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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을 쓰는 타이탄 1권(24화)
6장. 마법을 쓰는 타이탄(2)


“이제는 돈을 좀 갚으러 온 건가?”
“돈이란 신기루와 같아서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게 되는 것입니다. 기다리신다면 곧 좋은 소식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보다 원로원의 보고는 받으셨습니까?”
“총독으로 취임한다는 얘기는 들었다네. 무모한 짓을 벌였더군.”
“그렇다면 제가 무엇 때문에 온 것인지도 짐작하시겠군요.”
루시우스는 반짝이는 금발 머리를 살짝 흔들고는 미소를 지었다. 선이 가느다란 얼굴에 입술마저 여인의 그것처럼 아름다웠다. 베르기오스는 순간 욕정을 느끼고는 입맛을 다셨다. 남색을 즐기는 것은 아니지만, 눈앞의 청년이라면 한 번쯤 살을 섞어 보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
“요즘 사업이 영 좋지 않아. 아슈람 왕국에서 청해의 해상무역권을 장악하면서 은의 수입이 줄고 있다네. 옥타비아누스 장군이 마르나시아 지역을 정벌하고 나면, 다음 타깃이 아슈람 왕국이 된다는 말도 있다네. 그런 와중에 시리온 제국과의 충돌도 얼마 전에 있지 않았겠나. 물론 그것은 자네가 더 잘 알겠지.”
“전쟁은 곧 사업 아니겠습니까? 법무관 어르신께서 하실 말씀은 아니신 것 같습니다만.”
“그것도 어느 정도일 때나 그렇지. 지금은 오히려 수입보다는 지출이 많다네.”
그의 말은 어느 정도 사실이었다. 곧 있을 장기전을 대비해 군 당국은 많은 전쟁 물자를 사들이고 있었고, 곡물가와 철의 가격이 폭등하고 있었다. 거기다 많은 배들이 원정군에 차출되어 있어 교역도 활발하지 못한 시기. 당장 손해를 보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한 바가지의 물을 퍼낸다고 해서 대해가 마를 리 있겠습니까?”
“그건 그렇지만…….”
“하지만 어르신이 퍼낸 그 한 바가지의 물이라면 현재 척박한 시장에 단비가 되어 줄 겁니다. 설마 법무관 어르신께 후에 황금을 안겨 줄 그 좋은 기회를 보고만 있진 않으시겠죠?”
“이런, 결국 들켰구만. 좋네. 앓는 소리는 집어치우도록 하지. 자네 말대로 이번 위기를 넘기면 수익은 몇 배가 될 테지. 그래, 이번엔 얼마를 원하는가?”
“2개 군단을 추가로 편성할 수 있는 자금입니다.”
“이번에도 역시 ‘인페르날’을 담보로 하는 거겠지?”
“그렇습니다.”
베르기오스는 탁자 서랍에서 서류를 꺼내 들었다. 그 서류에는 지금까지 루시우스가 융통한 금액이 쓰여 있었다. 자그마치 오만 탈란트라는 어마어마한 금액이었다.
“그럼 사인하도록 하지.”

“1탈란트?”
“네. 그게 정확히 얼마가 되는 거죠?”
“아마도 네가 20년 동안 죽도록 일을 하게 되면 받는 돈이 되겠지.”
루시우스는 자신을 따라온 몸종을 향해 입을 열었다.
“와, 그러면 그 정도만 있으면 집을 구할 수 있을까요?”
“집도 구하고 결혼도 할 수 있을 거다.”
루시우스는 꼬마 몸종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베르기오스의 저택을 바라보았다. 아페테이아 시가지 내에서 가장 높은 언덕인 북언덕에 위치한 그 저택은 호화롭기 그지없어 호사가들로부터 입방아에 자주 오르내리고 있었다. 베르기오스가 저 저택을 구입하기 위해 수천 탈란트를 쏟아부었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으니, 그 가치를 알 만했다.
