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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감사합니다.”

소영은 그에게 감사 인사를 표했다. 정적이 흘렀다. 두 흡연자는 등을 보이며 뻑뻑 담배를 피웠다. 카세 료가 불투명한 흡연 부스의 벽을 응시하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아까 소다수 감사합니다. 신경 써 주셨습니다.”

“…….”

소영은 고개를 돌려 우직한 그의 등을 봤다. 담배 냄새가 밸 걱정 따위 하지 않는지 와이셔츠 입은 아까 차림새 그대로였다.

“제 일인걸요.”

이윽고 남자의 몸에서 시선을 뗐다. 뭔가 거북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자신의 은밀한 시간에 직장 일을 끌어들이는 것은 혐오한다. 그런데 방금 전 같은 비행기를 탄 사람과 흡연 부스에서 맞담배 중이라니. 기구한 일이었다. 입이 썼다. 망가져 내린 화장도 신경 쓰였다. 머리카락은 왜 이렇게 길어서. 미용실에 가서 정리를 한번 해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소영은 담배를 비벼 끄고 휴대용 재떨이에 갈무리했다. 작은 캡슐처럼 생긴 그것을 꽉 쥐고 벤치에서 일어났다. 인기척에 카세 료가 그녀를 돌아봤다. 두 사람의 시선이 잠시 맞았다.

“실례했습니다.”

소영이 고개를 꾸벅 숙인 뒤 부스를 나갔다. 카세 료는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호텔로 들어가는 그녀를 물끄러미 봤다. 윤씨였던 것 같은데. 그는 받침이 들어가 더욱 발음하기 힘든 그녀의 이름을 다시 떠올리며 입 안에서 굴려 봤다.







2화



오프인 날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소영의 룰이다. 그녀는 침대에서 최대한 늦잠을 잤다. 호텔 암막 커튼은 그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해서 한 점의 빛도 허용하지 않았다. 램프 등만 켜진 호텔방은 동굴처럼 어두웠다. 배가 고파서 일어났다. 비척비척 선 소영은 소량 환전해 두었던 돈을 들고 호텔 앞 편의점으로 갔다. 도시락이 훌륭한 편이다. 물론 관광객 기준에서 그렇다. 매번 먹다 보면 도시락도 질리기 마련이고 가게에서 파는 음식도 거기서 거기인지라 소영은 참치마요 삼각김밥 세 개를 집고 계산했다. 아침, 점심, 저녁용이다.

스튜어디스의 캐리어에 뭐가 들었을지 궁금해하는 이들이 있다. 소영은 일본에 갈 때면 한국 컵라면을 꼭 챙긴다. 호텔에서 오프를 보낼 때면 라면으로 식사하는데 일본 라면은 영 입맛에 안 맞는다. 한국 마트는 소영의 오피스텔에서 20분만 걸어가면 있으니 한 번 장 봐 올 때마다 박스째로 산다.

요즘에는 칼로리가 적은 누들면이 유행이라던데. 소영은 그녀의 의식을 착실히 거행하는 것처럼 고집스럽게 먹던 것만 먹는다. 호텔에 비치된 웰컴 드링크인 생수로 물을 끓여 라면을 준비하고 삼각김밥 포장지를 뜯었다. 맥주도 같이 마시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녀는 술을 못 마시는 흡연자라.

술, 하니까 자신의 입맛대로 기내에서 하이볼을 만들어 먹던 일본 남자가 생각났다. 왜일까.

소영은 갓 일어나서 퍽퍽한 입 안에 삼각김밥을 베어 물고 우적우적 씹었다. 비린내가 나지 않는 것에 만족하며 먹었다. 얼큰한 라면 국물을 호로록거리며 마시면서 침대에 앉아 휴대폰을 뒤적이다 보면 오프는 금방 지나간다. 소영은 먹을 게 떨어지자 편의점을 가려고 호텔을 나섰다.

샐러리맨들의 퇴근 시간이라서 거리는 와이셔츠를 입은 이들이 바쁘게 오갔다. 동경은 확실히 조용하다. 오사카는 이 시간대면 가게마다 입석으로 맥주잔을 기울이는 직장인들의 수다로 왁자지껄한데. 소영은 배를 채울 간식으로 과자와 빵을 이것저것 담으며 지나가는 이들을 흘깃 쳐다봤다. 아참, 담배도 사야지. 자판기에 동전을 넣었다. 툭― 밑으로 빠져나오는 담배를 집어 들며 라이터도 사야 된다는 것을 상기했다.

계산을 마치고 그녀는 편의점 봉지를 흔들며 호텔로 돌아왔다. 흡연 부스는 남자 두 명이 들어가 있었다. 소영은 그들의 얼굴을 흘깃 봤다. 그 남자는 아니다. 안면이 있는 사람도 아니다. 좋다.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부스 안으로 들어가 등지고 앉았다. 담배에 불을 붙이다 보니 문이 열리면서 그들이 나가는 게 느껴졌다.

