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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을 쓰는 타이탄 1권(23화)
5장. 격랑의 물살(7)


철컹!
레스터는 창살을 흔들어 보고는 한숨을 쉬었다. 지하 감옥 특유의 퀴퀴한 냄새가 모공으로 스며들고, 돌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가 온몸을 싸늘하게 만들었다. 그는 주위를 한 번 둘러보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렇게 될 줄은 알았지만, 재판이 끝나자마자 감옥으로 직행하는 신세가 되고 보니 처량하기 그지없었다. 전쟁터에서 구르는 것보다야 육체적으로 편하다고 해도 갇혀 있는 게 좋을 리 없다. 그래도 일주일 후에 있을 타이탄 시범에서 제대로 마법을 쓰기만 한다면 운 좋게 풀려날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죽지는 않겠지, 하며 레스터는 푸념 섞인 말을 내뱉었다.
“그렇다고 굳이 감옥에 가둘 것까지는 없잖아. 하루아침에 황궁의 손님에서 감옥 바닥으로 추락이라니, 그나마 밥이라도 주는 걸 위안으로 삼아야 하나…….”
“맛있네요.”
피아는 철판 그릇에 볼품없이 올려진 밥을 먹으며 입을 열었다. 딱 봐도 정체를 알 수 없는 재료들이 뒤죽박죽으로 섞인 음식이었다. 레스터는 식욕이 떨어짐을 느꼈지만, 일단 먹어야 산다는 생각에 수저를 들었다.
“이런 데서 나오는 밥이 맛있어 봐야…… 맛있잖아?”
레스터는 깜짝 놀라며 자신의 미각을 의심했다.
“군대밥보다 낫잖아? 지금까지 내가 먹은 건 뭐지? 감옥보다 맛없다니, 이거, 군인에 대한 대우가 너무 나쁜 거 아냐?”
“먹는 데 조용히 하시죠.”
“그만 좀 먹어라. 너 평소에 그렇게 먹은 건 다 어디로 가고 땅꼬마에 절벽이냐?”
“뭐라구요? 이 늙은이가? 지금 내가 누구 때문에 여기 있는데? 나랑 싸울래요?”
피아가 먹던 숟가락을 던지자 탁, 하는 소리와 함께 레스터의 뺨에 반찬 자국이 묻어났다.
“야…… 먹을 때는 건드리지 마라.”
“먼저 건드린 게 누군데 그래요?”
이번에는 레스터의 수저가 피아를 향해 날았다.
딱.
“아얏, 진짜 이러기예요?”
“어엇? 야, 인마?”
머리를 만지던 피아가 빨개진 얼굴로 레스터를 향해 달려들었다. 레스터는 당황하며 그대로 넘어지고, 피아는 레스터를 깔고 앉은 채 그의 머리를 쥐어뜯기 시작했다.
“으아악! 야, 인마! 아파! 아프다고! 정말 아프단 말이다!”
“밥 먹을 땐 오크도 안 건드린댔어요! 어디 한 번 당해 보시죠?”
“으아아아악!”
그렇게 쥐어뜯기기를 십여 분. 그 처절한 싸움은 피아의 배에서 흘러나온 소리로 인해 갑작스럽게 중단됐다.
꼬르르륵.
“아, 배고파요. 아저씨 때문에 이게 뭐예요.”
“뭐, 인마? 니 뱃속엔 거지가 들었냐? 그리고 솔직히 이게 나 때문이냐? 너 나 아니었음 죽을 뻔한 거 기억 안 나?”
“와, 치사하게. 애초에 그쪽으로 타이탄을 끌고 온 게 누군데요?”
“누가 거기 있으래?”
“도망친다고 친 거거든요? 아저씨가 잘 봤어야죠. 아저씨가 잘못한 거예요!”
“아니. 네가 잘못했거든?”
“기운이 넘치시는군요.”
두 사람 사이에 카일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깜짝 놀란 레스터가 벌떡 일어나는 순간, 위에 깔고 앉아 있던 피아가 꽈당, 하며 바닥으로 넘어졌다.
