없었다. 가장 왼쪽에 있던 타이탄의 손에 붙잡힌 세피로스의 동체가 그대로 끌려가며 또다시 벽으로 밀쳐졌다.
쾅!
벽에 동체를 부딪치자 그 충격이 그대로 레스터에게 전달되며 내장을 뒤흔들었다.
콰앙! 쾅!
적 타이탄의 주먹이 그대로 흉갑을 때렸다.
“크윽!”
비릿한 피 냄새가 식도를 타고 올라왔다. 연이은 충격에 내장이 상한 듯했다. 이런 상황에서 정신을 차리고 있는 것만으로도 용했다. 레스터는 문득 뒷자리에 있을 피아에게로 신경이 향했다.
‘피아는……?’
하지만 고개를 돌려 피아의 상태를 확인할 여유는 없었다. 레스터는 두 팔을 들어 날아오는 적 타이탄의 주먹을 쳐 내고, 그대로 몸으로 돌격했다.
콰직!
강철과 강철이 부딪치며 허공으로 파편이 치솟았다. 그러나 먼곳에서 이 장면을 보고 있는 이들에게는 한때의 흥밋거리일 뿐이었다.
“꽤나 발악하는군.”
베르키우스가 유쾌한 듯 입을 열었다. 얼마 버티지 못할 거라 생각한 자신의 예상을 뒤집고, 레스터는 선전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었다. 이미 세 기의 타이탄에 의해 구석에 몰린 채 완전히 포위되어 있었고, 회색의 타이탄들은 레스터가 퇴주하려는 모든 방향을 막고 있었다.
‘으윽, 일단 포위망을 빠져나가야 해. 몇 번 맞더라도 버텨 줄 거야.’
타이탄의 장갑은 수준 높은 경량화와 강화 마법이 걸려 있었다. 때문에 웬만한 검으로는 흠집조차 낼 수 없다. 아예 엄청난 질량 무기로 갑옷을 때려부수든가, 같은 강도의 마법적 처리를 받은 날붙이가 아니라면 타이탄의 중갑엔 상처조차 낼 수 없었다.
레스터는 날아오는 회색 타이탄 하나의 검을 어깨를 숙이며 피했다.
치링!
스쳐 지나가는 검면을 주먹으로 때린 레스터는 그대로 몸을 숙이며 가로로 베어 오는 다른 검에 옆구리를 내주었다.
콰직! 하는 굉음과 함께 순간적으로 움직임이 멎었지만, 어쨌든 치명상은 면했다. 적은 셋. 두 개의 검과 하나의 철퇴였다. 레스터는 얼굴을 노리고 날아오는 마지막 세 번째 철퇴 공격을 안면 갑주로 비껴 내며 세 번의 공격을 모두 무위로 돌리며 포위망에서 몸을 끄집어내는 데 성공했다.
“좋아! 이대로 저곳까지 달려가…….”
막 황족들이 있는 차양막 쪽으로 몸을 날리려던 레스터는 무언가 섬득한 기운을 느끼며 고개를 들었다.
콰직!
어디선가 날아온 배틀 해머 하나가 세피로스의 안면에 틀어박혔다.

두근!
흐릿한 영상이 눈앞을 어지러이 돌아다닌다.
두근!
누군가 자신에게 소리를 치고 있는 것도 같다.
두근!
귀는 멍멍하여 아무것도 듣지 못한다.
두근!
“……라고.”
모든 것이 흐릿한 감각 속에서 레스터는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으음……?”
누군가 자신의 어깨를 뒤흔드는 느낌에 레스터는 흐려진 초점을 맞추려 애써야 했다. 익숙한 얼굴의 소녀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 피아.”
“난 피아가 아니야. 내 이름은 메이다라.”
“메이다라? 무슨 소리야, 그게?”
“시끄러워. 지금 설명할 시간 없어.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마법 쓰고 싶다고 했지?”
“으응.”
레스터는 익숙치 않은 피아의 박력에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소녀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거, 지금부터 쓰게 해 줄게.”


<『마법을 쓰는 타이탄』 2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