그러나 그것도 타이탄에 비하면 그리 비싼 것은 아니었다. 타이탄 한 기의 가격은 기종에 따라 다르지만, 기본으로 수천 탈란트를 호가했다. 황금으로 산을 쌓을 정도의 사내인 베르기오스 정도라면 큰 부담이 아니겠지만, 루시우스와 같은 가난한 귀족들이 타이탄을 개인 사비로 운용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즉, 루시우스의 타이탄 인페르날은 운용하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비용이 들었다. 그리고 지금 아이젠 가문의 여력으로는 그것을 감당할 재원이 없었다. 이것이 그가 베르기오스에게 빚을 지고 있는 이유 중 하나였다. 그리고 그 빚의 담보로 ‘인페르날’을 잡고 있는 것이다. 조건은 지급 기한 없이 양측이 합의할 때 인페르날을 넘기는 것. 그것이 싫다면 돈을 갚는 것이다.
하지만 루시우스는 알고 있었다. 루시우스의 힘이 약해지고 그가 정치권에서 소외되는 순간, 베르기오스가 차용증을 손에 든 채 자신의 집을 찾아올 것이다. 그때가 되면 아무도 자신을 도울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살아남기 위해서는 힘겨운 외줄타기를 계속 이어 가야 했다.
‘언젠가는 그 더러운 눈깔을 파 버리고 말겠다.’
루시우스는 탐욕 어린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베르기오스의 시선을 떠올렸다. 눈치채지 못할 리 없다. 그저 모르는 척 넘어가고 있을 뿐이다. 루나를 데려오지 않은 것은 굳이 이런 모습을 보일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루시우스는 베르기우스에게 융통한 돈으로 우선 지금까지 루시우스를 따랐던 베테랑 직업군인들을 소집했다. 지금에 와서는 거의 사병이나 마찬가지가 된 그들은 순수 머릿수만 따졌을 때 일만 명에 육박했다. 거의 온전한 1개 군단인 그들은 수년간 루시우스와 손발을 맞춘 병사들로, 루시우스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가지고 있었다.
문제는 공화국에서 내줄 3개 군단의 병사들이다. 원로원에서 차일피일 미루며 출발을 늦추고 있는 것이다. 루시우스는 하는 수 없이 자신의 수하 중 하나인 포브스에게 나머지 병사를 지휘하도록 명하고 먼저 스토크나 영지를 향해 떠났다.
“너무 서두르시는 것 아닙니까?”
흑마를 이끌며 루시우스의 곁에 선 루나가 입을 열어 묻자 루시우스가 대답했다.
“최대한 서두르는 편이 좋아. 겨울이 오기 전에 도착해야 하니까. 눈으로 보지 않으면 지형을 정확히 파악할 수 없고, 내년 봄이 되기 전에 그 작업을 끝내야 하거든.”
“진심으로 스토크 족을 정벌하실 생각인가요?”
“불가능하다고 생각해?”
“제 상식으로는 사실 거의 불가능해 보입니다. 제아무리 타이탄이 무적이라고 한들, 스토크나 속주 바깥에 거주하는 스토크 족의 수만 자그마치 30만이 넘습니다. 그리고 알려진 정보에 따르면, 내년부터 스토크 족의 대이동이 시작된다고 합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손이 닿지 않던 센 강 북쪽의 스토크 족까지 밀려 들어오게 됩니다. 그렇다면 그 수는 자그마치 백만에 이른다는 것이 제 추산입니다. 제아무리 타이탄이 강하고, 정예 보병의 군기가 엄정하다 해도 우리 군은 아무리 긁어모아도 5만 이하.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나 다름없습니다.”
“괜한 걱정을 하는군. 전쟁은 단순한 숫자 놀음이 아니야. 병력이란 도박판의 판돈과 같은 것이지. 판돈이 많으면 많을수록 유리하지만, 그렇다고 판돈이 적은 쪽이 반드시 지는 것은 아니잖아?”
“무슨 생각이 있으신 겁니까?”
루시우스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스토크나 속주는 공화국의 동북부에 위치하고 있어. 그리고 남하하는 스토크 족은 반드시 스토크나 속주를 거칠 것이고. 그곳이 가장 큰 격전지가 될 거야.”
“수성전을 생각하는 겁니까?”
“그래. 필사적으로 적들의 공격을 막아 낸다. 어떻게든 막아 내기만 하면, 그다음은 자연스럽게 해결될 거야.”