“아야야…… 진짜 못됐어.”
“야, 인마. 그건 니가…… 아휴, 됐다. 어쨌든 카일 님은 무슨 일로?”
“말씀드릴게 있어서요. 미처 설명을 안 해 드린 것도 있고 말이죠.”
카일이 헛기침을 두어 번 하고는 말을 이었다.
“생각보다 상황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급히 미하일 경을 모시고 오느라 시간이 좀 더 걸린 점 먼저 사과드리겠습니다. 설득하는 데 시간이 좀 걸렸거든요.”
“만일 카일 님이 아니었다면 전 이미 죽은 목숨이었을 겁니다. 좀 늦은 것 정도야 문제될 게 없죠. 그런데 상황이 좋지 않았다는 건 무슨 뜻이죠?”
레스터의 질문에 카일이 대답했다.
“황태자와 이황자의 갈등이 생각보다 더 깊었던 것 같습니다. 이번 위령제 때 아무래도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자세한 것은 모르지만, 아무래도 후계자 건 때문이겠죠. 때문에 위령제 행사를 방해한 황태자에 대한 분노가 레스터 님에게로 향한 것이죠. 만일 예상대로 흘러갔다면 이황자의 출정일에 맞추어 레스터 님의 처형이 거행되었을 겁니다.”
“하지만 잘 이해되지 않는군요. 굳이 나를 타깃으로 잡은 이유가 뭐죠? 제 입으로 이야기하긴 좀 그렇지만, 저는 지금 올바드 경의 마지막을 지켜본 충성스런 오퍼레이터가 아니었나요? 그런 나를 처형한다는 것은 기껏 만들어 놓은 분위기를 떨어뜨리는 것이 될 텐데요?”
레스터의 말에 카일이 고개를 저었다.
“출정은 내년 봄입니다. 그 정도 시간이면 올바드 경을 잊기엔 충분하죠. 이황자 측에서야 어차피 일회성 이벤트로 기획한 위령제였고, 돈줄을 쥐고 있는 시민들 사이에서 당장 지원을 이끌어 내기 위한 방법일 뿐이었습니다. 명분을 만들어 놓고 나면 반강제적인 후원을 끌어내기가 매우 용이하기 때문이죠. 그보다 중요한 것은, 레스터 님을 제거하는 것이었습니다.”
“왜 나를 그토록 제거하길 원하지요?”
“그거야 레스터 님의 입이 두려워서일 겁니다. 만일 사실이 흘러나간다면 기껏 띄워 놓았던 올바드 경의 이미지가 엉망이 되는 건 둘째 치고, 이황자님의 꼴이 우스워지니까요.”
“모든 걸 알고 있단 말인가요?”
“아니요. 처음에는 그저 레스터 님께서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정도로만 생각했을 겁니다. 이제는 재판 때의 일도 있고 하니 대강의 그림은 짜맞출 수 있겠죠. 하지만 정말로 레스터 님이 타이탄에 탄 채로 마법을 사용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실제로 보게 된다면 깜짝 놀라게 될 겁니다. 듣기만 한 것과 실제로 보는 것의 차이는 상상을 초월하는 법이죠.”
“한데 그 사람은 누구였지요?”
“아, 보로미로프 경 말씀이십니까?”
“네. 그 백발의 영감 말입니다. 대단한 카리스마던데요.”
“하하하, 어디 가서 그렇게 이야기하지 마십시오. 당장에 칼을 들고 뛰어오실 분이니까요. 좋을 땐 한없이 좋은 분이지만, 화가 나면 물불을 못 가리시거든요. 그런 면은 황제 폐하를 닮았습니다. 아니, 함께 오래 있다 보니 닮아졌다고 해야 할까요.”