남이 피웠던 담배 향이 훅 빠지고 바깥 공기가 들어와 잠시 환기됐다. 소영은 자신이 담배를 피우면 잠깐 상쾌하던 공기가 또다시 오염될 거라며, 배덕한 생각을 하면서 담배를 물었다. 문이 다시 열렸다. 소영이 편의점 봉지를 바스락거리며 문가를 봤다. 그 남자는 이번에는 재킷과 서류 가방을 든 채로 부스에 들어서고 있었다. 업무가 방금 끝난 것처럼 피곤한 기색으로 담배를 물어 들다가 여지없이 부스를 차지하고 있는 소영을 이제야 발견했다.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집게처럼 끼우고 볼이 홀쭉하게 빨아 마시고 있는 정직한 모습으로 눈이 마주쳤다.

“…….”

“…….”

인사를 해야 할까.

소영은 답이 정해진 생각을 멍청하게 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그녀가 밤 인사를 건넸다.

“실례합니다.”

남자가 말하면서 문을 닫았다.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갈무리했다.

“아닙니다. 제가 여기 전세 낸 것도 아닌데요. 따지고 보면 제가 외지인이죠.”

소영이 머쓱하게 말했다.

“일본인이 아니십니까? 유창하셔서 몰랐습니다,”

남자가 물었다.

“발음이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니라서 아실 줄 알았어요. 한국인입니다.”

“항공사가…….”

자줏빛 유니폼을 떠올리며 남자가 의문을 담아 묻자 소영이 해명했다.

“아, 홍콩에서 일하고 있어요. 한국에서 일하다가.”

그는 이해한 것처럼 보였다.

“편하게 피우세요. 전 금방 들어갈 테니까요.”

소영은 아직 담배에 불도 붙이지 않은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분위기가 점점 어색해지고 있다. 입이 방정이지 당황하니까 밑이 빠진 동이처럼 줄줄줄 새어 나왔다. 제 국적에다가 일하는 곳까지 밝혔어야 했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카세 료는 벤치에 가방을 내려놓았다. 주머니를 뒤져 라이터를 꺼냈다. 문득 소영이 옆에 둔 휴대용 재떨이가 보였다. 편의점에서 구입한 것처럼 보이는 일회용 라이터도. 그리고 빵과 과자가 이것저것 든 편의점 봉투도.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것은 어제와 달리 화장기가 없는 맨얼굴이었다. 그는 실례가 되지 않게끔 흘깃 그녀의 얼굴을 살펴봤다. 매끄러운 하얀 얼굴에 숱이 많은 흑단 같은 머리칼을 늘어뜨린 여자는 꾸벅 인사하는 인형 같은 스튜어디스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보다, 성주의 히메 같았다.

그가 묵묵히 담배를 피우는 동안 소영은 몇 번 연기를 뱉더니 담배를 휴대용 재떨이에다가 껐다. 부스 내에 스테인리스 재떨이가 비치되어 있지만 작은 소켓 같은 그것에 담배를 처리하는 게 버릇인 것 같았다.

“그럼 좋은 밤 되세요.”

싱긋 웃는데, 볼우물이 푹 패이는 게 보였다. 깨끗한 미소였다. 눈앞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까지 다 봤는데도 그런 느낌이 들었다. 카세 료는 아직 그녀와 통성명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벤치에서 엉거주춤 일어났다.

“윤 상.”

소영이 문을 열다 말고 우뚝 멈춰 섰다.

“명찰을 봤는데 이름을 잘 못 읽었습니다. 윤 상 맞으십니까? 제가 맞게 알고 있는 건가요?”

“…….”

소영은 몸을 돌려 그를 봤다. 맹수에게 물리기 직전인 초식동물처럼 잔뜩 경계하는 태세였다. 료는 그녀만큼 당황했다.

“여러 번 구면인데 소개도 안 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갑자기 이름을 불러서 당황하셨다면 폐를 끼쳤습니다.”

“아닙니다. 명찰, 보실 수도 있죠. 윤소영입니다.”

소영은 애써 태연한 척하며 그에게 자신을 소개했다.

“저는 카세 료입니다.”

남자가 스스로를 소개하며 담배를 잡지 않았던 손을 뻗었다. 악수라도 하려는 걸까. 소영은 그의 손을 난처하게 봤다가, 기본 예의인 것 같아서 서둘러 잡았다.

“제가 호칭은 잘 몰라서, 카세 상이라고 부르면 되는 건가요.”

소영이 말하자 료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부탁드립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손을 거두었다. 료가 그녀의 손에 들린 봉지를 바라보며 물었다.

“식사는 아직이십니까?”

“네? 아, 네.”