루시우스는 유쾌한 듯 미소 지으며 말의 고삐를 쥐었다.
타가닥타가닥!
그때 멀리서 빠르게 말을 달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선두를 따라잡기 위해 서두르는 듯 그 소리는 급하게 대지를 울리고 있었다.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누구지?”
루시우스는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1개 군단의 진군 속도에 맞추기 위해 가고 있었기에 속도를 늦출 수는 없었다.
“헉헉, 이렇게 빨리 출발하실 줄 몰라 늦었습니다. 제 소개를 하지요. 저는 메르카토르 미트라 데 드미트리우스라고 합니다. 원로원에서 한 번 뵈었지요.”
“호민관 아닌가? 그런데 여긴 무슨 일로.”
두 사람의 나이 차는 십 년이 넘는다. 그럼에도 루시우스는 자연스레 하대를, 메르카토르는 자연스레 존대를 하고 있었다. 스토크나 속주의 총독이라는 점도 있지만, 루시우스에게는 자연스럽게 사람을 압도하는 분위기가 풍겨 나오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때로는 오만으로, 때로는 위엄으로 보일 수도 있게 하는 루시우스만의 분위기였다.
“이번 원정에 따라나서려고 이렇게 한걸음에 달려왔습니다.”
그의 말은 거짓이 아닌 듯, 그가 탄 말이 거칠게 투레질을 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쉴새없이 달린 모양이었다.
“현직 호민관이 수도를 버리고 이렇게 빠져나와도 되겠는가?”
“어차피 지금의 호민관들은 귀족파의 압박이 두려워 민회조차 열지 못하고 있습니다. 혼자의 힘으로는 한계가 있지요. 어차피 그곳에서 할 일이 없다면, 이렇게 아이젠 각하를 따라가는 것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그렇긴 하지만, 우리 군에 호민관이 필요할 만한 일은 없군.”
“건축가로서는 어떻습니까?”
메르카토르의 말에 루시우스의 표정이 기이하게 변했다. 실제로 그는 건축가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 수성을 하기 위해서는 단단한 성벽과 각종 구조물 등이 필요하다. 그를 위해서는 건축에 재능이 있는 장수가 필수적이었다.
“건축뿐만이 아닙니다. 검술과 웅변, 지리와 산술에 능합니다. 스토크나 지역을 돌아본 경험도 분명히 도움이 될 겁니다.”
“좋군.”
루시우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이었다.
“합류하는 것을 허락하지.”
“정말입니까?”
“너무 좋아하진 말게. 후회할 정도로 부려 먹어 줄 테니까.”
루시우스는 메르카토르를 보며 미소지었다.
장내에는 침묵이 맴돌고 있었다.
탁.
레스터는 세피로스의 토템을 훈련장 바닥에 내려놓았다. 레스터가 감옥에 가 있던 사이 타이탄은 보수가 끝나 두 팔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있는 상태였다. 다만 레스터가 엉망으로 만들어 놓은 내부 연결망은 여전히 그대로여서 현재 레스터 이외에는 누구도 세피로스를 가동시킬 수 없는 처지였다.
우우우우―
마나가 진동하며 거대한 타이탄의 동체가 토템을 매개로 서서히 그 몸체를 드러내었다. 아무것도 없던 빈 허공에 갑자기 나타난 막대한 질량의 물체는 훈련장의 긴장된 공기를 단숨에 메우며 그 자리를 차지했다.
“후우.”
두근두근.
심장이 거칠게 뛰며 식은땀이 온몸에서 흘러내렸다. 한 번 성공했던 일임에도 혹시나 잘못된 것이 있을까 싶어 몇 번이고 다시 확인했다. 단지 ‘움직이는’ 것뿐이라면 지금 상태에선 전혀 문제될 게 없었다.
다만 여전히 걱정되는 것이라면…….
“소환하는 걸 이렇게 가까이에서 본 건 처음이에요.”
들뜬 목소리로 입을 여는 피아. 그녀는 완전히 소환된 타이탄에 천천히 다가가더니, 차가운 강철의 외골격 위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그 손길은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를 대하듯 매우 조심스러웠다.
‘저 녀석의 생각은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군.’