카일은 그렇게 말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분은 꽤나 오랜 기간 황제 폐하의 신임을 얻고 계십니다. 현재 황태자파와 이황자파 어느 쪽에도 속해 있지 않지만, 타이탄 관리자라는 독특한 위치와 황제 폐하의 신임이라는 두 가지 권력을 손에 쥐고서 꽤나 높은 대우를 받고 계신 분이죠. 그래서 오히려 움직이기도 용이했습니다. 그분은 돈이나 권력으로 움직이실 분이 아니니까요.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으로 충분했습니다.”
“그렇군요. 어쨌든 덕분에 살았습니다. 이제 일주일 뒤에 있을 타이탄 시범만 제대로 보이면 전 풀려나는 거겠죠?”
“네. 틀림없이 그렇게 될 겁니다. 제아무리 정치가 혼란스럽고 앞을 모른다 해도, 그런 정도의 대발견을 눈감고 모른 척할 황제 폐하도 아니시지요. 미하일 보로미로프 경은 황제 폐하로 통하는 연결 고리입니다. 타이탄을 타고 마법을 쓴 걸 입증하기만 하면…….”
“아, 저…… 아저씨, 근데 나 그거 기억 못해요.”
피아의 말에 일순간 침묵이 맴돌았다. 레스터가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피아를 쳐다보았다.
“뭐, 인마?”
“그리고 어떻게 하는 건지도 잘 모르겠어요.”
“어쩌라고. 너 그때 분명히 여기가 죽을 곳 아니더라 어쩌고 하면서 뭔가 했잖아.”
“그게 사실 제가 한 게 아니라…… 헙, 몰라요.”
피아가 갑자기 입을 손으로 막고는 고개를 저었다. 레스터는 영문을 모르니 답답할 뿐이었다.
“대체 무슨 소리야? 니가 한 게 아니면 내가 한 거냐?”
“하여튼 전 모르니까 알아서 해요. 죽든지 말든지. 죽는 거, 생각보다 안 아파요.”
“무슨 소리야? 죽어 봤어?”
“많이 봤어요.”
피아의 말에 레스터는 자기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그 말에 담긴 죽음의 향기를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내 자신의 처지가 떠오르자 또다시 부글부글 화가 끓어올랐다.
“이 자식이 또 무게 잡네. 하여튼 그날까지 그 방법인지 뭔지를 생각해 내지 못하면, 내가 죽기 전에 너 꼭 데리고 갈 거다. 아니, 니가 올바드 경 죽였다고 할 테니까 알아서 해.”
“와, 치사대마왕. 죽을려면 혼자 죽지 왜 발목 잡고 그래요?”
“어차피 너도 나랑 엮인 몸이야. 못 들었어? 만약에 타이탄을 타고서 마법을 못 쓰면 너도 위증죄로 걸려 들어간다고. 아까 들었지? 그 미하일 보로미로프라는 사람이 얼마나 거물인지. 그런 사람을 속였으니 아마 무사하지 못할걸?”
“전 거짓말 안 했어요.”
“그 자리에서 입증하지 못하면 거짓말이 되는 거야.”
“으아응…… 생각해 볼게요.”
피아는 답답한 한숨 소리를 내며 입술을 깨물었다.


6장. 마법을 쓰는 타이탄(1)


“저 별이 금싸라기라면 내가 이미 싸그리 모아 담았겠지.”
―대부호 알라드.

베르기오스 푸블리어스 고르고나. 현재 53세인 그는 크라수스 공화국에서 가장 부유한 인물로, 각지에 사업체를 펼치고 있는 인물이다. 해상 국가 테라는 물론이고, 엘 비잔티움, 심지어는 시리온 제국에까지 교역을 펼치고 있으며, 주요 수입원은 부동산 거래와 내해의 교역에서 벌어들이는 수익이었다. 그의 전 재산은 크라수스 공화국의 일 년 예산을 훌쩍 뛰어넘는다고까지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돈에 있어서만큼은 명민하고 활력 넘치는 정력가이지만, 그 외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그다지 좋은 평판을 지니고 있지 않았다. 대외적인 시선에 민감해 정치권에도 줄을 대고 있지만, 실질적인 발언권은 낮은 편이었다. 타인을 위해서는 돈을 잘 풀지 않는 습성 때문에 인기도 그다지 높지 않은 인물이었다.