레스터는 속으로 고개를 저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기, 그거 생각해 냈어?”
“아니요.”
마법을 사용하기 위한 방법을 묻는 것이었고, 피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로서는 정말로 방법이 없었다. 그것은 그녀 ‘혼자’의 힘으로 해낼 수 없는 것이다.
“후우, 어떻게 한다? 지금 실패하면 도망칠 곳도 없는데…….”
레스터는 흘낏 훈련장의 한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고급스런 차양막 아래 많은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한눈에도 보통의 인물들이 아니었다. 시종들과 대화하며 연신 웃음을 짓고 있는 붉은 머리 사내는 황태자 테오도르이며, 화려한 의자에 앉아 와인을 들고 있는 금발의 사내는 이황자 베르키우스였다. 그리고 가운데에서 대화를 이끌어가고 있는 이는 미하일 보로미로프 후작이었다.
제국의 실세들이 모여들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닌 셈이다. 레스터는 온몸이 뻗뻗하게 굳은 것을 느끼고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어차피 실패하면 죽는 건 매한가지야.”
레스터는 애써 긴장을 누그러뜨렸다. 황태자에게 죽나, 이황자에게 죽나, 동네 망나니에게 죽나 어차피 죽는 건 똑같다. 그렇다면 최대한 실력 발휘를 할 수 있게 자신의 상태를 최적으로 만들어 놓아야 했다.

테오도르의 시선은 타이탄에 올라서고 있는 레스터에게 꽂혀 있었다. 그 역시 재판에서 벌어진 일에 대한 보고를 받은 상태였다. 그 보고에 있는 내용을 모두 믿을 순 없지만, 만약 사실이라면 그것은 정녕 놀라운 일이었다.
‘저자는 그저 일개 오퍼레이터일 뿐이지. 하지만 만일 정말로 그가 올바드 경을 대신해 타이탄을 움직였다면, 그는 올바드 경과 달리 제국의 반전파들을 끌어모을 수 있는 구실을 만들어 준다.’
전장을 선두 지휘하는 기사가 아니라 그들을 보조하는 마법사가 아군의 등을 지켰다는 사실은 말하기 좋아하는 호사가들에게 매우 좋은 이야깃거리가 될 수 있었다. 그 이야기는 삽시간에 전 세계로 퍼져 나갈 것이고, 레스터 펠리노의 이름을 모르는 자는 없게 될 것이 분명했다. 기껏 크게 벌렸던 위령제 역시 우스꽝스러운 이벤트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더불어, 제국 내에서는 메로링거 올바드 경의 예를 들어 소모되는 기사의 수와 갈수록 떨어지는 기사의 수준을 비교하여 반전 분위기를 이끌 수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30여 년간의 전쟁을 거치며 제국은 많은 인재를 잃었다.
어떤 이들은 늙었고, 어떤 이들은 사망했으며, 어떤 이들은 도망쳤다. 최근 들어 나타나는 기사들의 실력 저하는 전쟁의 장기화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 와중에 천재 여검사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돌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콰이로에게 그녀에 대해 간단한 정보를 들은 적이 있었다.
“음?”
무언가 찜찜한 기분이 스쳐 지나갔다.
“혹시, 자네 기억하나? 그 천재 여검사의 이름이…….”
“율리아 펠리노라고 합니다, 전하.”
콰이로가 입을 열었다. 그의 말에 테오도르가 헛! 하고 헛바람을 내뱉었다. 우연치곤 참으로 묘한 우연이었다.
“저 마법사의 이름이 레스터 펠리노라고 하지 않았나?”
“네. 그의 동생이 바로 율리아 펠리노입니다.”
콰이로의 말에 테오도르가 더욱더 흥미롭다는 얼굴로 레스터를 지켜보았다. 오빠는 뛰어난 오퍼레이터에, 동생은 천재 여검사라…… 평민 가문에서 저런 능력있는 남매가 나타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때, 그의 시선에 훈련장 한구석에서 레스터를 보고 있는 한 소녀가 눈에 띄었다.
“그렇다면 저 아이가 바로 그 아이겠군.”
오오오!
그 순간, 레스터가 탄 타이탄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