“잊지 말거라. 네가 가지고 있는 황금이 네 인격을 대변한다.”
“네, 아버님.”
그의 아들 타디우스가 조용히 절을 하고 물러섰다. 타디우스가 나간 문으로 집사가 들어와 조용히 고했다.
“그분이 오셨습니다.”
“그 아이젠 가문의 애송이 말인가? 그래, 이번엔 얼마를 빌리러 왔다든가?”
“그것이…….”
“그동안 잘 계셨습니까, 법무관 어르신.”
루시우스가 문을 열고 들어서자 베르기오스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여전히 예의라고는 모르는 녀석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를 미워할 수가 없는 것이 루시우스의 매력이었다. 굳이 ‘법무관’이라고 부르는 것도 그의 기분을 흡족하게 해 주었다. 평생에 관직에 나서 본 일이 별로 없던 베르기오스가 원로원의 일원이 될 수 있던 것도 그 법무관이라는 직책 때문이었다.
정상적으로 선거를 치러 법무관에 당선되기 위해서는 거쳐야 할 과정이 너무나도 많았다. 그것을 극단적으로 단축시켜 준 아이디어가 바로 저 루시우스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었다. 호민관 시절의 루시우스가 그에게 사제관의 지위를 부여하고, 겸임이 가능한 사제관의 지위를 이용하여 징세관으로 선출. 징세관과 더불어 아는 사람이라고는 거의 없는 행정 비서 서기관이라는 말단 관직을 얻어 그것을 통해 3년간 실적을 쌓은 다음 법무관으로 추천한 것이다. 징세관과 서기관의 겸임은 호민관인 루시우스의 발의로 가결되었다.
이로써 최소한 세 개 이상의 관직에서 총 9년간의 근무 경력이 있어야 한다는 법무관 제한 규칙을 세 개의 관직을 동시에 수행함으로써 충족시킨 것이다.
그렇게 베르기오스는 단 3년 만에 법무관이라는 고위 관직에 선출될 수 있었다. 물론 편법에 불과했기에 그 과정에서 상당한 돈이 뿌려졌다. 그러나 크라수스에서 가장 돈이 많다는 베르기오스에게 그 정도의 돈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법무관이라는 직책은 실제로 그가 한 일이 없더라도 베르기오스의 마음을 흐뭇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고위직이었다. 그가 원한 것은 명예였지, 골치 아픈 실무는 아니었기에 정치 일선에 나서는 일은 없었다.
그렇기에 평소에는 루시우스만이 자신을 항상 ‘법무관’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그는 루시우스라는 청년이 마음에 들었다. 문제는 이 마음에 드는 친구가 자신의 채무자라는 사실이었다. 조금씩 조금씩 빌리기 시작한 돈이 어느새 지금은 천문학적인 액수가 되어 가고 있었다.
법무관 일로 인해 완전히 그를 마음에 들어 했던 베르기오스가 무턱대고 돈을 빌려 주었던 것이다. 게다가 루시우스의 집안은 유서 깊은 아이젠 가문. 아이밀리아 씨족 가운데 가장 고위 관직을 많이 배출한 경력이 있다. 지금은 다소 기울었다고 하나, 아이젠 가문의 영향력은 여전했기에 돈을 받을 수 있을 거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확실한 담보를 쥐고 있었다.
“오랜만이군그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지?”
“덕분에 손쉽게 승리했습니다.”
루시우스는 어깨에 붉은 수실이 달린 크라수스 지휘관용 정복을 차려입고 있었다. 굳이 이런 복장으로 이곳에 온 이유는 명백했다.
자신은 국가를 위해 움직이며, 사리사욕을 위해 이곳에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어필하기 위한 것.
베르기우스는 내심 웃었지만, 눈앞의 청년은 이미 자신이 그 속셈을 알아차릴 거라는 정도는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교활한 술수나 조잡한 작전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가 밉지 않은 것은 아마도 저 당당한 자신감 때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